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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씨 안에 있어?”
“네. 들어오세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혜정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답했다.
곧 문이 열리며 3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임산부 한 명이 들어왔다.
“그림 그리고 있었어? 태교에는 좋겠다. 난 왜 그런 재주는 없나 몰라.”
혜정은 웃으며 대답했다.
“성아 언니도 해봐요. 하다 보면 재미있어요.”
성아라 불린 여자는 제물 마을에 있다가 선택의 시간에 이빨 부대를 선택한 이였다.
상혁의 제안을 받아들여 당시에 만나고 있던 남자와 곧바로 혼인했고 아이를 가졌다.
급작스레 결혼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편이었다.
다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은 성아와 같지 않았다.
급하게 사람을 찾아 급하게 결혼을 하고.
또 쫓겨나지 않기 위해 원치 않던 임신을 한 사람들은 다들 괴로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힘겨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혜정이 이야기 할 만한 친분을 쌓은 것은 성아가 유일했다.
“됐어. 괜히 건드렸다가 애기 짜증만 낼라. 난 그냥 맛있는거나 먹으면서 태교할래.
그나저나 또 어딜 우르르 나가던데 뭐 들은거 없어?”
혜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사람은 저한테 그런 얘기 안해요. 요새는 얼굴도 안비추는데요 뭐.
자기 아이 아니라면서 칼같이 선 그어버리는 사람이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저도 포기 했어요.
이 아이는 그냥 저 혼자만의 아이에요.
그 사람 자식이 아니라.”
성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도 우리지만 혜정씨도 진짜 딱하게 되었어.”
“아니에요. 이젠 다 괜찮아요.
저 혼자 낳아서 아주아주 예쁘게 키울거에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제일 훌륭하게.”
혜정의 대답에 성아도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기특해 혜정씨.
아무튼 간에 이번에도 애아빠 돌아올 때까지 편히 못자게 생겼어.
나도 좀 대범하게 있으면 좋을텐데.
차라리 전쟁 내보내는게 낫지 무슨 괴물들이랑 싸우겠다고 해서 사람혼을 이리 쏙 빼놓나 몰라...”
“걱정마세요. 다 무사할 거에요.”
물론 혜정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역귀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고 또 강하기에 이빨이 있다고 해도 지극히 위험했다.
실제로 토벌이나 수색을 나갔던 이빨부대에서 희생자가 나오는건 드문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어제 갓 결혼한 여자, 역귀 사태 전부터 부부였던 여자들이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역귀와의 전투에서 사망하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으니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강요에 의해 반강제로 임신해서 우울증에 빠져있던 한 여자는
그나마 의지하려던 남편마저 역귀에게 죽어버리자 곧바로 세상을 등져버리기도 했다.
혜정은 성아가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의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성아였으니 당연했다.
“모르겠어. 자꾸 맘편히 먹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되네...”
기운 없이 대답하는 그 모습에 혜정은 성아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다.
“제가 얘기해 드릴게요. 언니 남편 위험하지 않게 잘 봐달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성아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 듯 보였다.
“잠시 여기 계세요. 제가 금방 얘기하고 올게요.”
혜정은 밖으로 나가 상혁의 개인실로 향했다.
“무슨일이야?”
상혁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혜정은 주저없이 상혁에게 말했다.
“성아언니 남편. 안전한 곳으로 빼줘요.
위험한 일 시키지 말고.”
상혁은 웃었다.
“부정청탁이야? 그런것도 할 줄 아는지는 몰랐네.”
혜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해요.
대신 다른거 안바랄테니까 성아언니 남편만 지켜줘요.”
상혁은 새삼 혜정의 불러온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보급대로 빼는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편의를 봐주는거.
그동안은 중요한 문신사니까 파격적인 예우를 해준거야.
사실상 은퇴한 지금 계속 예외를 둘수는 없으니 그렇게 알아.
먹을거나 필요한 것 정도는 진수가 챙겨줄테니 그걸로 만족해.”
혜정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제 상혁의 차가운 태도에도 상처 받지 않는다.
제법 커다랗게 불러온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혜정은 당당한 걸음으로 상혁에게서 멀어져 갔다.
“소대단위로 차량 운용해서 이동해.
이동중에 역귀 발견하면 바로 멈춰서 척살하고.
이번 목적지는 제법 큰 도시니까 우선 외곽에 임시본부 만들어 놓고 주변 청소부터 시작해.
밖에서부터 정리해 가란 말이야.
이후에 어느정도 정리되면 도시 가운데 주둔지 만들고 본격적으로 수색한다.
제일 중요한건 인원이니까 신경써서 찾아.”
상혁의 명령에 이빨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간 여러번의 원정이 있었지만, 부대 전체가 이정도로 큰 도시로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생존자가 많이 있겠지만 그만큼 역귀도 많을게 분명했기에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역귀 사냥과 생존자 수색을 병행할 예정이었다.
곧 상혁의 명령에 따라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량이 안전지역을 벗어나면 소리를 들은 역귀들이 몰려들겠지만
지금의 이빨부대는 준비된 무기도 적지 않았고 물자도 충분했으니 어지간한 숫자의 역귀는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게 분명했다.
상혁 입장에서는 쫒아다니며 사냥해야 할 역귀가 직접 찾아와주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전군 진격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대장님.
아주 위압감이 넘치는게 역귀들 따위는 아주 그냥 파리새끼 마냥 조져놓을 수 있겠습니다.”
SUV를 운전하던 진수는 뒷좌석에 앉은 상혁을 보며 말했다.
상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진수에게 물었다.
“보급은 충분하겠지? 내가 얘기한 병사는 보급부대로 옮겼고?”
진수는 걱정 말라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그럼요. 보름은 실컷 먹고 마셔도 남을 만큼 충분히 챙겼습니다.
아 그 말씀하신 병사는 제가 따로 일러서 보급부에서도 제일 안전한 곳으로 배치시켰지요.
보급분대장 한테도 미리 언질 줬습니다.”
상혁은 만족했다.
처음엔 그냥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는 진수의 성향을 보고 이용해 먹기 좋겠다 생각했는데
정작 제대로 역할을 주고 일을 시키니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었다.
상혁은 진수에 대한 평가를 ‘이용해 먹기 좋은 놈’에서 ‘쓸만한 놈’ 으로 격상시킨지 오래였다.
다만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달까 지나치게 과장된 모습과 결정력이 부족한 것은 문제였다.
“다 좋은데 말이야. 조금 자립심을 가지면 좋겠어.
날 믿고 따라와 주는건 좋지만 의존도가 높아.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해.
내가 언제나 정답은 아니니까.”
진수는 펄쩍 뛰며 말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우리 인류의 영웅이시자 난세의 주인이신 대장님이...”
“그런거. 바로 그런게 문제야.
뭐 네가 존경을 표하겠다 하는건 문제 없지만 너무 과해.
광신도처럼 되지 않으려면 나만 쳐다볼게 아니라 알아서 판단해서 움직여.
난 내가 짜놓은 틀대로 움직여 주는 녀석을 좋아하긴 하지만 넌 그걸 좀 벗어나도 돼.
알겠어? 나에 대한 존경심 절반만 네놈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꿔보란 말이야.”
진수는 이해가 잘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뭐 천천히 생각해봐. 어려운 문제니까.”
“네. 대장님!”
힘차게 대답한 진수는 생각에 잠겼다.
짜놓은 틀을 벗어나라.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라.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립심. 그래. 충견도 좋지만 가끔은 늑대가 되어보라 이 말씀이시구만.’
대략 감을 잡은 진수는 신이 났는지 손가락으로 박자까지 타가며 차를 몰았다.
“주둔지로 하기 좋은 곳을 찾았습니다.
인근 역귀들은 다 처리 했으니 바로 자리 잡고 사냥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동 중 만난 역귀들을 어렵지 않게 잡아내고는 도시 외곽에 도착한 이빨 부대였다.
상혁은 진수의 보고를 받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공터. 가까운 곳에 물이 흐르고 있었고 조금만 이동하면 도시로 진입이 가능했다.
“물자 정리하고 수색조 꾸려서 도시 수색 시작해.
최우선 사항은 본부로 삼을만한 장소.
다음이 역귀 확인. 마지막이 생존자 수색이야.
수색 끝나면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이번엔 큰도시니 역귀건 생존자건 한둘이 아닐거야.
우리쪽 피해 최소화 해야 하니까 최대한 정보 긁어모아.”
곧 상혁의 지시대로 주둔지 정리와 동시에 소수로 꾸려진 수색대가 도시로 진입했다.
“후....”
크게 한숨을 쉰 상혁은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이빨부대의 토벌은 효율적이고 빨랐지만 상혁의 마음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있는 역귀들을 전부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오래 걸릴거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다.
속도를 높여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인원과 물자가 필요하다.
조금 무리해서 큰 도시로 원정을 온것도 그 이유에서다.
진혁의 방해로 그간 키우지 못했던 부대 규모를 키우고 충분한 물자를 확보한다.
그리고 진혁이 만들어 놓은 마을을 빼앗아 주둔지로 삼고 토벌을 계속한다.
혼자 전부 관리하기는 어려우니 진수에게 일을 더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 쓸만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솔직히 말하면 초기 이빨부대나 이후 충원된 인원들은 전부 어중이 떠중이었다.
지휘능력도 관리능력도 부족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장기말일 뿐.
그것만은 당장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생각을 접었다.
시간이 지나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자연스레 해결될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진수가 미친짓을 벌이지 않고 잘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모른 것은 이 도시를 쓸어버린 뒤에 생각하기로 한 상혁이었다.
“이게 좀 껄끄럽게 되었어.”
규태의 말에 진혁은 긴장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감염이 안돼. 봐, 돼지도 있고 병원체도 있고 주사도 있어.
근데 감염이 안돼. 몇방을 놔도.
닭도 마찬가지야. 그냥 병원체를 들이붓듯이 접종을 하는데도 감염이 안되는거야.”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병 유도 자체야 단순히 주사로 접종하는 것 만으로 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되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단 말이지.
이것도 역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봐. 감염병은 역귀가 전부 흡수한다면서.
전염뿐만 아니라 접종도 마찬가지라면 어때?
그러면 이게 좀 일이 복잡해 지거든.
병원체 때려박아 봐야 감염이 안된다면 실험이고 뭐고 할 수가 없잖아.”
진혁은 조금 초조해하며 물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억지 부릴만한 일이 아니란건 알지만,
그래도 제일 그럴싸한 해결책 이었는데.”
규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방법이야 있지. 동물로 안되면 역귀에다가 실험해 보는 수밖에.”
“역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지원이 충분하다면 평범한 역귀 한 마리 정도는 진혁 혼자 감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포하는 것?
시도해 본적도 없었고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밖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역귀를 쫒아다니며 실험 하는것도 여의치 않을게 분명했다.
진혁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규태가 말했다.
“뭐 당장 역귀 잡아오는건 무리일거고. 우선 살덩어리 같은거라도 구해오면 뭐라도 해볼 수 있을거 같은데?
그놈들 지 살 뜯어내서 새끼 친다면서?
그런 글러먹은 놈들이니 뭐 어찌 되지 않겠어?
그 시퍼런 칼 있으면 살덩어리 정도는 구할 수 있을거 아니야.”
“살덩어리요?
아 이걸로 역귀를 베어낼 수 있기는 한데...
음.... 일단 해볼게요.”
다른 이들과 이야기해보기 위해 실험실을 나서는 진혁에게 규태는 말했다.
“괜히 무리는 하지말고.
내말 듣고 나갔다가 혹여나 너 잘못되면
난 진아나 애들까지 갈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 한테 맞아 죽을테니까.
인류도 좋고 희망도 좋고 다 좋은데 네 몸은 건사시키란 얘기야.
새신랑 기분낼 만한 때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살아야 뭘 하든가 하지.”
툴툴거리듯이 말하긴 했지만 규태는 진심으로 진혁을 걱정하고 있었다.
진혁 역시 규태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걱정 말라는 듯 웃어보였다.
“갈수록 역귀가 늘어갑니다. 크게 문제 있는 수준은 아니긴 한데 생각보다 진행이 더뎌요.”
진수의 말에 상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역귀가 많을 거란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어.
그래도 느릿하게 움직일 여유는 없으니까 몰아붙여.
생존자는 어때?”
“일부 생존자를 발견하긴 했는데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며칠간 수색과 토벌을 반복하면서 생존자 그룹을 찾을 수 있었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아직 외곽이라 그럴테니 중심지까지 최대한 빨리 확보해.
이렇게 고생해놓고 인력 수급안되면 손해가 커지니까.”
진혁이 만든 마을을 습격하는 것 정도야 지금 인원만으로도 부족하지는 않겠지만
상혁이 원하는 것은 싸워서 빼앗는 것이 아닌 압도적인 병력으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아무런 피해 없이. 상대가 대적할 만한 의지조차 없게끔.
그렇게 해야 병력을 보존해서 역귀들과 수월하게 싸울 수 있다.
적이 죽건 아군이 죽건 그리 반갑지 않은 것이다.
“병력손실 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서두르면 오늘 중으로 주변 청소하고 도시 중심부에 자리 잡을 수 있겠지.
이 일대만 청소하고 인원 모으면 규모는 상당해질 거야.
그걸로 진혁이 마을 흡수하면서 토벌지역 넓힌다.
알겠지? 이번 작전이 정말 중요해. 그러니까 집중해서 실수 없게 해.”
상혁의 말에 진수는 곧바로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이동! 전부 빠릿하게 움직여.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아야 하니까 한눈팔지 말고 역귀들 오나 잘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두 부근에서 역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에에에엑!!!!!”
이제 역귀 정도는 큰 위협이 없었기에 이빨부대는 별 걱정 없이 이빨을 준비했다.
역귀는 단 한 마리뿐.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어? 저놈 생긴 게 왜 저래?”
진수의 중얼거림에 상혁 역시 역귀를 바라보았다.
역귀가 기괴하게 생긴 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지만, 확실히 저 역귀는 이상했다.
붉은 살덩이들과 함께 검고 짧은 털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모습.
마치 사람과 원숭이를 반반 섞어서 반죽한 듯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설마 하던 그 순간 역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움직임으로 이빨부대에 쇄도해 오기 시작했다.
“뭘 멍청히 있어! 막아!!”
진수가 소리 질렀지만, 역귀의 공격이 너무 거세서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상혁은 직접 지휘를 시작했다.
“전면부에선 역귀 시선 끌면서 뒤로 빠져. 나머지 창든 병사들이 후위에서 공격한다.
가까이 붙지 마! 보통 역귀가 아니야!”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간신히 자리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역귀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역귀 뒤에서 기세 좋게 창을 찌른 병사 하나를 집어 들어 갈가리 찢어 몸에 붙이기까지 했다.
사망자가 나오자 상혁은 칼을 뽑아 들고는 몸소 앞으로 나섰다.
“멀리서 계속 시선 끌어. 다가오면 빠지고 도망가면 약 올려서 잡아두란 말이야.”
다른 병사들이 역귀의 관심을 돌리는 동안 상혁은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이며 역귀에게 파고들었다.
확실히 다른 병사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정교했다.
역귀의 몸 한켠을 크게 베어낸 상혁은 생각 이상으로 묵직한 감각에 당황했다.
하지만 피해는 제대로 입혔는지 역귀는 크게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었다.
“전부 달라붙어서 처리해! 또 멍청하게 잡히지 말고!”
진수가 그렇게 소리치며 서둘러 상혁을 뒤쪽으로 모셨다.
“안다치셨습니까? 깜짝 놀랐지않습니까. 밑에 놈들 시키시지 왜 직접 나서세요.”
“단단해. 이 녀석 뭐지?”
서서히 무너져가는 역귀를 보며 상혁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원숭이... 뭐 그런거 같은데.. 뭐 저런게 다있죠?”
상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역귀는 살아있는건 뭐든 자기것으로 만든다.
그간 작은 가축이나 새 같은 녀석들이 섞인 역귀는 자주 봐왔으니까.
하지만 저 정도라면 침팬지 무리 정도는 취해야 가능한 모습이었다.
기본 근력이 우수한 짐승의 시체를 사용해서 몸이 저리 단단하고 강한것일까?
“저게 뭐든 보통은 아니지만 두억시니 수준 까지는 아니야.
정신만 차리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어.
저런 놈들도 잘 대처할 수 있게 준비해둬.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몰라.”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수색대 놈들은 뭐한 거야. 저런 놈들이 돌아다니는데.
재빨리 와서 보고부터 할 것이지....”
사실 정찰 나간 수색대가 돌아오지 않은 지 한참 지났으니 전부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저런 녀석들이 더 있다면 수색대라고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색대의 죽음이 아니었다.
상혁은 이 도시에 있던 놀이공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그곳엔 큰 규모의 동물원이 있었고 역귀가 그곳을 습격했다면
유인원들이 섞인 짐승 역귀가 나오는게 그리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침팬지 따위보다 훨씬 크고 무서운 짐승들이 많다는 얘긴데...”
불안감을 느끼는 순간 멀리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의 목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강력한 포식자의 포효였다.
“전투 준비!”
상혁은 크게 소리치며 집어넣으려던 칼을 고쳐 잡았다.
“꼭 같이갈 필요는 없어.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진혁의 말에 황반장도 거들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이정도 일은 우리만 가도 충분해.”
하지만 진아는 단호했다.
“내가 우리 팀에서 얼마나 중요한데?
눈 역할도 하고 귀 역할도 하고 응원단장이랑 미모 담당도 하고 있거든?
별일 아니라도 내가 같이 가야 완전 안전하지!
신우씨도 데려간다며? 그럼 나도 같이 가야 맞지!”
역귀의 살덩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원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을 운용하는 것이 유리하기에
모두와 이야기 해본 결과 만들어진 팀이었다.
사실 결혼식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급적 진아는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진아는 빠질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진짜 고맙고 미안해서 내가...”
진혁이 몸둘바를 모르자 진아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대신 나 할머니될때까지 완전 공주님으로 모셔야 될걸?”
“그러게요. 이건 솔직히 매일 업고 다녀도 모자라지 않나 싶은데.”
정상병 역시 가볍게 거들었다.
진혁은 알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말씀드렸지만 이번엔 그리 어렵지 않을거에요.
대신 언제나 그렇듯이 변수란게 존재하니까 항상 대비 해야죠.
진아가 따로 떨어진 역귀 찾아내고.
반장님이 드론으로 신경 분산시키고.
제가 나서서 처리하면 신우가 살덩이들 분해해서 가져오는걸로.
내용은 간단하지만 일이 꼬이면 또 어찌될지 모르니까 운이 좋기를 바래야겠죠.
이게 진짜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들 한번만 더 힘내봐요!”
준비를 마치고 늘 그렇듯 진혁은 진아와 함께 전동차에 올랐다.
자연스레 황반장과 정상병이 한조로 움직이게 되었다.
“나 꿈이 생겼어.”
전동차를 출발시키자 진아가 갑자기 말을 건네왔다.
“꿈? 뭔데?”
“나중에, 역귀들도 전부 없어지고 평화로워지면.
해야할 것 전부 다 하고 이제 나도 늙고 당신도 늙고 나면.
바다 보이는 근사한 집에서 여유있게 살고 싶어.
테라스에서 해지는거 보면서 같이 차한잔도 하고,
같이 별도 구경하면서.”
잠시 상상한 것 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기에 진혁은 진아와 함께 웃었다.
“그래. 그러자. 전부다 끝나면 우리 둘이 행복하게 바닷가에서 살자.”
진혁은 해야할 것 목록 맨 마지막에 넣을 것을 찾았다 생각하고는 마음에 단단히 새겼다.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해야지. 무슨일이 있어도.’
“몇마리야!”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역귀들이 선두 병력과 격돌하자 상혁이 다급히 물었다.
상황 보고를 받은 진수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최소 열 마리가 넘어갑니다. 뒤에서 계속 오고 있어요. 게다가 전부 짐승 섞인 괴물같은 녀석들입니다.
두억시니도 많고 다른 놈들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상혁은 옅은 신음을 뱉어내었다.
적어도 두억시니나 그에 근접한 수준의 괴물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병력으로는 피해가 극심한 것 정도가 아니라 전멸을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미 선두그룹 병사들은 짐승 역귀에 의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후위 대열부터 후퇴한다.
최대한 빠르게 빠져서 차량 탑승하고 인원 채워 넣는 대로 출발해.
물자들이랑 뒤처지는 모든 병사는 포기한다.”
명령이 전달 됨과 동시에 후위에서부터 병사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선봉에서 역귀들을 상대하고 있던 병사들이 너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몰려오는 역귀들은 그간 상대하던 역귀들과 차원이 달랐다.
두꺼운 가죽. 단단한 뼈. 근육량은 물론 단순 크기와 속도까지.
보통 역귀 서너마리 상대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봉 병사들 마저 몸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맞서는 적보다는 도망치는 적이 죽이기 쉬운 법이다.
모두가 등을 돌리자 전투는 학살로 변했다.
마치 무기가 없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역귀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하나 하나 잡아 채서는 몸을 불려대고 있었다.
참혹한 상황이었지만 상혁은 절망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흩어져서 도망쳐! 그래야 살 수 있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서 역귀들을 따돌려!
집결지는 임시숙영지다.”
그렇게 소리치자 선봉에서 역귀들에게 쫓기던 병사들이 각각 흩어져 달려 나갔고 역귀들 역시
도망치는 병사들을 쫓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혁은 진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전달했다.
“차량있는 곳에 도착하면 준비 되는대로 출발한다.
남겨진 인원들 전부 버려. 지금은 그 수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진수는 병력들을 돌아보았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역귀에게 쫓겨간 상황이었다.
간신히 임시주둔지에 도착해 인원파악을 해보니 20%에 달하는 병력이 사라져 있었다.
“만약 계속 싸웠으면 그 두배는 잃었을거야.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차 출발시켜!”
진수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 이빨을 받고 나서 역귀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는데
잊고 있던 공포심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에 만난 역귀들은 무서운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대장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못 온 병사들이 많습니다.”
출발하려던 그때 병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역귀에게 쫒기던 병사 그룹에 아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시간 없어. 어설프게 대기했다간 놈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칠거야.
너도 살고 싶으면 어서 움직여.”
하지만 곧 그 병사 주위로 몇 명이 더 찾아왔다.
“제 동생이 아직 안왔습니다.”
“다른 소대원들도 금방 도착 할 겁니다.”
“보급대원 대부분은 아직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평소였다면 적당히 잘 달래건 강하게 협박을 하건 했겠지만 지금은 너무 시간이 없었다.
상혁은 곧바로 눈앞에 있는 병사의 목을 쳐냈다.
“시간 없으니까 전부 다 입 다물어. 이따위 꼴 나기 싫으면.
잘못했다간 전멸이야.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전부 타. 바로 출발한다.”
상황은 금세 정리되었다.
얼마안가 병사들이 탄 차를 출발 시킬 수 있었다.
“후...”
진수가 운전하는 차에 자리 잡은 상혁은 깊게 한숨을 뱉어내었다.
이빨부대의 전투력을 믿고 사전 조사와 수색을 게을리한 대가였다.
어지간한 역귀 무리 정도는 무리없이 잡아낼 거라 생각했는데
규격외의 역귀들이 이리도 많이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역귀 사냥에 시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부로 복귀한다.”
이빨부대의 첫 패배였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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