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어디서 본 장면인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폐건물이 가득 찬 동네,
이곳저곳 휘갈겨져 있는 '휴거', '종말', '회개' 등등의 시뻘건 락카질,
한 여름 녹음이 누런 유리창에 막힌듯 탁한 하늘과 누런 공기,
곡갱이로 내리 깐듯이 군데군데 까뒤짚어진 아스팔트와
그 위를 소용돌이 치며 날아가는 시멘 가루 뒤섞인 회색 먼지를
나는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예닐곱살, 그 쯤 되었을 때.
복슬거리는 강아지를 선물 받았던 장면 이라거나
초등학교 졸업식날 들 뜬 마음에 무작정 길을 건너려고 하다가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일 뻔 했던 날이 라던가
그 당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었지만 결혼식을 올릴때,
내 옆에서 눈물을 훔치던 아내의 드레스 입은 모습 이라던가...
이따금 한 번씩, 꿈 속에서 미래를 미리 겪어보고는 했었다.
물론, 데자뷰라는 단어와 뜻을 알기까지는 비슷한 일을
수십번 더 겪고 나서였지만...

조금 전, 홀로 내뱉은 말따라 지금 이 장면은 어디서 본적이 있었다.
아마도 데자뷰 였을테지...
개인적으로 자세히 모든 것을 기억할수는 없지만,
조금 지워지고 남은 기억에만 집중한다면 생각보다
쓸만한 재주라고 생각한다.

가령 지금 눈 앞에 서있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3층짜리 낡은 빌라.
204호에 꼭 들어가야 한다거나...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뱉는것처럼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조금 뻑뻑한 현관 문 손잡이를 돌리고 들어왔다.
곧 쓰러질듯한 외관과는 다르게 나름 정돈된 내부환경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끌어 모으려 이내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 분후, 싱크대 선반 위에서 몇 시간전까지, 아니 몇 십분전까지
사람이 머무른 듯, 미약한 온기가 담겨져 있는 철제 머그컵을 발견하고 난 뒤로,
좀처럼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서 안방으로 추정되는 공간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신발장에서 무언가를 본 기억이 났다.
아니, 무언가를 분명 보았던 것 만 같다.

-끼이이이이익!

낡은 경첩소리가 내는 비명을 거북하게 받아들이며
조심스레 열어 본 신발장에...
내 세살베기 딸아이가 토막나 있었다.
도심 건물 숲, 한 가운데에 호랑이가 나타나는게 더 현실성 있을 것 같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항상 웃어주고 애교 부리며 '아빠, 아빠' 소리치던 내 아이 였는데
낯설게 느껴지는 이 공간에 놓인 신발장 안에서
고깃덩이로 날 반겨줄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필시 아까 컵에서 느껴진 희미한 온기의 주인은 이 모든걸 알고 있으리라...

최대한 침착하게 증거를 모아야만 했다.
온기의 주인을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녀석은 날 몰라봐도
나는 녀석을 알아챌수 있도록,
또 정말 만약에 그 놈이 이 상황을 만든 주인이고
어린 내 딸의 마지막 숨을 거둬간 녀석이라면,
그 이유를 두 귀로 직접 듣고 나 또한 녀석의 마지막을 끊어내야만 했기에.

안방과 작은 방, 화장실 모든 곳을 샅샅이 뒤지고 난 후에
발견한건 출처를 알수없는 백색 가루가 담긴
약봉지 수십개와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도구들, 그리고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를 내가 찍어 준 딸아이의 사진 몇 장과 내 아이의 숨을 거둬갔을 커다란 중식도 한자루 뿐이 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모든 걸 뒤져보곤 난 후,
거실 쇼파에 몸을 의지한채 찾아낸 물건들을 다시금 살펴보니
적정감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슬픔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게 꿈이라면 좋을텐데...
딸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갓난아이가 하품하는 모습을
바라봤을 때, 딸아이가 하루하루 성장함에 따라 내 빈약하고 가난한 마음에 아이의 존재가 커져가고 잠시라도 눈을 떼게 되면
물 속에 깊이 잠겨 허우적거리며 산소를 그리워하듯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매일 홀로 힘겹게 키워냈던 아이였는데

어딘지 모를 낯선 지역에 떨어져 이상한 곳에서 딸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아이를 그리워하며
아이가 숨을 거둔 공간에서 위로를 받는다는게 역겹게만 느껴진다.

아이를 데려가고 이런 고통을 선물해준 신을 원망하며
범인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고통속에서 죽어가길 기도한 후,
이 칼로 아이를 따라간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며
바닥에 놓인 칼을 주우려 몸을 일으키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

쇼파 틈사이로 보이는 구겨진 종이 끄트머리를 짚어들고
혹시나 녀석을 알수있도록 신이 내려주는 마지막 자비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깊게 숨을 들이 마신 후,
얼마나 접었다 폈는지 가늠도 안되는 해진 얄팍한 종이를
천천히 펼쳐보았다.

그곳에 적힌 일련의 사건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와 동시에 지워진 데자뷰의 기억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약에 절어 살았고 내 집에서 약에 취해 내 아이를 내 손으로
스스로 죽였다. 약 기운이 꿈 처럼 사그라들면 괴로움도 기억도 잊어버리기에 내 스스로가 나에게 내린 벌이 였음을 알수있었고
과거의 나 처럼 지금의 나 또한 같은 벌을 내리리...
발견한 약봉지를 털어 넣고 집 밖으로 나서면
나는 다시 한 번, 모든 걸 잊고 고통 받겠지.
내 아이의 서글픈 죽음에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내가 찾지 못하도록 물건들을 숨기고, 코로 내 죄악을 들이 마시고 밖으로 나선다.
" 아, 데자뷰가 아니라 지옥이구나 "



"분명 어디서 본 장면인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폐건물이 가득 찬 동네,
이곳저곳 휘갈겨져 있는 '휴거', '종말', '회개' 등등의 시뻘건 락카질,
한 여름 밤 달빛이 누런 유리창에 막힌듯 탁한 하늘과
가로등 하나 없이 내리깔린 어둠.
곡갱이로 내리 깐듯이 군데군데 까뒤짚어진 아스팔트와
그 위를 소용돌이 치며 날아가는 시멘 가루 뒤섞인 회색 먼지를
나는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