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계절이다.

외투의 겉옷을 단단히 여미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본다. 가을비가 멎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쌀쌀함과 축축함이 공존함에도 사람들은 공원을 찾았다.

나들이를 나온 가족, 연을 날리는 아이,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피지만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품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담뱃갑을 찾았지만 잡히는 건 종이쪼가리 뿐이다.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나이가 든다는 건 조금씩 잊어버리는 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일찍 오셨네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는 없던 여자가 벤치에 앉아있다. 희뿌연 머리가 드문드문 섞인 검은 머리를 뒤로 둥글게 묶은 여자였다.

예쁜 얼굴…이라기보다는 젊을 적 인기가 많았을 얼굴이었다. 숨길 수 없는 나이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쉽게 보기 힘든 헤이즐 색의 눈동자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가 입은 말쑥한 회색 원피스는 요새 사람들이 입는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어, 편하게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뭐, 그녀의 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존재에게 외모는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여자는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절 알고 계신가요? 놀랍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습하고 무더운 풀냄새, 화약과 쇠, 피의 냄새가 옅게 베어났다.

“당신을 본 적이 있소. 젊었을 적 내가 두 다리로 밀림을 헤치고 손에는 소총을 들고 있던 때.”

“아, 베트남 참전용사시군요.”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당신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라 인사했다. 그 장면이 조금 우스웠다. 지금 이곳, 이 상황에서 나의 전쟁경험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죽음 앞에는 모두가 스러진다. 베트콩도, 아군도, 진영도, 가치도.

“그 때는 간호사의 차림으로 나타났었지.”

그리 말하며 조용히 과거를 곱씹었다.

“다른 간호사들과는 다르게 말수가 없었던 당신은 우리에게 눈인사만 건넸다오.”

그녀는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눈인사를 건넸지만, 병동의 약 삼분의 일 정도만이 그녀에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 당시 느낀 의아함에 건넨 인사를 되돌려줄 기회를 놓쳤고, 이는 후에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 후 눈인사를 받았던 소대원들과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곁을 떠났다. 사인은 다양했다. 심장마비, 말라리아, 감염 등등. 가장 늦게 죽은 소대원은 완전히 회복한 후,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가 게릴라와의 총격 중 사망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 으스스한 빛이 감도는 랜턴을 든 그녀를 따라다니던 스산하고 감미로운 노래를.

Child my little child, why are you on the run?

-아이야, 내 작은 아이야, 왜 그리 급히 도망가느냐?

Time has come and shall be done, fussing is no fun.

-때가 되었고 또 그리 될 것이니, 투정은 좋지 않단다.

Time to tuck you in a sleep, with a wooden sheet.

-잠에 들 시간이야. 나무로 된 시트 위.

down goes the coffin lid, it’s time to count the sheep.

-관 뚜껑이 닫히니, 이제 양을 셀 시간이야.

잔잔히 흥얼거리며 누워있는 병사들을 찬찬히 살피다 간혹, 작은 입맞춤 소리가 들리면 그 다음날 차게 식은 전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걸 지켜보았다.

함께 풀과 벌레가 무성한 밀림지대를 통과하다, 게릴라의 총격을 받게 되었을 때.

손이 하얘져라 소총을 움켜쥔 병사 뒤에 등허리를 감싸고 안으며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던 그녀를.

보았다.

그 지겨운 초록 지옥에서 돌아왔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다른 전우들에 비하면 운이 좋았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꺼져가던 인간성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다시 그 시절을 상기하자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제 오랜 시간이 되었고, 이제 노쇠한 몸이 되었으니.

죽음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데리러 온 것이오?”

“네.”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행동에 깊은 한숨을 절로 나왔다.

손이 떨리고 땀이 흐른다. 남의 죽음을 아무리 보았다 한들, 죽음 그 너머를 보지 못했기에.

미지에 대한 막역한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한다.

“가기 전에, 질문 몇 가지만 해도 되겠소?”

죽음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은 뒤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맞소?”

죽음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소.”

그리 말하며 두 손을 내려다본다. 앙상하고, 생명력 없이 질기고 미끄러진 피부 위로 도드라진 혈관들이 잔가지처럼 뻗어있는 손을.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던가.

위장한 베트콩일지, 아니면 민간인일지 수천 번 고민하다 충동적으로 당긴 방아쇠에 쓰러진 아이와 여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품 안에서 떨어졌어야 할 불발된 수류탄이나 총 대신.

강보에 쌓인 핏덩이를 보았을 때.

두 손을 잘라버리고 두 눈을 파내고 싶었던 충동이 어찌나 많았던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삶이었고, 응당 그리 될 것이었다.

“지은 죄가 많소이다.”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죽음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죽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동료, 가족들의 핏발선 눈. 그 더운 밀림 열기 속에서, 몸이 춥다고 말하며 피 흘리며 죽어간 전우들의 이야기를.

한참의 고해성사를 마친 이후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죽음에게 질문했다.

“아이, 딸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사과를 할 수 있겠소?”

이 질문에 죽음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오늘 처음으로 입에 미소가 걸렸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맨 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던 탓에.

매일같이 술을 달고 살았고, 분노와 증오 속에 갇혀 주위를 볼 겨를이 없었던 탓에.

딸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지금껏 지은 죄 중 아이에게 지은 죄가 단연코 가장 컸으니. 용서를 받지는 못할지언정 사과를 해야 했다.

“우리 둘의 대화가 끝나면, 당신이 아이에게 사과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고맙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하자 죽음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째 보기 좋은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부드러운 미소.

죽음은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약병을 꺼냈다.

손가락 두 마디도 되지 않는 크기, 은빛 액체가 이리저리 살랑이고 있는 약병을 주며.

“마셔요.”

말없이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뽑는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쉽게 열린 약병의 주둥이 틈으로, 아찔할 정도로 산뜻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카시아, 산딸기, 자욱하고 싱그러운 들풀,

입가까지 약병을 올린 뒤, 마지막으로 죽음을 쳐다본다.

이상하게 그렇게 낯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불가항력의 존재 이전에, 어딘가 알 수 없는 친근함이 느껴졌다.

“…고맙소.”

천천히 입 안에 병을 기울였고, 따듯하면서도 상쾌한 은빛 액체가 입안을 타고 흘렀다. 액체는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무겁다.

점차 의식이 흐려지는 저편으로, 죽음의 말이 들렸다.

“지옥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아요.”

달콤하면서도 안정되는 목소리로.

-당신은 이미 그곳에 있으니까.

뭐?

-이번이 스물아홉 번째 대화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오?

몸을 움직이려 해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신체는 의식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저 죽음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울려 퍼진다.

-스스로가 지옥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그게 당신에게 내려진 형벌이에요.

몸이 가라앉는다. 의지는 산산이 쪼개어지고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어지럽다.

어지러워.

어지…러….



중년의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리고 있다.

추운 가을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뛰어야 했다. 요양원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병원으로 전해들은 목격담대로 공원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백발에 검버섯이 핀, 등이 굽은 노인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마치 흔들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노인.

여자는 노인을 보는 순간 안도감과 짙은 분노가 차오른다.

“아버지.”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노인은 반응하지 않는다.

“아버지!”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주름이 깊게 새겨진 눈꺼풀 틈으로, 옛날에는 총명이 빛났을 헤이즐 색 눈동자가 보였다. 노인의 입이 벌어지고, 몇 개 없는 이빨을 보였다.

“…으?”

여자는 천천히 다가간다. 그가 죽도록 미웠다. 증오스럽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이후 자신과 어머니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던 그가 싫었다. 밤만 되면 알코올에 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가 혐오스러웠다.

눈가에 눈물이 왈칵 차오르고,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흘러내린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가을바람에 마비되었던 뺨을 뜨겁게 만든다.

“왜…, 또 왜 여기 계셔요.”

도대체 어떻게 요양원 수많은 눈길을 피해, 왜 이 공원으로 향하는지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요양원에서 전화가 올까 전전긍긍하는 매일 매일이 지겨워 죽을 것 같았다.

“….”

노인은 이전과 다름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어진 입 틈으로 한 줄기의 침이 주륵- 흐른다.

그 모습을 보자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 오른다.

“…행복해요?”

그녀의 인생에 있어 공포스러운 악몽이자 끔찍한 흉터, 어린 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그가 이토록 초라하게 전락한 꼴이라니.

“비겁한 개새끼.”

여자는 저주를 퍼붓는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편한 형벌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모두 잊어버리고 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간 그가.

겁쟁이면서 치졸한 사람이었다.

이토록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복받쳐 오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흘렸다. 길 잃은 분노와 원망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어째서 악인은 그들의 행위에 비해 편안한 끝을 맞이하는가.

한참을 흐느끼는 그녀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얹힌다.

미약한 온기를 가진, 쇠잔한 손바닥이다.

“…미안…해. …미안….”

어눌한 목소리로 반복해 말하며, 애써 그녀의 빛바랜 검은 머리를 쓰다듬는 서툰 손길.

여자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하는 이 사과가 자신을 인지하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노인의 삶 속, 어떤 과거의 망령을 향한 것인지.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다시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녀와 같은 헤이즐 색 눈동자였지만, 아무리 깊게 들여다본다 한 들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여자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한껏 그녀가 가졌던 분노가 우스울 정도였다. 이제 아이나 다름없는 노인에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한 건지.

“…집에 가요 아버지.”

여자는 손을 내밀었고, 노인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 천천히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노인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우며, 조심히 외투 안에 있는 접힌 쪽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노인의 이름과 나이, 혈액형과 주소, 그녀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쪽지는 다행히 상한 곳이 없었다.

여자는 다시 종이를 그의 외투 안에 넣은 뒤, 느린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