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두억시니님을 맞을 준비를 해라!”
저녁 시간이 지나기 전에 광장 한켠에는 단상이 마련되어있었다.
최대위가 묶여있던 곳이었지만 노인은 혼례가 먼저라며 최대위의 벌을 미루었다.
결국 최대위는 광장 구석으로 옮겨지고 그곳에 단상이 세워진 것이다.
조악했지만 없는 자재로 급히 만들어야 했기에 마을 사람들이 제법 고생했다.
단상 위에는 진아가 하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있었고 노인은 그 옆에서 청년 두 명의 경호를 받으며 경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최대위는 탈수 증상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이를 갈았다.
역귀들에 대한 분노. 자신을 무시하고 이렇게 고통을 준 노인에 대한 분노.
지금의 최대위의 마음속엔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죽여버릴 거야. 저 늙은이도 그 괴물 새끼들도. 전부다 죽여버릴 거야!!!”
하지만 그런 최대위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진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오로지 노인만이 기대와 희열을 안고 두억시니를 기다리고 있을 뿐.
“제물을 준비해라.”
곧 진혁일행이 제단 앞으로 끌려왔다.
진아는 당황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노인에게 제지당했다.
“나서지 말게.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두억시니 색시가 될 자가 이리 경거망동해서 되겠는가?”
진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묶여있는 진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잘 생각하셨네. 그렇게 품위를 지키며 두억시니님을 맞이하시게.”
곧 멀지 않은 곳에서 두억시니의 깊이 있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진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집중했다.
노인의 말대로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자 두억시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대략 위치 정도만 가늠할 뿐이었지만 가까워지면 좀 더 뚜렷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억시니 님이시어. 오늘 이 자리에서 위대한 존재를 모실 무녀를 바치겠나이다.
비록 미천한 인간에 불과하나 몸과 마음 모두 헌신할 수 있는 맑은 영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 미천한 자가 두억시니님을 받들어 모실 수 있게 허락하소서!”
“크아아아아아악!!!!”
길게 토해내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두억시니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곧바로 길을 터주며 바닥에 엎어져 고개를 조아렸다.
처음 보는 거대한 모습과 위용에 진혁은 놀라며 노인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모시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네요.
저도 아무것도 모를 때 마주쳤으면 그냥 무릎 꿇고 살려달라 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한번 보면 그 위대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네. 곧 혼례가 시작될 거고 자네들은 모두 제물로 바쳐지겠지.”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혼례라니 너무 거창하다. 괴물한테 무녀는 뭐고 또 색시는 뭐예요. 역겹기만 하고만....
차라리 영감님이 색시 하세요. 색동저고리 같은 거 입고.
괴물 신부로는 그게 더 잘 어울리겠네.
저 괴물 새끼한테 점수 따려면 그게 더 낫지 않겠어요?”
진혁의 도발에 노인의 옆에 있던 청년들이 움직이려 하자 노인은 제지하고는 직접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최후의 발악이 고작 그따위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는 것뿐인가?
내가 자네를 너무 높게 평가했던 모양이야.
마지막 순간을 겸허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하는 짓거리는 시정잡배만 못하구만.
뭐 좋네. 자네가 그리 도발해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
자네들은 여기서 제물로 바쳐질 것이고 저 아가씨는 두억시니님의 신부가 될 것이네.”
무시하듯 진혁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말에 진혁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돼요. 이미 제가 프러포즈도 다 했고 들러리까지 구해놔서.
오늘은 아니지만 진아는 저랑 결혼할 거예요.
그리고 다른 놈도 아니고 괴물 새끼한테 와이프 뺏기면 아저씨가 절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어요.”
노인이 되묻기도 전에 진혁의 손이 순식간에 노인의 팔과 목에 휘감겨 들어갔다.
단상 위에 있던 두 명의 청년은 당황하며 내려가려 했지만,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마을 사람들 몇 명과 노인의 명령을 듣고 있던 사람 중 일부였다.
아무래도 노인 휘하에 있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듯했다.
노인의 실질적인 수하들은 금세 다른 이들에게 제압당했다.
진혁역시 간단히 노인을 제압해서는 땅에 쓰러트리고 말했다.
“영감님처럼 극단적인 선택지를 주는 사람들의 단점이 뭔지 알아요?
진심으로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예요.
문지기 하고 있던 분을 슬쩍 떠보니까 다 말씀해 주시던데요?
딸이랑 아내를 인질로 잡다시피 해서 어쩔 수 없이 모시고 있다고.
제 손 포박할 때 느슨하게 묶어주신 분은 어머님을 인질로 잡혔고.
저한테 칼 찾아주신 분은 병약한 동생분.
그 밖에도 많던데요? 여동생부터 시작해서 가족, 친구, 심지어는 마을 사람들 전부 인질로 잡기도 하고.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저기 돈과 명예에 눈먼 사람들 몇 명 외에는 전부다 당신 편이 아니란 얘기에요.
그러니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살짝 불씨를 던진 것만으로 순식간에 반란군이 조직된 거죠. 반나절도 안 되어서.”
노인은 당황했지만, 아직 여유를 잃지 않았다.
“멍청하긴! 너희 쓰레기들이 모인다고 달라질 게 있성 싶으냐?
두억시니님은 너희 따위 순식간에 쓸어버리실 수 있다.
그러니 허튼짓 말고 당장 떨어져서 무릎을 꿇어라!”
그 말에 대응하듯 두억시니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위협스럽게 흔들어 대었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의 별다른 행동은 없었다.
공격하지도, 다른 역귀를 부르지도 않는 두억시니를 보며 진혁은 말했다.
“약간 도박수긴 했는데 다행히 맞았나 보네요.
두억시니 입장에서 영감님은 중요한 사람이죠.
그러니 영감님이 인질로 잡혀있는 이상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거예요.
안 그런가요?”
“그럴 리가 있는가? 두억시니님은 완전무결한 존재시네.
그런 얕은수가 통하겠는가? 분명 순식간에 네놈들을 도륙 내겠지.
그러니 어설픈 짓거리 말고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게!”
노인은 당당히 말했지만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다.
“만약 아니라면 지금 당장 우릴 혼내주라고 하세요.
대신 그 순간 영감님이 무사할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거예요.”
진혁은 손에 들린 칼을 슬쩍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그 살벌한 모습에 노인은 심호흡하고는 다시 여유를 되찾으며 말했다.
“좋네. 이번엔 내가 한발 물러서겠네.
자네 협박이 조금은 통했다는 걸 인정하지.
하지만 만약 내가 진짜 죽음을 각오하고 두억시니님께 고한다면 어쩌겠나?
난 두억시니님을 위해 얼마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네.
두억시니님도 그걸 아시니 내가 그냥 죽겠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두억시니님과 수많은 역귀들을 어찌 막아낼 텐가?
협박은 좋았지만 딱 한 걸음이 모자랐구만.
내가 죽어서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면 자네들도 끝이란 말일세.”
진혁은 조금 곤란함을 느꼈다. 진혁은 물론 노인을 해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협박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곤란한 것은 진혁쪽이었다.
그때 단상 위에 있던 진아가 소리쳤다.
“아니요! 절대 그렇게 못할 것에요.”
모두는 진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도 두억시니 목소리가 들려요.
그 덕에 저 노인이 그동안 두억시니에게 전한 생각도 읽어낼 수 있어요.
저 노인은 죽는 걸 무서워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만은 지켜달라고 두억시니님께 빌고 또 빌었어요.
저렇게 호기롭게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겁내는 거예요.
두억시니도 그 노인의 부탁을 기억해요. 그러니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확신이 생기자 진혁은 안도하며 노인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영감님? 인성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선생님이시네요.
자 그럼 이제 영감님 허세도 들켰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죠.
저희가 영감님을 살려드리는 대가로 뭘 해주실 수 있을까요?”
노인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포기하며 말했다.
“좋네. 자네들을 전부 자유롭게 해주겠네.”
“자네들이라면요?”
“자네와 같이 온 저 아가씨와 기술자 양반. 그리고 군인들 둘까지 전부 말이네.”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그건 전부가 아니잖아요. 전부라면 이 마을 전체 정도는 되어야죠.”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욕심이 과한 거 아닌가? 마을을 통째로 내놓으라니.
그건 안될 말일세! 내가 어떻게 일궈낸 곳인데...”
진혁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 놓은 공포의 성이죠.
영감님. 영감님은 틀렸어요. 잘못된 선택을 한거라구요.
그러니 포기하세요. 잘못된 건 바로 잡아야 하니까.”
노인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두억시니한테 전하세요. 이 근방 역귀들 전부 다 데리고 아주 멀리 가버리라고.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법한 아주 먼 곳이요.
더는 사람도 해치지 말고 산이든 강이든 자리 잡고서는 그냥 웅크리고 있는 거죠.”
노인은 이를 갈았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대답했다.
“두억시니님과 역귀들을 물리는 건 가능하네. 내 안전만 보장해 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
하지만 봉인하듯 움직임을 묶는 건 불가능하네.
내가 부탁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진혁이 진아를 돌아보자 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영감님 안전을 보장해 주면 이 마을을 포기하고 멀리 가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조건 정도는 받아들일 거예요.
두억시니에게도 사실상 유일한 추종자이자 대화 상대인 영감님은 필요한 존재거든요.
하지만 얌전히 있으란 조건은 좀 힘들어요. 그땐 전부 버리고 마구 날뛰겠죠.”
진혁은 아쉬웠지만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 지금 당장 물리세요. 영감님을 풀어주는 건 역귀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우리 안전이 보장된 이후입니다.”
“.... 알겠네.
두억시니님이시여! 이 미천한 종이 간곡히 청하나이다.
저의 목숨을 가엽게 여기시고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이들을 내버려 두고 먼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다른 역귀들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
부탁드리겠나이다.”
곧 두억시니가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과 반란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은 기뻐하며 크게 환호했다.
진혁은 노인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는 단상에 올라 진아를 마주했다.
“이쁘네. 진짜 당장 시집가도 되겠어.”
진아는 웃으며 진혁에게 안겼다.
“하객도 많은데 오늘 오빠한테 시집갈까?”
가볍게 농담을 하던 그 순간, 노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돌아본 그곳에는 최대위가 광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노인이 쓰러져있었고 최대위의 뒤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의 박일병이
최대위가 묶여있던 줄을 들고는 멍하니 서 있었다.
“넌 내가 무조건 죽인댔지 이 개새끼야...”
노인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조용했던 두억시니가 분노로 포효하기 시작했다.
“전부 도망쳐요!!!”
진혁은 누가 말리기도 전에 소리를 치며 두억시니에게 달려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환호하던 모든 사람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마침 두억시니와 가까이 있던 마을 사람 몇 명이 난동을 부리는 두억시니의 공격에 말려들어갔고
순식간에 몸이 조각나 버렸다.
죽은 이의 시체를 찢어 붙인 두억시니가 다른 공격대상을 찾으려던 그때,
진혁이 사람들과 두억시니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두억시니는 진혁이 들고 있는 칼이 뭔지 알고 있다는 듯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알고있어요. 그 칼이 위험하다는걸 알고 주저하고 있는거에요.”
진아의 외침이 진혁에게 확신을 주었다.
어차피 몇 번 휘두르지 못하니 무작정 덤비는 것 보다는 그냥 시간을 벌자.
그게 진혁의 작전이었다.
우선 마을 사람들을 전부 대피 시킨다음 몸을 빼내면 된다.
칼을 위협적으로 휘둘러 보이며 견제를 하던 그때, 두억시니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크게 포효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크아아악!!”
울림소리 때문에 땅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역귀... 역귀들 부르고 있어요. 전부다 달려올거에요!!”
진혁은 당황했다. 지금 진혁이 할 수 있는거라고는 두억시니를 잠시 잡아두는 것 뿐이었다.
근데 만약 사방에서 역귀들이 달려든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죽는데 단 몇분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당장 돌아서 퇴로를 뚫어야 하나?’
하지만 어설프게 몸을 뺐다간 두억시니가 날뛸게 분명했다.
고민하는 사이 마을 밖으로 도망치려던 사람들이 역귀에게 쫒겨 다시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억시니는 확실하게 전부 죽이려는 듯 역귀들로 마을을 포위한채 점점 범위를 줄여가고 있었다.
“아.... 안돼.... 저희를 다 죽일 생각이에요. 남김없이 전부 다....”
진아마저 절망적인 말을 하며 좌절하고 있었다.
정상병은 최대위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소리 질렀다.
“야이 미친새끼야!!! 네가 무슨짓을 했는지 알아?
우린이제 다 죽었어 이새끼야!”
하지만 최대위는 광기어린 눈을 희번뜩 거리며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며 말했다.
“이빨! 이빨 어디 있어? 애새끼들 데려와! 저 괴물 새끼 내가 죽여버릴거야!!”
정상병은 최대위가 날뛰지 않도록 제압한뒤 진혁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지금으로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역귀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 두억시니를 죽인 다음,
명령자가 사라져 날뛰는 역귀들을 상대로 길을 뚫어서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는 것.
하지만 이게 가능할지 어떨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진혁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두억시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두억시니는 그다지 싸울 생각이 없는지 진혁을 피해 움직이며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대치하고 있던 아까와는 달리 진혁이 움직일수록 다른 이들이 위험해져 버렸기에
계속 움직일 수도 그렇다고 몸을 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놈을 잠시라도 잡아둘 게 필요해!!”
진혁의 외침에 정상병은 뭔가 방법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정상병의 눈에 박일병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제압당했을 때 빼앗겼던 가방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박일병에게 정상병이 소리쳤다.
“연막탄!”
그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박일병은 다급히 가방을 뒤져 남아있던 연막탄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던져!”
박일병은 주저 없이 핀을 전부 뽑아버리고는 두억시니에게 연막탄을 던졌다.
곧 두억시니 주변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금세 하얗게 피어오른 연기가 두억시니의 앞을 뒤덮자 진혁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두억시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두 가운데로 모이세요! 밖으로 나가면 역귀들이 있어요!”
연기 속에서 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보이지 않는 두억시니의 다음 목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두억시니는 크게 괴성을 지르고는 진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단상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리 오고 있어요! 다들 피해요!”
그 와중에도 진아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기에서 벗어난 두억시니가 마주한 단상 위에는
진아뿐 아니라 진혁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진아의 목소리는 진혁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고마워. 위험하니까 어서 내려가!”
진아를 단상 아래로 내려보낸 진혁은 달리던 속도를 주체못하고 버둥거리는 두억시니를 향해
있는 힘껏 뛰어들었다.
‘한방! 온 힘을 실어서 한번에 끝내야돼!’
두억시니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진혁의 칼은 두억시니의 몸 최 선단에서부터
수직으로 깊숙이 긁고 지나갔다.
진혁은 예의 그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지만 큰 무리 없이 바닥에 착지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두억시니 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억시니는 큰 타격을 받은 듯 좌우로 크게 갈라진 몸뚱이를 흔들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진혁은 재빨리 진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진아는 충격적인 얼굴로 소리쳤다.
“안돼요... 잡아야 되요! 저게 다른 사람들을...”
진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억시니는 미칠 듯이 몸을 요동치며 가까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진혁은 막아보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진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어서는 다친 곳을 메꾸듯이 찢어 넣는 두억시니의 모습이었다.
“안돼....”
상처가 빠르게 채워져 가는 것을 본 진혁이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멍청한 놈.”
어딘가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두억시니에게 달려들었다.
잡히는 대로 사람들을 찢어 붙이던 두억시니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칼 두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달려오는 그에게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들고 있는 저 칼들. 역시 위험한 느낌이었다.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지만, 상처가 아직 깊었기에 움직임이 굼떴다.
두억시니가 버둥거리는 사이 상혁은 어렵지 않게 두억시니쪽으로 뛰어 들어가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두 개의 칼은 마치 춤을 추듯 역귀의 몸뚱이를 잘라 대고 있었다.
보통 역귀와는 비교하기 힘들정도로 크고 강한 두억시니지만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상혁의 검을 막을수도, 또 도망칠수도 없었다.
위험을 느낀 두억시니는 다시 한번 큰 울음소리를 내어 역귀들을 불러 모았다.
“밑에 놈들 부르려고? 안될걸?”
상혁의 말처럼 역귀들은 달려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달려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자, 우리 대장님이 저 덩치 큰 놈 썰어 재끼시는 거 다들 봤지?”
어디선가 진수가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분이 들고 계신 무기가 바로 이빨이란 것이다.
이빨만 들면 누구라도 역귀들을 아주 사정없이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가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내가 역귀한테 악감정이 있다.
혹은 내가 여기서 살아나가야겠다. 라는 분들. 전부 하나씩 골라가셔.”
곧 진수의 뒤에서 이빨부대 몇 명이 자루 속에 담긴 날붙이 들을 바닥에 쏟아놓기 시작했다.
분명 필요할거라며 상혁이 준비하도록 시킨 이빨 들이었다.
사람들이 주저하자 진수는 곧바로 자신의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못 믿겠으면 직접 한번 보시던가. 얘들아! 저 역귀놈들 전부 쓸어버려!”
진수의 외침에 마을 안으로 들어온 이빨부대가 가까이 있는 역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마을 사람 몇 명이 바닥에 있던 이빨을 집어 들었다.
무기를 집자마자 오싹하고 역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저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는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역귀들에게 달려들었다.
상당한 수의 역귀였지만 이빨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사람들 역시 모두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귀 사태 이후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속도보다 역귀가 죽는 속도가 더 빨랐다.
상황을 파악한 두억시니에게 공포의 감정이 비쳤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잊었던 공포감이 찾아오자 두억시니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보내줄 정도로 상혁은 무르지 않았다.
“두억시니란 녀석은 엄청난 괴물이니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더니
그냥 좀 덩치 큰 역귀네.
괴물 주제에 머리는 좀 굴리나 본데 결국은 돌대가리고.
겁낼 거 하나 없겠어.”
상혁은 재빨리 두억시니를 뒤쫓아서는 몸을 지탱하고 있는 부속지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두억시니는 그야말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무기력해졌다.
그 사이 주변에 있던 역귀들도 대강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혁의 손에 의해 두억시니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이빨부대도, 칼을 들고 역귀와 싸우던 마을 사람들도
역사적인 첫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상혁은 칼에 묻은 두억시니의 체액을 털어내며 진혁에게 다가갔다.
진혁은 아직도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칼 어디서 났어.”
진혁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당당히 마주 서려 했지만 혼자 서기에는 버거웠는지 비틀대었기에
진아가 달려와 부축을 해주어야 했다.
“다시 물어볼게. 그 칼은 뭐고 어디서 났어.”
진혁은 상혁을 노려보며,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촌장님께 받았지. 오래전에 신녀 할머니께 받아서 맡아두고 계셨던 물건이야.
타인의 희생이 아니라 내 피로 역귀를 베어내는 칼.
촌장님은 아저씨에게 넘기려고 했는데 아저씨는 거절하셨지.
결국엔 내가 쓰게 되었어.
세상에 딱 하나뿐인 물건이지.
이건 딱 한 사람만 주인으로 삼으니까
형이 뺏어간다 쳐도 못 쓸 거야.”
진혁은 상혁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단 하나뿐인 귀한 물건을 받지 못했으니 질투할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상혁의 분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터져 나왔다.
“아예 칼까지 쥐여 줬는데 거절을 하셨다?”
상혁은 진혁의 칼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점차 언성을 높였다.
“역귀랑 싸우라고 턱밑에 칼을 가져다 바치기까지 했는데 그걸 걷어차고 그냥 죽어버리다니.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왜 도망치기만 했던 건데?
왜 싸우질 않았던 건데?
역시 아저씨는 틀렸어.
내가 각오한 모든 게 우스워질 만큼 무책임하고 멍청한 사람이야.
그냥 평생을 도망만 쳐왔던 겁쟁이.
너도 다를 것 하나 없어.
아저씨가 능력이 있어도 안 싸웠다면,
넌 싸울 생각은 있지만, 능력이 없지.
한심하긴 매한가지야.
늘상 지킨다. 구한다. 말만 할 뿐이지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입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진혁은 소리쳤다.
“형은 아무것도 몰라! 아저씨는 훨씬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어!”
진혁은 상혁이 모르는 예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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