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다.

그 사실이 이리도 끔찍하게 느껴질 거란 걸 예전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이 우중충한 것이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쏟아질 것 같았다.

화가 나다 못해 절망감마저 느끼며 급히 옷을 챙겨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최대한 빨리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

고작 비 따위로 뭘 그리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나에게 비란 것은 다른 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렵고 끔찍한 존재다.

“아이고. 402호 총각 또 병이 도졌나 보구만.”

“그러게.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비만 오면 왜 저러는지.... 딱해서 원.”

남 얘기 좋아하는 동네 아줌마들의 들으라는 듯한 뒷담화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리고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터.

하늘이 흠뻑 쏟아부을 준비를 하는 걸 보니 한시가 급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차를 출발시키고는 새삼 참담한 기분으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이리도 비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



일 년 전. 장마의 막바지 무렵 오랜만에 시골 고향마을에 들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공기마저 끈적해져 나돌아다닐 만한 날씨가 아니었건만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운치 있게 산책을 하겠답시고 우산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섰다.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동네 외곽에 흐르고 있는 강이었다.

강 한가운데 다리 대신 내놓은 징검다리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오늘같이 비가 흠뻑 오는 날이면 물살이 빨라져 어린 나에게 좋은 놀이터가 되어주었었다.

위험한 것도 모른 채 징검다리를 한발, 한발 건너며 즐거워했고,

나뭇조각을 던져서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는 걸 가만히 구경하기도 했다.

그때를 추억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지 난 예전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징검다리 가운데로 나아갔다.

한발. 한발.

어릴 땐 펄쩍 뛰어넘어야 했던 징검다리지만 이미 어른이 된 내겐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난 발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물을 바라보았다.

물속에 무언가 있었다.

아니 누군가라고 해야 할까?

탁한 물속에서도 새하얀 그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짧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얇디얇은 팔다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어린 소녀가 물속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체 따위도 아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난 들고 있던 우산마저 떨어트린 채 얼어붙고 말았다.

마치 발레를 하듯 하늘하늘 움직이던 소녀는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녀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그 순간,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내 몸을 움켜쥔 듯한 섬뜩함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소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내가 다가왔다.

내가 비명을 지르며 강둑으로 뛰어나와 뒤를 돌아보았을 즈음에는

물 밖으로 기어 나와 돌다리로 올라서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정신없이 도망쳐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나타났고,

사방이 막힌 곳으로 숨어들어도 당연하다는 벽을 통과해 다가왔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도망치다가 결국 붙잡히자 소녀는 그대로 내 목을 졸랐다.

차디찬 손으로 목을 졸라대는데 내 힘으론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축축이 젖은 머리칼을 내 코앞까지 들이대고 시체처럼 차가운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죽음에 대한 공포가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정신을 잃었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면 다시 소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비가 오는 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공터에 도착하자 잡념을 떨쳐버리고는 재빨리 우의를 뒤집어쓰고 우산을 집어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난 공터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먼발치에서 새하얀 형체 하나가 나타났다.

한발, 한발 내게 다가오는 그것을 보며 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시야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어지면 엉뚱한 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눈을 떼는 순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그러니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거리를 유지면서 절대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소녀에게 잡혀 목이 졸리는 건, 매번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끔찍했으니 필사적이었다.

난 소녀를 노려보며 제발 비가 그치기를 기도했다.

일기예보상 비는 며칠간 쉬지 않고 내린다.

내가 그걸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애써 털어버리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이제부턴 그야말로 지옥 같은 술래잡기 시간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숨이 차서 가슴이 아플지경에 팔다리는 후들거렸다.

무거운 우산 따위는 집어던진 지 오래였으며

빗물 섞인 끈적한 땀 냄새가 배 나오는 우의마저 벗어 던진 채로 공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

언제나와 같은 하얀 피부에 하늘거리는 걸음으로 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여전히 미소를 띄운채.

“나한테 왜 이래!!!!”

발악적으로 소리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소녀는 우습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더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서 내게 내밀었다.

그 작디작은 손을 보는 그 순간, 지워졌던 기억이 돌아오듯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리 와. 내가 잡아줄게.’

어린 시절 돌다리에서 함께 놀던 소녀.

짧은 단발머리에 파란 블라우스.

그리고 새하얀 피부.

비만 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강둑에서 만나, 함께 돌다리를 건너며 놀곤 했다.

너무도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

그 좋았던 추억을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아....”

기억을 더듬던 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소녀의 죽음.

마치 억지로 지우기라도 한 듯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물에 빠진 채, 마치 춤을 추듯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떠내려가던 소녀.

그날 이후 충격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죄책감?

하얀 형체가 내 코앞에 당도했을 때에야 간신히 소녀가 물에 빠지던 그 순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리 와. 내가 잡아줄게.’

그렇게 말하곤 내 손을 잡으려는 그녀의 손을 장난스레 피했다.

분명 장난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소녀는 휘청댔고 그대로 물에 빠져들어 갔다.

비 때문에 불어난 물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치며 그녀를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어느새 난 공터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차디찬 손으로 내 목을 졸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이제 더이상 반항하지 않는다.

이건 죗값이다. 지금 내가 죽건, 아니면 평생 이 지옥 같은 숨바꼭질을 계속하건

내 죄이며 내 업보다.

곧 찾아온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숨 막힘에 난 한껏 입을 벌렸지만, 비명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잔뜩 벌어진 입속으로 빗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선 빗물이 아닌 것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고통의 눈물일까? 후회의 눈물일까?

지금의 나에게는 뭐든 상관이 없었다.

비는 여전히 무섭게 쏟아져 내리고 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