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달려가던 진혁은 들려오는 총소리에 마음이 급해짐을 느꼈다.
총따위로는 역귀를 절대 죽일 수 없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역귀들을 모으는 역효과만 있을뿐.
진혁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들었다.
아직 실전에서 써본일이 없어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오늘 거하게 데뷔전을 치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곧 역귀 특유의 지독한 악취가 사방에서 나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한두마리가 아닌데?”
걱정스런 마음이 커지던 그때, 진혁의 눈에 역귀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급히 몸을 숨기려던 진혁은 역귀의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레 역귀에게 다가갔다.
역귀는 평소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지도 휘적휘적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석상이라도 된양 그 자리에 얌전히 서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니 그런 녀석들이 한두마리가 아니었다.
제법 많은 수의 역귀들이 마치 마을을 포위하듯 적당한 거리를 둔채 가만히 지키고 있었다.
한번도 이런걸 본적이 없었기에 진혁은 우선 잠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때, 마을 쪽 방향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군인복장을 한 두명이 역귀 때문에 함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진혁은 역귀들의 행태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이쪽이에요. 잘은 모르지만 이녀석들 안움직이고 있으니까 천천히 이쪽으로 오세요.
혹시라도 움직인다면 곧장 제 쪽으로 뛰어오세요. 제가 구해드릴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군인들은 천천히 역귀 포위망 쪽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역귀들은 진혁의 목소리를 듣고도, 병사들의 움직임을 보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몇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역귀를 지나쳐서 포위망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진혁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역귀의 뒤쪽으로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병사 한명이 정확하게 역귀의 옆을 지나친 그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역귀가 긴 울음소리를 뱉어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뛰어요!”
진혁은 그렇게 소리치고는 곧바로 역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매섭게 휘두르는 역귀의 부속들을 피해서 역귀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부분을 베어내었다.
‘헉’
칼은 역귀의 다리를 깊이 베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한번의 칼질로 인해 순식간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고작 한번만으로 이정도라면 절대 오래싸워서는 안된다.
진혁은 병사들이 잘 도망친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역귀는 그정도 상처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지 전혀 수그러들지 않은 기세로 진혁에게 쇄도해왔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서웠기에 여유있게 피할 수도 없고, 또 지금 상태로 시간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다.
진혁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하고는 역귀를 노려보았다.
여기저기 기워진 듯한 역귀에게 고정적인 약점이 있을리 없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을 것이다.
칼을들고 자세를 잡은채 가만히 기다리던 진혁은 역귀의 첫 번째 공격을 피해내고는 역귀쪽으로 한발 들어가서는 사선으로 크게 칼을 휘둘렀다.
역시나 아찔할 정도의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진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상처를 따라 정확히 같은 위치에 다시한번 칼을 휘두르자 역귀의 몸이 크게 갈라지며 힘을 잃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역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걸 확인한 진혁은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첫 전투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지만 아무래도 버거웠다.
가급적 전면전은 피해야겠다 생각한 진혁이었지만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진혁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일으키고 몇걸음 더 움직였지만 몸은 한계에 왔는지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바닥이 마치 늪처럼 몸을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풀냄새 흙냄새를 맡자 정신까지 몽롱해져 더 이상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다.
진혁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뭐야 왜 너희만 와? 최대위는?”
진수 앞에는 숨을 헐떡거리는 5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처음 최대위의 거래를 통해 풀려난 다섯이었다.
“인원들을 전부 불러주십시오. 최대위님과 부대원들을 구해야 합니다.
정신나간 사람들이 대위님과 동료들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지금 당장 구해야 합니다.”
진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진수도 나머지 병사들도 죽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위로 올라가봐.
내가 늘상 말하던 대장님이 오셨으니까 인사 드려야지.
여기있던 놈들은 이미 다 인사드리고 복종을 맹세했으니까 너희도 빨리 해.
그리고 나서 뭐 명령을 받든가 구하러 가든가.”
병사들은 진수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한채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부대원들을 모아 다시 마을로 쳐들어갈 생각에서였다.
다급히 상주하고 있던 인원들을 찾아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왠지 미적지근했다.
“그게... 지금 우린 대장님 지시에 따라야 해서... 최대위님 말고.”
“무슨소리야. 우리 대장님은 최대위님이지. 빨리 구하러 가야한다니까?”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자 곧 상혁이 그들앞에 나타났다.
“제물이라니 제대로 얘기해 봐.”
상혁의 말에 병사들은 지금까지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수상한 마을을 찾아간 일. 노인과 대화를 한 것. 식사중 습격을 받은 것.
그리고 노인이 두억시니란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두억시니란 말에 상혁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님은 분명했다.
언젠간 싸워야 할 상대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상황은 알겠다. 하지만 지금은 두억시니와 싸울때가 아니야.
그러니 최대위와 다른 병사들은 포기한다.
너희가 다시 구하러 가겠다면 말리지 않아.
대신 지원은 일절 없으니 알아서 해.
보나마나 죽겠지만 그게 너희 신념이면 지키라고.
아니면 새롭게 지휘권을 가진 내 밑에서 호의호식 하던가.”
병사들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넘어간 병사들도 있는데다
간신히 도망쳐온 마을을 무기하나 없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있는 병사들을 보며 상혁은 말했다.
“돌아나갈 생각 없으면 씻고 배나 채워.
기존인원들은 내 지시사항 전달하고.
내일부터 할 일이 많을테니 푹 자둬야 할거야.”
돌아서서 멀어지는 상혁을 가만히 보고 있던 병사들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는 씻기위해 욕실로, 누구는 배를 채우기 위해 식량 창고로 움직였지만
밖으로 나가는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무슨일이야?”
상혁이 개인실로 돌아와보니 혜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좀 해요.”
상혁은 대답도 없이 의자에 가서 앉았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에요?”
혜정의 물음에 상혁은 주저없이 계획을 이야기 해주었다.
“본격적으로 부대를 만들거야.
군인녀석들이 주 전투원들이 될거고 구조된 사람들중에서 쓸만한 놈들 추려서 부대원으로 넣어야지.
아이들 수색은 지속적으로 할거니 바빠질거야.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내일부터 바로 작업할 거니까.
구조된 여자들도 많을테니 이빨공장도 시작할거야.
물론 선택권은 줘야지.
충분한 물자와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자진해서 이빨공장에 들어갈 것이냐.
역귀들이 득실득실한 밖으로 내몰릴 것이냐.”
혜정은 거부감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는 입을 열었다.
“그놈의 이빨공장 얘기좀 안하면 안되요? 그게 사람이 할짓이에요?”
상혁은 오히려 웃었다.
“애들을 무기로 쓰는 것부터 이미 정상은 한참 벗어났어.
게다가 이빨공장이라고 거칠게 표현하긴 했지만 실상은 상상만큼 끔찍하진 않을거야.
구조된 사람들 중에서는 부부도 있고 연인도 있어.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자녀를 가지는 것 뿐이야.
그리고 다른 여자들에게도 충분히 선택권을 줄거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를 직접 고를 수 있도록 말이야.
정당하게 짝을 지어주는거지.
이런 세상에서도 사랑은 싹트기 마련이고 아이도 태어나기 마련이야
난 그걸 조금 인위적으로 가속할 뿐이지.
그게 싫으면 떠나면 되는거고.”
사랑은 싹트기 마련이다.
혜정은 가슴이 아리는 느낌이 들었다.
“네 덕분에 이빨에 대한 거부감은 압도적으로 줄거야.
아이들을 끌고다니면서 찔러대는게 아니라 언제나 부모가 돌볼 수 있으니까.
후유증은 평생에 걸쳐 조금씩 나타날테니 당장은 크게 체감하지 못할테고.
문제 될 건 없어. 이론상 일년이 지나기 전에 대규모 토벌부대가 만들어질거야.
이제 가능해. 역귀들을 전부 몰아내는게.”
우습게도 혜정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막무가내인 것은 맞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놓였다고 할까?
아니면 정말 역귀를 모조리 없앨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더 할말 없으면 나가봐. 내일부터는 바빠질테니까.”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저도 짝을 선택 할 수 있나요?”
“원한다면.”
혜정은 주저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신을 선택한다면.... 받아주실 건가요?”
상혁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애정이 필요한거라면 이미 말했듯이 네게 줄 애정같은건 없어.”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혜정은 새삼 서글퍼졌다.
“그럼... 그냥 안아주는건요. 애정없이 그냥 안기고 싶다면요?”
상혁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을거야. 네게 애정을 줄 만한 다른사람들.”
혜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이어야 해요.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냥 외롭지 않게 해주세요.”
그걸 가만히 보던 상혁은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하지만 애정은 없어. 앞으로도 그럴거고.”
혜정은 옅게 미소지었지만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까이 오지마.”
예지의 말에 상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하은이가 날 무서워할거라고 했지.
그래도 지금은 잠들었잖아. 잠깐 얼굴이라도 볼게.”
하은이를 안고 있는 예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도 당신이 무서워.”
상혁은 참담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상처가 난 아이 하나 제대로 뉘일 곳 없는 야산은
예지의 훌쩍이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하은이는 좀 괜찮아?”
오랜 시간 침묵을 깨고 상혁이 입을 열었다.
예지는 조용히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열이 안내려가... 우리 하은이 열이 안내려가...
애는 탈진해서 기절한건지 잠든건지 모르게 쓰러져있는데.
내가 할수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상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혁오빠랑 사람들이 물이라도 구해오겠다면서 내려갔어.
뭐라도 찾아오길 기도해야지.”
“미안해. 변명할 생각은 없어. 내가 밉겠지. 그맘 이해해.
너에게도 우리 하은이에게도 너무 큰 상처를 줬어.
날 원망해도 좋아. 정말 미안해.”
예지는 가만히 상혁을 돌아보았다.
“또 우리가 습격을 받으면 그때도 우리 하은이 찌를거야?”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지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다시 하은이를 내려다 보았다.
“당신이라면 그렇겠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후회도 안하고,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하겠지.
당신은 그런사람이니까.”
“네가 죽을뻔 했어. 진혁이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죽을뻔 했다고.
내가 그걸 그냥 지켜봐야 했을까?”
상혁이 언성을 높였다.
예지의 목소리는 오히려 가라앉았다.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어. 아빠가 했던것처럼 그렇게 했어야 했어.”
“아저씨 얘기 그만해! 아저씨는 틀렸어. 아저씨의 그 안일한 짓거리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모양 이꼴인거야.
처음부터 악착같이 역귀들을 상대 했다면 이런 꼴은 안났을 거야.
도망치고. 숨고. 피하고. 그러다가 이꼴이 난거라고.
역귀놈들을 죽일 가장 확실한 무기가 있는데 그걸 안쓰고....”
흥분해서 떠들던 상혁은 예지가 안고 있는 하은이의 모습을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직도 나 사랑해?”
예지의 질문이었다.
“사랑해. 누구와도 바꿀 수 없을만큼.”
“하은이도 아직 사랑해?”
“사랑해. 하은이도 너무 소중한 아이야. 하지만....”
예지는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다른 사람은 절대 사랑하지마.
나랑 하은이가 당신 마지막 사랑인거야.
그것만 기억하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
당신이 사랑하는 우리를 평생 그리워하면서 살라고.”
예지는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은이랑 둘이 있고싶어. 따라오지마.”
그리고 그것이 상혁이 본 예지와 하은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죽어!! 죽어 이새끼야!!”
최대위가 들고 있는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아이의 몸을 파고들자 빨간 피가 솟아올랐다.
피를 흠뻑 마신 총알은 그걸로 모자랐는지 그 뒤에있던 두억시니에게 곧장 날아갔다.
“무슨짓을 하는겁니까!!!!”
어딘가에서 노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최대위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려던 그순간,
두억시니에게 큰 피해를 줄거란 최대위의 기대와는 달리
기세좋게 날아간 총알은 마치 호수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린것처럼
별다른 저항감 없이 두억시니의 몸을 뚫고 들어갔고 그마저도 몇초도 되지 않아 수급이 되었다.
예전 역귀들과의 전투에서 언제나 그래왔던것처럼.
“총으로 이빨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은 짓을.
그런건 소용이 없어요.
날아가는 총알 따위가 순수한 희생을 안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황한 최대위가 총을 내려다본 그순간 달려온 두억시니가 최대위를 잡아들었다.
“안됩니다. 두억시니님. 그 사악한 인간은 그냥 죽여서는 안됩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그 악마같은 자를 벌하고 마땅한 최후를 선사하겠습니다.”
두억시니는 정말 노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멈칫 하더니 최대위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이를 집어들고는 천천히 마을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남은 놈들은 가둬두고, 저 인간은 내앞에 데려와. 내가 직접 심판해야겠다.”
노인이 광장 한켠에 자리하자 마을 청년 몇 명이 나서서는 최대위를 그의 앞에 무릎꿇렸다.
정신우 상병은 다른 병사와 함께 끌려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최대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자신이 관리병을 하고 있던 이유는 최대위가 그래도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은 사람.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돌봐주면서도 그를 존경해 왔다.
하지만 최대위는 거침없이 아이에게 총을 겨누었고 방아쇠를 당겼다.
애초에 아이들의 안위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하는 듯이.
“난 지금까지 뭐한거야?”
자조 섞인 혼잣말이었다.
노인은 분노한 채 최대위에게 소리쳤다.
“그리도 자신있게 신념을 이야기하더니 대체 무슨 꼴입니까?
역시 당신에게 아이들은 그냥 무기일 뿐이었겠지요.
겉으로는 선한척 고통을 감내하는척 하고 있었지만
결국 당신의 속내는 그리도 추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두억시니님께 구원받는건 제가 그냥 두고볼수 없으니 벌을 내리겠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이 광장 한가운데 매달릴겁니다.
그리고 매일 아주 조금씩 당신의 피부를 벗겨내겠습니다.
그 고통을 한달이고 두달이고 감내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후회하고 회계하십시오.
당신은 제물로 바쳐질 자격조차 없습니다.”
최대위는 망연한 표정으로 묶여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실망한건지 아니면 두억시니를 죽이지 못한것에 실망한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정신차려요. 눈좀 뜨고 나 봐봐요. 눈떠요 빨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간신히 눈을 뜬 진혁은 진아의 얼굴을 볼수 있었다.
진혁이 정신을 차리자 진아는 크게 안도하며 원망어린 말을 쏟아냈다.
“세상에. 이제야 일어났네. 아니, 금방 올거라던 사람이 왜 여기에 쓰러져 있어요.
죽은줄 알았단 말이야!
정말.... 안그래도 청혼 미리 받아서 불안한데.
결혼도 하기전에 과부되긴 싫으니까 놀래키지 좀 마요.”
“맞는 말이네. 자네는 뭐든 혼자 하려고 해서 문제야.
서로 의지하면 좋지 않은가?”
진아에 이어 황반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진혁은 둘에게 사과를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제 쓰러트린 역귀의 시체는 근처에 있었지만
다른곳에 있던 역귀들은 어디로 가버린건지 보이질 않았다.
“이 칼 분명 효과는 좋은데 후유증이 생각보다 심해.
익숙해 지는데는 시간이 좀 필요하겠어.”
진아는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중요한거 아니까 내가 그거 쓰지 말라고는 못하겠는데
적어도 쓰러지지는 말아야지.
괜히 익숙해진답시고 혹사하고 그러면 내가 가져다 버릴테니까 그리알아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아직도 울리는 머리를 몇 번 흔든뒤 어제일을 이야기했다.
역귀들의 이상행동은 마치 마을을 고립시켜 놓은 것 처럼보였다.
들어갈수는 있지만 나갈수는 없도록 하듯이.
진혁의 말을 들은 진아는 문득 그전에 느꼈던 이질적인 것을 떠올렸다.
그게 역귀와는 다른 어떤 거대한 존재의 느낌이라면?
“그 두억시니란거 역귀들 우두머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두머리고 또 자아가 있고 지능이 있으면 역귀들을 조종해서 마을을 포위하는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까 말은 안했는데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거든.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있는 느낌이었어.
그게 혹시 두억시니의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가능성이 있어. 그런데 왜 지금은 사라졌을까?
아무래도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알아봐야겠어.
돌아가서 기다려 내가 금방...”
진아는 마을로 가려는 진혁의 팔을 잡아챘다.
“아니 정말. 방금 얘기했는데 또 그런다.
왜 다 혼자하려고 해요.
내가 뒤에서 가만히 뒷바라지나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어.
나도 같이가요. 그리고 그 이상한 느낌때문이라도 가야되요.
어쩌면 할머니가 저것 때문에 날 보냈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황반장 역시 같은 생각인 듯 했다.
“나도 같이 움직이는게 좋다고 생각하네.
아무래도 혼자는 위험해.
우리가 자네 만큼 날래진 않지만 그래도 재주 하나씩은 있지않나.
도움이 될걸세. 무엇보다 자네가 위험할 때마다 우리가 나섰다는걸 잊지 말게.
서로 보조해주면서 가는게 맞지 않겠나.”
진혁은 가만히 둘을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둘에게 도움받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간 지켜주겠다 말했지만 자신 역시 둘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네 말이야. 전에도 얘기했지만 너무 마음에 여유가 없네.
느긋하란 얘기가 아니야. 자네 자신을 받아들이는게 먼저란 얘기지.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지 않나?”
진혁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나중에 제대로 한번 얘기해보도록 하지. 지금은 우선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말이야.”
황반장이 앞서 걸어가자 진아가 진혁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해가 완전히 졌지만 마을은 밝았기에 찾아가는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진수가 상혁의 개인실로 찾아가 막 노크를 하려던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아 대장님! 마침 잘되었습니다. 들어보셔야 할....”
진수는 문밖으로 나오는 혜정과 어색하게 마주하며 말끝을 흐렸다.
“뭐야. 너 왜 거기서 나와?”
혜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고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이게 뭐야. 우리 대장 완전 고목나무인 줄 알았더니만 파릇파릇 한가봐?
가만히 보니까 나 빼고는 다 뒤에서 재미보고 있었구만.
아이고 내팔자야. 그놈의 내세상은 언제 오는지 참.
기구하고 서럽고 그러하네.”
잠시 툴툴거린 진수는 방문을 노크하며 상혁을 불렀다.
“대장님.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상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일이야?”
“그 미친 마을에서 생존자가 두명이 더 왔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니 한번 들어보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진수는 곧 두사람을 불러왔다.
둘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두억시니. 그냥 좀 까다로운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상으로 복잡한 놈이군.
역귀들을 통제하는 것 같았고 또 지성이 있다라...
확실히 중요한 내용이야.
이건 좀더 명확한 정보가 필요할 것 같고,
무엇보다 너희 둘을 구해줬다는 사람.
이빨이 아니었지만 역귀를 베어냈다고 했지?”
상혁은 혹시 자신처럼 문신의 활용법을 아는 사람일까 생각했지만
다른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않았다.
역귀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전부 알아내는게 좋다.
“두억시니와의 싸움은 가급적 피하려 했지만 상황을 보니 조사해볼 가치는 있어보인다.
내일 준비를 하고 소규모 병력으로 정찰한다.
두억시니와의 전투는 피하되, 전원 문신을 이용한 새 이빨을 지급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혜정이한테는 내일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작업해야한다고 전해.”
병사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갔고 진수는 상혁의 말을 전하기 위해 혜정의 방으로 찾아갔다.
“... 누구세요?”
“나야. 목소리는 왜그렇게 깔아? 누구라고 기대했는데?”
곧 문이 열리며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혜정이 나타났다.
“대장이 내일 아침 일찍부터 바로 작업 시작하래. 빨리 무장시켜서 오후에 바로 움직인다고.
그 뭐냐 그... 문신 작업인가 뭔가.
그게 새 이빨이라면서? 네가 그 기술자고.
출세했네. 난 잘해야 역귀 꾀어낼 미끼나 노리개 거리나 되겠지 했는데.”
혜정의 표정은 싸늘해 졌지만 진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 대장님의 위대한 이유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하나 흙먼지 하나 함부로 버리질 않아요.
아주 알뜰살뜰하게 쓴다 이거지.
봐. 최대위가 개판을 내놓은 우리 이빨부대를 단 몇시간만에 딱 정리를 하셨잖아.
너도 그거 봤지?
‘다음으로 높은 놈은 누구냐?’
딱 이러시는데 카리스마가 아주그냥.....
넌 행복한줄 알아. 뭐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이빨공장행이었는데
그나마 대장님이 일맡겨 주셔서 그 관리자라도 단거니까.
자 난 뭐냐. 이거 보여? 총책임자.
이제 완장을 제대로 찼다 이거지. 그러니까...”
혜정은 더 듣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아니 근데 저년은 나랑 눈도 못마주치던 년이 기술좀 배웠다고 사람을 쳐 무시하기나 하고...
대장 첩질해서 자리 따낸주제에 어딜 오른팔을 몰라보고 까불어?
한번만 딱 걸려봐 아주 아작을 내놓을 테니까.”
들으라는 듯 방안을 향해 소리친 진수는 방으로 돌아갔다.
곧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기에 방안에 있던 혜정이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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