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빨라! 이제 들이닥칠거야! 지금 도망쳐야돼”

진아의 다급한 외침에 사람들은 아이들과 짐을 챙겨 분주히 움직였다.

“전부 데리고 먼저 가. 금방 따라갈테니까.”

진아가 주저하면서도 모두를 데리고 떠나자 마을엔 진혁과 상혁 둘만이 남았다.

진혁은 상혁을 마주 보았다.

“이제 끝났어. 그러니까 칼 내려놓고 항복해.

역귀는 결국 사라질거야. 나랑 다른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어.”

진혁은 드디어 들을 준비가 된 상혁에게 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분명 느리긴 하지만 역귀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불사를 무효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방법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훌륭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따라와.

그간 벌려놓은 일들에 대한 벌을 받아야지.”

상혁은 코웃음 쳤다.

“그래. 어떻게 벌을 줄 건데? 광장에 매달아 놓고 돌팔매질이라도 하게?”

“아니. 평생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봉사하면서 살게 될거야.

이빨에 희생된 아이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그리고 싸움에 내몰려 죽은 사람들 까지 전부.”

화를 삭히듯 꾹꾹눌러 대답한 진혁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형이 원하는건 결국 역귀들을 없애는 거잖아.

내가 방법을 찾았어. 이빨 없이도 가능하다고.

당장은 조금 느리겠지.

답답할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우리가 이길거야.

역귀들을 몰아낼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지금이라도 되돌려 놓자.”

상혁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역귀 토벌은 실패했고 이빨부대는 없어졌다.

진혁은 방법을 찾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믿는대로, 본인의 방식대로

역귀들과 싸우려 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신은 진혁에게 완전히 패배해버린 것이다.

졌다는 사실이 착잡하긴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역귀만 사라진다면 크게 후회를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씨를... 아니 예지랑 하은이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하자.”

모든걸 포기하고 천천히 칼을 내려놓으려던 상혁은 진혁이 덧붙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사랑하는 아내 예지. 그리고 소중한 딸 하은이.

단 한순간도 그 둘을 잊은 적 없었다.

죄책감 없이 편하게 잠들어본 기억 역시 없었다.

수많은 밤을 고통과 슬픔에 괴로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혁이 제 정신을 유지 할 수 있었던건,

그때 자신의 행동이 옳은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를 구하기 위한 희생. 유일한 방법.

하지만 진혁이 전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면서 상혁을 지탱해주던 진실 하나를 부수어 버렸다.

그건 상혁에게 상상 이상의 고통을 주었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아내와 딸을 죽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이 한문장이 상혁의 머릿속을 맴돌며 냉철함과 차분함을 빼앗았다.

잠시 혼란스러워 하던 상혁은 그간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상황에서 상혁이 선택한 것은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아닌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난 틀리지 않았어!!!”

상혁은 소리를 지르며 진혁에게 달려들었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진혁은 상혁의 공격을 막아내며 다급히 말했다.

“잠깐! 발악해봐야 소용없어! 포기하고 무기 버려!”

진혁의 말은 상혁에게 닿지 않았다.

그간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당한 상혁은 그저 분노하며 진혁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 뿐이었다.

상혁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진혁은 금세 상혁이 이러는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분명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상혁은 가족의 죽음에 대한 엄청난 죄책감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강인한 상혁이지만 진작 마음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말을 계기로 상혁을 버티게 해준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그 순간, 마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신없이 상혁의 공격을 막아대던 진혁은 바람에 실려오는 역한 냄새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 정도로 냄새가 진하다면 정말 코앞이다.

몸을 피해야 하니 정신 차리라고 제대로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사실상 그저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도 덤벼드는 상혁을 상대로 틈을 내기조차 어려웠다.

물러서려 하면 그만큼 다가와 간격을 유지하고

파고들어 붙잡을 생각으로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졌기에 저번처럼 몸싸움을 유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진혁은 도박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세 번 연속해서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상혁의 칼을 막아낸 뒤, 몸통쪽으로 올려베 듯 크게 휘두르자

상혁은 정확하게 간격 밖으로 물러났다.

이때를 노린 상혁은 재빨리 달빛을 상혁에게 집어던졌다.

날아오는 달빛을 어렵지 않게 쳐서 날려버린 상혁은 주저 없이 뒤로 껑충 물러났다.

칼을 쳐내는 동안 저번처럼 진혁이 달려들어 품안으로 들어와 버린다면 그대로 멱살을 잡혀 엎어 쳐질 게 뻔했기에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

간격만 유지된다면 무기를 버린 진혁을 베어버리는건 아주 쉬운일이었다.

하지만 달빛을 쳐낸 상혁의 눈에 보인것은 진혁의 양손이 아니라 장전된 석궁이었다.

칼을 버린 진혁은 상혁에게 달려드는 대신 반대로 물러나며 석궁을 꺼내어 자세를 잡았다.

상혁은 급히 진혁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달빛을 쳐내느라 자세가 무너진데다 간격이 벌어져 있어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곧 진혁이 쏜 화살은 상혁의 대퇴부에 박혔고, 고통 때문에 멈칫하는 사이

진혁은 이번에야 말로 상혁에게 파고들어 그대로 바닥에 메쳐버렸다.

“컥!”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상혁은 간신히 기절하는 것 만은 피할 수 있었다.

여전히 분노와 고통이 뒤섞여 복잡했지만 그나마 숨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붙잡았다.

상혁이 놓친 칼을 저 멀리 차버린 진혁은 다급히 말했다.

“후. 이제 그만해. 미치는 것도 나중에 하고 화내는 것도 나중에 해.

지금은 우선 살자. 살아야 뭐든 할거 아니야.”

심장을 찌르는 듯한 그 말에 상혁은 눈을 감았다.

고통과 함께 점점 차분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자. 빨리 일어나. 이제 또 발광하면 진짜 가만안둬.”

하지만 상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순순히 따라가려 했지만, 곧 광장으로 들어서는 거대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그슨대는 최대위의 이빨부대와의 전투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무서운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잘리고 뚫린 상처들을 회복하기 위해 찾아왔기에 한산한 광장을 본 그슨대는 아쉬운 듯 몸을 떨었다.

고작 두명분의 시체로는 몸을 다 회복하지 못할게 분명했다.

때문에 그슨대는 가까이 있는 두명에게 달려드는 대신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생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피한 마을 사람들의 행렬쪽이었다.

거대한 그슨대의 모습에 진혁 역시 몸이 굳었지만,

그 거대한 몸뚱이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게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달빛을 주워들고는 그슨대 앞을 막아섰다.

이길 자신은커녕 잠시나마 시간을 벌수 있을지 조차 확신이 없었지만, 이번엔 주저하지 않았다.

다만 긴장한 채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후... 아저씨. 네. 지금이네요.

도와주세요. 진짜 딱 5초. 아니 10초만 버티게 해주세요.”





진혁은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셋까지 셌을 때, 그슨대가 움직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휘감아오는 그슨대의 팔.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잡혀 버렸을 터였다.

간신히 몸을 빼냈지만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다른쪽 팔이 진혁에게 휘둘러졌다.

피할여력이 없자 진혁은 도망치는 대신 달빛을 휘둘렀다.

그슨대의 손에 상처를 낸 덕에 잡히는 것 만은 막았지만

휘두르는 팔힘을 몸으로 받아낸 덕에 한참을 날아가 바닥에 쳐박혀야했다.

‘일곱..... 여덟.....’

와중에도 숫자 세는걸 잊지는 않았지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슨대가 다가왔다.

죽는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모든 이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

진아에게, 아이들에게, 다른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게 아쉬웠지만

그리고 먼저 떠나서 미안했지만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기반을 마련했으니 남은 싸움은 믿음직한 이들이 잘 마무리 해 줄거라 믿었다.

“아홉.... 열.... 고맙습니다. 아저씨. 여기까지네요. 좀 이따 봐요.”

최후를 직감한 그순간,

“누구마음대로!!”

진아의 당찬 외침과 함께 그슨대 몸에서 불꽃이 튀었다.

돌아보니 진아와 황반장, 정상병을 중심으로 구조대가 모든 장비를 가지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빨부대가 장비를 다 가져가서 남은게 별로 없어.

그래도 최대한 지원해 보겠네.

퇴치가 아니라 시간을 끌다가 몸을 빼내는데 집중하자고.”

황반장이 투척기에 연막탄과 섬광탄을 넣고 그슨대를 맞춘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정상병은 진혁을 부축했고 진아 역시 그 옆을 지켰다.

“이빨부대랑 격렬하게 싸워서 상태가 안좋아.

그래도 이길 생각은 안하는게 좋겠어.

저 상태라도 사람 수십명은 쉽게 죽일 수 있을거야.

내가 어떻게든 정신 사납게 만들어 볼 테니까 몸조심해서 시간만 끌어줘.

아 그리고 하나 더. 또 한번 죽네 마네 하면 진짜 내손에 죽을 줄 알아!”

진아의 말에 진혁은 다시금 힘을 얻어서는 당당히 일어섰다.

“미안해. 이제 약한소리 안한다고 했는데 또 했네.”

그슨대가 정신을 차리자 진혁은 다시금 눈빛을 빛내며 소리쳤다.

“황반장님은 투척기 운용하면서 원거리에서 교란해주세요.

적당히 쓰시되 연막탄 두말은 최후를 위해 남겨두시구요.

진아는 그슨대 머릿속 좀 헤집어 주면서 허튼짓 할거 같으면 미리 말해줘.

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저녀석이 다른 사람 못노리게 할게.

신우는 우리가 적당히 도망칠 수 있게 상황 좀 살피고 준비해줘.

그리고 형 안전한데로 피신시켜 주고.”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진혁은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이란게 그런거지 뭐.”

시덥잖은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한번 달빛을 들고 그슨대와 마주했다.

이번엔 당당히 마주설 수 있었다.





“비참해. 비참한 꼴이야...”

정상병의 부축으로 광장 외곽으로 빠진 상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참할 것도 없고 서러울 것도 없어요.

일단은 살아야지요. 그렇게 처절하게 살아남았으니 이거저거 따지지 마세요.

그리고 동생분 말대로 평생 속죄하면서 사세요.

그러면 됩니다.”

상혁은 고통 때문에 거친숨을 몰아쉬며 진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그슨대를 상대로 위축대지 않는 당당한 모습.

진혁이 위험해 진다 싶으면 어디선가 드론이나 섬광탄 따위가 날아와 도움을 주었고,

묘하게 굼뜬 그슨대의 모습을 볼 때 진아가 열심히 손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어수룩하게 느꼈던 진혁은 이제 없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었다.

상혁의 눈에 진아가 들어왔다.

“그래. 새 가족을 찾았나 보지?”

정상병은 상혁의 상처를 돌보며 대답했다.

“네. 태영마을 첫 커플이자 첫 부부에요. 저희한텐 그야말로 희망이죠.”

태영마을. 부부.

진혁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 놓은 모양이었다.

“허황된 꿈만 꾸는 어린애인줄 알았는데. 혼자 이걸 다 해냈네.”

정상병은 웃으며 상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혼자라니요. 저걸 보고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동생분은 혼자가 아니에요. 모두 함께 이걸 다 이뤄놓은 거죠.

보셨잖아요.

죽을 각오로 이빨부대에 맞선 사람들.

주저없이 역귀를 막아선 사람들.

그들 하나 하나에게 용기를 주고 믿어주면서 함께 이뤄낸거에요.”

그말에 상혁은 아까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동생들을 지키겠다며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상우.

과거 이빨이었던 기억으로 두려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윤성.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철저한 신뢰로 이루어진 진짜 가족이었다.

그에 비해 상혁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정작 마음이 앞서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서 몰래 따라왔어요.

다른 분들은 전부 마을을 빠져나갔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혜정이 정상병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혼자 남았다 생각하던 찰나에 찾아온 그녀를 보고 상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이에요. 진짜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어서 왔어요.”

혜정의 얼굴엔 간절함이나 슬픔이 묻어나지 않았다.

“이 뱃속에 아이가 있어요. 말해주세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몇 번이고 받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상혁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과 마음을 정리했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뒤에 상혁은 혜정에게 말했다.

“미안해. 역시 내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 할 수 없어.”

혜정은 오히려 안도했다.

“고마워요. 후회 없이 당신을 미워할 수 있게 해줘서.

처음엔 무서워서. 다음엔 버림받을까봐 당신을 따랐어요.

그러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당신에겐 전 그냥 수단이었겠죠.

당신은 더 이상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니까.

당신의 죽은 아내와 딸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었으니까.

그럴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니까.

그게 당신이 살면서 치러야할 업이었으니까.

이제 이해했어요.

네. 이 아이는 그냥 제 아이에요.

전 이제 당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서 속죄하면서 살거에요.

이빨이 된 아이들과 고통받았던 모든 사람들을 도우면서.”

혜정은 그대로 돌아섰다. 이제 두 번다시 상혁앞에 마주하는 일은 없을 거였다.





상혁은 한숨을 쉬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속죄.

그간 저지른 일들이 죄악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언젠간 업이되어 돌아올거라는 것 역시 각오했었다.

하지만 목표로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속죄하는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때, 태영을 믿었다면. 이빨을 쓰지 않았다면.

하은이를 찌르지 않았다면. 예지를 죽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진혁과 나란히 서서 싸울 수 있었을까?

여전히 가족인채로.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서 후회해 봐야 달라질 건없다.

냉철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지금 상혁이 해야할 것은 속죄가 아니었다.

그때, 상혁의 눈에 고전하는 진혁과 구조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간은 충분히 끌어주었지만 저대로면 몸을 빼는 것은 어려울게 분명했다.

몸을 가볍게 움직여본 상혁은 할 일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정상병에게 말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난 괜찮으니까 내버려두고 저녀석 좀 도와.

도망가지 않을테니 걱정말고.”

상혁의 눈을 잠시 바라본 정상병은 상혁의 각오를 읽어낼 수 있었다.

상혁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가서 영웅이 되려는건가요?

저희를 도와 그슨대랑 싸워서?

그걸로 속죄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상혁은 웃었다.

“그럴 리가. 난 처음부터 내가 좋은일을 한다고 생각한적 없어.

미화시킬 생각도 없고 칭송받고 싶지도 않아.

난 그냥 내가 판단한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야.

평생을 속죄하면서 산다니. 지금 나한텐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죄인으로 죽어야지.

내 목표는 역귀를 없애는거고 난 실패했어.

남은건 저녀석과 너희들 몫이야.

너희가 좋든 싫든, 내 도움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거기에 걸어야겠어.”

정상병은 고개를 저었다.

“잘 이해가 안되지만 어쨌건 그냥 둘수 없어요.

당신은 살아서 속죄해야해요.”

하지만 정상병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번개처럼 움직인 상혁이 정상병을 바닥에 넘어트리고는 달려나간 것이다.

주변에 떨어진 칼 두자루를 집어든 상혁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이해 받을 수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 할게. 천번이고 만번이고.’

상혁은 곧바로 고전하고 있는 진혁에게 달려갔다.





구조대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슨대와 거리를 유지하며 시간을 끌고 있던 진혁은

몸을 빼기 쉽지 않다고 느끼며 상황을 살폈다.

투척기는 비었고 드론은 추락한지 오래였다.

그슨대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반대로 진혁은 달빛의 사용 때문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진아가 지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더는 안돼. 역귀는커녕 두억시니보다 훨씬 강해서 내가 잃어낼 수가 없고 막기도 힘들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을리 만무했다.

지친 진혁을 알아본 그슨대가 쉴새없이 몰아치려는 그때,

갑자기 괴이한 비명을 지르고는 진혁에게서 몸을 돌렸다.

“멍청히 있지 말고 뭐든 해! 지능낮은 역귀들이면 모를까 이정도 되는 놈 상대로 도망치는게 가능할거 같아?

시간 끌어봐야 다 죽으니까 이악물고 덤벼!”

진혁은 당황한 채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그걸로 날 도와주면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아니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어. 이빨 쓰는거 하나도 안반가우니까!”

상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난 내가 믿는대로 움직여.

난 이놈을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이빨도 쓸거야.

그게 싫으면 내가 벤 만큼 네가 메꾸든가 아니면 입닥치고 이놈이나 죽여.”

상혁은 다친 몸이 무색하도록 유연하게 그슨대의 몸쪽을 파고들며 두 개의 칼로 자잘한 상처들을 내고 있었다.

화가난 그슨대가 상혁에게 신경을 쏟은 그때,

진혁은 생각을 버리고 과감하게 달려들어 거대한 그슨대의 다리를 수차례 베어냈다.

다시한번 긴 비명을 내지른 그슨대가 다리를 휘두르며 돌아서자 이번엔 상혁이 그슨대의 몸을 타고 올라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얕은 수로 그슨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었다.

그슨대는 몸을 강하게 흔들어 상혁을 떨쳐버리고는 진혁에게 달려들었다.

진혁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지만 그슨대는 따라붙는 대신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관망했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몸이 성치않은 상혁과 달빛을 쓰는 진혁은 금세 체력이 떨어질테니 오히려 절망감만 커질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상혁은 자세를 고쳐 잡고는 구조대에게 소리쳤다.

“뭐든 틈을 만들어. 총을 쏘건 돌을 던지건,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저놈 눈을 딴데로 돌려.”

황반장은 고민 끝에 최후를 위해 남겨놨던 연막탄 두 개를 장전했다.

그 모습을 본 상혁은 진혁에게 말했다.

“잘들어. 틈이 생기면 내가 달려들어서 저놈 가드를 전부 무력화 시킬거야.

그 사이에 어떻게든 달려들어서 대가리를 베어버려.

기회는 한번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할지는 네가 선택해.”

진혁이 주저하는 사이 황반장의 연막탄이 그슨대에게 날아갔고,

그와 거의 동시에 상혁이 그슨대에게 뛰어들었다.

진아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간절하게 그슨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상혁은 연막속에서 그슨대의 팔 한짝을 목표로 잡아 미친 듯이 난도질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양쪽에서 두 개의 팔이 달려들어 상혁을 붙잡아 한쪽 팔과 다리를 뽑아내었다.

“지금!”

신음한번 내지 않으며 외치는 상혁의 모습에 진혁의 주저함이 사라졌다.

곧바로 달려간 진혁은 그슨대의 머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연막속에서 진혁의 모습을 뒤늦게 알아챈 그슨대였지만

남아있는 팔 한짝을 휘두를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어느새 날아온 상혁의 칼이 팔에 박혀 움직임이 저지당했다.

아직 붙잡혀 있던 상혁이 남아있는 한쪽팔에 든 칼을 정확히 던져 막은 것이다.

이것까지 예상을 했는지 아니면 그저 믿고 뛰어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뛰어오른 진혁과 그슨대의 머리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진혁은 정신을 집중하여 그대로 그슨대의 머리를 세로로 갈랐다.

이빨에 비해 무딘 달빛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시원하게 그슨대의 살을 파고들었다.

진혁이 달빛을 회수하고 3초가 지나자 그슨대의 거대한 몸체가 쓰러졌다.

진혁은 그슨대를 살피는 대신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혁에게 다가갔다.

“이걸 원한건 아니었어. 그냥 살아서 속죄하길 바랬지.”

착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상혁의 얼굴은 개운해 보였다.

“말했지만 난 언제나 내 생각대로 움직여.

내 판단은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놈을 없애는 거였어.

너나 다른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가긴 틀려보였으니까.

내 목표는 역귀를 없애는거야.

넌 이제 그게 가능해졌지. 난 실패 했고.

그러니까 그냥 할 수 있는 걸 한거야.

이빨의 도움을 받아서 찜찜하다면 뭐 그렇게 생각 해.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고.”

진혁은 슬픔과 분노가 같이 올라오는걸 느꼈다.

“이렇게 죽을거였으면 그렇게 처절하게 살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죽는다고 용서되는게 아닌데.”

상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후회 안해. 손가락질 받을 일이란거 알고도 했으니까.

변명하지도 핑계되지도 않아.

그래 몹쓸 짓이지.

하은이. 예지. 내가 죽인 사람들. 괴롭힌 사람들 전부에게.

역귀들이 전부 없어지면 희생된 모든 이들에게 속죄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실패했으니 그럴 자격도 없지.

평생 속죄하다니 그건 일을 끝마친 뒤에 하는거야.

내가 목표로 한걸 이뤄낸뒤에 용서를 받는거라고.

모든걸 각오하고도 결국 실패했으니 속죄할 자격 없어.

그냥 죄인으로 죽어야지.”

진혁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상혁은 확신에 찬 듯 했다.

“그래도... 사과해. 용서 못받더라도 용서받을 자격 없더라도 사과는 하라고.

형 때문에 고통받은 모두한테.”

상혁은 천천히 눈을 감고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럴거야. 저승가면 직접 하나하나 마주보고.”

상혁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진혁은 천천히 일어났다.

“끝까지 사과 한마디 안하네. 나쁜 사람이야 진짜.”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 착잡함을 이해했기에 진아가 다가와 진혁을 다독여주었다.

잠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곧 진혁이 모두에게 말했다.

“정말 고생들 많으셨어요. 다 여러분들 덕이에요.

이제 마마가 있으니 지금처럼 고생하지는 않을거에요.

뭐가 어찌되었건 저희 목표는 역귀를 없애는거고 지금 방향은 잡혔어요.

할 일이 많아요.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만들고 또 싸움을 준비해야죠.”

진혁은 모두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진아, 황반장, 정상병. 다른 구조대원들.

그리고 지켜야 할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상우, 수지, 윤성, 시현.

김갑수 이장과 태영마을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돕기위해 주저없이 달려온 제2 마을 사람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지만 이렇게 살아남았고

여전히 모두와 함께 하고 있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다.

그 믿음과 희망이 진혁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래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살아남았네요.

앞으로도 죽 지켜보세요. 아저씨 의지가 이걸 이뤄낸거에요.”

허공을 보며 자랑스레 말한 진혁은 모두를 이끌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서둘러 마을로 돌아와 재건에 힘써야 했다.





마침.
















에필로그 - 15년 후, 역귀 토벌 1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



“그슨대가 죽던 그날이 역귀 토벌대 탄생의 시작일이라고 할 수 있었죠.

사람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묶고 본격적으로 토벌대를 조직하면서

마마를 세상에 퍼트려 역귀를 상대했어요.

자연스럽게 진혁 삼촌은 토벌대 대장이 되었고

태영마을은 토벌대 본부이자 임시정부 근거지가 되었죠.

그리고 그때 제2 마을이라고 불리던 농촌이 지금의 진혁마을이 된거구요.

그 사람들이야 진혁 삼촌한테 신세를 안진 사람이 없으니 뭐.

지금도 진혁삼촌 생일이 진혁마을 축제일이니 말 다했죠.

아 그 도망친 진수란 사람은 나중에 이빨부대 잔당들을 모아서 산적단을 만들었구요.

아시죠? 그 옛날에 잡힌 그 송곳니단.

그 전신이 이빨부대에요.

와 그거 잡는다고 저희도 엄청 고생했거든요.

역귀랑 싸우랴 송곳니랑 싸우랴 엄청 정신 없어서 이제 체계화가 된거에요.

진혁 삼촌은 계속 역귀 토벌 대장으로 있고

저를 자경대에 넣어주셔서 송곳니나 그런 무장집단들이랑 싸우게 되었죠.

여기 윤성이는 구조대쪽에서 또 고생하고 있구요.

20살 되자마자 바로 현장 투입되서 싸웠죠.

그때는 좀 너무한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뭐 막상 진혁 삼촌이 잘 가르쳐준덕에 칼쓰는거 하나는 자신있어서 공을 많이 세웠어요.”

열심히 상우의 말을 받아적던 남자는 옆에있던 윤성에게 물었다.

“그 문신이 새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혜정 아줌마가 태영마을에 보육원을 만들었어요.

속죄를 하신다면서 이빨이었던 아이나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셨죠.

진혁 삼촌은 혜정 아줌마 이야기 듣고 나서 진짜 가족처럼 챙겨주셨어요.

혜정 아줌마가 극구 사양했는데도 꼬박꼬박 형수님 이라 불러드리고

아줌마 딸 지혜도 조카로서 이뻐하셨구요.

그 보육원이 지금은 학교 역할도 하고 있어요.

아 이건 여담이긴 한데 제 여자친구가 거기 교사로 있어요.”

윤성이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말하자 상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 여동생이에요. 옛날부터 선생님이 꿈이었어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애들을 돌봤거든요.

착하고 이쁘게 잘 컸다 싶었는데 하필이면 이놈이 채가는 바람에...”

남자는 웃으며 상우에게 되물었다.

그럼 다른 분들은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보자.. 신우 삼촌은 구조대 대장이 돼서 본격적으로 생존자 구출 임무를 하셨구요.

약사 규태 아저씨는 역귀 토벌대 본부에서 마마 관리직 맡으셨고.

아 황반장님은 은퇴하셔서 태영마을 기술자로 남으셨어요.

지금은 후임 양성에 애쓰고 계시고.

우리 시현이는 민옥 이모 뒤를 이어서 영양사로 일하고 있죠.”

상우의 대답에 윤성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작년에 상우형이랑 결혼했구요.”

남자는 마주 웃으며 물었다.

“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제 인터뷰는 거의 마무리 되었구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볼게요.

이제 어떻게 보면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

토벌대장 진혁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1년 전 역귀 완전 박멸을 선언하시고 부인 분이랑 따님이랑 잠적하신걸로 아는데...”

상우와 윤성은 둘다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삼촌이 어디 계신지는 말씀 못드려요.

그냥 은퇴하고 원하시는대로 바다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진아 누나랑 우리 귀여운 소현이랑

아주아주 행복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둘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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