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리저리 정리할 것이 많아 이제야 일기를 쓴다.

지독히 쓸쓸한 죽음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닮아 그러하듯 아버지께선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루게릭 병으로 누워 계신 지가 얼추 10년이었다. 아버지께선 누워계시는 동안 조카나 친척들께서 찾아오는 것조차 극도로 꺼려 하셨고, 자신의 병든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친구나 지인이 남아 있을 리 없었고, 아버지의 빈소에 찾아오신 아버지 지인분은 거의 10 년을 들락날락했던 동수원 병원의 간호사님 한 분과 간병 이모들, 그리고 노무사님뿐이었다.

투병 생활 동안 아버지의 소통은 루게릭 협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동병상련으로 뭉쳐진 커뮤니티였다. 다만 아버지께선 루게릭 병 환자 중에서 생존 기간이 비교적 긴 편이었고, 안타깝게도 많은 루게릭 협회 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아버지의 죽음에 애도해 주실 수 있는 분 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 오래 생존하신 딱 한 분께서 근조 화환을 보내주셨고, 그것이 아버지의 기나긴 투병 생활과 루게릭 협회에 쏟은 애정을 증명하는 듯한 산물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촉이라는 게 과연 실존하는 것이었을까?

마치 아버지께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보였다.

돌아가시기 거의 직전, 자신을 오래 돌봐주던 간병 이모를 단어 그대로 '즉시' 내쫓았다. 그 당시의 나는 의아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돌아가시기 전 자신을 오래 돌봐준 간병 이모에게 일부러 정을 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아생전에 아버지께서는 간병 이모에게 자신의 상태가 안 좋아지시면 그냥 죽게 내버려달라고 말씀하셨었다고 한다. 하지만 간병이모께서는 그럴 수 없다고, 119에 신고해서라도 어떻게든 살려내겠다고 얘기하셨다고 한다. 그 말대로,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간병 이모가 그날 계셨더라면 어쩌면 아버지께선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연명 치료하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으므로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감지하고 간병인을 미리 내 쫓는 조치를 취했던 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선 내가 얼마나 바쁘고 힘들게 일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시간 동안에는 일체 연락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하시던 날 낮 시간대에 힘겨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좀 와줄 수 있냐는 얘기를 하셨다. 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얘기를 길게 나누고 싶으셨던 걸지도 몰랐다.

일을 번개처럼 끝내고 조퇴한 후 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땐, 아버지께선 간병인도 없이 침대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계셨다. 어찌 된 거냐고 물어보니, 그날 새로 온 간병인이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며 꼼짝도 못 하는 환자를 내버려 두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아버지 소변이며 물이며 집에 있던 간식들을 먹여드리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 물론 그날이 아버지와 마지막 날 임을 전혀 인지한지 못한 채...

그날 밤늦게 간병인이 다시 돌아왔고, 난 간병인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선 예전에 자신을 돌봐줬던 다른 간병이모도 불렀다. 믿을 만한 새로운 간병인을 소개해 달라는 명분으로... 그분은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주셨던 활동보조인 이모였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작별 인사라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날 밤 아버지께선 마치 주무시는 듯한 편안한 모습으로 떠나셨다.

난 아버지께서 루게릭 병 확진 받으셨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나니 할 일이 산더미였다. 어머니와는 이혼하셨고, 자식은 나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며 채권 정리며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상한 건 그 이후 부터 였다.

일상으로 복귀한 후 아버지께서 날 지켜준다는 느낌을 여러 차례 받았다.

거의 15년 동안 내 과실의 접촉 사고 한 번 없었던 나에게 몇 번의 큰 사고 위기가 연달아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한 끗 차이로 모두 비켜나갔다. 사이드 미러에서 보이지 않던 제네시스가 빠른 속도로 갑자기 나타나 내 차와 손 한 뼘도 안 되는 간격으로 스쳐 지나간다든지 하는 일들이 말이다.

심지어 주차장에서 접촉사고도 한 번 일으켰는데, 상대방 차주께서 크게 망가진 게 아니니 그냥 가라는 얘기도 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일이 자세히 열거하긴 힘들지만, 금전 문제나 부동산 문제 역시 누가 몰래 도와주고 있는 것 마냥 술술 풀렸다.

그때 느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날 도와주고 계신 거라고...

아버지께선 외동아들인 나를 극도로 아껴주셨었다. 어느 부모님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뉴스에 가끔씩 나오는 부모, 아니 인간 같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더욱 크게 느껴진다. 내가 부모님을 잘 만난 거라고...

살아 계실 땐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선 그 흔한 회초리 매질은 커녕 나에게 욕설 한 번, 큰소리 치신 적 한 번 없었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만큼 효자였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아버지의 사랑엔 이유가 없을 터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무속 관련 일화를 읽다 보면 수호령이 지켜준다는 내용이나 조상님께서 도와주셨다던가 하는 내용의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물론 내가 신기가 있어 돌아가신 아버지와 내가 직접 얘기를 하거나 만나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육신은 화장되어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 외의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무언가가 날 긍정적인 방향으로 도와준다는 것을 확신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