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지에 도착한지 한달 정도 지나자 윤성이의 상처도 많이 좋아졌다.

처음엔 트라우마로 힘들어 했지만 곧 안정을 찾아갔고,

지금은 다른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형, 진혁 삼촌은 삼촌이고, 진아 누나는 누나잖아. 그치?”

윤성의 질문에 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혁 삼촌이랑 진아누나가 결혼하면 이제 뭐라고 불러야 돼?”

상우는 이해가 안간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얘기야. 결혼해도 진혁 삼촌은 진혁 삼촌이고 진아누나는 진아누나지.”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수지가 끼어들었다.

“아니지 오빠. 삼촌이랑 결혼했으니까 진아숙모라고 해야지.”

“안돼 언니. 숙모라고 하면 진아언니가 싫어할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아이들을 기분좋게 보고 있던 황반장은 멀리서 걸어오는 진혁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오늘은 애들이 얌전하네요. 무슨얘길 저리 재미있게 한 대요?”

진혁의 말에 황반장은 특유의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진아를 자네한테 얼른 시집보내야겠다는 얘기 중이구만.

요즘 애들 아주 보통이 아니야.”

진혁은 민망한지 넉살좋게 웃어보였다.

같이 웃던 황반장이었지만 곧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시기가 시기인데다 자네역시 정신 없을테지만 여자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된다네.

내말 무슨 얘긴지 알겠지?

오히려 이런 시기일수록 의지할 사람이란게 필요할테니 말이야.

진아뿐만 아니라 자네에게도 말이지. 가족이란게 그런거 아니겠나?”

“가족.”

진혁은 황반장의 말을 되뇌이며 예전기억을 떠올렸다.

진혁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언제나 듬직한 형이 있었고.

아버지이자 스승님인 아저씨가 있었고.

예쁘고 착한 여동생 예지가 있었다.

형이 좋았고 아저씨가 좋았고 예지가 좋았다.

때문에 형의 결혼 후에도 태영을 계속 아저씨라 불렀고 예지 역시 계속 예지라고 불렀다.

예지의 딸 하영이 태어나고, 처음 삼촌이라고 불렸을때의 그 감동은 아직도 진혁을 뭉클하게 했다.

진혁은 이 가족을 사랑했고 영원할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듬직했던 형은 진혁의 적이 되었고, 아저씨는 더 이상 없다.

예지와 하영이는 아직도 진혁의 꿈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제가 다시 가족을 만들 자격이 있을까요?

형도 저렇게 되고 아저씨도 예지도 하영이도 없는데.

저 혼자 새 가족을 만들어도 괜찮을까요?”

황반장은 진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걸 나한테 물어서야 되겠나?

자네가 직접 답을 내야지.

혼자서 힘들면 같이 고민해 보게. 자네 가족이 되고싶은 사람에게 말이야.”

황반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전기를 손봐놔서 이제 전기가 좀 여유로워졌네.

촌장이랑 얘기했으니 오늘부터는 아홉시까지 전기를 쓸 수 있을거야.

가로등도 켜질테니 이제는 밤에도 느긋하게 산책 할수 있게 되었네.

뒷동산 산책로에 올라가면 노을이 아주 예쁘더구만.

혼자가긴 아까운 곳이야.”

그렇게 말한 황반장은 아이들을 불러서는 집으로 돌아갔다.







“왠일이에요? 데이트 신청을 다하고? 난또 그 이상한 칼이랑 바람이라도 난줄 알았는데.”

진아의 장난스러운 말에 진혁도 웃으며 허리에 찬 칼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기에 슬슬 칼을 손에 익히기 위해 하루종일 연습중이었다.

“노을이 예쁘잖아. 둘만 있은지도 좀 되었고. 오랜만에 같이 시간좀 보낼까 해서.”

진혁은 뒷동산에 마련된 작은 벤치에 진아와 함께 자리잡았다.

진아는 진혁의 팔짱을 끼고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이렇게 좋은데를 왜 이제 데려왔어요?”

진아는 가만히 진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가로등이 켜질때까지 둘은 가만히 서로를 의지한 채 시간을 보내었다.

진혁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진아가 입을 열었다.

“안가면 안되요?”

자신 역시 이대로 있고 싶었다.

이 안전한 거주지에서 진아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할 일이 있다.

“지금 형은 무슨짓을 할지 몰라.

당장은 이렇게 평화롭지만 이대로 놔두면 언젠간 형이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무섭게 힘을 키워서 여길 찾아올거야.

그러니까 움직여야해.

그리고 내가 구할 사람들도 아직 남아있을거야.

마을에 필요한 물자도 챙겨올수 있을거고.

완전히 떠나는게 아니야.

그때처럼 약속할게. 이번에도 꼭 살아돌아올거라고.

그리고 돌아오면......”

잠시 뜸을 들인 진혁은 결심한 듯 진아를 마주보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

진아는 감정에 북받친 듯 눈물이 그렁거렸다.

“지금 이런 시기지만, 그리고 우리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난 네가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그것 때문에라도 꼭 다시 돌아올게.

어떻게 해서든 예쁜 반지 하나 구해서.

웨딩드레스는 힘들어도 손에 예쁜 반지 하나는 내가 꼭 끼워줄게.

받아 줄 수 있지?”

진아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은 그런 진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반딧불이 몇 마리가 아름다운 빛을 내며 날아올랐다.







“평소처럼만 해. 지난 몇주간 수백번 그렸던거랑 다를게 전혀 없어.”

혜정은 긴장을 억누르기 위해 침을 삼키고는 조각칼을 집어들었다.

이제 눈감고도 그릴 수 있다 자부했는데 막상 상혁이 어디선가 아이를 잡아오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할수 있어. 망설이지마. 네가 선택한 일이야. 너만 할수 있는 일이고.

어머니 얼굴을 기억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 감정에 얽매이지 마.”

상혁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자 혜정은 다시금 심호흡을 하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것이 가슴언저리를 파고들자 아이는 죽어라 비명을 질러대었다.

다행히 상혁이 꽉 묶은데다 아이의 어깨까지 잡아 누르고 있어 큰 흔들림은 없었다.

피부에서 배어나오는 피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지만 조각칼은 몸이 기억하는대로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절할 정도의 비명소리는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지만

결국엔 마치 판박이를 한것처럼 완벽한 문양이 아이 몸에 새겨졌다.

모든 작업을 마친 혜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완벽하네. 잘했어. 힘들었을테니 좀 쉬도록해.”

상혁은 묶여있던 아이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혜정은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이 끝나자 생각지도 못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갑자기 휘몰아쳐서였다.

긴장감 때문에 잊고 있던 감정이 갑자기 터져나온 것이다.

토할 것 같은 느낌에 구역질을 하던 혜정은 곧 진정하려 애쓰며 마음을 억눌렀다.

그럼에도 몸을 일으키고 의자에 몸을 기대기 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 후 상혁이 홀로 돌아왔다.

혜정이 물었다.

“애는요?”

“재웠어. 지금 세상모르고 자고 있지. 오늘 고생했어. 이제 푹 쉬어.”

상혁의 대답을 들은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심장을 간질이는 느낌에 웃음을 터트렸다.

상혁은 그런 혜정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방금 부부 같지 않았어요?”

잠시 방금 상황을 돌이켜본 상혁은 가볍게 웃었다.

사실 그리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기에 의식적으로 과장된 감정 표현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힘들었을테니 그렇게 웃으면서 기분좋게 가자.

제일 어렵고 중요한게 끝났으니 오늘은 일찍 자.

나머지는 내일 하면 되니까.”

실컷 웃던 혜정의 웃음은 곧 가라앉았지만 이번엔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감정 제어가 힘들어보였기에 상혁은 부엌에서 물한잔을 떠와 혜정에게 내밀었다.

“마셔. 급하게는 말고 천천히. 그리고 전부 다 잊고 푹 자.

앞으로 힘든일 많을거야. 그러니까 견뎌. 할 수 있어.”

혜정은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들이고는 조금씩 천천히 마셨다.

어느새 혜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 저좀 안아주시면 안되요?”

상혁은 그런 혜정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에게 많을걸 바라지는 마. 네게 줄 애정 같은건 없으니까.”

혜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건 필요 없어요. 그냥.. 그냥 안아주세요.”

상혁은 고심하듯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자야겠어. 먼저 들어갈테니 마음 좀 추슬러.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안기고 싶으면....

네 발로 찾아와. 문은 안 잠글테니.”

상혁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혜정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울고 웃었다가

또 괴로워하고 우울해하던 혜정은 어느 순간 평이한 얼굴로 돌아갔다.

조금 진정이되었는지 크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난 혜정은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상혁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언제나 선택권을 주었다.

이 역시 상혁의 선택지 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것인지 상혁의 품을 찾아들어갈지.

잠시 고민하던 혜정은 몸을 돌려 상혁의 방으로 향했다.

상혁의 말대로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뭔가 생각한거랑 좀 다르단 말이야.

왜 그런거 있잖아. 막 몰려다니면서 다 때려뿌시고,

그러다가 이제 여자들 있으면 번쩍들어다가 데려가고.

막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 살려달라 하고.

역귀들 추풍낙엽처럼 휩쓸고 다니고 또 세력도 커지고.

근데 이건 뭐 옛날이랑 다를바가 없어.

뭣보다 내 위치가 영 애매하단 말이지.”

진수는 눈앞에 묶여있는 소년에게 떠들고 있었다.

최대위를 끌어들여서 이빨부대를 만든 것 까지는 좋은데 뭔가 생각했던 방향이랑 달랐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빨인 소년에게 이렇게 하소연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뒤에 깃발 딱 세워놓고 있으면 사람들이 막

송곳니 만세! 송곳니 만세! 이러고.

내가 칼 딱 휘둘러서 역귀 쓰러트리면 막 환호하는거지.

그러면 여자들이 줄을 설거 아니야.

그렇게 내세상이 되어야 되는데 참 이게 뭔지 모르겠다.

그래 이빨공장 그건 좀 그럴수도 있어. 뭐 그렇다 쳐.

근데 우리가 무슨 구세군이냐고.

뭔 민간인 구출 그지랄을 떨면서 시간 낭비를 하고있어.

밥은 밥대로 뺏기고. 손대지도 못하게 할거 뭐하러 이렇게 죽 데려다 놔.”

최대위가 실질적인 지휘권을 맡으면서 이빨부대는 더디지만 착실하게 역귀들을 사냥해 나가고 있었다.

더불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하나하나 구해가고 있었다.

다만 아이들만은 예외였다.

구해진 아이들은 보호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기처럼 차출되었고 이빨로 사용되었다.

당연히 반발이 컸지만, 현재 이빨부대가 가진 무력이 대단했기에 모두 침묵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미묘한 방식이 진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봐, 최대위란 놈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야.

우리 대장님을 생각해봐.

뒤에서 후광이 딱비치잖아.

용기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분이란 말이지.

망설임도 없고 언제나 빠르고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신다고.

이제 아주 범접할 수가 없는 큰사람이란 말이야.

근데 그 군인 나부랭이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겁쟁이가 칼든 꼬락서니야.

착한놈도 아니오, 나쁜놈도 아니고.

그렇잖아 하는꼴이.

일은 더디지. 그렇다고 사람들 한테 환영받냐 하면 그것도 아니잖아.

착한척 하는 나쁜놈인지 나쁜짓 하려는 착한놈인지.

저러면 저거 오래 못간다고.

자 나를봐. 난 확고한 믿음이 있어요.

내가 뭘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고.

내가 지휘하면 저렇게 호랑말코같은 꼴은 안나지.

우리 목적이 뭐야? 역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이거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아주 코뿔소처럼 들이받아야지.

뒤를 볼 시간이 없어요 우리는.

저렇게 멍청하게 하면 안되요.

‘아이고 살아계셧군요. 구해드리겠습니다.

여기 먹을것좀 드시지요. 물도 있습니다.

어디 누울자리가 불편하시지 않으신가요?

이제 걱정마세요. 아 그리고 혹시 아이가 있으신가요?

그럼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아니 다른건 아니고 저희가 좀 써먹을데가 있어서...

아 안된다구요? 안되는건 없어요 이 씨발님아.

아가리 쳐닫고 애 내놓으세요. 다 정의를 위한겁니다.

넌 그냥 여기서 편하게 쉬세요. 우린 당신 자식 칼로 쑤실테니.’

이게 뭐냐고? 애매하잖아 하는 짓거리가.

지 욕심에 역귀들 썰다가 괜히 뭔가 찔리니까 사람들 구하면서 도망칠 구석을 만드는거 아니야.

하여간 군인이라는 놈이 사람 다룰줄도 모르고 책임 회피나 쳐 하고 앉았고.

여하튼 이제 그래서 고민인거야.

이걸 그냥 냅둬야 되나 어째야 되나...”

진수는 식칼을 꺼내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말했다.

“일단 당장은 쓸모가 좀 있어. 보아하니 착착 움직이면서 사람들도 모으고 있고.

대장님이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엥간치 칭찬받을 규모는 될거 같은데...

그럼 일단 눈치 잘보고 있다가 때되면 죽여야겠네.

그러고 나서 내가 제대로 굴리지 뭐.

그래. 어차피 지금이야 신경쓸 것도 많고 그러니까.

가만히 지켜보다가 좀 안정적이 됐다 그러면,

바로 자리 뺏어서 정식으로 이빨부대를 창단하는거야.

그땐 진짜 깃발부터 만들어야지. 오라질 것들이 진짜 기본중에 기본을 몰라.

그러고 나서 이제 괜히 구호활동이니 어쩌니 이딴건 쳐박아 버리고

바로 역귀들 쓸어담는거야.

지금까지 모아온 쓸모없는 놈들은 뭐... 다 데려다 죽이든가 아니면 노예로 써먹든가..

아 그래! 노예 괜찮네. 이제 나중가면 계급이란게 생길거 아니야.

이제 대장님이 황제고 내가 대장군이 되면 수발들 놈들도 필요하고.

그래 그래야 겠다.

일단 얌전히 있으면서 부대 커지는거나 구경해야겠네.

어디 내가 첩으로 들일 반반한 것들 있나 좀 살펴보고.

좋아. 다 잘되었어. 대장님은 언제쯤 오시려나 모르겠네.

눈치봐서 그전에 부대는 내가 먹어놔야지.”

진수는 그렇게 쉴틈없이 떠들며 혼자 웃었다.







“잘 되길 기도해. 생각대로 안되면 골치아파지니까.”

상혁은 아이 손을 가볍게 찔러 피를 한방울 내서는 빨간색 검에 떨어트렸다.

혜정은 긴장한 얼굴로 가만히 칼을 바라보았다.

잠시 기다리자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칼에 묘한 불쾌감이 서렸다.

“물어볼 것도 없이 성공인 것 같지?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혜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상혁에게 버려질 가능성은 없어진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정성을 위해서 이빨을 늘릴거야. 칼 두 개에 전부 씌워야지. 가능하면 둘셋씩.

그리고 그 말많은 놈이 사람들을 잘 모아놨다면 곧바로 토벌대를 만들거야.

넌 이빨들 관리를 맡아.

체계만 갖춰지면 바로 역귀들을 휩쓸어 버릴테니.”

상혁은 전에 없이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걸 보니 혜정도 기분이 좋아졌다.

“간단하게 테스트만 해보고 올테니 슬슬 떠날 준비하고있어.

연습은 게을리 하지 말고.

돌아가면 적어도 수십번은 칼로 새겨 넣어야 할거야.

뭣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해.

주저하지마. 익숙해지란 소리야.

어제는 처음이라 그럴 수 있지만 이제 그럴 여유는 없어.”

상혁의 말에 혜정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기... 혹시 제가 힘들다고 하면... 또 안아주실래요?”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게 필요하다면.”

상혁의 목소리엔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지만 혜정의 얼굴은 한층 좋아졌다.

상혁이 밖으로 나가자 혜정은 조용히 그림을 연습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섭고 싫기만 했던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자꾸 애정이 생길까?

예전엔 죽을까 두려워 했다면 지금은 버려질까 두려웠다.

“저 남자한테 난 어떤 사람일까?”

고개를 흔들고 다시 그림에 집중했지만, 혜정은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밖에선 거친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가 들려왔다.

역귀에 대한 대책도 있고 안전지대도 있으니 상혁이 오토바이를 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근처에 역귀 따윈 보이지 않았기에 효율적으로 역귀들을 찾아가고 또 꾀어낼 수 있었다.

상혁은 곧바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당연하다는 듯 10여 분도 되지 않아 힘껏 울부짖는 역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 역귀는 길을 잃은건지 밭 한가운데 혼자 있었다.

크기도 작은 것이 희생자를 많이 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연습용으로 딱 좋은 놈을 만났어.”

상혁은 오토바이를 멈추고는 역귀가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크크크아카칵”

기침인지 비명인지 모를 이상한 소릴 내뱉은 역귀는 비틀거리지만 빠른 속도로 상혁에게 다가왔다.

상혁이 붉은 칼을 꺼내들자 손을 통해 기분나쁜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래. 그렇게 써있었지. 이건 이빨에게 해가 될 뿐만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업이 쌓인다고.

그래서 뭐? 이제 와서 그게 무서울 리가.

망설임 따위 예지랑 하은이 잃으면서 전부다 버렸어.”

역귀가 상혁에게 덮쳐드는 순간, 상혁은 가볍게 몸을 틀어 역귀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칼을 휘둘렀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역귀의 몸 한쪽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날카로워. 그냥 보통 이빨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

이거면 몇 마리든 무서울게 없지.”

역귀가 완전히 고기조각으로 변하는데는 단 몇 번의 칼질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저씨, 당신이 틀렸어. 두고봐. 이제 어떻게 되는지.”







“필요한건 다 실어 놨네.

침낭이랑 옷가지. 식량. 공구들. 그리고 잡다하게 쓸만한것들.”

진혁이 떠나려 하자 황반장은 주저없이 자신의 전동차를 꺼내었다.

진혁 입장에서는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반장님.”

황반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게 없으면 힘들지.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갈수 있으니 당연히 꺼내야지 않겠나?”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는 아이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진혁을 배웅하고 있었다.

진아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촌장이 이야기했다.

“무기가 생겼지만 그렇다고 절대 무리를 해선 안돼.

알고 있겠지? 역귀는 아무 의미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능적으로 생기에 이끌린다네.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도심지에 많아.

상혁이라면 그런 곳을 찾아다닐 테니 아주 위험한 싸움이 될거야.

자네에게 준 그 칼은 제약이 많네. 이빨처럼 날카롭지도 않지.

그러니 조심히 사용하게.

대응책이 생겼다고 무턱대고 역귀와 싸움을 벌였다간 금세 끝장이 날거야.

게다가 역귀녀석들 중에서도 특출난 녀석들이 있네.

그러니 신중해야해.”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촌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이들에게 걸어갔다.

“상우는 책임지고 동생들 잘 챙기고 있어.

그리고 이거 잘 보관해. 돌아오면 쓰는법 가르쳐 줄테니까.

사람이 머리만 키운다고 다가 아니야. 몸도 키우고 해야지.

동생들도 지키고 하려면 무기도 들어야돼.”

상우는 진혁이 쓰던 정글도를 받아 들었다.

“수지도 오빠말 잘듣고. 잘 배워. 속썩이지 말고.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금방 돌아올테니까 건강하게 있어.”

진혁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중에 진아는 없었다.

보낼 마음이 들지 않아 나오길 주저한 것일까?

차라리 그게 나을수도 있었기에 진혁은 그냥 떠나기로 했다.

“자, 슬슬 출발 준비를 해야지. 인사 끝냈으면 어서 타게나.”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며 전동차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황반장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니, 반장님 뭐하세요?”

황반장은 오히려 당연한거 아니냐는 듯 반문했다.

“뭐하냐니. 당연히 나도 가야지. 자네 운전실력이야 내가 뻔히 아는데.

그리고 나처럼 실력있는 기술자를 안데리고 가면 쓰나.

마을에 필요한것들이 많으니 내가 직접 나가서 구해와야지.

자네는 기계치 아닌가?”

진혁은 당황했다.

황반장이 따라나설거란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것이었다.

“반장님. 전 형을 찾으러 가는거고 그러다보면 위험해 질거에요.

괜히 같이 가셨다가....”

황반장은 진혁의 말을 잘랐다.

“내 걱정은 말게. 나도 내몸하나 건사할 실력은 되는 사람이야.

자네 형에게는 나도 빚이 좀 있으니 어떻게든 갚아줘야지.

뭐 신혼여행에 끼어든 시아버지가 된 기분이라 영 어색하긴 하네만...”

진혁이 의문을 가질 때 진아가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반장님. 민옥이모 좀 뵙고 오느라.

애들은 잘 돌볼테니 제발 무사히만 돌아오라고 손을 꼭 잡아주시던데요?

가면서 먹으라고 계란도 몇개 챙겨주셨어요!”

“뭐야? 너도 따라가게? 아이들은? 아니 그보다 전에 다 얘기된거 아니었어? 기다린다고 했잖아.”

아무렇지 않게 차에 오르는 진아를 보고 진혁은 물었다.

“나도 그러려고 했어요. 애들 가르치면서 조용히 기다리려고 했는데,

어젯밤 꿈에 우리 할머니가 나타나셔서는 꼭 꼭 따라가라고 신신당부 했어요.

우리 할머니 엄청 대단한 분이었던거 오빠도 알죠?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거면 이유가 있는거에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반장님한테 말씀드리고 급하게 준비했죠.”

진혁은 거기에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단순히 꿈얘기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진혁은 기계같은 것 보다 무속에 대한 신뢰가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래도 안돼. 이건 그냥 나가는게 아니라 싸움이라니까.

나 형이랑도 싸울거고 역귀랑도 싸울거야.

휘말리면 위험해.”

하지만 진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위험한 일은 안할거야. 그냥 오빠가 출혈과다로 쓰러지기 전에 잡아주고, 돌봐주고

혹시 생존자 발견하면 그사람들 돌봐주고 요리하고 치료하고.

주거지 마련하면 거기도 지키고.

분명 내가 할 일이 있어서 할머니가 나타나신 거야. 그러니까 나도가요.”

더 이상 말리기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하려 입을 열었지만 진아는 진혁이 말할 기회를 주지않았다.

“뭣보다 나 오빠 센스 못믿겠어. 반지는 내가 고를래. 그러니까 빨리타.”

그쯤되자 진혁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진아의 꿈이 확실히 의미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 대신 조심해야해. 내가 지켜주겠지만 정말 정말 위험하니까. 알겠지?

나도 그렇고 진아도 그렇고 여기 반장님도 절대 죽지말고 돌아오는걸로 하자. 알겠지?”

진아와 황반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떠나는 쓸쓸한 길이라 생각했지만 함께 나서는 길이 나쁘지는 않았다.

진혁은 기운을 내며 차에 올랐다.

모두는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두고보세요. 아저씨. 흡족해 하실테니까.”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