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형이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날 도와줄 사람들이 많은 거지.”

상혁은 더 묻지 않고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이빨부대는 전의를 상실했고 머릿수에서도 밀린다.

이제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좋아. 마음 같아선 다 엎어버리고 싶지만 지금 상황이 안 좋아.

이쪽으로 역귀가 오고있어. 그것도 아주 엄청난 놈이.

우리끼리 싸울게 아니라 힘을 합쳐야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좋든 싫든 협조해.

우리 이야기는 역귀를 막아낸 다음.

그 다음이야.

이 인원이면 어떤 역귀든 제압 가능하니까.

고집 그만부리고 내말 들어.

일단을 살아야지. 전부다 죽일건 아니잖아.”

진아는 진혁에게 달려가 안겨서는 말해주었다.

“역귀가 오고있는 건 맞아. 하지만 싸운다고 해서 이길거란 보장은 없어.

지금껏 이정도로 큰 기운은 없었어.

사람이건 짐승이건 닥치는데로 가져다가 몸을 불렸나봐.

정말 엄청나게 커. 꼭 그슨대 같이.”

진혁은 진아를 안쓰럽게 내려다 본 후 말했다.

“들었지? 그슨대같은 놈이라 싸우는건 그리 현명하지가 않아보이네.

물론 이길 수 있다고 해도 형한테는 협력 안해.

이빨을 쓰지도 않을거고.

방법도 찾았어. 시간이 좀 걸리지만 역귀를 약화시킬 방법.

그러니까 더욱더 쓸 이유는 없어.”

“방법? 좋아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시간이 걸린다고?

얼마나? 한시간? 아니면 며칠? 표정을 보니 몇주는 걸리나보네.

지금 오는 역귀가 그걸 기다려 줄까?

아니 지금은 어찌 어찌 넘어간다 치고.

그따위로 느려가지고는 아무소용없어.

답답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야.

역귀 근처에 있으면 사람이 역귀로 변할수도 있어.

정말 아무런 예고도, 징조도 없이.

내가 직접 경험했지.”

진아와 진혁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귀가 주변 사람을 역귀로 변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건 둘이 어느정도 짐작하던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게 이빨을 쓸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둘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진혁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이번엔 진아가 나섰다.

“아뇨. 예고도 징조도 없는게 아니에요. 전 역귀나 두억시니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똑똑히 알죠. 그것들 마음엔 좋은 감정이 전혀 없거든요.

절망. 그리고 공포. 그런것들만 가득하죠.

아무 조건없이 역귀가 되는게 아니에요.

희망을 잃고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면 역귀의 나쁜 기운에 영향을 받아서 그들처럼 변하는거에요.

전부 당신이 사람들을 몰아세운 탓이라구요.”

사실 이게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진혁과 둘이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하고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혁에겐 이걸 정면으로 반박할만한 수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따지고 드는 대신 저 멀리 치워버리고는 진혁을 설득했다.

“아니 그런 얘기는 아무래도 좋고, 지금 당장 올 녀석을 잡으려면 이빨을 써서 싸워야해.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아니 잠깐만 내말 좀 들어봐... ”

상혁은 전혀 듣지를 않고 소리쳤다.

“정신차리라고! 진짜 다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해.

이빨을 들고 날 도와. 전부다 죽게 하고 싶지 않으면!”

진혁은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자신의 뒤에있는 제 2 마을 사람들과

이빨부대와 대치하고 있는 태영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에게 이빨을 쥐어주고 역귀. 그슨대와 싸우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진혁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빨은 안써. 어떤 상황이건 어떤 이유가 붙건. 이빨은 절대 안쓸거야.”

상혁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그럼 어쩔껀데? 그냥 멍청하게 있다가 다죽을거야?

내가 말했지? 대책없는 정의는...”

“그래. 위선만도 못하다고. 대책이 없는건 아니야.

좀 어렵고 힘들겠지만 옳은 선택을 하려는거지.”

진혁은 상혁의 말을 잘라버리곤 사람들에게 외쳤다.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전부 챙겨서 빠져나갈테니 싸울 수 있는 분들은 대피 도와주시고

사람들을 보호해 주세요.

언젠간 마을로 다시 돌아올테지만 지금은 몸을 피하겠습니다.

그슨대, 오려면 얼마나 남았어?”

진혁의 말에 진아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아직 거리는 있어. 그리고 지금은 멈춰있어서 시간은 좀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뭔가가 막고 있나봐.”





최대위는 이빨을 들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너희를 사지로 몰지 않을 것이다.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모든 무기를 활용해서 역귀의 씨를 말릴 것이다.

그러니 나만 믿어라. 역귀는 막는 것이 아니다.

기습으로 목을 따야지.

자 전부 준비해라.”

곧 구조대와 이빨부대가 아껴놓고 있던 각종 장비들이 분배 되기 시작했다.

연막탄부터 시작해서 섬광탄이나 수류탄 따위도 있었고,

태영마을에서 끌고온 트렉터 따위도 있었다.

황반장이 개발한 투척기에는 연막 대신 이빨이된 짧은 단도들이 잔뜩 채워졌다.

태영마을과 이빨부대 상황을 전부 알고 있기에 준비한 무기들이었다.

“다른 무기들은 소용없다지만 연막과 섬광탄은 녀석들의 눈과 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 효과는 이전 녀석들이 충분히 확인했지.

그리고 수류탄 역시 큰 소리를 내며 주변에 피해를 주기에 녀석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저돌적인 역귀의 돌진은 중장비나 차량이 맞대응 해서 상쇄시키면 된다.

이것들로 견제를 하면서 이빨 발사기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다.

그리고 녀석의 힘이 빠지면 그때 이빨을 들고 전부 달려들어 마무리 한다.”

즉흥적으로 준비한 것 치고는 매우 훌륭한 작전이었다.

반신반의 하며 따라온 병사들조차 이것이면 분명 이길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승리하면. 너희가 원하는건 전부 다 해주마.

말뿐인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건 뭐든 말이다.

술과 여자, 음식 뭐든 다 가져라.

가진힘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좋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라.”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듯 멀지 않은 곳에서 역귀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아��!!!!”

동시에 넓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워넣는 고약한 냄새에 병사들은 무기를 고쳐잡았다.

“좋아.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낮짝좀 보자.

그 역겨운 대가리를 갈가리 찢어주마.”

최대위는 복수심에 불타며 그슨대를 기다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상혁은 뭐든 선택을 해야했다.

막아낼 수 없다면 역시 도망치는게 맞다.

지금 협조의사가 없는 진혁과 계속 부딪혀 봐야 좋을게 없다.

“이빨부대!!!!”

모두가 긴장한 채 상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후퇴한다. 전부 물러나서 날 따라와. 역귀를 피해서 부대를 재정비한다.”

이빨부대와 태영마을 양측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깐!”

하지만 진혁의 외침이 상혁과 이빨부대는 멈추게 했다.

“뭐야? 물러나겠다고 분명 얘기했을텐데?”

하지만 진혁은 단호한 얼굴로 나섰다.

“그래. 나도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고 싶어.

하지만 형을 그냥 보낼수는 없어.

다시 어딘가에서 힘을 길러 올테니까.

이제 더는 안놓쳐.”

상혁은 기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진혁에게 말했다.

“아무리 쪽수로 밀린다지만 이빨부대가 마음먹고 버틴다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해.

이기진 못해도 여기 사람들 절반은 길동무 삼을 자신이 있어.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 괴물역귀가 오면 꼼짝없이 전멸이야.

너 믿고 도와주러 달려온 사람들 전부 사지로 몰거야?”

진혁이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 가만히 있던 혜정이 앞으로 나섰다.

이빨부대는 문신사였던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모두 기억하시겠죠?

아이들에게 문신을 새겨넣고 그 피로 이빨을 만든 장본인이예요.

네 여러분이 들고 있는 그 무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을 죽이고 괴롭혀 만든 그 무기.

비록 대의라는 이름하에 조금 무뎌지셨겠지만

그래도 다들 죄책감을 느끼고 계시겠지요.

저 역시 말도 못할 정도로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당신들에게도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있다면 이빨을 버리셔야 해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 사라지는 순간 모두 악마가 될거에요.

네. 당신들이 대장이라는 저 사람처럼.

다들 칼을 집어들때마다 업보의 무게와 나쁜 기운을 느끼고 있잖아요.

그러니 이제라도 이빨을 버려야 해요.

그간 이빨 때문에 희생당한 아이들. 그리고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그만둬야 되요.

모두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아직 희망은 있어요.

더 이상 괴물이 되지 말아요.”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문신사였던 그녀의 말이었기에 그 파급력은 컸다.

그간 이빨을 쓰면서 애써 감추어왔던 죄책감과 불쾌하고 끈적한 기분이 한번에 터져나오는 느낌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인원들 대부분이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이빨을 들어올린 이들이었으니 더 그러했다.

“지금 항복하면 더 편안하게 해드릴 수있겠습니다.

이빨 따위가 아니라 역귀를 상대할 수 있는 더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 있어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러니 항복하세요. 항복하면 모두 받아주겠습니다.”

진혁이 혜정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누군가가 손에 들고있던 이빨을 떨어뜨리자 그게 신호가 되듯 모두가 칼을 버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분위기가 이렇게 변하자 상혁에게 등을 돌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간 상혁은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공포와 보상을 적절히 섞어가며 병사들을 다루어 온데다

최근 사건들로 인해 병사들의 마음이 상당히 떠나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진혁이 혜정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혜정은 말없이 물러났다.

이빨부대는 무기를 버리고 슬금슬금 진혁쪽으로 움직였다.

분위기에 휩쓸려서인지 최후에는 상혁 쪽에 단 한명도 남지 않는다.

상혁은 허탈감에 한숨을 쉬었다.

한순간.

혜정의 고작 말 몇마디 만으로 정말 한순간에 혼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상혁은 단신으로 진혁과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맞서게 되었다.

“형은 틀렸어. 그렇게 장기말 버리듯이 하나둘 죽여가며 온 결과가 이거야.

이빨이랍시고 멋대로 애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어거지로 몰고온 결과가 이거라고.

유일한 길이니 어쩌니 하면서 그런 끔찍한 짓을 한 업보가 되돌아 온거야.

필요한 희생. 유일한 방법. 전부 틀렸어.

내가 제물마을에서 했던 얘기 기억나?

형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죄하게 될거야.

예지랑 하영이를 죽게한 그 벌을 받게 될거라고.”

상혁은 흥분하는 대신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예지도 나한테 그랬지.

내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어했어.

하영이를 찌르지 말아야 했다고 말하고 싶어했지.

하지만 아니야.

하영이. 하영이 덕에 그때 우리가 목숨을 부지한거야.

날 욕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욕해.

하지만 난 틀리지 않았어.

나쁜 짓이건 못할짓이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믿는걸 할거야.

그러니까 곱게는 못잡혀.”

상혁은 두 개의 칼을 모두 빼어들었다.

“쓸데 없는 짓 하지마.

혼자서 이 사람들을 전부 따돌리고 도망칠수는 없어.”

비웃음을 흘리는 상혁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그랬지? 우리라면 맨손으로 비슷한 성인 남성 두세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거라고.

근데 말이야. 만약 내가 칼을 들고 전부 죽일 각오로 날뛰면 어떻게 될까?

몇 명이나 죽어야 내가 잡힐까?”







“전부 물러나세요. 이번 만은 저 혼자 하겠습니다.”

진혁은 그리 말하며 달빛을 꺼내어 들었다.

“위험한짓 하지 마! 혼자서는 안돼!”

진아의 걱정에도 진혁은 단호했다.

“형은 지금 벼랑끝에 몰렸어.

마음먹고 날뛴다면 여러명이 덤벼 봐야 다치는 사람만 늘 거야.

지금은 내가 혼자 상대하는게 최선이야.

그리고 시간이 얼마없어. 그러니까 사람들 대피하는 것 좀 도와줘.”

진아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겁도 없이 혼자 덤비겠...”

상혁이 이죽거리는 순간 진혁은 번개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주절주절 떠들다가 눈치봐서 빠지려고? 그렇겐 안되지.

나도 전력으로 덤빌테니 어디 한번 받아봐.”

진혁의 달빛이 날카롭게 상혁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내는 상혁이었지만 적지 않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간 진혁과의 공방은 셀수 없이 많았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실력이 늘었다 라는 것 만으론 개운하게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

그렇기에 쉬이 막아내고 피해낼 수 있는 공격임에도 여유를 가지기 어려웠다.

칼싸움으로 질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 불안감 때문에 상혁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 널 제법 우쭐대게 만든 모양인데. 전부 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거야.

척 보기에도 네가 다루기엔 너무 벅차거든.

네 그릇으로 안고갈 수 있는 규모가 아니야.

결국 내말대로 되겠지.

안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모두 죽게될거야.

네가 사랑하던 사람. 그리고 믿었던 사람. 지켜야 할 사람까지 전부다.

전부 너 때문에 죽는거지. 처절하고 비참하게...”

진혁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임이 더욱더 묵직해지고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확신에 찬 듯한 움직임.

진혁의 움직임을 살펴보던 상혁은 곧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알아 챌 수 있었다.

지금의 진혁은 망설임도 없고 주저함도 없다.

그간 어딘가 위험하고 불안정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진혁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킬 수 있다는 확신. 이길 수 있다는 확신. 해낼 수 있다는 확신.

그로 인해 상혁이 내뱉은 말들 따위는 가볍게 흘려 넘길 수 있음은 물론.

상혁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까지 했다.

상황파악이 끝난 상혁은 어설픈 심리전 따위는 전부 버리기로 하고 싸움에 집중했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빠져서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진혁은 이를 간파했는지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전과 달리 지금의 진혁은 적당히 잔머리 굴리면서 싸울만한 상대가 아니다.

“좋아. 나도 상황이 급하니까. 어설픈 짓거리는 더 안해.

대신 진짜 죽일 각오로 휘두를 테니 원망하지마.”

상혁이 진심으로 공격에 나서자 분위기가 변했다.

모든 공격이 진혁의 심장과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고 진혁이 제때에 반응하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목표에 도달할 것임이 분명했다.

진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혁의 칼을 받아내며 간간히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역시 어설픈 제압 용도가 아닌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 만한 공격들이었다.

그야말로 죽일 각오로 맞선 그들을 진아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진아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눈을 감고 그슨대의 위치를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멈춰있던 그슨대가 빠르게 마을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부 마을을 벗어나세요! 곧 도착할 거에요!”

진아의 외침에 대피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죽여! 저놈을 죽여!!!”

최대위는 발악적으로 소리쳤지만, 주변에 멀쩡하게 서있는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그슨대에게 어딘가 뜯겨서 헐떡이고 있거나

그저 살덩이가 되어 끔찍한 모습으로 굴러다닐 뿐이었다.

모든 장비를 동원하여 다수의 인원이 기세좋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나마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 병사들 소수만 생존했을 뿐,

나머지는 몸을 빼내기도 전에 그슨대에게 몸이 갈리거나 몸의 일부가 되었다.

단 한 마리의 역귀에게 사실상 이빨부대 최고 전력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분명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생각했는데 그슨대는 끝내 쓰러지지 않고

차분하게 이빨부대를 부수어댔다.

주변에 일어설 수 있는 병사가 없다는걸 확인한 최대위는 이빨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의 앞에는 가히 건물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그슨대가 서 있었다.

“죽어! 이 괴물 새끼야!!!”

기세좋게 달려들던 최대위는 그가 눈치채지도 못한 새에 공중에 떠올랐다.

“놔!! 이 새끼! 내가 죽여버린다! 이 괴물새끼 너 죽여버릴거야!!!!”

기다란 부속지에 잡혀 들어올려진 최대위는 그제야 그슨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제멋대로 섞여있는 일반 역귀와는 달리 이녀석은 제법 규칙성 있는 모습을 하고있었다.

네 개의 다리가 거미처럼 뻗어있었고 그 위로 네 개의 부속지가 마치 각기 다른 길이의 손가락을 가진 팔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몸은 역시나 인간과 짐승들이 무자비하게 섞여있었다.

작은 동물들은 물론 곰이나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들부터 시작해서

코끼리나 코뿔소, 기린과 같은 거대 동물 역시 섞여있는 것을 보니

두억시니를 넘어서 명백하게 최악 최강의 역귀임이 분명했다.

그슨대는 들어올린 최대위의 팔과 다리를 장난치듯이 천천히 떼어내고 있었다.

최대위의 비명은 제법 긴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최대위가 최후의 숨을 내뱉었을 때

그슨대 주변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시체들을 집어들어 몸을 회복하던 그슨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곧바로 생기와 살기가 가득한 태영 마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째 느낌이 좀 쎄한데...”

진수는 묶여있는 황반장과 아이들을 지키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엄청난 역귀가 쳐들어온다고 하는데 아직 특별한 낌새는 없다.

다만 묘하게 불안한 것이 마냥 앉아서 기다리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슬쩍 상황을 살피러 가자니 인질로 잡은 이들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비우기도 곤란했다.

고민하던 진수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라. 대장님이 스스로 판단해버릇 하라기도 하셨고.

여기 쭈구려 있으려니가 불안해서 안되겠네.

거기 꼬맹이 둘. 너네만 따라와. 나머지 놈들 도망가면 얘네는 그냥 죽는거니까 꼼짝말고 있어!”

황반장과 상우, 윤성이에게 당부한 진수는 수지와 시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얼마안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뭐야 사람들이 왜이리 많아?”

이빨부대는 온데간데 없고 이상한 사람들만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혹시 몰라 아이들을 이끌고 몸을 숨긴 진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상황은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빨부대, 그리고 상혁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진수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소란떨지 못하도록 단속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광장 쪽으로 내려가 보니

역시나 심상치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이빨부대는 반토막이 난것도 모자라 전부 항복했는지 이빨은 다 던져버린채 마을 사람들을 돕고 있었고

상혁은 어느새 돌아온 진혁과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이빨부대가 와해된 시점에서 진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상혁이 몸을 빼는걸 도울수는 있을 것 같았다.

1:1 전투에서 상혁이 질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완전히 혼자 남은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곤란할테니 자신이 뭐라도 해야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진수는 곧바로 싸우고 있는 둘에게 달려가서는 아이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그만! 너 싸가지 없는 놈. 움직이지마! 손가락 하나라도 까닥하면 둘다 죽인다!”

상혁에게 달려들던 진혁은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진수를 확인하고는 멈춰섰다.

상혁은 내심 안도했다.

진혁을 이기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못하고 곤란해하던 차에 진수가 적절히 나서 준 것이었다.

“좋아. 아주 잘했어.

그대로 이쪽으로 와. 괴물같은 녀석이 온다니까 우선 몸을 피하자.”

곧 진아와 다른 이들이 진수 주변으로 모여들었지만 감히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쌓인것에 압박감을 느끼는지 진수에게서 여유가 사라져갔다.

“오지말라니까 이새끼들이 자꾸 기어오고 지랄이야.

이것들 죽는 꼴 보고싶어?”

거친 협박에 사람들이 머뭇거릴 때, 정상병이 앞으로 나섰다.

평소 앞으로 나서는 것 보다는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도맡아왔던 만큼

직접 앞으로 나서는건 상당히 의례적인 일이었다.

정상병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진수에게 말했다.

“긴말 안할게요. 살고 싶으면 아이들 풀어주고 여길 떠나세요.

실수로라도 그 애들한테 생체기 내는 순간

이 사람들이 전부 성난 짐승마냥 달려들거에요.

그 아이들은 우리 마을의 희망이거든요.

그러니까 어설프게 협박하지 말고 칼 버리세요.”

조곤조곤한 말이었지만 지금 이상황에서는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진수의 주저함을 본 정상병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빨부대는 전부 죽거나 항복했어요. 남은건 당신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세요.

지금 인질따위 잡아봐야 달라질건 없어요.

그 칼버려요. 그럼 적어도 살수 있을거에요.”

“듣지마! 저새끼가 하는말은 전부...”

다급히 진수를 말리려던 상혁은 곧 달려드는 진혁 때문에 말을 멈추어야 했다.

“미쳤어? 애들 죽일 작정이야?”

상혁이 소리쳤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저놈은 우리 애들한테 털끝하나 손 못대. 믿음직한 사람들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난 내 할 일을 해야지.”

다시 매섭게 싸우기 시작한 둘이었지만 진수의 눈엔 그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방에서 성난 얼굴로 노려보는 데다 상혁의 목소리 마저 닿지 않으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정상병의 차분하고 선한 얼굴이 이번만큼은 마주보지 못할정도로 무섭게 느껴졌다.

진수는 떨리는 입술을 혀로 살짝 핥은 뒤, 발악하듯 소리쳤다.

“개소리 집어치워! 진짜 죽여버린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이런 애새끼들 내가 수십은 죽여봤어! 알아?”

칼이 아이들 목에 조금더 가까워졌지만 정상병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제 저도 시간 더 안드려요. 이게 진짜 마지막 기회에요.

곧 괴물 같이 무서운 역귀가 올거니까, 그 전에 칼 버리고 도망가세요.

애들만 놔주면 얌전하게 보내드릴게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끔찍하게 죽을걸요?

저희에게 죽건, 역귀에게 죽건.

그건 싫잖아요.

그러니까 애들 풀어주고 도망치세요.

그럼 살 수 있어요.”

역귀란 말에 진수의 입이 딱 하고 닫혔다.

지금 모든 상황이 안좋았지만, 역귀의 존재는 가히 최악중에 최악이라 할수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진수에게는 역귀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도 컸다.

“셋 셀게요. 이제 저도 말로 안합니다.

하나. 둘....”

그 순간 멀리서 그슨대의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라이! 씨발!!!”

그 소리가 신호가 되듯 진수는 들고있던 칼을 내동댕이 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지금 진수 머릿속에는 이빨부대도, 상혁도 없었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원초적인 두려움만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도망치는 진수를 내버려 두고는 아이들을 챙겼다.

“반장님이랑 오빠들이 아직 묶여있어요!”

입마개가 풀어지자마자 뱉어낸 시현의 말에 얼마안가 황반장과 상우 윤성이도 풀려날 수 있었다.

몸을 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진수마저 사라지자 상혁은 이를 악물었다.

“외통수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