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고생이 많네. 그래. 오늘일도 잘 된 듯 하구만.”

김갑수 이장은 돌아온 진혁에게 말했다.

처음 구조대를 꾸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진혁은 최소한의 인원을 가지고 최대의 효율을 내고 있었다.

그 덕에 사람들을 구조함은 물론, 상혁의 이빨부대가 성장하는 것 역시 적절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사실 오늘은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독특한 역귀를 만나서 조금 위험했죠.”

진혁은 이장에게 짐승역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음... 골치 아프구만. 짐승으로 만들어진 역귀만 해도 까다로운데 두억시니로 변하는 것들도 늘고 있는 모양이야.”

“네. 다행히 이번엔 구조대가 잘 움직여준 덕에 큰 무리 없이 빠져나오긴 했지만, 항상 운이 좋지는 않을 겁니다.”

이장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구조대가 역귀를 잘 상대해오고 있긴 하지만 진혁이 가진 달빛 하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역귀를 상대할 방법을 찾는 것도 조금 더 신경 써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빨이 아니라 뭔가 방법은 분명히 있을 텐데.... ”

“쉽지는 않을걸세.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거로 하지.

그보다 이제 두 번째 마을도 거의 준비가 끝났겠다,

상혁이 쪽이 구조대가 다녀간 곳을 다 둘러보고 다른 곳으로 가려면

조금 시간이 있을 테니 당분간은 좀 편히 쉬는 게 어떤가?

미뤄둔 일도 처리하고 말이야.”

진혁은 조금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와의 결혼이 기정사실화된 이후부터 얼굴 마주치는 사람마다 들었던 말이 언제 식을 올리냐는 것이었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니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자

역시나 상우를 중심으로 한 아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삼촌! 민옥이모가 삼촌 결혼할 때 고깃국 끓여 준대요!”

“수지 언니랑 나랑 들러리 할 때 머리에 꽃장식 해도 돼요?”

신나서 떠드는 아이들을 일일이 다 상대해준 진혁은 문득 떠올렸다.

“아... 반지 아직 준비 못 했네.”

호기롭게 마을을 떠나려 할 때만 해도 어디서든 반지 하나만은 구하겠다 다짐했지만

일이 미묘하게 되어서 같이 움직이게 되었고,

지난 석 달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반지를 찾아볼 겨를이 안 났던 것이다.

“뭣보다 직접 골라야겠다고 했지...”

다른 건 몰라도 미적 감각은 진아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진혁이었다.

결국 둘이 같이 안전한 도시를 둘러보며 반지를 찾아와야 할 테지만

반지 하나 구하자고 이 시기에 둘이 마을 밖을 돌아다니기에는 영 꺼림직했다.

다행히 그 걱정은 정상병이 해결해 주었다.

“그런 거라면 마침 좋은 게 있어요. 이번에 구조된 사람들 두 번째 마을로 이송해야 하거든요.

물자들도 좀 전달해야 하니 겸사겸사요.

버스 한 대만 가니까 전동차로 안내해주시고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두 분이 인솔해주시면 안전하기도 훨씬 안전하고 근처에 큰도시도 있으니 살짝 들렀다 오시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두 번째 마을은 안전상의 이유로 지금 이곳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제법 큰 도시들도 지날 테니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반장님이나 구조팀은 여기서 일정이 좀 있어서 안 그래도 부탁드릴 생각이었어요.

역귀들이야 대략 정리가 되어서 큰 위협은 없을 테니 걱정 없겠죠.”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로 딱 떨어지네.”

진혁은 안도했다.

쉬지도 못하고 다시 나가야 하는 건 좀 번거롭지만, 일 자체가 힘들지 않기도 하고

또 오는 길엔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이장님이 그러시는데 이제 슬슬 마을 이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하시네요.

이제 두 번째 거주지도 생겼으니 그럴싸한 이름 정도는 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생각해 보시고 뭐 좋은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잠시 이름 몇 개를 떠올려본 진혁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작명 역시 진혁의 특기는 아니었다.

진아나 아이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준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이는데요..”

진수의 말에 상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역귀도 거의 없는 곳이었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마치 전부 피난이라도 간 것처럼.

심지어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주했던 흔적이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다만 한 명이라도 찾아.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게 뭔가가 있어.

내가 했던 약속 기억하지?

네 와이프 될 사람 찾는다 생각하고 무슨일이 있어도 찾아.”

그말에 진수는 열정을 불태우며 이빨부대를 독촉했다.

“자자. 흩어져서 찾아! 아주 샅샅이 뒤지란 말이야. 개미 새끼 하나 놓치지 말고.

누구든 찾으면 곧장 나한테 와서 얘기해. 알겠지?

알아들었으면 움직여!”

수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생존자 그룹이 건물 안에 숨어있습니다.”

가장 먼저 달려나간 것은 역시나 진수였다.

하지만 마음 급한 진수를 놀리기라도 하듯 생존자 그룹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몇 명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건물 입구를 단단히 막아놓은 채 숨어있었다.

운 좋게 창문 밖을 엿보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빨부대 역시 놓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우리는 이빨부대다! 역귀들을 도륙 내고 새 시대를 여는 구원자들이지!

문을 열어라. 안전하게 지켜주고 맑은 물과 먹을 걸 제공하겠다!

그러니 어서 문을 열고 우리를 맞이해라!”

삼류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지르는 진수를 보며 상혁은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건물 안에서 대답은 없었다.

물론 진수 역시 곧바로 문이 열릴거라 생각하지는 않은 듯 곧바로 다음 대안을 내놓았다.

“부숴.”

그 한마디에 단단한 쇳덩어리를 든 이빨부대가 앞으로 나섰다.

쇠지레나 소방용 해머 따위들이 달라붙자 얼마 안가 문은 완전히 부서졌다.

진수는 이빨부대를 데리고 안으로 돌입했다.

“여기 대장 누구야? 나와!”

역시나 신경 거슬리는 소리를 해대는 진수의 눈은 다급하게 안을 훑어대고 있었다.

“빨리 정리하고 책임자 먼저 찾아와. 여자는 나중이야.”

상혁의 말에 건물 안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전부 열두 명입니다.”

생존자들을 가운데로 몰아 앉혀 놓고는 이빨부대가 주변을 빙 둘러싼 것이 꼭 인질을 잡은 은행강도 꼴이었다.

상혁은 그중 대표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걱정 마. 좀 거칠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니까.

우리가 굳이 이렇게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온 이유는 두가지야.

첫 번째로 인원 확보.

나한텐 역귀들을 없앨 방법이 있어.

역귀들을 전부 죽이고 다시 옛날처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게 내 목표지.

그래서 사람들이 필요하거든. 싸울사람. 도울사람. 그리고 미래사회 일원까지.

그러니 지원자를 받아야겠어.

자세한 얘기는 저기 말 많은 녀석이 실컷 해줄테니 천천히 들어보고.

지금 내 관심은 이 두 번째 이유인데.

이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없는 이유가 뭘까?

역귀도 별로 없는 여기에 생존자가 여기뿐이란건 말이 안돼.

돌아보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귀신같이 증발한 곳도 있었어.

어쩌면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진수는 당연하다는 듯 칼을 빼어 들고는 가까이 있던 사람 한명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남자의 입이 열렸다.

“생존자들을 모으는 녀석들이 왔었어.

솔직히 우린 믿을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없어서 계속 숨어있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녀석들이 이유일거야.

제법 규모가 있었어. 작은 버스까지 몰고다닐 정도니까.”

상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발앞서 움직이는 그룹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아봐야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내 가려운 곳을 긁어줬으니 더 모질게 대할 수는 없겠지.

놔줘. 그리고 설명해줘. 이번엔 아주 정중하게.”

진수는 칼을 거두고는 목을 가다듬고 이제는 자다가도 줄줄 외울 수 있는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

당신들은 이제 두가지 선택권이 생겼어.

첫 번째로 우리 이빨부대에 합류한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합류하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여기서 산다.

우리랑 합류하기만 하면 아주 행복할거야.

이빨부대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던가.

아이를 낳아 미래사회에 일조하고 호의호식 하던가 하면서.

그런데 우리랑 합류 안하면?

글쎄 지금까지는 어찌 잘 살았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힘들걸...

얘들아 전부 뒤져서 식량 전부 옮겨. 쓸만한것도 다 챙기고.

아 혹시 달달한거 있으면 가져와. 소리 질렀더니 당 떨어진다.”

남자는 다급히 소리쳤다.

“아니 지금껏 우리가 모아온 식량을 전부 가져가면 우리는 어쩌라는 거요?”

진수는 아랑곳 않고 대답했다.

“어쩌긴 뭘 어째. 다시 모으든가 그냥 좀 굶든가 해야지.

그러니까 선택을 잘해봐. 지금 결정하기 힘들면 한 삼일쯤 빈속으로 고민해 보시던가.

어차피 우리 당분간 여기 있을거니까. 한번 다 같이 머리 맞대고 생각해보시고 말해주셔.”

이를 악무는 남자에게서 눈을 뗀 진수는 찬찬히 생존자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남자였지만 여자도 세명이 있었다.

“봅시다.... 한명은 너무 애라 좀 그렇고... 한명은 보자.... 아 유부녀신가보네.

그래 두분이 행복하시고. 아이고 마침 또 이렇게 이쁜 처자가 있네.”

진수는 함박웃음을 지어보이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이십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겁을 먹어 잔뜩 움츠러 들어있었지만 진수는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진수가 상혁을 돌아보자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은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네.

이래뵈도 꽤나 중책을 맡고 있는 녀석인데 세상이 이렇다보니 아직 짝을 못찾았거든.

보다시피 달달한 말로 여자 꼬시는 재주는 없으니 내가 좀 나서야겠어.

로맨틱한걸 원했다면 미안하지만 이해 좀 해줘.

자 너에게 선택권을 줄게.

저 녀석 신부가 되어준다면 내가 여왕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대접해 주지.

원하는건 뭐든 줄 수 있는 힘이 나한테는 있으니까.

생존하겠답시고 이런 조그만한 건물에 갇혀지내면서 힘들었던게 있었을테지.

식량 문제. 잠자리. 씻는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역귀들 때문에 맘편히 있지도 못했을거야.

그런데 어때? 저기 이빨부대 보이지?

너희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역귀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무장집단이야.

저녀석들이 네 명령을 듣는다면 어때?

상상도 못했던 권력을 가지게 되는거지.”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떨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혁은 아랑곳 않고 계속 얘기했다.

“뭐 괜찮아. 싫을 수 있어. 거절할 수 있지.

다만 알아둬야 할게 순정이 뭉개진 남자는 꽤나 유치해지는 법이거든.

난 지원자만 받아주고 나머지는 곱게 보내주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녀석이 부하들에게 투정 섞인 명령을 할지도 모르지.

남은 녀석들 전부 역귀 밥으로 준다던가

아니면 산채로 불에 태워버리라던가

그냥 클래식하게 전부 목을 칼로 그어버리라 할 수도 있지.

뭐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 그렇단 거니 또 너무 맘쓰지는 말고.

자, 이제 선택을 해줘야 겠어.

첫 번째. 한 남자의 순정을 짓밟고 심술난 녀석의 투정을 받는다.

두 번째. 저 녀석의 신부가 돼서 여왕으로 군림한다.

어때?”

주변에서 반발이 일어났지만 이빨부대에 의해 금세 무력 제압 당했다.

진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덜덜 떨면서 주저하다가 천천히 진수의 손을 잡았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사모님이시다. 어디 이쁜 꽃이라도 있으면 가져와.

내 사랑을 받아준 여자한테 선물 하나 없어서 쓰나.”

상혁은 몸을 돌려 책임자인 남자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올바른 선택을 해줬으면 좋겠어.”

모두는 망연한 얼굴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냥 길영마을로 하면 안돼?

그대로 쓰기 좀 그러면 뉴욕처럼 신길영 마을!

아 이러니까 어감이 안좋은데....”

다른 마을로 가는 버스를 무사히 호위하고 전동차를 탄채 돌아오는 진혁과 진아 였다.

마을 이름 관련해서 슬쩍 이야기를 했더니 진아가 이런저런 의견을 내고 있는 것이다.

“난 그냥 거주지1, 거주지2. 이렇게 불러도 그만이라고 생각해.”

진아는 기겁을 하며 반대했다.

“무슨 감옥도 아니고 그게 뭐야.

나중에 여기가 엄청 큰 도시가 되고 또 수도가 되고 그럴수 있는건데

이름을 잘 지어놔야 나중에 좋을거 아니야.”

진아 생각을 이해 못하는것도 아니었지만 역시 진혁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급한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보다 우선 우리 원래 목적부터 달성해야지.

아직 시간여유 있으니까 천천히 한번 볼까?”

진혁은 도심지 쪽으로 전동차를 몰았다.

이 근방은 역귀들이 전혀 없는걸 확인 했기에 가벼운 마음이었다.

“사람들이 다 털어가서 이쁜게 하나도 안남아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마음에 드는걸로 골라야 결혼식 늦은게 덜 억울할거 아니야.”

진혁은 가만히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훔친다면 귀중품이 먼저일까

아니면 식량과 실용품이 먼저일까?

진혁의 경우 지금껏 혼자 돌아다니면서 가게 금고를 턴다거나 돈이나 금품을 챙긴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중을 위해 되는대로 쓸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가봐야지. 나같으면 그런건 가급적 안건드렸을거야.

고스란히 있기만 하면 그중에서 제일 예쁜걸로 골라오자.”

진아는 기대감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비싸고 고급진 물건이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별볼일없는 반지라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진혁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장난끼가 발동했다.

때문에 진혁이 제법 멀쩡해 보이는 금은방을 찾아 차를 세웠을 때, 팔짱을 낀채 내리지 않았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내가 직접 고르는건 왠지 자존심 상해.

그러니까 오빠가 알아서 골라와! 마음에 드는걸 찾아올때까지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고.

알겠지? 앞으로 바가지 안긁히고 잘 지내려면 신중하게 골라야 할걸?”

진아의 말의 진혁은 자기도 모르게 잔뜩 긴장했다.

진아 성격상 저건 분명 농담일 테지만 해준게 없는 진혁 입장에서는 마냥 웃어넘기기도 껄끄러웠다.

진아가 만족할 만큼의 당혹스런 표정을 보여준 진혁은 역귀들을 상대할 때 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속으로 웃음을 지은 진아는 문득 기대감을 가졌다.

저정도의 각오를 보여줄 남자라면 이런 세상에서도 믿고 의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점지해 주셨나봐. 손녀사위를 아주 거창한 남자로 정하신거지.”

웃으며 중얼거린 진아는 느긋한 마음으로 전동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아마도 시간이 꽤 걸릴테니 편히 쉬면서 기다릴 생각에서였다.

역시 진아의 예상대로 진혁은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아가 슬슬 지루함을 느끼려던 그때, 진아는 얼굴을 굳혔다.

뭔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 마리 뿐이었지만 이건 심상치 않다.

두억시니.

두억시니임이 분명했지만 이건 예전 제물 마을에서 봤던 그것과도 차원이 달랐다.

훨씬더 거대하고 위험한 느낌.

분명 안전한 곳일 텐데 어떻게 된것일까?

진아가 다급히 진혁을 부르러 하자 마침 진혁이 가게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두억시니! 이리로 오고 있어!”

진아의 다급한 외침에 진혁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곧바로 전동차에 올랐다.

“어느쪽이야?”

진아는 마을가는 방향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괜찮아. 따돌릴 수 있을거야. 바로 출발할게 꽉잡아!”

전동차는 금세 그곳을 벗어나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진아는 그런 진혁을 말렸다.

“잠깐만! 우리 그냥 도망갈게 아니라 조금 기다려보자.”

의외의 말에 진혁은 당황했다.

“기다리자니? 지금 지원도 없어서 많이 위험할텐데 왜?”

“그때 이후로 두억시니는 본적 없잖아.

우리 두억시니한테서 뭔가 정보를 얻어보기로 했던거 기억안나?

보통이 아니야. 분명 엄청 오래살았을거고 아는것도 많았을거야.

그러니까 내가 두억시니 생각 들을 수 있을 거리 까지만 기다려 보자.

방법 필요하다면서? 안그래도 이제 두억시니 일부러라도 찾아다녀야 하나 생각했는데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아.”

진혁은 고민했다.

지금 상황에서 두억시니에게 잘못걸렸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저번 제물마을에서도 두억시니를 상대로 살아난건 운과 상황이 따라줘서 였고

실상 실질적으로 두억시니를 죽인건 상혁의 무기였다.

“얼마나 가까워야 들을 수 있겠어?”

“아마도 20미터 쯤. 어쩌면 더 가까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래.”

진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보통의 역귀가 20미터를 달려오는 시간이면 전동차는 대략 그 두배 이상을 이동할 수 있다.

물론 얼마전 본 짐승역귀의 사례도 있고 해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도망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되었다.

안들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들킨다 해도 어느정도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좋아. 대신 너무 무리는 하지 말자. 위험할 것 같으면 전부 포기 하고 도망치는거야. 알겠지?”

진혁은 길 한쪽 수풀속에 전동차를 세워 숨겼다.

언제 출발해도 문제가 없게 준비한 상태였다.

“내가 신호하면 바로 출발해. 알아낼 만큼 알아내던가 우리가 들켰으면 신호줄게.”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침착하게 기다렸다.

두억시니는 느린 움직임으로 둘이 있는 곳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가게 해주지 그래?”

최대위는 점잖게 말했지만, 정상병은 단칼에 거절했다.

“대위님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지금도 침착한 척 하고 계시지만 보나마나 뭔가 사고칠 생각 하고 계시겠죠.

처음 대위님 봤을때는 참 올곧은 사람이다 싶었는데

지금은 그 정신나간 노인네나 대위님이나 똑같이 위험해 보여요.”

최대위를 제압해 거주지로 돌아온 것 까지는 좋았지만

역귀에 대한 분노 만으로 폭주하는 최대위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덕에 정상병이 머무는 곳에 임시 구치소를 만들어 가둬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생으로 가둬두고 있는건가?

날 악당취급 하는 주제에 하는 짓은 참 추잡하구만.”

정상병은 웃었다.

“비아냥 거리셔도 할 수 없어요.

뭐 먹을 것도 잘 넣어드리고 책이라든가 놀거리도 많이 구해 드릴테니까

그냥 근신한다 생각하시고 가만히 계세요.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아직 불안해 하니까.

나중에 다들 괜찮다 생각하면 그때 풀어드릴게요.”

“이러고 있을 시간에도 역귀들이 사람들을 공격할거야.

그냥 둬서는 안돼. 역귀는 무조건 전부 박멸한다.

그게 목표가 되야지.

지금처럼 구출대 놀이나 하고 있을게 아니라 전부 무기를 들어야 한단 말이지.

다시 날 믿고 내 말에 따라. 역귀들을 전부 찢어 발겨줄테니까.”

정상병은 한숨을 쉬었다.

“이빨은 이제 다시는 안쓸거에요. 앞으로도 절대 쓸일이 없어야 되요.

그런거 없어도 사람들 구하는덴 전혀 문제 없으니까.

언젠가는 역귀들을 상대해야 할거고, 아직 마땅한 방법이 없는건 맞지만

뭐 언젠간 상대할 수 있겠죠.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곧 뭔가 방법이 생길거에요.”

“너무 물러. 그따위 생각만 가지고 있다간 전부 죽어버릴거야.”

최대위가 소리쳤지만 정상병은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용없어요. 지금 전부 다 잘되고 있고 앞으로도 잘 될거에요.

전 일좀 하러 가겠습니다. 이따 저녁때 다시 올게요.”

정상병이 향한곳은 병원역할을 하고 있는 마을 약국이었다.

구조활동이 없는 날엔 주로 약국에서 약사의 일을 도우며 이것저것 배워두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하지만 정상병을 맞아준 것은 약사가 아니라 상우였다.

“안녕하세요!”

“뭐야 약사 아저씨는 어디가고 너혼자 있어?”

상우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겠어요. 어디 가셨나봐요. 전 민옥이모가 약 좀 받아오래서 심부름 온거에요.”

“약? 이모님 어디 아프셔?”

“아뇨. 소독약 다 떨어졌다고 받아오래요.

윤성이 상처는 이제 다 나아서 필요없다 싶었는데

수지랑 예지가 돌아가면서 한번씩 무릎이 까져 오네요.”

정상병은 알만하다는 듯 선반에서 소독약 한통을 꺼내었다.

“난 또 이모님 감기라도 오셨나 했네.

감기약 같은건 잔뜩 쌓여있으니 너도 애들도 괜히 병키우지 말고 바로 얘기해.”

상우는 소독약을 받아들고는 약국을 나서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수지가 예전엔 잔병치레도 참 많이 하고 감기도 자주오고 그랬는데 요샌 기침한번 안하네요.

오히려 너무 씩씩하고 건강해서 문제라니까요.

약 꺼내 주셔서 감사해요. 이따 밥시간에 늦지말고 오세요.

감자조림 새로 했는데 엄청 맛있어요.”

상우를 보낸 정상병은 선반에 채워진 약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감기부터 시작해서 피부병이나 각종 감염병 예방약을 구비해 놓고있었지만

정작 사용된적은 없었다.

소독약이나 붕대.

파스와 진통제는 지속적으로 소비되는걸 생각하면 좀 이상한 부분이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면역력이 높아져 내병성이 강해진 것일까?

병 치료보다는 상처치료 전문인 정상병에겐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공부 좀 해놔야지. 나중에 큰병 생긴 사람 왔을 때 아무것도 못하면 안되잖아.”

정상병은 다시금 공부의지를 다잡았다.







역귀의 고약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올때쯤.

진아는 두억시니의 머릿속을 읽어낼 수 있었다.

“됐다. 잠깐 집중 좀 할게.”

진아는 숨쉬는 것 마저 조심하며 두억시니 몰래 복잡한 이미지들을 정리 해 내고 있었다.

마을... 경비대... 역귀... 희생자...

무기... 피... 아이들...

이 두억시니 역시 인간이었다가 두억시니로 변하여 동굴에 있던 경우였다.

다만 말단 경비원이었던 이전과 달리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수많은 이미지들이 시간순서와 관계없이 마구 몰려들다 보니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쉽지않았다.

무엇보다 두억시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진혁은 긴장한 채 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냄새도 진해졌고 깊이 있는 두억시니의 소리 역시 점점 커지고 있었다.

10미터 안으로 들어온다면 도망치기 쉽지 않을게 분명했다.

별도 신호가 없어도 위험하다 싶으면 출발해야겠다 마음먹은 진혁은 가만히 전동차를 출발 시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멀지 않은 곳에서 역귀의 형체가 나타났다.

예전 제물 마을에서 봤던 역귀보다도 훨씬 거대한데다

마구잡이식으로 시체를 이어붙인 모습과는 달리 제법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역귀의 기괴함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진혁은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12미터. 다행히 전동차쪽을 향해 똑바로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것임은 틀림 없었다.

진혁이 조금더 가까이오면 곧바로 도망치겠다 마음먹은 그순간,

“크아아아아아!!!!”

두억시니는 깊은 비명소리와 함께 정확히 전동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자! 들켰어!”

진아의 외침이 터져나오기 전에 진혁은 이미 전동차를 출발시켰다.

생각보다 역귀의 움직임이 빨랐지만 그래도 아직은 전동차보다 느리다.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진아는 그와중에도 읽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뭔가 있어. 분명 중요한게 있어.’

그 순간, 진아의 머릿속으로 두억시니의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안돼 피해!!”

진아의 외침에 진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오토바이 한 대가 공중을 날아 전동차를 덮쳐오고 있었다.

다행히 진아가 경고한 탓에 간신히 피해내긴 했지만

두억시니는 쉴 생각이 없어보였다.

만만치 않은 속도로 달려오면서 눈앞에 보이는 무엇이든 집어들어 던져대고 있었다.

그덕에 진혁은 쉴틈없이 뒤를 돌아보며 날아오는 돌덩이나 토막난 가로수 따위를 피해야 했다.

진아는 열심히 두억시니를 읽어내어 진혁에게 경고를 해주며 한편으로는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을 뒤지며 마음졸이고 있던 그때,

“아!! 가로등!!!”

진아의 다급한 외침에 진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두억시니가 달리던 기세 그대로 옆에 있던 가로등 하나를 통째로 꺾어 들고는

진혁 일행을 겨냥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침 이제 막 강물 위에 놓여진 다리로 접어들어 길도 좁아진 상태였다.

곧 공중으로 던져진 가로등의 궤적을 보니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진혁은 다급히 다리 난간을 바라보았다.

난간은 튼튼해 보였지만 그리 높지는 않았다.

진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핸들을 강하게 틀었다.

“꽉 붙잡아!”

진혁은 진아를 안아들어서는 그대로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전동차 후미에 가로등이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무사히 강물속에 떨어진 진혁은 수면위로 얼굴을 빼내자마자 진아를 찾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곳에 진아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알아내진 못했어. 분명 뭔가 있는데...

진아는 걱정스런 얼굴로 다리위를 올려다 보았다.

진혁 역시 다리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괜찮아. 이제 신경쓰지마. 그보다 역귀도... 수영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두억시니 자기도 잘 모르는 것 같아.”

“크아아아악!!!”

다리위에 있던 두억시니는 강물속에 있는 둘을 내려다 보며 비명을 질렀다.

“뛰어들거야! 빨리!”

두억시니 의도를 읽은 진아의 외침에 둘은 재빨리 다리로부터 멀리 헤엄치기 시작했다.

곧 뒤에서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역귀가 물에 빠져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가!”

진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두억시니는 자유롭게 수영하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죽지 않는 역귀였으니 숨이 가쁠 걱정을 할 필요 없었고

그랬기에 강바닥에서도 큰 문제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강의 깊이는 수면에 떠 있는 둘을 위협할 만큼 얕았다.

두억시니는 물속을 헤집으며 위쪽에 보이는 두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