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잠은 잘 잤는가? 잘잤길 바래야 겠군. 오늘부터 많이 바빠질 테니 말이야."
 
박노인의 말에 진아는 투덜거리며 눈앞에 식사를 바라보았다.
 
식량이 풍족한 곳이라더니 확실히 식탁에 올라온 것들은 이 상황에서 사치스럽다 느껴질 정도였다.
 
"많이 드시게. 두억시니님을 모실 귀한 인재시니 내가 조금 더 신경 썼네.
 
든든히 먹어 두시게."
 
진아는 수저를 드는 대신 박노인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가둬두고 막대하고있는건 아니죠? 지금 차려진 이정도는 대접해 주셔야 될거에요."
 
박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시게. 내가 부족하지 않게 챙길테니. 우선 가볍게 식사를 하시고 곧바로 교육에 들어가겠네.
 
아가씨는 아주 좋은 기운을 가졌지만 눈이 트여 있지는 않아.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주겠네."
 
진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갇혀있는 진혁과 황반장을 위해 순순히 따라야 할까?
 
아니면 뭔가 탈출할 기회를 봐야할까?
 
어느쪽도 간단치 않았다.
 
진아의 고민을 눈치챈 것인지 노인은 다시 명확하게 말했다.
 
"어제도 말했듯이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그러니 차분히 내 말을 듣는게 좋을거야."
 
진아는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희망은 놓지 않았다. 
 
할머니가 꿈에 나온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걸 믿고 지금 당장은 조용히 시키는대로 해보기로 했다.
 
"우선 편히 식사하시네. 난 자네 동료들 식사 챙기는걸 좀 보고 올테니."
 
노인은 밖으로 나가 청년 몇명을 불러모았다.
 
"제물들 식사는 아직이겠지?
 
준비해서 가지고오게. 나도 함께 갈테니.
 
그 친구와 조금더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말을 마친 노인은 잊을뻔 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지시했다.
 
"아 그리고 몇 명 더 불러오게. 
 
활달한 친구니, 손이 더 필요할게야."
 
곧 식사와 함께 청년 몇명이 모여들었다.
 
배식이라기엔 지나치게 거창한 인원이었다.
 
노인은 그들과 함께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창고로 향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이미 준비하고 있던 진혁과 다른 이들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한두명은 아닌것 같죠?"
 
박일병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과하다고 해야할지 적절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 그때 밖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부산스레 미안하네. 그냥 소소하게 식사를 챙겨줄 수도 있네만 
 
내가 또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거창하게 준비했네.
 
뭔가 준비했을 테지만 그건 그냥 묻어두길 바라네.
 
인질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네들뿐만은 아니니."
 
진혁은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허튼짓하면 진아한테 해를 끼쳐 주시겠다?"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워 견디기 힘든 진혁이었다.
 
"자네 잘못이 아니네. 방법은 있을테니 너무 염려말게."
 
황반장이 위로를 해주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노인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문을 열겠네."
 
곧 문이 열리며 노인이 청년들을 대동한채 창고안으로 들어왔다.
 
모두는 줄이 풀려있는 진혁과 다른 이들을 보면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저  얌전히 잡혀있을 사람들은 아니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내 식탁으로 초대하긴 좀 그러니 허름하지만, 이곳에서 식사를 대접 할 수 밖에 없겠구만.
 
내 잘먹여주겠다 약속했으니 차려진 것에 아쉬움은 없을게야.
 
물론 그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자네 대답 여하에 따라 이 식사가 정갈하게 제공될 수도 있고
 
그대로 돼지 밥이 될 수도 있네."
 
노인은 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제안했다.
 
"자네가 내밑에서 일해주기만 한다면 모두를 살려주겠네.
 
하지만 그게 싫다면 전부 제물행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진혁은 황반장과 다른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겠나? 자네라면 모두가 제물로 바쳐지는 걸 견디기 힘들겠지.
 
그러니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 믿네.
 
자네가 고개 한 번만 끄덕이면 이들은 아주 편안한 삶을 가지게 될 거야.
 
내 약속하지. 모두가 이 마을에서 행복할걸세.
 
그리고 자네 역시 남부럽지 않게, 멋진 삶을 살겠지.
 
마을 사람들을 돕고, 또 존경을 받으면서 말이야.
 
아주 쉬운 질문이니 오래 고민하지 않았으면 하네."
 
진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올바른 선택. 이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진혁은 대답하는 대신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아... 진아는 어떻게 되죠?"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 아가씨는 자네 선택과 관계없이 무녀가 될걸세.
 
나조차도 얻을 수 없었던 지극히 영광스러운 자리이지.
 
내 장담하건대 두억시니님의 색시가 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축복이야.
 
자네도 머지않아 알게 될걸세.
 
그러니 선택하게.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녀의 행복을 옆에서 지켜보겠나?
 
아니면 모두의 원망을 받으며 다 같이 두억시니님께 영혼이 해방되겠나?
 
자네는 영리하니 답을 알 수 있을걸세."
 
진혁은 눈을 감았다. 무엇이 맞을까? 
 
언제나 올곧은 마음을 가지면 자신만의 신념이 생긴다는 아저씨의 말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곧바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마음이 너무 약해진 탓일까? 아니면 너무도 잔혹한 조건을 내걸어서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웃으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조급했던 모양이군. 
 
자네를 위해 시간을 좀 주도록 하겠네.
 
동료들과 이야기도 좀 나누고 조언을 구해도 좋네.
 
물론, 이 먹음직한 음식들을 먹는 건 내게 대답한 다음이야.
 
사람을 세워둘 테니 결정을 내렸으면 부르도록 하게.
 
대신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음식이 식으면 맛이 없지 않겠나?"
 
곧 문이 닫혔다.
 
잠시동안 창고 안에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나 걸리겠어?"
 
상혁의 질문에 혜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작업에 열중하며 말했다.
 
"오전 중에는 가능해요. 자꾸 말 시키지 마요 집중력 떨어지니까."
 
퉁명스러운 말에 상혁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혜정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악했지만 병사들이 꽉 잡아준 덕에 작업에 차질은 없었다.
 
상혁은 다른 병사들에게 말했다.
 
"무기가 필요해. 날붙이는 뭐든 좋으니 구해놔. 
 
새로 차출할 병력들에게 분배할 거야.
 
싸워본 경험은 별로 없을 테니 괜스레 단검술 같은 거 가르칠 생각 말고
 
튼튼한 막대기 여러 개 구해다가 끝에 칼 매달아서 창으로 만들어.
 
그거면 몸 써본 적 없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싸움은 가능할 테니."
 
빠르게 명령을 내리고는 진수를 찾았다.
 
"넌 나 따라와. 이제부터 구조된 사람들 편제 시작할 거야.
 
전투조. 이빨 공장. 둘 중 하나. 나머지는 퇴출이야.
 
괜스레 반발 있으면 본보기로 분위기 좀 잡아.
 
그렇게 원하던 완장 채워줬으니 마음껏 휘두르란 말이야."
 
진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상혁을 따랐다.
 
"아이고 그럼요. 제 특기 아닙니까.
 
아주 카리스마 있게 좌중을 휘어잡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여나 거슬리는 놈 있으면 그냥 다 쑤셔버릴 테니 
 
마음 푹 놓으시고 큰일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까불거리는 진수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이동한 상혁은
 
넓은 공간에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 섰다.
 
대략 삼십여 명. 그중 젊은이가 이십 명 정도 되었고 나머지는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많았다.
 
대략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 상혁은 곧바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들었겠지만 어제부로 지휘권이 바뀌었다.
 
따라서 이빨 부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 될 거야.
 
그간 당신들은 구조된 입장에서 받기만 했겠지만 
 
지금부터는 필요에 의해 새로이 인원 편성을 하도록 하겠다.
 
물론 강제성은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떠나도 좋다.
 
하지만 남는다면 적어도 역귀한테 찢어 죽거나 비참하게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우선 첫 번째. 
 
전투원으로 쓰일 젊은 남자를 뽑겠다.
 
이빨 부대에 편제돼서 역귀들을 쓸어버릴 사람들.
 
지금까지 알던 이빨과는 달리 새 무기는 아이를 찌를 필요도 없고 역귀한테 효과도 좋다.
 
그간 도망만 다니던 역귀 놈들을 두부 썰듯이 썰어버릴 테니 지원해 주기 바란다.
 
전투원들은 당연히 그 위험성에 걸맞은 영광스러운 대우를 해줄 것을 약속한다.
 
다음으로 미래사회의 일원이 될 가족.
 
부부와 연인을 우선적으로 뽑겠다.
 
역귀를 사냥할 이빨을 위해서는 아이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낳아서 부대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더이상 칼로 찌르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전문가가 작은 문신 하나만 새겨넣을 거야.
 
그게 전부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인류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했으면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가족을 만드는 일이야.
 
역귀들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대신 새로운 희망을 키우는 거다.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테니 빠짐없이 지원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부부, 연인 외에도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다면 환영이다.
 
특성상 여성들에게 자신의 피앙세를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다시 말하지만, 강제성은 없으니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가정을 만들면 된다.
 
모든 것이 싫거나 불가능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보호 활동을 하지 않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곳에서 추방하도록 하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아직 어린애들이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상혁은 주저 없이 말했다.
 
"예외는 없다. 전투원이 되거나 아이를 만들거나.
 
그걸 하지 못한다면 받아주지 않는다."
 
고등학생 정도 된 듯한 딸을 곁에 둔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쳤다.
 
"미친 소리! 그럼 이 어린것이 강제로 결혼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상혁은 대답 대신 진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기회를 보고 있던 진수는 곧바로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이 아저씨. 우리 대장님이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
 
예외는 없다잖아. 예외는. 미래의 국민을 낳는 일인데 안 될 게 뭐 있어.
 
옛날엔 다 열네 살 열다섯 살이 애도 낳고 다 했어. 
 
뭐가 걱정이야?"
 
그말에 남자는 화가 났는지 진수에게 소리쳤다.
 
"뭐야? 이게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어?
 
어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서 수작을 부려? 어?
 
당신들 미쳤어? 어? 제정신이야?"
 
진수는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아이고 우리 아저씨가 또 분위기 파악 못 하시고 목소리를 높이시네.
 
이봐 성질 급한 아저씨. 내가 누군지 아쇼?"
 
남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수는 주머니에서 식칼을 꺼내서는 곧바로 남자의 목에 꽂아 넣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는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고 놀란 남자의 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당신들 책임자야. 대장님이 직접 내게 당신들 관리를 맡겼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제 당신들 목숨은 내가 손에 딱 쥐고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겠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을 잘 들어야겠지?
 
잘 알아들었으면 이제 얌전하게 입 다물고 대장님 말씀을 들어. 알겠지?"
 
진수는 만족스럽게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몇 번 숨을 헐떡이며 피를 토해내던 남자는 딸의 손을 잡으려는 듯 휘저었지만
 
끝내 잡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 
 
자, 내가 이빨 부대에 들어가서 영광스런 전투원이 되겠다 하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이제 내가 가족을 만들어서 이빨 공.... 아니. 러브러브 모드로 인구수를 늘리는 데 일조하겠다 하는 분들은 둘씩 짝지어서 여기 이쪽으로.
 
또 싱글인데 짝을 찾겠다 하는 분들은 파트너 찾아오시고.
 
내가 이도 저도 아니다. 하면 저쪽으로 가서 찌그러져 계셔."
 
사람들은 허둥지둥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대충 돌아가는 것을 보니 상혁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였다.







“어떻게... 그래도 뭔가 빨리 결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침묵을 깬 건 박일병이었다.

넋이 나간 듯한 진혁과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황반장.

그리고 모든 의욕이 사라진 정상병 대신 나선 것이다.

하지만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전 이게 고민할 거리는 아닌 것 같거든요?

막말로 그냥 죽을래 살래 이거잖아요.

말 안 들으면 다 죽일거다.

대신에 내 밑으로만 들어오면 잘해주마.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어차피 여자분한테는 선택권이 없다면서요.

그냥 무녀로 호의호식하게 해준다는데 뭐가 문제냐 이거죠.”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슬슬 박일병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걸리는게 뭔데요. 대체 뭘 어쩔 생각인데요?

왜 그 노인네 밑으로 안 가는데요?

악당이라서? 그냥 그게 싫은거에요?

하는 소리 보면 구구절절 다 맞는데 왜 악당이에요?

아니 그래요. 뭐 다 그렇다 쳐요. 악당이라 치자구요.

그래서요?　당신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정의로운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솔직히 저는 그딴거 보다 당장 내 목숨이 중요하거든요?

그딴 괴물 새끼한테 찢겨 죽을 생각은 없다 이거에요.

죽으려면 당신들만 죽으면 되잖아. 왜 나까지 그래야 되는데!”

박일병이 화를 내기 시작하자 정상병이 입을 열었다.

“그만해. 다 아니까 그만하라고.”

하지만 박일병은 멈추지 않았다.

“다 알면 문제없잖아요!

지금 당장 한마디만 딱하면 풀어주고 밥도 주고 지켜줄텐데.

대체 왜... 아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아무튼 난 이미 결정 내렸어요.

다들 가만히 있으면 나만이라도 나갈래요.

뭐 괴물한테 절하라면 절하고. 숭배하라면 숭배할 테니까

난 그냥 좀 추해도 편안하게 살꺼에요.”

박일병은 문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저좀 풀어주세요. 그 두억시니님. 저도 모실테니까.

진심으로 섬길테니까 어르신을 만나게 해주세요.

저기요?”

밖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소용없을거네.”

황반장의 말이었다.

“그 노인네 보통이 아니었어. 그리 간단히 받아주지는 않을걸세.”

정상병이 덧붙여 설명했다.

“굳이 우리를 묶어서 얘기한건 우리까지 인질로 잡았단 소리니까.

네가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들어주지 않을 거야.

저 사람이 결정하고 움직여야 뭐가 되도 되겠지.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단 얘기야.”

박일병은 멍하니 그걸 듣고 있다가 다급히 진혁에게 다가갔다.

“당신, 빨리 얘기해. 어떻게 할 거야?

그냥 죽을 수는 없잖아. 그치? 뭐 싫은 것도 알고 나쁜 것도 알고 뭐 다 알겠는데

그래도 일단은 살아야 되잖아.

살아야 뭘 하든 할 거 아니야 그치?

우리 전부 목숨이 달린 건데 막 쓸데없이 고집부리지는 않겠지?”

진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하게. 가뜩이나 마음의 짐이 많은 친구이니 정리할 시간을 좀 주는 걸로 하지.”

황반장의 말에 박일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야 되는데!!!”

한번 흥분하기 시작한 박일병은 멈추지 않고 말을 토해냈다.

“다 죽었어. 내가 아는 사람들, 가족들, 그리고 부대원들.

우리가 봤던 그 많은 사람이 전부 다 죽었다고.

그 괴물 새끼들한테.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발악하는 동안에도 그 사람들은 찢겨 나갔어.

반항 한번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근데 여기는 어떤데?

최근에 이렇게 많은 사람 본 적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군데 모여서 굶지도 않고 비명 지르지도 않고

평화롭게 있는 거 본 적 있냐고.

이게 나쁜 거야?

이게 나쁜 거면 좋은 건 뭔데?

되지도 않는 정의니 뭐니, 헛소리하면서 괴물 새끼들한테 다 꼬라박는 거?

아니면 병신 같이 도망만 다니면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추잡하게 사는 거?

그게 맞냐고!”

정상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일병을 말렸다.

“야 이 새끼야 그만 안 해?”

하지만 박일병의 화를 돋웠을 뿐이었다.

“뭘 그만해!! 내가 틀린 말 했어?

저 새끼 말 한마디면 이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잖아.

제대로 식탁에 앉아서 밥 먹고. 제대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지붕 있는 집안에서 괴물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왜 이러고 있냐고?

벌써 몇 달 동안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다가

이제 사람답게 살 기회가 왔는데

뭐? 그거 대신 그냥 괴물 밥이나 되라고?

당신들은 어떤지 몰라도 난 죽어도 그거는 싫거든?

그러니까 제대로 결정해.

아니 결정도 아니야 입 열고 한마디만 하라고.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럼에도 진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 들어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뭔데 내 모가지를 네가 쥐고 있는건데?

어? 대체 뭐 때문에 거기서 아가리 여물고 찌그러져 있는건데?

일어나 이 새끼야!!!”

박일병이 진혁의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진혁 대신 정상병이 박일병에게 다가가 뺨을 후려갈겼다.

“가만히 안 있어? 안 그러던 놈이 왜 이래?”

박일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서러움을 토해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아니잖아요... 그냥 살고싶은건데.

다 필요없고 그냥 살려달라는건데 왜....”

황반장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탁이네.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하세.

믿을만한 친구니 진혁이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나.”

진혁이 입을 연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네.

아가씨 정도라면 쉬이 들을 수 있을게야.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지.

충분히 느껴야 한다네.”

식사가 끝나자 박노인은 진아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신부수업 명목으로 영적인 감각을 익히는 수업.

대부분은 모호한 개념들이었기에 지식 전수라기엔 뜬구름 잡는 소리가 많았지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지낸 진아는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잘 배워두면 이 상황을 타개하거나 하다못해 나중에라도 쓸 일이 있을 것 같았기에

진아는 군말않고 열심히 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목소리를 듣는게 아니라 마음을 받아들이는것이지.

감정과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라는게 이해가 빠를걸세.

두억시니님이야 자아와 의식이 있으시니, 조금만 해보면 금세 가능할걸세.

아가씨처럼 영기가 좋다면 역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본능뿐인 괴물이라지만 그래도 한때는 인간이었고 희미하게나마 의식은 있을테니.”

진아는 문득 의아해하며 물었다.

“인간..이요? 역귀도 인간이었어요? 분명히 역귀는 몸을 찢어서 다른 역귀를 만들어 내는거라고 들었는데...”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했다.

“그래. 지금 대부분의 역귀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하지만 신체 역시 인간이고 몸에는 기억이 남아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역귀 역시 인간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네.

그리고 내가 모시고 있는 두억시니님이나 과거 동굴에서 나온 역귀들은 대부분 인간이 역귀로 변한 경우지.”

조금은 놀라운 이야기였다.

만약 인간이 역귀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은 어떨까?

감염되거나 옮긴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할 것이 뻔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거네. 지금의 아가씨는 두억시니님의 목소리를 쉬이 들을 수 있고,

또 조금 더 정진한다면 역귀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을게야.

그러니 잡념을 버리고 집중하게.”

그때, 밖에서 노인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잠시 다녀올 테니 내가 알려준 대로 정신을 맑게 하고 차분히 기다리게.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두억시니님을 맞이할 것이야.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신의 색시가 된다는 자각을 가지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할걸세.”

곧 밖으로 나온 노인에게 마을 청년이 말해다.

“결정을 내렸으니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노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뭐 그렇겠지. 저런 호기로운 젊은 친구들은 그 심리를 잘 이용해야 해.

‘너한테 부귀영화를 줄 테니 내 밑에 들어와라’ 하면 주저 없이 죽을 녀석들이지.

하지만 다른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걸면 주저하게 된다네.

그 정의감이 발목을 잡는 것이지.

뭐 사실 나로선 어느 쪽이든 관계없네.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면 사람들을 인질 삼아 힘깨나 쓰는 부하를 손에 넣는 것이고,

신념을 지키겠다고 하면 그냥 두억시니님께 바칠 제물들을 얻는 것이고.

못해도 본전 이상은 하는 거래야.

기억해두게. 모든 거래는 상대가 뭘 하건 손해가 없도록 치밀하게 짜야 해.”

노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진혁을 대면했다.

“그래. 결정은 내렸는가? 내 생각보다 시간은 좀 걸렸구만.

음식은 이미 다 식었겠어.

다만 자네가 좋은 결정을 했다면 내가 특별히 다시 한창 거나하게 차려 주겠네.

어제부터 많이 시장할 것 아닌가?”

진혁은 그런 노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안 주신건 제가 충분히 고민해 봤어요.

그리고 결정했죠.”

“그래. 올바른 결정을 내렸겠지?

사실 이게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싶기는 했네만...”

노인의 말의 진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사실 쉬운 문제였지만 그래서 더 어려웠어요.

저희 형 생각이 나서 말이죠. 아, 상혁이형 기억하시죠?

저랑은 달리 머리도 좋고 능력도 좋아서 다들 좋아하셨는데.”

상혁이라면 노인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몸도 다부지고 머리도 좋고 다방면으로 뛰어나서 요새 보기 드문 인재라고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었다.

“저희 형은 어릴 때부터 선택지를 주곤 했었어요.

설거지할래? 아니면 대련할래?

집 청소할래? 아니면 나가서 하루종일 농사일 도울래?

대부분은 이렇게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철이 들면서 나중에야 알게 된거죠.

아 이게 내가 속고 있구나.

나한테 기회를 주는 척하면서 답을 강요하고 있구나.

내 시각을 좁히고 딴생각을 못하게 끔 하는 수작이구나.”

노인은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형제구만. 좋아 그래서 어떻게 했나?

그 말에 따르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다른 선택을 했나?

바보 같은 짓이네. 지기 싫어서 더 어려운 길을 걷겠다니 말이야.”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것보다 더 좋은게 있었죠.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선택지란 게 사실 두 개일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 순순히 영감님 농간에 놀아나지는 않겠다 이겁니다.”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인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네.

애석하지만 그리 나온다니 나도 별수 없구만. 자네들은 모두 죗값을 치러야겠어.

두억시니님께 제물로써 사용될 걸세.

영혼 해방 역시 그리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부귀영화를 버리면서까지 고집을 부리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군인 대장 놈은 원래 계획대로 내 직접 벌을 내리는 거로 할 테고,

오늘은 자네들 넷이 전부 다 제물이 되어야겠군.

두억시니님께 색싯감을 소개하고 혼례를 올리는 좋은 자리니만큼 푸짐해야겠지.

전부 다 묶어. 이번엔 꼼짝도 못 하게 아주 단단히.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두억시니 님께서 오실 테니 준비해.”

노인의 말에 청년들이 다가와 네 명을 묶었다.

진혁은 별다른 저항 없이 포박을 당하고 있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