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사랑받길 갈구하는 여자의 고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서는 간신히 실눈을 뜨고 휴대폰을 보았다.

그이에게 온 메시지도, 부재중 전화도 없다.

그 사실이 다행스러운지 실망스러운지 묻는다면 둘다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먼저 안부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그는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가 원할 때, 그가 필요할 때 일방적으로 연락을 준다.

어제 지우지 않은 화장 때문에 눈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욕실로 향했다.

밤새 피부를 괴롭히던 화장을 말끔히 지워냈지만,

개운함보다는 맨 얼굴을 드러냈다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뒤, 거울을 보지 않고 곧바로 화장대로 향했다.

맨얼굴을 마주하는게 내키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외면할 수 없다.

한숨을 내쉬며 마주한 얼굴.

내 본모습이자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모습. 혜지라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절망적인 모습에 치를 떨어준 뒤, 서둘러 화장을 시작했다.

시계의 긴 바늘이 한바퀴 반을 돌고 나자,

못난 혜지에서 미녀 제시로 완벽한 변신을 할 수 있었다.

제시.

그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제시. 제시라고 부를게. 네 눈동자랑 잘 어울리거든.’

평범 이하의 내가 철저하게 외모만을 보는 그의 눈에 들 수 있었던건 화장술 덕분이었다.

이러기 위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된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직업과 능력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화장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그를 속이고 있는건 아니었다.

단 한번, 난 그에게 혜지로서 마주선적이 있었다.

그가 날 분위기 좋은 호텔로 데려간 그날.

화장조차 지우지 않고 제시로서 그에게 안긴 뒤,

불안감을 가진 채 제시라는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다행히 그는 충격을 받거나 날 미워하지 않았다.

‘그래. 괜찮아. 하지만 난 혜지보다 제시를 더 사랑해.

그러니까 내 앞에선 언제나 제시로 있어줬으면 좋겠어.’

이후 난 완전하게 제시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날 불러내는건 주로 밤 9시에서 새벽 3시 사이였다.

평일과 주말 대중없었기에 난 퇴근 후에도.

그리고 주말에도 화장을 지우지 못한 채 그에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술에 취해 살짝 꼬인 목소리로 내가 보고 싶다 말해 주기만을.

그 어디로도 나가지 못하고 휴대폰을 옆에 딱 끼고서.

자정이 넘어감에도 희망을 놓치 못 한 채

새벽3시가 넘어갈 때 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어 버린다.

지우지 못한 화장을 눈물로 씻어내며.

피부트러블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신경쓰지 않는다.

혜지가 조금 더 못나진다고 해서 달라질건 없으니까.

내가 그의 애인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게 아니었다.

또 그가 날 찾는 이유가 사랑이 아닌 욕정인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삶에 지친 직장인들이 혹시나 하며 복권을 사는것처럼.

어쩌면 그가 조금이라도 날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옅은 기대감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띠링’

새벽 1시를 넘어갈 무렵 울리는 카톡 소리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졸고 있던 나는 다급히 휴대폰을 들었다.

‘샤인모텔. 408호.’

그뿐이었다.

애정도, 무드도 없는 글자지만 비참하리 만치 기쁜 마음이 들었다.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울을 확인하고, 제시의 얼굴을 잠시 손 본 다음 택시를 타고 그에게 달려간다.

날 마주한 그에게선 역시나 사랑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품은 따뜻했다.

충족되지 않는 애정을 갈구하며 그에게 안긴 뒤, 그는 다정한 키스도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들어가 씻는 대신 난 조용히 옷을 챙겨입었다.

여기서 씻을수도, 그의 품에서 아침을 맞을 수도 없다.

그의 앞에서 혜지가 되면 안되니까.

제시로 와서 제시로 안기고 제시로 떠난다.

그게 그의 규칙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잉~~’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심코 본 화면에 떠있는 이름, 크리스.

한참동안 울리던 전화는 부재중 표시가 뜸과 동시에 크리스란 여자가 보낸 메시지를 띄워주었다.

‘미안해. 깜빡 잠들어서 전화 못받았어. 어디야? 내가 갈까?’

아마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자인 듯했다.

이 여자도 그에게 크리스로서만 다가설 수 있을까?

그때 조급한 크리스의 다음 메시지가 들어왔다.

‘린다랑 있는거 아니지? 미안해. 전화 좀 받아줘.’

린다. 린다라는 여자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여러 여자를 만난다는 건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전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제시. 크리스. 린다.

J. K. L.

내가 제시인건 눈이 예뻐서가 아니다.

그저 그가 편의를 위해 알파벳 순으로 이름을 매겼을 뿐.

샤워를 끝낸 그는 내게는 눈길 조차 주지 않고는 그대로 침대로 가서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난 말없이 불을 꺼주고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새벽 3시. 집에 돌아와 그제서야 샤워를 하고 외롭고 슬픈 혜지로 돌아왔다.

그나마 오늘은 호출이 있었던 덕에 마음 편히 화장을 지우고 잠시나마 제대로 눈을 붙일 수 있다.

아침 6시면 다시 출근 준비를 해야하니 딱 3시간 동안만.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일까?

하루에도 수십번씩 하던 질문을 다시금 던졌다.

하지만 너무나 서글프게도 이번역시 이 질문이 날 변화시키지 못했다.

다시 아침이 오면 사랑받길 갈구하는 제시의, 아니 J의,

아니 혜지의 고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와선 그 세가지 이름 중 내가 뭘 더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셋다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오늘 만큼은

크리스나 린다보다

그리고 어쩌면 존재할지 모르는 아이리스나 마틸다 보다

제시가 더 행복했다는 터무니 없는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