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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나서며 머리에 꼼꼼히 감겨진 붕대를 풀었다.
여전히 관자놀이쪽 통증이 심했지만 그 이상으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풀어헤친 붕대를 바닥에 버리고는 택시를 잡으며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듯 중얼거렸다.
“죽었어. 내딸이 죽었어. 그 망할 새끼가...”
몽롱한 정신으로 병원에서 눈을 떴을때만 해도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닐거라 생각했었다.
후드려 맞은 탓인지 기억 일부가 지워져 있었지만
마지막 기억은 딸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던 평화로운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형사라 소개한 남자는 유감을 표하며 딸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정황 상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용의자를 쫓는 중이라며 내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아직 확실한건 없으니 CCTV로 확인한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 따님과 식사를 하고 계시던 그 시간에
건물 위층에서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가 내려와서는 현관 앞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그러다가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별안간 문을 열어서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죠.
이후 최초 목격자가 말하길.
뭔가 요란한 소리가 나서 열린문 안을 슥 들여다 보니 집안은 난리가 나있었고,
그 청년이 집에있던 야구배트를 들고 쓰러진 선생님을 공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목격자 분이 급히 도우려 하자 그 자는 무기를 버리고는 도망친 상황입니다.
신고를 받고 저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따님은 이미 야구배트에 수차례 가격당해 사망한 상태였고
선생님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CCTV 사진을 보여주었다.
혹시 아는 사람인지 묻는 형사의 말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사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위층에 사는 대학생 청년.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친 정도에 불과했지만
고등학생인 내 딸에게 은근히 묘한 눈빛을 보내던 이 청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다시 끓어 오르는게 느껴졌다.
진작에 어떻게든 손을 썻어야 했는데 설마 하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딸을 잃었다.
그랬기에 청년에 대한 것을 숨기고 형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타 이렇기 직접 밖으로 나온 것이다.
“안되지. 경찰 따위한테는 못넘겨.
감히 우리 딸을... 내가 직접 찢어 발겨도 시원찮아.”
청년이 어디로 도망쳤을지는 대충 예상 가는 곳이 있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옆방 노인네가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아놓고 하는 얘길 들은적이 있다.
윗집 총각이 근처 폐건물에 자주 들락 날락 거린다고.
그 형사가 이미 주변 도로를 전부 차단했다고 했으니 멀리 도망치지 못한 놈이
급한대로 그곳에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택시를 잡아타고는 진정하려 애쓰며 숨을 골랐다.
경찰들이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굴러다니는 쇠몽둥이 하나를 집어들고는 폐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차가운 공기만이 텅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내 딸을 죽인 그놈이 분명 여기에 있다.
그 생각에 간신히 차갑게 식힌 머리가 다시 뜨거워짐을 느꼈다.
가족을 버려 두고 도망간 와이프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착한 내딸.
못난 아빠 둔 탓에 또래 애들처럼 맘편히 놀지도 못한 불쌍한 내딸.
그간 잘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와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 모든 감정이 분노가 되어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살인자 놈에게 향했다.
어두운 건물 안을 정신없이 뒤지던 그때, 마침내 이를 갈아 마지않던 그 녀석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놈의 그 저열한 눈을 마주한 그순간, 날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너무도 당당히 내앞에 나선게 이상하단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놈에게 달려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이 푹 꺼지며 그대로 아래층으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조금만 주의깊게 움직였다면 쉬이 알아차렸을 변변찮은 함정에 걸린 한심한 날 탓하며
비참하게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떨어질 때 충격이 제법 컸었는지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곧 머리위에서 녀석의 비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든 찾아가서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제발로 쫒아왔네.”
“이 새끼가...”
하지만 내말은 위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어느새 내 옆으로 내려온 녀석이 내가 떨어트린 쇠몽둥이를 주워들며 말했다.
“착한 애였어. 마음씨도 곱고, 어른스럽고.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거든.
근데 그애 유일한 단점이 뭐였는줄 알아?
쓰레기 같은 부모를 뒀단거야.
그거 하나 때문에 죽은거라고.”
이를 악물고 움직여 보려는 시도는 녀석이 휘두른 쇠몽둥이에 가로막혔다.
화가 난 듯 몇 번이나 몸 이곳저곳을 후드려 대는 통에 분노를 잊고 고통에 신음하며 꿈틀거릴 뿐이었다.
녀석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손에 든걸 집어던지고는
내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널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릴 생각이거든?
만족스러울 만치 때려패서 죽여버릴건데 적어도 주둥이 멀쩡한 지금 딱 하나만 물어보자.”
날 움켜잡은 손에서부터 나를 넘어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네가 뭔짓을 했는지 기억해?"
대답할 수 없었다.
이놈이 내 딸을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체 내가 이녀석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난 그저 내 딸을 음흉하게 쳐다보는 놈을 신경쓰고 있었을 뿐 말 한마디 섞은 적 없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녀석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기억 안나는구나?
그치? 기억도 못하지?
그놈의 술때문에 머리가 그냥 돌아 버렸겠지.
다시는 술 안마실거라고.
매일 거짓말하고 그러다가 또 술마시고 예지한테 손찌검하고.
이 쓰레기 새끼야."
술. 저녁식사때 술을 꺼내 마신건 기억할 수 있었다.
그걸 불안하게 보던 예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럼 지금 내 기억이 불분명한건 머리를 맞아서가 아니라 술때문 이었을까?
놈은 몇번 숨을 고르더니 날 내팽개치고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가 어딘줄 알아?
너 술먹고 올 때마다 예지가 도망나와 있던 곳이야.
니가 망나니처럼 하고 다닐때 마다 예지가 와서 서럽게 울던 곳이라고.
안쓰러워서 내가 먹을거 사주면서 몇번 돌봐줬는데 예지가 나한테 부탁하더라.
집 비밀번호 알려줄테니까 혹시라도 아빠가 난동부리면 와서 살려달라고.
그 어린애가 나한테 죽을지도 모르니까 살려달라 그랬다고.
벌벌 떨면서.
니가 사람새끼냐? 어?
기억이 안나?
개소리 말고 똑바로 대답해.
네 딸 예지 왜 죽였어?"
그의 말. 그리고 이 상황.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왜죽였냐.
이건 내가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저녁식사 시간을 비극으로 만든 싸이코를 죽이기 전에
내가 물어봤어야 할 말이었다.
“진짜 기억 안나는구나?
그래도 난 대답 들어야겠으니까
어떻게든 기억해 내.
기억 날때까지 쳐맞는거야!"
그의 발길질이 거침없이 내 몸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몸속에 남은 술기운이 날아가서인지
아니면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인지
간신히 그 때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저녁거리와 함께 술 몇병을 사갔고, 오랜만에 기분좋게 취했다.
딸은 술병이 비어갈수록 불안해하며 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집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취기가 올라온 내겐 그 모습이 도망간 집사람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는 잡아다가 방안에 밀쳐놓고 야구배트를 들어서는 마음이 풀릴때까지 후드려팼다.
왠 놈 하나가 달려들기 전까지.
고통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지만 녀석에게 반항할 힘도 도망칠 힘도 없었다.
지금까지 날 채우고 있던 분노와 혼란은
딸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온몸에 쏟아지는 묵직한 고통으로 바뀌어 갔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비굴하게 내뱉은 말은 녀석을 더 화나게 했는지
이젠 악에 받친 소리까지 지르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가 기껏 한다는 말이 그딴 병신같든 소리야?
다 필요 없어 그냥 죽어 이 새끼야!!"
근처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날카로운 쇠붙이를 집어든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손하나 까딱 할수 없는 난 눈을 감고는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만! 경찰이다!"
몇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녀석을 제압했다.
녀석은 바닥에 엎어지며 여전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놔! 저 새끼 죽여버릴거야! 저 개새끼!"
내가 경찰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자 병실에 찾아왔던 형사가 내게 수갑을 들이 댔다.
"가정폭력 및 박예지양 살해 혐의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그 짧은 시간안에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도저히 웃긴 상황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맞아죽는것 보다는 교도소에 가는게 낫다.
심지어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놈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기 까지 했다.
하지만 문득 딸을 죽여놓고 웃는 내 모습에 혐오감이 밀려왔기에
미소를 지우고는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죄책감 보다, 후회나 고통보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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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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