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도망만 쳐도 괜찮을까요?”

진혁의 물음에 태영은 고개를 들었다.

“도망치고 숨고, 또 도망치고, 그러다 들키면 죽고.

남은 사람들은 다시 도망치고, 숨고.

이렇게 가다간 전부다 죽어버릴 텐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이빨이 안 좋다는 건 알지만 이건....”

태영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일어서서 진혁의 어깨를 짚었다.

“그래, 답답하겠지. 그동안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기만 했으니...

그래도 지금은 참아야 해, 당장은 힘들더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진혁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역귀 사태가 일어나고 몇 개월 동안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당장 오늘을 버텨내기 버거울 정도로 참담한 현실 속에서

진혁은 어쩔 수 없이 이빨로 역귀에게 대응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곤 했다.

“왜요. 그냥 단순하게 인류애 때문에? 아이들의 생명은 소중하니까?

그래요. 예전에 말씀해주셨잖아요. 이빨을 쓰면 안 되는 이유.

그런데 막상 상황이 이리되고 나니까 이게 맞는지 확신이 안 서요.

전부 다 죽는다면 그깟 신념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마지막 한 명까지 버티다가 역귀한테 찢겨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냐구요.”

태영은 진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우리가 지금까지 도망만 친 건 단순히 두려워서가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야.”

진혁dl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워 했기에 태영이 덧붙여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우리가 이빨을 써서 역귀와 전쟁을 벌인다고 치자.

아마 죽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줄겠지. 잠시동안은 말이다.

하지만 대규모 싸움이 시작된다면 역귀들은 더 큰 위협이 되어버릴 거야.

녀석들이 생기에 이끌리는 것 이상으로 살기에 이끌리거든.

전투가 벌어지는 곳엔 역귀들이 몰려들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빨을 이용하면 전투가 지속될수록 인류를 망가뜨릴 거야.

생각해보자.

이빨이 무기인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또 어떻게 희생될지.

그리고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싸움이 길어지면 인간성이 옅어지면서 사람들은 마음을 잃고 악귀와 같은 모습이 될 거다.

부모를 죽이고 아이를 강탈하거나 신생아마저 이빨로 쓰일지 모르지.

피에 의해 쓰이는 전쟁이 어디까지 잔혹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어.

결국 역귀들을 멸하기 전에 인류가 확정적인 쇠퇴의 길로 들어설 거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큰 희생을 감수하고 역귀들을 몰아냈다 쳐도

인류는 결국 짐승들만도 못한 상태가 되어 버릴 거야.

자유를 위해 가장 지켜야 할 것마저 베어 넘긴 사람들은

오로지 결과만을 중시하며 어떤 끔찍한 짓이든 저지르겠지.

대의라는 명분 하에 말이다.

우리가 알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영원히 불가능해 지는 거야.”

잠시 숨을 돌린 태영은 진혁의 눈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맞아. 언젠가는 역귀들과 전쟁을 치러야 할 거야.

하지만 그건 지금이 아니야.

우리가 지금 하고있는 것처럼 곳곳에 안전한 부락을 만든 다음

이빨이 아닌 올바르게 역귀를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리고 모든 인류가 하나로 합쳐져 역귀들을 상대할 정도로 힘을 충분히 기른 그때.

그때 싸움을 시작하게 될 거야.

물론 그날이 금방 찾아오지는 않을 거다.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옳은 길이야.

내가 하려 하는 건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준비를 해두는 거지.

당장은 힘들고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서 뿐 아니라, 하영이와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하영이의 다음 세대. 또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를 위해서야.

지금은 이해가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걸 꼭 기억해.”

진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신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쁜 생각을 조금은 억누를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말하마.

이빨은 절대 안 된다. 그걸 기억해.

그리고 요새 상혁이가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네가 잘 챙겨줘.

마음이 강한 녀석이니만큼 잘못된 확신을 가지게 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다.”

태영은 진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빨은 안된다.....”

진혁은 태영의 말을 되뇌었다.







“그때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사람들을 만나보고

또 형이 하는 꼴을 보니까 확신이 생겼어.

역시 이빨은 절대 써서는 안 돼.”

상혁은 여전히 화난 얼굴로 진혁을 쏘아붙였다.

“헛소리. 결국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때문에 지금껏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어온 거야.

나중엔 방법이 생길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인류를 연명시키겠다고?

대체 언제까지? 기약은 있어?

하지만 내가 새롭게 알아낸 이빨 사용법은 순식간에 인류를 구원해줄 거야.

몇십 년도 필요 없어. 이 효율성이면 몇 년 안에 역귀를 전부 도륙 내겠지.

그렇다면 누구 말이 맞을까?

아저씨는 틀렸어. 사람들은 다 영웅 취급해 주지만 아저씨는 그냥 겁쟁이에 쓰레기일 뿐이야.”

“아니. 아저씨는 겁쟁이가 아니야.

그랬다면 그렇게 주저 없이 마지막 싸움을 하러 역귀에게 달려들지 못했겠지.

그동안 아저씨가 역귀를 피하기만 했던 건 훨씬 더 미래를 위해서야.

이 칼을 쓰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야.

우리 세대에게 하는 부탁이자 메시지지.

그리고 이 칼을 내가 쓰게 된 이상.

난 아저씨 방식대로 사람들을 지키면서 아저씨 뜻을 이어받을 거야.

아저씨가 맞다는 걸 증명할 거라고.”

상혁은 진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 년 전은 물론 얼마 전 만났을 때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상혁의 머리를 차갑게 시켜주었다.

“좋아. 그렇다면 증명해봐.

네 방식대로. 그리고 아저씨의 방식대로 역귀들을 상대하라고.

난 내 방식대로 역귀들을 몰아낼 테니까.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진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상혁과 진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많네. 네놈이 일궈놓은 거주지 따위는 당장엔 필요가 없겠어.

여기서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데려갈 거야.

네놈은 내가 버린 쓸모없는 사람들이나 데려가서 피난촌이라도 만들던가 해.”

이번엔 진혁 대신 진아가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가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끌고 가지 않아. 그냥 지원자를 받는 거지.

오기 싫다는 사람은 억지로 데려가지 않는다.

다만 들어오고 싶어도 자격이 안 되면 들어올 수 없어.

이게 내 규칙이고 방식이야.

가장 효율적으로 역귀들을 사냥하는 방식.”

상혁이 진수에게 지시하자 진수는 재빨리 단상 위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자, 우리 위대하신 대장님이 이빨부대와 함께할 지원자를 뽑습니다.

여기 이제 보호 못 받는다는 건 다들 알지?

그러니까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들이 필요해.

이빨부대가 그걸 해줄 수 있다.

다들 눈으로 봤을 테지. 그 무시무시한 괴물 떼를 손쉽게 도륙 내 버리는 걸 말이야.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 무조건 들어와야겠지.

아 잠깐. 잠깐. 그렇다고 또 뭐 아무나 받아주는 건 아니고,

몇 가지 조건이 있으니까. 지금부터 잘 들어봐.”

진수는 이빨부대 주둔지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역시 이번에도 상당한 소란이 일었지만, 처음보다는 덜한 반응이었다.

이미 조건부 평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이기도 했고,

또 몇몇은 스스로 이빨을 들고 역귀들을 상대해 봤기 때문에 그걸 뿌리치기 힘들기도 했다.

결국 조건에 부합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상혁의 쪽으로 향했다.

“웃기지마! 멋대로 데려가게 둘거 같아?”

진혁은 반대했지만, 상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한 것처럼 보여?

이사람들은 전부 스스로 선택 했어.

그러니 네놈 따위가 된다 안된다 결정할 일이 아니지.

대신 남아있는 사람들이나 데려가.

네가 내버려 두면 백이면 백, 전부 죽을 테니.

네 그 알량한 희생정신과 아저씨의 그 미쳐버린 인류애로 한번 품어보라고.”

그럼에도 진혁은 상혁에게 칼이라도 휘두를 기세였지만 진아는 물론 황반장까지 나서서 진혁을 말렸다.

“그만하게. 지금은 싸운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이건 자네들 형제만의 싸움이 아니네.

까딱 잘못했다간 저 이빨부대란 놈들이 남은 사람들을 공격할 수도 있어.”

황반장의 말이 맞았다. 이미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 대부분은 상혁 쪽으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들이 마음먹고 공격을 한다면 진혁은 물론 남아있는 사람들 역시 쉽게 제압당할 것이 뻔했다.

황반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감의 밑에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 역시 대부분 상혁에게로 향했다.

그 와중에 정상병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최대위 같은 놈을 믿는 바람에 못 할 짓을 해버렸거든?.

아직 머리도 복잡하고 좀 어렵긴 한데 그래도 저놈이 최대위 보다 더한 미친 새끼란건 알겠네.

차라리 이쪽에 붙어서 그 신념이란 거에 걸어보는 게 낫겠어.”

박일병은 고민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생존을 중요시하는 박일병에게 상혁의 이빨부대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다만 정상병도 있고 다른 이들도 있기에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정상병은 그런 박일병을 보고 말했다.

“결정은 네가 직접 내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은 아니니까.”

고민하던 박일병은 정상병과 진혁, 황반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살고 싶어요.”

이빨부대 쪽으로 가려는 박일병을 황반장이 불러세웠다.

“자, 이걸 가져가게. 아까 떨어트린 자네 가방이야.

그냥 주긴 좀 서운해서 내가 쓸만한 것 조금 챙겨 넣었네.

다만 내가 하고픈 말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거야.”

조용히 받아든 가방 속에는 식량 약간과 나침반, 랜턴 따위가 들어있었다.

“감사합니다....”

박일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인 뒤 이빨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대략적으로 이동이 끝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혁쪽에 붙어있었고

남은 사람들은 이빨부대에 거부감을 가진 몇 명과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늙거나 어린 학생들 뿐.

상혁은 진혁에게 말했다.

“내가 충고하나 할게. 뭐 잔소리라면 너 꼬맹이 때부터 귀에 못 박히도록 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번엔 진짜 뼈에 사무치게 새겨들었으면 좋겠어.

넌 너무 약해. 그러니까 네가 하는 말에 힘이 없는 거야.

정의니, 신념이니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걸 이뤄낼 만한 힘이 없으면

그냥 헛소리일 뿐이야.

사람의 힘이란 게 근력만을 말하는 건 아니지.

주먹질이건 말이건 사람 다루는 능력이건 뭐 하나는 뛰어나야 해.

근데 너한텐 뭐가 있지?

아저씨 뒤를 잇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 용기는 가상한데

네가 아저씨처럼 뛰어난 게 뭐가 있냔 말이야.

내가 단언할게. 아무것도 없어.

똑똑히 새겨들어.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네 미래는 둘 중 하나지.

되지도 않는 욕심 부리다가 널 믿는 사람들을 전부 죽게 한 뒤에 정신이 나가서 비참하게 죽어버리던가.

수도 없이 실패를 겪은 뒤에 뒤늦게 나를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던가.

뭐가 되었건 나로서는 그리 반갑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그 꼴이 난다면 아저씨가 틀렸다는걸 너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니 난 웃을 수 있어.

혹여나 날 찾아온다면 네 면전에 대고 웃어주지.”

진혁은 화를 내는 대신 상혁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저 미친 영감도 나한테 그랬지.

힘이 있어야 한다고. 난 너무 약하다고.

맞는 말이야. 영감이 창고에 가둬놨을 때 무력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뼈저리게 느꼈거든.

그래서 한참 고민했는데 다행히 답을 내릴 수 있었어.

날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해.

난 형이나 아저씨처럼 혼자 전부 다 해내지는 못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믿고 조금씩 의지하기로 했지.

그렇게 내 편을 늘려갈 거야.

두고 봐. 약하다는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리고 나도 형 미래를 예견해볼게.

형 미래는 딱 하나야.

아저씨한테, 예지한테, 그리고 하영이한테 사죄하게 될 거야.

그리고 형이 죽인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 사죄하면서 남은 생을 고행하듯 고통스럽게 살게 되겠지.”

상혁은 더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진수에게 명령할 뿐이었다.

“지원자들 짐 챙기게 하고 이동 준비시켜.

식량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챙기고.

난 먼저 돌아가 있을 테니 사람들 잘 추슬러서 돌아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혁 역시 슬슬 몸 상태가 호전되었기에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남은 인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 대부분은 이빨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아이들과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진혁은 불안해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전한 거주지가 있습니다.

식량도 자급 가능하고 물도 충분할 겁니다.”

그들의 불안감이 조금 가시는 듯했기에 진혁 역시 이동 준비를 하기로 했다.

소란이 있었으니 다른 역귀들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조금 의미 없는 질문일 수는 있네만... 그래도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네.”

황반장의 질문에 진혁은 진아와 함께 황반장에게 다가갔다.

“사실 창고 안에서 말이야. 자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네.

충격에 빠졌다고 할까? 다른 친구들한테는 조금 기다려보자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걱정이 되었었지.

하지만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툭 털고 일어나서 말이야.

혹시 뭔가 기운을 낼 만한 게 있었나 물어보고 싶네.”

확실히 진혁은 오랜 시간 동안 멍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는

문지기에게 말을 걸어 반란 계획을 실행했다.

그렇게 갑자기 기운을 차린 이유가 무엇일까?

진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실 뭔가 대단한 게 있어서는 아니에요.

솔직히 그 영감이 한소리가 나름 충격적이기도 했고

형을 막겠답시고 나선 주제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저씨랑 촌장님은 날 믿어줬는데 내가 자격이 부족한가 싶기도 하고 좀 혼란스러웠거든요?

왜 있잖아요. 나쁜 생각을 하다 보면 거기에 빨려 들어가서 더 나쁜 생각만 하게 되는 거.

그렇게 막 좌절감에 허우적대다 보니 최악까지 생각한 거죠.

‘그래. 어차피 난 이정도 밖에 안되는 놈이다.

여기서 죽으면 난 딱 그 정도 놈이다. 그냥 내려놓자.’

근데 막상 또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이제 먼저 간 가족들 생각이 나는 거에요.

여기서 죽으면 내가 아저씨랑 혜지, 하영이 볼 낯이 있을까?

그건 진짜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그렇게 정신이 딱 들고나니까 이제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부터 한 거죠.

게다가 저 혼자 죽는 거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 때문에 죽으면 안 되잖아요.

구하겠다고 걱정 말라고 큰소리쳐놓고 그래놓으면 안 되니까.

뭐 진아나 반장님이나, 마을에 두고 온 우리 꼬맹이들 생각도 나고.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내가 어떤 놈인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자.

능력이 부족하면 사람들 도움을 받아보자.

여기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도움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이랑 힘을 합쳐보자.

대충 이런 생각 흐름으로 반란 일으키는걸 떠올린 거죠.”

황반장은 안심했다.

안 그래도 마음의 짐이 많아 힘들어하던 진혁이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은 부담을 내려놓고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잘 생각했네. 자네가 인복은 좀 있는 듯하니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자네 형이란 작자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자네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니 자부심을 좀 가지고!”

“그럼요. 걱정 마세요. 이제 좀 알 것 같거든요.

반장님이 말씀하신 짐을 내려놓으란 얘기를 이제 이해한 것 같네요.”

대답하는 진혁은 상당히 개운해진 얼굴이었기에 황반장도 진아도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때 정상병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이 사람들도 돌봐야 하고 그 이빨부대란 곳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진혁은 곧 진지한 얼굴로 고심했다.

“이 사람들은 거주지로 잘 인도해야지요.

아마 큰 문제는 없을거에요.

진짜 문제는 그 이빨부대죠.

벌써 규모가 제법 커졌어요.

전면전을 벌이려면 사람도 많이 필요하고 피해도 극심할 테니 그건 피해야겠죠.

그래도 멋대로 사람들을 이용해먹는건 두고 볼 수 없으니까 뭔가 대책은 필요해요.

제일 좋은 건 소규모 조직을 만들어서 형보다 한발 앞서 사람들을 구출해 내는 건데...”

그 말에 황반장은 가방에서 작은 무전기 하나를 꺼내었다.

“그 일병 친구에게 준 가방 안에 슬쩍 무전기를 넣어놨지.

이 친구가 도와만 준다면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계속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무전기를 본 정상병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얘기해 볼게요. 그래도 제가 제일 잘 알고 가까우니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진혁은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좋아요. 우선 첫 번째로 구조대를 꾸릴거에요.

역귀들을 피해서 사람들을 구해오고 안전한 곳으로 이송시킬 구조대.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거나 기존 거주지를 넓히는 것도 병행해야 될거에요.

그러려면 식량 탐색이나 확보도 필요할 거고.

그러니 최대한 빨리 지원자를 받아서 운영을 시작해야 해요.

두 번째로 형보다 앞서서 움직이며 피해를 최소화 할거에요.

이빨부대가 도착 전에 구조대를 투입해서 그 지역 생존자들을 먼저 구해오는 거죠.

마지막 세 번째는....”

진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도 역귀와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요.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이빨이 아닌 다른 방법을요.”







“진지를 옮긴다. 여기는 너무 좁고 근처 역귀들도 거의 사라졌어.

좀 더 넓은 지역으로 가서 좋은 시설로 바꿔야 해.

큰 도시의 호텔 건물 같은 걸 통째로 진지 삼아서 전기와 식수를 연결하고 식량 비축을 한다.

삶이 안락해져야 마음 놓고 아이들을 낳을 테니 중요한 문제야.

그리고 주기적으로 역귀를 사냥하면서 안전 지역을 넓힌다.

아직은 오합지졸이니 본격적인 훈련도 시켜야 하고 무기 조달 같은 것도 필요하고 할 게 많아.

손재주 좋은 사람들 몇 명 더 뽑아서 문신사로 키울 테니 차출 좀 해놓고.

인원 관리 철저히 하고 부대 효율적으로 돌리도록 분대 단위로 편성해.

지휘관으로 쓸만한 놈들도 있어야 되니까 대략 후보 리스트 뽑아놓고 본격적으로 체계를 잡는다.

이해했으면 움직여.

준비되는 대로 여길 뜰 거야.”

진수에게 명령을 내린 상혁은 개인실로 돌아왔다.

개인실에는 혜정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또 무슨 일이야.”

상혁은 짐을 대충 던져놓은 뒤 소파에 기대앉았다.

혜정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휴게소편의점에서 집어온 임신테스트기였다.

테스트기에는 줄 두 개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상혁은 특별한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알겠어. 앞으로는 너무 무리하지 마.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먹을거든 뭐든 가능한 구해줄 테니.”

너무 덤덤한 반응에 혜정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낳아도 괜찮아요?”

상혁은 전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지금 식량보다 더 중요한 게 이빨이야.

당연히 아이들은 많을수록 좋지.

그래서 굳이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반강제로 아이를 만들도록 하는 거고.

너도 아이가 생겼다면 당연히 낳아야지.”

혜정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아이를 이빨 재료로 쓰겠단 말이에요?”

“내 계획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했을 텐데.

네 아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어.

가장 처음 태어나는 아이로 신생아가 이빨로써 효용성이 있는지 확인할 참이었으니까.

네가 직접 문신 새기기 껄끄러우면 후임이라도 가르쳐서 시켜.

안 그래도 문신사는 몇 명 정도 더 둘 생각이었어.”

혜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아이잖아요!!”

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 안 해.”

“하지만... 이 아이 당신 아이 맞단 말이에요....”

울먹이며 말하는 혜정에게 상혁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 난 내 아이라고 생각 안 해.

그러니 다른 애들이랑 전혀 다를 바 없어.

주저 없이 이빨 재료로 쓸 거야.”

혜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처음 두 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맘속에 피어오른 건 분명 기쁨이 먼저였다.

그렇다면 상혁에게 이야기를 꺼내면서 뭘 기대했고 뭐에 실망했을까?

사실 그녀조차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감정이 너무 북받쳐 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상혁은 그렇게 울고 있는 혜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울던 혜정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눈물을 닦아내고는 일어났다.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당신 아이라고 생각 안 한다면 나도 더 강요 안할거에요.

그래도 제 아이라는 사실 만은 변하지 않으니까.

대신 절대 이 아이를 이빨로 쓰지 않을거에요.

그건 양보 못 해요.

이 애는 저 혼자 잘 키울 테니까 이빨이니 뭐니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마요.”

“내가 꼭 이빨로 써야겠다면?”

상혁의 물음에 혜정 역시 강하게 대답했다.

“문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갈 테니 알아서 해요.

억지로 잡아둘 생각은 마요.

차라리 이 애랑 같이 죽어버릴 테니까.”

상혁은 눈을 감고는 대답했다.

“좋아. 아이는 편할 대로 키워. 그렇게까지 이빨로 쓰기 싫다면 특별대우해주지.

대신 다른 신생아들에겐 전부 문신을 새겨넣어야 할 거야.

그것마저 못하겠다고 땡깡 부리면 그땐 안 받아줄 테니 그리 알아.”

혜정은 대답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자신의 침대에 누운 혜정은 가만히 배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괜찮아. 누가 뭐래도 넌 내아이니까 엄마가 끝까지 지켜줄게.”

혜정은 다시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이제 우는 건 그만해야 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