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밖으로 나가면 안돼. 물이 얕아지는 순간 바로 잡힐거야.”

진아의 외침에 진혁은 달빛을 꺼내들었다.

물속에서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야했다.

안타깝게도 두억시니가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물 밑에서 언제 위협적으로 부속지를 뻗어올지 몰라 두려움만 커져갔다.

가만히 집중하고 수면을 들여다 보았지만, 물이 너무 탁했기에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공기방울들이 올라오고있어 저쯤일거라 생각할 뿐이었다.

“헤엄칠 수 있지? 강 따라서 하류로 내려가자.”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헤엄쳐 나갔다.

진혁은 조금씩 가까워지는 공기방울들에 집중하며 진아의 뒤를 따랐다.

몇미터쯤 이동했다 생각한 그 순간 물속의 흐름이 조금 바뀐 느낌이었다.

“어디있는지,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진혁의 물음에 진아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움직이느라 집중이 안되서...”

수영에 익숙치 않은 진아는 지금 상당히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뒤에서 두억시니가 따라오는 상황에 멈출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진아가 조금만 버텨주길 바라며 이 위기를 타개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혁은 재빨리 먼발치의 수면을 쭉 훑어보았다.

방향은 조금 달랐지만, 멀지 않은곳에 부표 하나가 떠있는게 보였다.

“저기 저거 보이지? 저기까지 가서 매달릴 수 있겠어?”

진아는 힘겨운지 대답 대신 곧바로 방향을 바꿔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진혁은 진아의 뒤를 따르며 다시 두억시니를 찾는데 열중했다.

이제 공기방울마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진혁의 아래쪽 물속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당황한 진혁이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뭔지 모를 물컹한 것이 진혁의 허벅지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모르긴 해도 두억시니가 긴 부속지 따위를 휘둘러 진혁을 낚아채려 하고 있는 듯 했다.

진혁은 달빛을 든 손에 힘을 꽉 쥐고는 열심히 헤엄쳤다.

그 와중에 진혁의 발끝에 다시 한번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이번에도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는 시간문제였다.

마음이 급해진 진혁은 물속에 달빛을 집어넣고는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운 좋게 부속지 일부만 잘라낸다면 적어도 잠시 시간은 벌 수 있다.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진아가 막 부표에 매달린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진혁은 안도한 그 순간.

진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진혁이 달빛을 날카롭게 휘두르자 두억시니가 대상을 바꿔 진아에게 곧장 다가간 것이다.

“안돼... 안돼. 안돼!!!”

진혁은 소리를 지르며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둘 중 하나야. 내통자가 있거나. 감시자가 있거나.

정황상 내통자가 가장 가능성 높겠지.”

상혁의 말에 진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전부 불러내서 색출해 볼까요? 누가 배신자인지.

맡겨만 주시면 제가 금세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진수가 살벌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좀 독한 방법을 써야겠어.

우리보다 한발 앞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다닌다는 걸 보니 보나마나 진혁이 녀석 짓이야.

그놈이 만든 마을을 쳐서 전부 뺏어온다.

그냥 맘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제풀에 지치겠거니 했는데, 날 방해했으니 되찾아와야지.”

진수는 상혁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싸가지 없는 놈 언젠가는 한번 크게 혼나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아주그냥 묵사발을 내버려야지요.”

그렇게 말한 진수는 순간 아차싶어 상혁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유일한 혈육일 텐데 이렇게 막말해도 괜찮을까?

다행히 상혁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신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세세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부대원 전체에 공지를 해.

다음 수색지역은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고.

다음주 쯤에 수색 시작한다고 하면 정보가 넘어가겠지.

그놈들 오기전에 몰래 일반인 쪽에서 사람 몇 명 뽑아서 생존자인 것 처럼 위장시켜 놔.

그리고 똘똘하고 날랜 이빨부대 두어명 근처에 숨겨놓고.

그놈들이 위장시킨 생존자들을 찾아 데려가면 몰래 따라가면서 위치를 알아내는거야.

이해했지?”

진수는 과장스럽게 감탄하며 상혁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원래부터 저런 스타일이었지만 진수에게 여자를 붙여준 이후로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알았으면 움직여. 물자들 부족한 것 없는지 확인하고.

무기들도 더 필요해. 역귀사냥만 하는게 아니니 군대든 어디든 전부 털어서 뭐든 확보해.”

진수가 나가고 나자 상혁은 다시금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인원부족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생존자들을 더 찾아야 한다.

가짜 정보로 진혁을 묶어둔 동안 다른곳을 수색해서 인원 확보를 해야한다.

상혁은 남쪽 지역을 훑어보았다.

상혁의 기억으론 그쪽에 놀이공원까지 있는 제법 큰 도시가 있었다.

어린시절 태영이 그 놀이공원에 데려가 주었을 때,

진혁과 예지는 물론 상혁 역시 다시 없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후 성인이 된 후에 예지가 조르는 통에 몇 번 데이트하러 가기도 했고,

역귀 사태 바로 얼마 전에는 하영이를 데리고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게 상혁의 세가족이 함께 보낸 마지막 여행이었다.

지도를 훑어나가는 상혁의 손끝이 살짝 떨려왔지만 그렇다고 망설이지는 않았다.

‘후회하지는 않아.’

상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진아는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고 숨이 막혀오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발목을 강하게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던 것까지만 기억할 뿐.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두억시니의 기억이었다.

다만 멀리서 정신을 집중한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고 명확했다.

심지어는 두억시니의 감정과 마음까지 고스란히 흘러들어왔다.

두려움과 고통. 외로움.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뒤덮어버린 끝없는 분노.

반대로 진아의 기억과 감정 역시 두억시니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때문에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다급한 상황의 진아도

당장이라도 진아를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는 두억시니도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정보와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몇 초 정도였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두억시니와 진아는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과 감정을 완전히 공유할 수 있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현실감 없는 그 상황은 어느순간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진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뭍으로 올라와 있었다.

“정신차려! 죽으면 안돼!”

처절할 정도로 슬픈 목소리로 소리치는 진혁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진아를 끌고 들어가던 두억시니의 부속지를 진혁이 잘라서는 뭍으로 데려온 것 같았다.

진아가 눈을 뜨자 진혁은 안도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진아를 끌어안았다.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

아직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진아는 그런 진혁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 두억시니는 물속에 남아있었다.

“빨리 도망가자. 왜인지 모르지만 저놈이 물속에서 꼼짝않고 있어서 구할 수 있었어.

그래도 금방 움직일거 같으니 우선 피하자!”

둘은 서둘러 물가를 벗어나 다리쪽으로 향했다.

전동차를 다시 몰고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불행히도 전동차는 못쓸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때 두억시니도 정신을 차렸는지 물에서 빠져나와 큰 울음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둘은 두억시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하며 조심스레 그곳을 빠져나왔다.







두억시니가 다가오기 전에 몸을 피한 진아와 진혁은 안전한 건물안에 몸을 숨겼다.

이미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 우선 하루밤 자고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날이 밝고 나서 두억시니나 혹시 있을지 모를 다른 역귀를 피해 차량을 찾아야 할것이었다.

그게 여의치 않는다면 걸어야 한다.

우선 오늘만은 푹쉬기로 결정한 진혁이 진아를 돌보고 있을 때, 진아가 입을 열었다.

“두억시니한테 잡히니까 뭐랄까 완전히 연결된 느낌이었어.

아무래도 직접 닿아있으면 그런식으로 공유 되나봐.

머릿속으로 생각이나 감정같은게 막 밀려들어와서 꼼짝도 못하겠더라.

두억시니도 나랑 비슷했을거야. 그래서 못움직인거지.”

진혁으로서는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실 직접 경험한 진아도 뭐라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웠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떨어져 있을 때는 찾기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역귀를 잡을 힌트를 찾은 것 같아.”

“잡을 방법이 있어?”

진혁은 눈을 빛내며 물었지만, 진아는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근데.. 이게 설명하자면 좀 길어.

정확하게 방법이라 하긴 그렇고 말 그대로 힌트 정도라서.....

그리고 오빠도 몰랐던 이야기들도 있어.

어쩌면 아무도 몰랐던 그런 얘기들.

근데 이게 조금 무거워...”

난감해하는 진아의 태도에 진혁은 의아해했다.

무거운 이야기가 무엇일까?

진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두억시니. 옛날 길영마을에 있던 경비대 부대장이었어.

기령이란 사람이 경비대장이었고.”

분명 진혁이 태영이나 마을 어르신들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역귀들과 싸우던 경비대. 그 경비대를 지휘하던 경비대장 기령.

이후 길영마을은 그 경비대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걸로 알고 있다.

분명 진아와 다른 이들에게도 예전에 그렇게 말해준적 있었다.

“부대장이라서 전해지지 않았던 비밀들까지 전부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조금 어두운 이야기야..”

진아는 주저하며 두억시니에게서 알아낸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대장님. 찾으셨습니까?”

부대장의 말에 기령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앉게. 먼저 부대장직을 맡아줘서 고맙단 말을 해주고 싶네.

나야 글이나 겨우 읽고 쓰는 수준이니 자네처럼 아는게 많은 이가 필요했던 참이야.

게다가 칼솜씨도 훌륭하니 경비대와 마을에 아주 큰 보탬이 될걸세.”

기령의 칭찬에 부대장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 자네를 부른건 다른게 아니라 말이야.

무거운 이야기를 해주려 해서네.

이제 직책이 있는 만큼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던 진실을 알아야 할테지.

쉽지 않겠지만 난 자네가 잘 받아들이고 마을과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부대장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네. 걱정마십시오. 진실이 무엇이건 전 이장님과 대장님을 따를겁니다.”

기령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 말이야. 역귀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부대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역병을 옮기고 다니는 괴수들이지요.

예전에 전국이 역병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도 바로 그 역귀들의 소행이라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 마을은 이장님 휘하 경비대와 대장님께서 최선을 다해 역귀를 막아내신 덕분에

역병으로부터 안전했습니다.

지금은 몇 남지않은 역귀의 잔당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밤낮으로 애쓰고 있지요.

최근들어 역귀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대장님께서 분명 잘 해결하실거라 믿고 있습니다.”

술술 나오는 대답에 기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 대답해 주었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있지.”

부대장은 고개를 들어 기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다르다네.

역귀는... 그런 존재가 아니네. 역병을 옮기고 다니는 괴수 따위가 아니야.

과거 전국에 역병이 돌기 시작하던 그때,

이장님은 마을을 지킬 방법을 고심하시다 결단을 내리셨네.

조모님께서 남기신 주술책을 보시고 말이야.

이장님의 조모님께서 신통술이 뛰어나셨다는건 알고 있겠지?

그 덕에 역병을 막을 수 있는 주술을 걸수 있었지. 마을을 지킬 주술을 말이야.”

부대장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장님. 주술이라 하시면...”

“액받이를 두는거지.

마을에 올 모든 역병들을 받아낼 액받이.

이장님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모두를 구하려 하셨네.

때문에 직접 선별하신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애도한 뒤에

주술을 걸어 액받이로 만들었지.

주술에 걸린이는 마을에 올 모든 역병들을 한몸에 받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며 괴물이 되지.

그 액받이가 바로 역귀라네.”

부대장은 당혹스런 얼굴로 기령을 바라보았다.

그간 괴물이라고만 생각한 역귀가 사실은 인간. 그것도 마을 사람이었다니...

떠올려 보면 역귀들은 커다랗고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시체를 취해 몸에 붙이면서 만들어진 형태이고

처음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 비슷했다.

다만 온갖 질병들로 인해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끔찍할 뿐.

“원래대로라면 몇 달간 역병을 받아내던 역귀는 주술의 힘이 다하면서 죽게 되어있네.

그때마다 난 이장님을 도와 새로운 역귀를 만들었지.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변했어.

역병이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역귀들이 강해졌네.

그리고 자연스레 죽어 사라져야 하는 역귀들이 죽지 않았지.

그뿐만 아니라 몇 달에 한번꼴로 마을 사람들이 역귀로 변하기 시작했네.

주술이 폭주한 것이야.

그간 역귀를 끊임없이 억누르던 역병이 사라져서 일테지.

강해진 역귀는 난폭해지고 또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네.

처음의 역귀는 내가 던진 단검 하나에도 맥을 못추리는 녀석들이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 개 중대가 달려들어도 생체기 하나 내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고 또 불사의 몸을 가지게 되었지.”

부대장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그럭저럭 머릿속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거란걸 알고있네. 하지만 난 자네가 이해해줄거라 믿네.

이장님은 마을을 부흥시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하셨고.

나 역시 이장님을 보좌하며 이를 받아들였지.

내 단언하지. 이장님. 그리고 나와 경비대가 한건 모두 옳은 일이었네.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어.

그러니 자네도 이해하고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네.

이제는 애물단지가 된 역귀를 어떻게든 전부 처리해야해.

역귀들만 다 물리친다면 더 좋은 세상이 올테니 말이야.

마을 사람 모두가 안심하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일세.

자네만 있다면 할 수 있네. 어떤가? 나를 도와주겠나?

당장 대답이 어렵다면 내 시간을 주겠네.”

하지만 부대장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아닙니다. 바로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전 이장님과 대장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죽을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역귀가 무엇이었건 어떤 존재건 변하는건 없습니다.

마을을 지키고 대장님을 따르기로 맹세했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기령은 감탄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좋네. 역시 자네는 이마을에 없어선 안될 중요한 인재야.”







진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진혁은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역귀가 주술에 의해 탄생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일거란 생각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저 사고로 만들어진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희생을 강요하며 인위적으로 괴물로 만든 것이었다니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모두를 구한다.

제물마을에서 두억시니에게 제물을 바치고 마을을 지키던 김기태 영감.

살아남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총을 겨눈 최민규 대위.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딸까지 주저 없이 찔러 역귀를 죽이던 상혁.

돌이켜 보니 셋 모두 역귀가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생각으로 일을 벌였다.

정말 방법이란 그것밖에 없는것일까?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일까?

생각하던 진혁은 문득 떠올렸다.

“잠깐만.. 역귀가 폭주한게 역병이 없어져서라고 했지?”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응. 원래 역병을 받아내기 위해 만들어진게 역귀니까. 역병이 없어지면서 지금처럼 변한거야.

사람 몸 뜯어 붙이고. 또 죽지도 않고 무기도 안통하고....”

돌이켜보면 역귀 사태 이후 사람들은 병에 걸린적이 없었다.

그 흔한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간 역귀들이 자잘한 전염성 질병을 모두 흡수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럼... 만약 인위적으로 병에 걸리게 하면? 그럼 역귀들이 약해질까?”

진혁의 물음에 진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어떻게?”

진혁과 진아는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진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약사 아저씨가 원래 질병관리청에서 일하지 않았나?”







‘정상병님.. 들리십니까?’

집에서 책을 보던 정상병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박일병의 목소리에 무전기를 집어들고는 대답했다.

“그래. 얘기해.”

‘다음 수색지가 정해졌습니다. 다음주 중으로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번엔 북쪽으로 올라간답니다.’

정상병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죽 훑어보았다.

“좀 작은 동네긴 한데 오히려 생존자는 좀 있을수도 있겠다.

생각보다 빠르네. 바로 움직여야겠어.”

‘네. 사람이 점점 줄어서 그런지 조금 급한 것 같습니다.’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두어달간 대부분의 생존자들을 미리 데리고 왔으니 이빨부대로서는 인력 수급이 쉽지 않을 터였다.

“그래. 아무튼 고마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가급적이면 앞으로 나서지마.

거기서 나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이제 여기도 살만해 졌으니까 아무 걱정 없어.”

박일병은 잠시 주저하다 이야기 했다.

‘사실 좀 겁이 나기는 한데, 당분간은 여기 있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여기 대장이라는 놈도 그렇고 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비겁하게 도망쳐온 주제에 이런말 할 자격 없다는건 잘 알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정보를 빼와야 하니 여기서 조용히 있는게 좋겠습니다.’

정상병은 미안함과 고마움에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래. 고맙다. 조금만 고생해주고. 그래도 너무 부담가지지 마.

몸 건사하는게 제일 중요하니까 무리하지 말고.

절대 들키지 마. 무슨 얘긴지 알겠지?

좋아. 잘지내고 있어. 또 연락주고.”

무전을 끝낸 정상병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빨부대 보다 먼저 수색을 하려면 구조대를 모아 서둘러 출발 준비를 해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 두분 아직 안돌아왔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약사 박규태가 찾아왔다.

흰가운을 대충 걸친채 늘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건 피곤해서가 아니라 그저 원래 그런 표정일 뿐이었다.

“공부하고 있었어? 딴게 아니라 구해야될게 좀있어서 말이야.

사람 약은 아니고 그 돼지랑 닭들한테 놓을 예방 주사.

농장 관리하는 박씨 아저씨가 무조건 필요하다고 난리시거든.

동물약은 비축해 놓은게 없는데 구할 수 있을까?

다음에 또 언제 나간다고 했지?”

“마침 지금 준비할 생각이었어요. 준비만 되면 당장이라도 나가야될 것 같은데요?”

정상병의 대답에 규태는 고심하며 말했다.

“그건 다행이네. 근데 이게 찾기가 쉽지 않을건데...

일단 내가 대충 적어줄테니까 좀 찾아봐.

뭐 축산쪽 전문 동물병원 같은게 있을테니 그쪽 뒤지면 어떻게 되겠지.

지금 예방접종 안해놓으면 건강하게 못자라니까.“

“네. 걱정마세요. 그보다 아저씨 동물쪽도 잘 아시나보네요?”

규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아는건 아니고. 어깨너머로 배운거지 뭐. 동물시험도 하고 했으니.

아무튼 대충 리스트 적어놓을 테니까 요령 것 찾아봐.

정 안되면 나도 같이 움직이지 뭐.”

규태가 돌아가자 정상병은 서둘러 황반장을 찾았다.







“이상하구만. 진작 돌아왔어야 하는데...”

황반장의 말에 정상병 역시 의문을 표했다.

“네. 늦어도 어제 저녁에는 도착했어야 하는데 좀 걱정이네요.

무슨일 생긴건 아니겠죠?”

황반장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긴 어려웠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그냥 좀 느긋하게 움직이는걸수도 있으니 조금만더 기다려 보는게 좋겠어.

그 둘이라면 어지간 해서는 위험할 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 않기로 하세나.

우선 구조대를 준비시키고 기다리기로 하지.”

정상병과 황반장은 구조팀과 물자들을 준비했다.

정상병이 맡은 것은 제 1팀.

주로 젊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구조와 치료, 물자 보급 담당이었다.

황반장이 맡은 것은 제 2팀.

기계에 능숙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술 지원 및 드론들을 이용한 역귀 유인과 수색을 담당했다.

실질적인 구조 자체는 이 두 개팀 운용만으로 가능했지만

진혁과 진아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진아는 역귀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고 진혁은 역귀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이니 당연했다.

그 둘이 있는 것 만으로도 안전성이 대폭 올라가는 것이다.

만약 둘에게 무슨일이 생긴거라면 당장 구조일정은 물론 향후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물론 그런걸 모두 제외 하더라도 황반장은 그간 정든 둘에게 무슨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으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진아와 진혁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억시니를 피해 운좋게 멀쩡한 차 한 대를 발견해 끌고 올수 있었지만

마침 거의 다와서 기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조금 늦게 도착한 것이다.

황반장을 포함한 구조대 모두는 크게 안도하며 둘을 반겼다.

“모습을 보아하니 고생깨나 한 모양이구만.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사실 슬슬 걱정하던 차였거든.

무슨일이 있었던 겐가?”

황반장의 질문에 진아가 나서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진혁이 정상병에게 물었다.

“그래서 약사 아저씨한테 한번 물어볼 생각이야.

이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뭔가 실마리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상병 역시 확신하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일단 같이 가서 한번 이야기 해보도록 하죠.

구조대도 곧 출발해야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진짜 중요한 것 같으니까요.”

구조대에게 준비를 지시한 뒤, 진혁과 진아, 황반장과 정상병 넷은 곧장 규태를 찾아갔다.

우르르 몰려온 그들에게 규태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이야기를 들고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확실히 최근에 병오거나 고생한 사람 없었지.

그러니까 그게 역귀가 병들을 몽땅 흡수해서라고?

원래 그게 역귀의 역할이고?”

약사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귀가 저렇게 강해진건 병이 없어서 일거에요.

쉽게 말해 독한 전염병을 주입시키면 역귀도 그냥 평범하게 상처 입힐 수 있을거란 거죠.

아직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실현이 가능할진 잘 모르겠는데...

만약 가능하다면 진짜 역귀랑 싸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빨 없이. 다른 희생 없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규태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아.

예전에 내가 일했던 곳이나 관련 기관 뒤지면 병원균 샘플이야 구할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함부로 휘두르고 다닐수는 없어.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치명적인 전염병을 맘대로 뿌려댔다간 역귀가 죽기전에 사람들이 죽어나갈거야.

역귀가 죽으면 병이 퍼져나가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자 황반장이 이야기 했다.

“그럼 천연두는 어떤가?

치명적이지만 인류가 완전히 극복한 질병이라고 들었네만 그거면 가능하지 않겠나?”

하지만 규태는 이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어려워요. 옛날에 종식된 병이라 지금 사람들한텐 내성도 없고

백신 자체가 보급이 되질 않아서 위험한건 마찬가지에요.

무엇보다 원체 치명적인 질병이라 병원체 자체가 철저하게 관리되었거든요.

국내에는 아예 없어서 구할 수가 없어요.”

“흠...”

모두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실마리가 잡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은 듯 했다.

그때 정상병이 문득 규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 그러면 혹시... 동물들은 어떨까요?”

모두는 정상병을 바라보았다.

“역귀가 사람시체만 쓰는게 아니잖아요.

살아있는거면 뭐든 다 가져다 쓰니까 동물들 시체도 많이 섞여있잖아요.

그럼 동물 질병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그거라면 사람한테는 안전하니까 사용가능 할 것 같은데.”

“그... 건 될거 같은데”

규태가 처음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잠시 생각한 규태는 곧 다른 이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돼지 콜레라는 다들 알지? 기주 특이성이 강해서 사람한테는 영향이 없어.

구제역도 다들 들어는 봤을테고.

이런식으로 동물들한테는 치명적인데 사람한테는 영향이 거의 없는 질병들.

그런것들 병원체를 가져다가 배양하는거야.

그걸 동물 시체를 가진 역귀한테 접종하면 병에 걸리겠지.

효과가 있다면 죽은 역귀 사체를 감염원으로 쓸 수 있을거야.”

슬슬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럼 그 병을 어디서 구하는게 좋을까요?”

진혁의 물음에 규태가 대답했다.

“모르겠지만 어디서든 구할 수 있을거야.

마침 동물 예방접종 때문에 부탁한 참이었는데 내가 움직여야겠네.

구조대 나간다고 했지? 나도 같이가. 구조활동 겸 보급품 탐색 겸 병원체도 찾지 뭐.

실험할만한 장비도 좀 집어오고.”

만족스런 결과에 황반장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구만. 아직 좋아하긴 이르지만 왠지 느낌이 좋아.

진혁이와 진아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서둘러 출발해야 겠네.

할게 아주 많이 있으니 주저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진혁은 물론 진아 마저 별다른 불평없이 곧바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