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생해서 실험 재료를 조달해준 네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실험 결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혁 일행은 무사히 역귀를 사냥하고 사체 조각들을 공수해 가져왔다.
곧 규태는 그 살덩어리들로 실험을 시작했고 며칠 후 할말이 있다며 모두를 불러서는 이렇게 입을 연 것이다.
“우선 말해줄 건 역귀 몸뚱이 상태.
이게 비슷한 사례도 없고 생물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도 아니긴 한데
간단히 말하면 역귀 시체는 몸에서 잘려 나가도 죽은게 아니야.
무슨 얘기냐 하면 혈액이라든가 양분 같은게 공급이 안되니까 썩어야 되잖아?
근데 역귀 살덩어리는 그런거 싹 무시하고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다 살아있어.
그래서 보통 칼이나 이런걸로 썰지를 못해.
칼로 푹 찌르면 이게 꾸물꾸물 하더니만 금세 원상복구 해버리거든.
살아있는 역귀랑 똑같으니까.
왜냐고는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그냥 마법같은 힘으로 샤랄라 하게 버티고 있다. 뭐 이렇게 생각하고 치워버리자고.
아무튼 그런 살아있는 살덩이에다가 병을 접종해 봤지.
어떻게 됐냐. 전부 다 잘 접종이 되더라.
소, 돼지, 닭, 사람 기주가 뭐든간에 어떤 병이든 깔끔하게 접종이 되고 병징이 일어나고 했다 이거야.
심지어는 병원체 두어개가 합쳐지는 듯한 모습도 보이고
원래는 별볼일 없는 병이지만 중증도가 높아지고 뭐 그런 현상도 일어난단 말이지.
중요한건 이거야.
병이 심해지니까 보통 칼로도 고기 썰 듯이 잘라낼 수 있는걸 확인 했어.”
진혁은 물론 같이 듣고 있던 세 사람 역시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빨이나 다른 잡다한 방법 없이 역귀를 상대할 수 있게 된건가요?”
규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좋아하기 이르다는 듯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맞긴 한데 이게 좀 귀찮아.
아무래도 지금은 병 증상이랄까 이런것들이 너무 들쭉 날쭉이라 적당한 병원체를 찾아야 해.
새로운 병원체를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르고.
보통이라면 나 혼자서 이따위 설비로 할 수 있는 레벨의 실험이 아니긴 한데.
역귀 시체에다가 병원체 몇 개 때려 넣고 기다리면 돌연변이든 뭐든 계속 생겨나니까 가능은하지.
물론 시간은 필요해.
아무튼 그렇게 역귀 퇴치용 역병을 만들어 내고 나면 그걸 열심히 뿌려대야지.
예방접종 하는거 마냥 역귀들 줄 세워놓고 주사 맞출수는 없으니까
사방에다가 병걸린 역귀 시체 던져놔서 그놈들이 집어가길 기다리면서.”
아직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그래도 길은 찾은거네요? 잘만하면 역귀들 전부 없앨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모두는 희망적인 표정으로 규태를 바라보았다.
“어... 이론상...은 그렇지... 뭐 아직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니니까 그렇게 너무 똘망똘망하게 쳐다 보지마.”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우선은 시간을 좀 줘. 신우는 나좀 도와줘야 될것같고.
뭐 진혁이랑 진아는 이 기회에 좀 쉬면서 신혼좀 즐기고.
황반장님은 뭐... 바쁘셨으니 쉬시면서 피로좀 푸시고요.”
“부탁드릴게요. 조금만 힘내주세요.”
진혁의 말에 규태가 걱정말라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아직 좋아하기 이르단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은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역귀가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해결책이 생긴 것이다.
“혜정씨 밥 아직이지? 같이 먹으러 가자.”
성아의 말에 혜정은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원들이 대부분 빠져나갔기에 건물안은 한산했다.
“조용하네. 원정나간지 벌써 일주일인데 언제 오려나...”
“며칠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엔 꽤 오래 있을거라고 하던데...”
혜정덕에 남편이 안전한 보직으로 변경되었지만, 성아는 불안감을 지우지는 못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쟁터에 내놓은 셈이니 쉬이 안심할 수 있을리는 없었다.
“안전하게만 왔으면 좋겠어. 안죽고 멀쩡하게 걸어오는 걸 봐야 맘이 놓일는지...
우리 애기 태어나면 아빠 얼굴보여줘야 되는데. 못그럴까봐서 얼마나 불안한지 몰라.
여기 그런 엄마가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혜정은 성아를 안심시키며 문득 상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상혁.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자식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빠.
어쩌면 그냥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는게 나을수도 있겠다는 비참한 생각마저 들었다.
마음이 가라앉으려는 찰나 혜정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끝 쪽 단단한 철문 앞에 빈 식판이 놓여있었다.
철문 아래에 식사를 넣을 수 있는 작은 문이 달려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방안에서 식판으로 식사를 제공 받는 모양이었다.
“저긴 뭐에요? 안에 누가 있나요?”
혜정의 물음에 성아가 대답했다.
“감옥 같은 거래.
부대안에 배신자가 있어서 가둬놨다고 하더라.
원정 정보를 미리 빼돌려서 그 대장 동생네 집단한테 넘겼나봐.
그것 때문에 생존자 찾기가 엄청 힘들었대.
그 사람들이 미리 싹 데려가는 바람에.”
“동생이라면.....”
혜정은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진혁의 이야기는 상혁이나 진수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상혁과는 달리 모든 이들을 구한다는 목표로 거주지를 만들어 생존자들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만약 혜정이 이빨부대를 떠나게 된다면 진혁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 않을까?
“뭐해? 어디가려구?”
“얘기를 좀 해봐야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성아는 불안해하면서도 혜정의 뒤를 따랐다.
곧 두사람은 철문 앞에 도착했다.
“저기.. 안에 있나요?”
혜정의 조심스런 말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혜정이 잠시 할말을 고민하던 사이 안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 박정석 일병입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좀 여기서 꺼내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혜정은 박일병의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언가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
역귀의 위험함과는 다른 무언가.
혜정이 자세히 물어보려던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피해 상황 파악하고 부대 정비해.
혹시라도 따라올지 모르니 경계 세우고 입구 전부 막아.”
상혁의 명령에 이빨부대는 분주히 움직였다.
피해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진혁이 있는 마을을 습격할 인원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 강행한 원정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물론 현재 피해 상황은 시간을 들여 차분히 인원을 보충하고 준비를 한다면 메울 수는 있겠지만
부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게 문제였다.
이 상태로 병사들을 몰아붙여 마을 습격을 지시하긴 힘들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다 생각한 그때, 진수가 달려와 다급히 말했다.
“경계병이 그러는데 이쪽으로 차 한 대가 오고 있답니다.
놓고 온 저희 차량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뒤쳐졌던 병사들인 것 같습니다.
용케 도망친 놈들이 남은 차량을 끌고 여기까지 온걸텐데 문제는...
꽁무니에 역귀들 몇 마리가 따라붙었답니다.”
저렇게 심각하게 말하는걸 보면 그 짐승역귀들일 것이다.
어쩌면 두억시니가 섞여있을지 모른다.
상혁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입구 봉쇄하고 전부 걸어잠궈.
버리고 온 시점에서 그놈들은 전부 죽은거였어.
구할생각 말고 역귀한테 안들키도록 조심해.
싸워봐야 잃는게 더 많고, 어설프게 문열었다간 전멸할수도 있어.”
진수는 대답하려 했지만, 황급히 다가온 혜정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문열어줘요.”
상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돼. 잘못하면 전부 죽어. 따라붙은 놈들 전부 보통이 아니야. 우리 피해만 커져.”
“보급대 전체가 낙오됐대요. 그 사람들일수도 있어요. 열어줘야 되요.”
상혁은 그제야 혜정의 뒤에서 불안감에 손을 물어뜯고 있는 성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물자를 정리하고 있던 보급대에게는 후퇴명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물자들과 함께 전부 버려졌다.
그중에는 혜정이 직접 나서서 보호를 요청했던 성아의 남편도 포함되어있었다.
상혁은 대답 대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데리고 가서 둘다 방에 가둬. 소란떨지 못하게 하고.”
마지못해 둘을 끌고 가는 병사들과 근처에있던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사기를 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거칠게 반항하며 끌려가는 혜정의 모습을 보며 상혁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병사들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공포라면 충분히 보여줬으니 이제 달콤한 유혹으로 홀리는 수밖에 없다.
상혁은 끌려가는 혜정과 성아를 멍하니 보고 있던 진수를 불러내었다.
“진혁이 마을 찾으러간 수색조는?”
“네. 아까 확인해보니 돌아왔답니다.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했구요.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다.
“방법을 바꿔야겠어. 일단 사람부터 모아야지.
지금처럼 적당히가 아니라 전부. 진혁이가 일궈놓은 마을부터 시작해서
다른 생존자들이 저마다 부락을 만들었을거야.
그런곳들 전부 다 흡수해서 규모를 늘린다.
두억시니나 짐승역귀들 상대하려면 그 수 밖에 없어.
오늘은 다들 쉬게하고 배불리 먹여.
그리고 내일 오후에 전투원 전부 모아놔.
다들 제정신이 아닐테니 솔깃해 할만한 얘길 해줘야지.
더불어 제대로 가르칠거야.
싸우는 방법.
그리고 단호하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
“괜히 멋부린다고 껄렁하게 서 있지마.
기본 자세가 사실 엄청 중요하거든.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건 중단 자세야.
공격도 방어도 수월하고 단순하면서도 견고하거든.”
마당에서 상우와 윤성을 가르치고 있던 진혁은 자세를 잡는 둘의 모습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공부벌레인줄만 알았던 상혁이 제법 잘 하는것도 그렇지만
아직 어린 윤성이마저 그럴싸하게 해내는걸 보고 재미가 붙은 참이었다.
생각해보면 진혁과 상혁이 처음 태영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한것도 딱 둘 정도 나이였을 때였다.
길영마을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통.
역귀 수호 명목으로 제자를 키우는 전통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진혁은 왠지 책임감이 생겨났다.
태영에게 배운 모든 것들을 제대로 전수해주겠다 마음먹은 진혁이었다.
“나중에는 너희가 애들도 지키고 역귀 사냥에 앞장서고 해야 할 거야.
힘들어도 차근차근 하나씩 잘 해보자. 이해했지?”
둘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네!!!”
그 소리에 막 집으로 들어서던 황반장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기운이 넘치는구만. 아주 믿음직해.
다른 애들이랑 진아는 어디있는가?”
피곤해 보이는 황반장의 얼굴을 보며 진혁이 걱정스레 말했다.
“다 방에서 쉬고 있어요.
진아가 요새 좀 피곤해 하더라구요.
그보다 반장님 어디 아프세요? 표정이 너무 안좋으신데?”
황반장은 걱정말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냥 나도 좀 피곤해서 그러네.
다들 쉬라고 닦달할 때 쉬면 좋았을걸,
이놈의 버릇 때문에 뭐든 일을 찾아서 끝장을 봐야하는 성미 때문에 밤을 새다시피 했으니...
그래도 그 덕에 우리 태영마을이 한층더 살기좋아졌지.
뭐 그거면 된거 아닌가?”
황반장 덕에 전기 수급도 수월해지고 각종 기계들도 놓여져서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진게 사실이었다.
“늘 감사하죠. 그래도 몸부터 챙기세요.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큰일 납니다.”
“안그래도 좀 쉴 생각이었네. 그보다 약사 양반이 자넬 찾고 있으니 한번 가보게나.
아무래도 좀 진전이 있었던 모양이야.”
“네. 알겠습니다. 쉬세요. 너희들 반장님 편히 쉬시게 조용히 연습하고 있어 알겠지?”
진혁은 상우와 윤성에게 연습을 지시하고는 곧바로 약국으로 향했다.
“불평할 상황이 아니란건 알지만... 이거 좀 징그럽네요.”
진혁의 말에 규태 역시 동감했지만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딱히 틀린말이 아니긴 한데, 난 하루종일 들러 붙어 있다보니 이제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어.
하도 봐서 그냥 내 자식같은 느낌이야.
조만간 저놈이 카네이션 들고 와서 달아줄거 같으니까 그런 상처 주는 소리는 속으로나 해.”
둘의 앞에는 살덩어리 하나가 미세하게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간 규태가 연구한 역귀 퇴치용 병원체가 접종된 역귀 살덩이였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애지중지 키우고 연구한 보람은 찾았어.
이론상 이놈을 역귀한테 척 붙이기만 해도 내가 만든 치명적인 역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게 되겠지.
시간이야 좀 필요하겠지만 대충 한 2주만 지나면 아마 쑹덩 쑹덩 썰릴거야.
그냥 보통 날붙이 따위로도.
그럼 그 살덩어리 잘라서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면 역귀가 주워먹고 병걸리고 뭐 그런거지.”
시간이 걸리는게 조금 문제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과물이었다.
이거라면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역귀를 없앨 수 있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빨 없이도 역귀를 토벌할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당장 시험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규태는 대답 대신 살덩어리를 크게 한뭉텅이 잘라 플라스틱 상자에 넣어주었다.
“가져가. 시험해보고 제대로 조사해서 알려줘. 솔직히 백퍼센트 확신은 못하거든.
이놈이 제대로 먹힐지 어떨지 말이야. 나가기전에 이장님께도 잘 말씀드리고.”
“그럼요. 걱정마세요. 완벽하게 확인하고 올게요.”
자신있게 대답한 진혁은 상자를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많이 안가는게 좋을거 같은데...”
규태 말대로라면 적당한 곳에 살덩이를 뿌려둔 뒤, 역귀가 흡수하는걸 확인하고
몇주간 역귀를 지켜보며 상황을 파악해야했다.
때문에 구조대를 움직이기는 적합하지 않았고,
두세명 정도 소규모 팀이여야 역귀를 몰래 추적하며 조사하기 수월했다.
평소라면 늘 그렇듯 진아와 황반장, 정신우 일병과 함께 움직일 테지만
진아는 조금 쉬게 해주는게 좋을 것 같았고 황반장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결국 진혁은 정상병에게 부탁해 둘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진혁은 먼저 상황을 설명드리기 위해 김갑수 이장을 찾았다.
“이게 답이 될겁니다. 아직 마지막 테스트가 남았지만
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분명 이게 방법이 됩니다.
이빨 같은걸 쓰지 않고도 역귀를 상대할 방법.”
이장은 확신어린 진혁의 얼굴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자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네. 태영이가 자넬 정말 자랑스러워 할게야.
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난 늘 걱정이야.
자네가 지고있던 마음의 짐은 내려놓은 듯 하네만
그럼에도 아직 완전하지 않네.
부디 여유를 가지고 몸부터 잘 챙기게.”
“네 걱정마세요. 이제 저도 예전처럼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차분히 시간을 들여서 많은 이들과 함께 역귀를 상대할 겁니다.
아저씨가 원하셨던대로요.
그래서 역귀 토벌대를 만들려 합니다.
지금 구조대를 중심으로 역귀와 싸울 사람들을 모을 생각입니다.”
이장은 다시금 진혁에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불안감에 쫒기던 청년은 사라지고 당당하고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된 진혁.
그 모습에서는 젊은 시절의 태영의 모습이 비쳐보이는 듯 했다.
“그래. 자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내가 사람들도 모으고 물자도 조달해서 틀을 마련해 놓겠네.
그러니 아무걱정 말고 조심히 다녀오시게.
그리고 자네가 돌아오면 정식으로 자네를 역귀 토벌대 대장으로 임명하겠네.”
그런 거창한 직함 같은걸 달 생각은 없었던 진혁은 상당히 당황했지만
이장은 단호한 태도로 기어코 진혁의 동의를 받아내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밖으로 나온 진혁은 오랜만에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대장이셨는데. 자칭 수호대장. 자칭 마을 경호 대장.
그거 엄청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제가 대장이 되었네요.
아저씨가 놀리실지 자랑스러워 하실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왕시작한거 열심히 해보게요.
새로 만든 가족들 나중에 행복하게 살려면 열심히 해야겠죠.”
진혁의 발걸음은 무겁고도 또 가벼웠다.
“밖은 어때?”
상혁의 물음에 진수가 보고를 올렸다.
“짐승역귀들이랑 두억시니 들이 근처에 잔뜩 포진해 있습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포위된 느낌이라 저놈들이 물러날때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역귀들이 이빨부대 본거지 인근에 잔뜩 몰려와 있었다.
토벌을 하기에도, 빠져나가기에도 쉽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우리한테도 시간은 필요해.
식량도 물도 충분하니 녀석들 줄어들때까지 농성하는걸로 하고 들키지 않게나 조심해.
기다리는 동안 병사들 훈련시킨다.
이번엔 역귀 상대법 따위가 아니야.
전쟁 준비지. 너도 똑똑히 배워둬.
사람 죽이는덴 이골이 났겠지만 전쟁은 또다른 문제니까.
그리고 한가지 더. 병사들 사기를 올릴만한 무언가가 필요해.
병사들이 좋아할만한게 뭘까?
1차원적으로 생각해봐. 뭐가 있을지?”
진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나는대로 대답했다.
“뭐 남자라면 여자 싫어하는 놈 없을거고.
술 이랑 고기. 뭐 권력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돈이야 딱히 쓸모 없으니 빼구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게 제일 흔하지. 그러니 그걸 전부 주면 되는거야.
그리고 전쟁의 승리자는 원래 전리품을 챙기는 법이지.
그게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말이야.”
상혁의 말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언제 어떤 상황이건 상혁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가장 효율적인 결정을 내린다.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해봐야 의미가 없기에 늘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도 충분했다.
다만 원정때 상혁의 말도 있고 해서 진수는 조금은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사기를 올리는 방법. 그리고 병사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전쟁의 전리품.
조금은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내가 공식적으로 약속할 수 있는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그럴싸 해보이는 것 뿐이야.
명예, 물자, 권력. 대단하긴 하지만 이게 사람 마음을 확 사로잡기에는 부족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할 것을 네가 은밀하게 약속을 해준다면 그건 구미가 좀 당기겠지?”
상혁의 말에 진수는 완전히 확신 할 수 있었다.
그간 여러 가지 명령을 받아왔지만 대부분은 진수의 생각과는 다르거나 조금 아쉬운 것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어쩌면 진수가 진정으로 꿈꾸고 바래왔던 것을 직접 지시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수는 진심어린 미소를 지으며 상혁에게 깊이 고개 숙여 보였다.
“그럼요. 은밀한 약속이라면 맡겨 주십시오.”
“마음이 복잡하단건 이미 다 알고 있다.
힘들고 무기력한 심정도 다 이해한다.
나 역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 원정은 우리의 첫 패배다.
그것도 뼈아플정도로 처참한 패배.
그렇다고 좌절하지 마라.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하는건 어줍잖은 녀석들이 아니라 인류를 괴멸로 몰고갔던 역귀들이니까.
패배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 없다.
내 단언컨대 이 패배는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일 것이다.
앞으로는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거다.
내가 약속하마. 우리가 이빨부대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이고 긍지를 느낄 것이다.”
평소 병사들을 거칠게 다루는 상혁이 전과는 달리 힘을 북돋아주는 말을 했다.
축 쳐진 이빨부대의 사기가 약간 나아진 듯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보였다.
단순한 패배를 넘어 끔찍한 공포를 느꼈고, 개중에는 동료를 버리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상혁의 단호한 명령에 대한 반발 역시 적지 않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혁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대충 말로 때울 생각은 없었다.
“좌절하는 대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패배한 이유는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어서다.
그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자만 이빨부대로 받아주었다.
오로지 개인의 정의감과 신념에 의해 스스로 무기를 들기로 결정한 자만을 모아
숭고하게 싸워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역귀가 더욱더 강해지고 또 거칠어지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역귀 사냥에 앞서 인류 통합을 우선 하려고 한다.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아직 생존자들이 많이 남아있다.
건물 곳곳에 숨어있는 그런 작은 규모의 생존자들을 이야기 하는게 아니다.
역귀들에게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 부락을 이루고 있는곳.
이곳저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생존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고 웅크리고 숨어있지.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역귀들은 순식간에 밀어버릴 수 있다.
그들이 무섭다며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내고 우리 옆에 세워 함께 싸운다면
오늘 같은 패배는 절대 없을 거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인류 통합을 위한 전투를 준비할거다.”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생존자 마을을 찾아 힘으로 복종시킨 뒤 이빨부대 전투원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면밀히 따져보면 지금 하고있은 생존자 수색, 편입 과정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이미 자리잡아 규모가 있는 마을을 습격하여 전투를 벌여 빼앗아 오는 것과는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물론 지금 너희들에게 억지로 강요할 문제가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지금껏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너희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인간과의 전쟁으로 내몰아,
다시 희생을 강요한다는건 나 역시 용납 할 수 없다.
그러니 너희에겐 그에 따른 보상을 주도록 하겠다.
비록 너희들의 숭고한 의지에 충분하진 않겠지만 최대한의 대우를 해 주겠다.”
이후 상혁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전투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평소라면 솔깃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다지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소 차가운 반응에도 상혁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역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닌 사람과 전투하는 법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모두는 열의와 긍지를 가지고 훈련에 임해주었으면 한다.”
말을 마친 상혁은 그대로 돌아갔다.
남겨진 병사들은 그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진수가 병사들 앞에 섰다.
“우리 대장님이 참 좋은 말씀 해주셨네.
근데 말이야. 솔직히 조금 아쉬운감이 없지 않아 있어. 그지?
아니 뭐 우리끼리니까 편하게 얘기하는건데.
뭐 정의의 사도다. 보람과 긍지다. 인류의 미래다 이런거 다 좋다 이거야. 다 좋은데...
솔직히 뭐 남는게 있어야 해먹든 뭘하든 할거 아니야. 안그래?
우리도 우리 나름의 즐거움도 있어야 하고 또 배부르고 등따시고 또 남자만의 즐거움이라든가
뭐 이런게 있어야 영웅놀이 같은거도 할거아니야. 그렇잖아?
보상이냐고 뭐 캔통조림 나부랭이 이런거나 주시고 말뿐인 명예 뭐 이딴건 과자부스러기 만도 못한건데.
뭐 나야 우리 대장님 모시는 재미로 사니까 그런거는 아무래도 좋기는한데
너희는 좀 그렇잖냐. 솔직히 이중에서 이빨부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 있어?
아 그러니까 우리끼리 얘기야 우리끼리.
다 대장님이 반강제로 편입시킨거잖아.
칼한자루 들고 역귀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랑 싸우라고 하면서.
근데 이제는 멀쩡히 사람들이랑 전쟁을 벌인다네?
안그래도 이리구르고 저리구르는데 이거 좀 별로잖냐?”
평소 말이 많은 진수였지만 이런식의 접근은 처음이었기에
병사들은 다소 긴장한 채 진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우리 대장님한테는 꼼짝도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이빨부대 부대장 아니냐?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너희들 챙겨줄게.
무슨소리냐 하면. 이번에 전쟁치를 마을 말인데 규모가 엄청 커.
옛날에 그 어디냐 미친 촌장있던 마을 출신 있지 여기도?
어 거기보다 배는 더 클걸?
먹을거도 많고 또 이쁜 아가씨도 겁나 많을거 아니야.
내가 적당히 다 커버 칠 테니까 아무 걱정말고 하고싶은대로 해.
내말 무슨 말인지 알지?
왜? 너무 순진해서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겠어?”
진수는 짐짓 장난스레 몸을 숙여 비밀스럽게 이야기 했다.
“전쟁에서 이기면 부대정비랑 물자정돈 할거 아니야.
내가 대장님 잘 묶어둘테니까.
그놈들이 쌓아놓은 물건들이라든가 먹을거 마음껏 약탈해서 가져가란 얘기야.
언제까지 전부 가져다 바치고 보급용 짬밥 먹을래?
대충 챙겨서 와이프 가져가든 네놈들이 숨겨서 먹든 하고.
뭣보다 너희들 와이프 거의다 임신 했을거 아니야?
풀데가 마땅치 않지?
이쁜 아가씨들 많은데 전리품으로 좀 데려다 놀아도 좋지 않겠어?
뭐 순정을 지키겠단 놈들은 그냥 술이나 따르게 하든가 뭐 그건 알아서 하고.
첩으로 삼고 싶다 하는놈들은 나한테 데려와서 슬쩍 얘기해.
다 처리해 줄테니까.
원래 이기면 전부 가지는게 이바닥 정석이거든.
우리 대장님은 너무 올곧으셔서 이런 얘기 안하니까 내가 특별히 신경쓰는거야 알겠지?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하고 싶은거 다 해봐.
보상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안그래?”
다소의 소란이 일었다.
거부감을 느끼는 이도 있었지만 은근히 반기는 부류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배란 것에서 관심을 돌리는것에는 성공했다.
그게 사기 진작으로 이어질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진수는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대신 훈련은 조금 빡쎌테니까 정신 바짝 차려.
일단 이겨야 술을 챙기든 여자를 챙기든 할거야니야.”
진수는 그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다.
“잘했어. 적어도 쓸만한 놈들 몇놈은 확실하게 사기가 올랐을거야.”
밖에서 가만히 진수의 말을 듣고 있던 상혁은 진수를 칭찬했다.
“너도 애들 지휘하는 것 배워둬. 전쟁은 사람 잘찌른다고 다가 아니니까.”
진수는 자신있다는듯 당당히 대답했다.
“그럼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주 아작을 내버릴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이빨부대의 목표가 역귀에서 인간으로 바뀌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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