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술집 사이의 비좁은 골목, 따가운 행인의 시선과 양심의 가책을 피해 만든 암묵적인 흡연구역에서.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담배곽을 꺼내 몇 번 손바닥에 쳐준 뒤, 한 개비를 입에물고 라이터를 찾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챙겼던 것 같은데.

한숨을 쉬며 옆에 담배를 피시던 노인에게 다가가 담뱃불을 빌렸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건넸고, 나는 작게 목례를 하며 라이터를 받았다.

“악마에 대해 아는가?”

노인이 건넨 한 마디가. 사이비들의 전도보다도 당혹스러운 스몰 토크의 시작이었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더하려 분주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담뱃불을 빌린 대가로는 조금 버거운 대화주제인데.

조용히 라이터를 돌려주며 못들은 척 하려 했으나,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태연한 척 연기했어야 하는데. 누굴 탓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연거푸 잔을 비워냈던 나를 탓해야지.

피부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의 집요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한껏 들이마신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입에서 빠져나온 연기는 곧 빗속으로 흩어졌고,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말쑥한 차림의 노년 남성이었다. 걸친 옷은 질 좋은 양복이었고, 손목에 걸린 시계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머리와 굽고 앙상한 튀어나온 몸은 역력한 세월의 흔적이었지만.

눈빛에는 알 수 없는 형형함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성공한 노년의 사업가. 그의 첫 인상이었다. 누구보다 냉철하고, 현실적일 것 같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악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 우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어르신은 악마에 대해 잘 아십니까?”

나의 질문에 그는 다 타오른 담배를 녹슨 깡통에 던진 후 품에서 담배 곽을 꺼내 손바닥에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 너무 잘 알지.”

“아, 그러십니까?”

조금 우울한 기분과 얼큰하게 취한 두뇌는 평소라면 넘겼을 헛소리도 주의 깊게 듣게 만든다. 노인은 새로이 불을 붙인 담배를 깊게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야기를 해 주겠네. 한 번 들어보겠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손에 든 담배는 타들어가고 있었고, 아직 왁자한 술집 안에서는 즐거운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굳이 돌아가서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나?”

“네?”

하마터면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살짝 술이 깬 상태로 노인을 바라보자 그는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놀라지 말게. 예비신부와 신랑이 그렇게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 하는데, 오히려 모르는 게 힘들 정도인데.”

놀라움은 곧 창피와 찝찝한 죄책감이 되었다. 곧 결혼 소식을 알리는 두 친구를 진심으로 축복해주지 못하는 내가 못마땅한 건 사실이니까.

“잠시 둘은 내버려 두고, 내 이야기나 듣다가 돌아감세.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테니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악마들이 숫자 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나?”

삼? 고개를 갸웃한다. 악마의 숫자라고 하면 세자리 수의 6아닌가. 나의 표정에서 의아함을 읽은 노인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보통 삼은 길한 숫자라고들 하지. 삼위일체, 세 명의 동방박사, 아기 예수를 위한 황금, 몰약, 유황, 사흘 뒤의 부활…등등. 하지만 말일세, 악마들도 삼을 매우 좋아하네. 지니의 세 가지 소원, 원숭이의 손이 들어주는 세 가지 소원.”

노인은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숫자 삼을 더럽히는 걸 즐긴다고 해야겠지. 세 가지의 소원으로 영혼을 가져가는 것, 그것이 악마들의 좋아하는 것일세.”

나는 잠자코 담배를 태우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생각에 잠겼다. 지니가 악마인가? 지니 이야기는 알아도 원숭이의 손 이야기는 또 뭐지? 하지만 이미 오를 때로 오른 취기는 내게 계속 이야기를 들으라 부추겼고, 나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네. 악마는 세 가지의 소원을 빌미로 인간을 유혹하고, 세 가지의 소원을 대가로 그의 영혼을 취하는 이야기들이. 개중에는 신실함으로 물리치는 인간이나, 자기 계략에 넘어가는 악마들도 있었지만, 그건 극소수의 이야기이고.”

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이야기를 이었다.

“보통은 아주 교활하고 능수능란하게 사람의 영혼을 가져가지. 인간은 자신이 수렁에 빠졌다는 걸 눈치 챘을 때는 한참이나 늦은 뒤야.”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꽁초를 재떨이 역할을 하는 깡통에 던져 넣었다. 나는 그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를 기다렸지만, 노인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의아하게 느껴져 나는 입을 열었다.

“…끝입니까?”

노인은 끄덕이며 말했다.

“끝일세.”

퍽이나 싱거운 이야기여서 헛웃음이 나왔다. 기승전결도의 기도 아까운, 그저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에 묘하게 짜증이 났다.

“어르신, 이야기가 너무 짧고 결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세상이야기가 시작부터 결말까지 다 짜여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 적어도 뭐라도 좀 알려주셔야죠. 세 가지 소원을 쓰고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라든가, 교활한 악마들이 쓰는 방법은 뭔지.”

“궁금한가?”

노인은 내 요구에 스스로의 턱 끝을 쓰다듬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악마들은 어느 날 나타나 내게 거래를 요구하지 않는다네. 악마가 널 찾도록 만들지. 네가 기적을 바라는 간절한 상황에 나타나 일생일대의 선택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너에게 부귀영화와 절세미녀를 제시하지도 않지.”

노인은 툭 던지듯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하며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정말, 아주 사소하고 간단한 것들로 네 소원을 시작하게 만든다네, 네가 사특한 존재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마치….”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비릿한 미소를.

“그래, 마치 담뱃불처럼.”

그의 말에 나는 약간의 소름을 느꼈고, 그리고 소름 뒤에는 불쾌한 짜증을 느꼈다. 너무나도 흔하고 쉬운 클리셰였다. 내가 다섯 살 먹은 꼬맹이었다면 무서워했을, 알고 보니 선량한 사람이 악마였다의 플롯.

“너무 뻔해서 재미가 없군요 어르신.”

“…안 무섭나?”

“제가 어르신 손주였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노인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나 역시 다 핀 담배를 깡통 재떨이에 던져 넣으며 노인과 같이 흡연구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저 예비부부 사이에 끼인 네 신세를 잊을 수 있지 않았나?”

그의 말에 취기 섞인 짜증을 느낀다. 대학교 친구였던 셋에서 둘이 연인이 되었을 때도 불편함을 느꼈지만, 부부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내게 밝힌 오늘은 몇 배나 쓰라렸다.

특히, 나 역시 예비신부 쪽을 좋아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싫은 건, 둘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며 뒤에서 추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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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한다면 내가 혼쭐을 내주겠네. 아니, 아예 너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 주지.”

노인이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게 기울였다. 그의 익살스러운 주름진 미소는 무척이나 무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난 노망난 헛소리라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위나 맞추어주기로 했다.

“아, 예. 그렇게 되면 참 좋겠네요.”

대답하며 그늘을 벗어나 빛이 있는 거리로 나오는 순간, 노인은 우뚝 멈췄다. 그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다 갑작스런 정지에 놀라 노인을 향해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노인을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가로등 빛이 내리쬐는 노인의 모습 뒤, 건물의 벽에 진 그림자는 몇 배나 큰 사람의 모습이었다. 단순히 광원에서 멀어져 생긴 큰 그림자라곤 볼 수 없는 거대한 빌딩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리고, 등 뒤의 환한 술집의 가로등보다도 선명하게 빛나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노인의 샛노란 홍채, 뚜렷이 보이는 가로로 찢어진 동공.

노인은 다시 저벅저벅 내게 걸어왔고.

나는 털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도시의 소음과 더운 바람에 나부끼던 나뭇잎들이 모조리 멈추고, 숨을 쉬는 건 나와 노인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소원대로 내 너에게 불을 주었고, 두 번째 소원대로 내 너에게 지식을 주었으니.”

기묘한 소리였다. 여자와 노인, 아이와 뱀의 쇳소리가 섞인 기묘한 목소리에 등골이 떨렸다.

“마지막 소원으로 네 욕망을 채워 주리라.”

덥고 찝찝한 여름공기는 사라지고 싸늘한 추위가 온몸이 할퀸다, 한 발짝 씩 가까워 질 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머릿속을 메운다. 슬픔, 절망, 비탄, 공포.

헐벗은 이브의 손에 쥐어진 베어문 선악과부터 참호 속에 뭉개진 반대 팔을 쥐고 죽어가는 병사와 머릿속을 매우는 형형색색의 섬광과 쾌락에 취해 심장이 멎는 마약중독자까지.

노인은 잔뜩 굳은 내게 비릿한 미소를 지은 뒤, 내 몸에 바짝 붙어있던 오른손을 잡고는 손에 무언가를 억지로 쥐어주었다.

“선물일세.”

그리고 노인의 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며, 그의 몸이 옆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노인은 바닥에 부딪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광경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지른다.

기묘하게도 그 순간에서 몸의 긴장이 풀렸다. 오히려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심연의 존재가 떠나가자 침착해질 수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노인이 준 걸 쑤셔 넣고는 노인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회사에서 졸면서 들었던 인명구조 사용교육이 이리도 쓸모가 있을 줄이야.

다행히 노인의 의식이 돌아오고, 곧 도착한 구급차에 몸을 싣고 떠났다. 소란에 내 친구들은 물론 노인의 일행까지 밖으로 튀어나왔고, 난 노인의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으로부터 눈물로 얼룩진 감사인사를 들으며 명함을 건네받았다.

꽤 이름난 중견기업의 인사였다.

그의 가족들은 꼭 융숭한 대접을 약속하며 연락처를 받아내고는 사라졌다.

아직 얼떨떨함을 떨쳐내지 못한 내 곁으로 친구들이 다가왔다. 나에게 상황을 물어보았고 나는 자초지총을 설명했다.

예비 신부의 얼굴에는 걱정이, 예비 신랑의 얼굴에는 묘한 일그러짐이 생겼다.

“…재수 없게.”

예비 신랑이 중얼거림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절대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예비 신부의 얼굴 역시 경악에 물들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니 내가 틀린 말했어? 솔직히 우리 결혼한다는 발표하는 이야기에 모두의 축복을 받지는 못할망정, 불길하게 이게 뭐야?”

예비 신부가 그의 뺨을 때린다. 급작스레 고개가 꺾인 신랑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본다.

짙은 갈색 눈동자 위로, 반투명한 노란색 홍채와 가로로 찢어진 동공을 보았다.

둘은 날 선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싸움을 시작했고, 나는 충격을 회복할 세도 없이 둘을 말려야 했다. 신부는 울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곧 한 대 칠 기세로 다가가는 신랑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몇 주후에 그녀에게 듣자하니 그녀가 고등학생일 적,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했고, 자존심만큼이 강했던 그녀는 아직 신랑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둘이서 결혼을 약혹한 뒤 이제야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던 그녀는, 아예 결혼 자체를 모두 물렀다고 내게 하소연을 하며 술을 들이켰다.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이렇게 없었을 줄은 몰랐다고, 그와 보냈던 시간이 무척이나 증오스럽고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진다며 우는 그녀를 달래야했다.

그녀가 너무 많은 술을 먹지 못하게 제지한 뒤, 그녀를 자취방으로 바래다주었다.

뒤를 돌아 떠나려는 순간 그녀가 날 끌어당겼다.

자고 일어나면 후회할 취기의 욕정. 충동과 복수심에 못 이겨 일어난 정사.

이브의 입 안에 퍼진 선악과의 첫 과즙만큼이나 달콤했다.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던 우리는 결국 지쳐 떨어졌다. 먼저 잠에 빠진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둔 뒤, 나는 담배를 피기 위해 대충 바지와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입에 담배를 문 뒤, 바지주머니를 뒤지려다, 문득 이 겉옷이 예비 신부와 신랑이 싸웠던 날에 입었던 옷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잡힌 물건을 꺼냈다.

그 날 아무리 찾았던 없었던 라이터가 내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개중에는 신실함으로 물리치는 인간이나, 자기 계략에 넘어가는 악마들도 있었지만…'

나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짙은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간혈적으로 깜빡이는, 붉은 네온의 십자가가 보였다.

그래서 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신이시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멋있는 영화 제목을 보고 오랜만에 써본 공포소설입니다. 즐겁게 보고 가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