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노인네가 아직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네.”

상혁은 눈앞에 오색찬란한 한복을 차려입은 노파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노인은 실실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왕년엔 만신소리까지 들었다더니 확실히 뭔가 가닥은 있나봐?

치매걸린 노인네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완전히 폐허가 된 길영마을에 들어온 상혁과 여자는 텅 비어있는 마을 한쪽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찾아갔다.

그곳은 만신이라 불렸던 무녀가 사는 집으로 치매끼가 오기 전까지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역귀 출몰 이후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죽었다 생각했는데 이리도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다.

“혼자서 살았을리는 없고, 그 재수없는 손자새끼가 돌봐줬겠지. 이름이 뭐더라?

창욱? 그래 지창욱. 그 새낀 지금 어딨어?

그리고 어떻게 역귀한테 살아남았어?”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킬킬킬, 이놈이 피맛을 보더니만 아주 악귀가 다되었구나.

어디 나도 한번 죽여보거라. 내 피는 씁쓸할테니 아주 맛이 좋을게야.”

상혁은 주저없이 칼등으로 노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헛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지창욱 지금 어딨어?”

노인은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끌끌, 지 마누라랑 딸년을 잡아먹은 놈이 제 무덤 파는 줄도 모르고 업을 쌓고 있구나.

곱게 저승 가긴 틀렸으니 죽어서도 보고픈 가족 얼굴도 못 보고 얼마나 서글플꼬...”

상혁은 노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칼을 들었다.

“그래. 미친 노인네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손주 새끼는 내가 직접 찾아볼 테니 그 잘난 저승 먼저 가 계셔.”

여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칼은 노인의 목 언저리로 휘둘러졌다.

“안돼!”

어디선가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상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칼을 거두었다.

노인의 목에서 피가 배어 나오긴 했지만, 적절히 멈추었는지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숨어있을 줄 알았지. 튀어나와. 할머니 죽는 꼴 보기 싫으면.”

곧 천장 다락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려왔다.

“왜. 이 노인네가 말해주든? 숨어서 절대 내려오지 말라고.

필사적으로 숨기는 걸 보니 네가 뭔가 알고 있나 보구나?”

창욱은 대답 대신 화가 난 얼굴로 상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옛날부터 넌 마음에 안 들었어.

나이도 어린놈이 하는 꼴을 보면 싹수가 노랬거든.

금수만도 못한 새끼. 넌 천벌 받을 거야.”

상혁은 피를 흘리는 노인을 발로 넘어트리며 말했다.

“이미 헛소리는 지겨울 만큼 들었거든?

그러니까 딴소리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난 지금 역귀를 몽땅 도륙 낼 계획을 세우고 있어.

근데 이빨이 효과는 좋아도 영 불편하단 말이야.

그래서 방법을 찾고 있거든?

보아하니 네가 그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어때?”

창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했다.

“그래. 쉽게 입은 안 열겠지. 그러면 선택권을 줄게.

첫 번째. 고집부리면서 버티다가 피 흘리는 할머니 저승길 떠나는 걸 멍청하게 지켜본다.

두 번째. 그냥 후딱 내놓고 나서 죽어가는 할머니를 구해드린다.

빨리 선택해. 이 노인네 이거 금세 염라 만나러 올라간다.”

창욱은 쓰러져서 피를 흘리는 할머니를 바라보다 품속에 손을 넣어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걸 받아든 상혁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물러났다.

창욱이 할머니 상처를 돌보는 동안 상혁은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래 아저씨가 숨기는 게 있을 줄 알았어.

방법은 있지. 없을 리가 있나.”

상혁은 책을 잘 챙겨 넣고는 창욱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럼. 방법이 있지. 있고말고.

봐 내가 그 증거야. 직접 눈으로 봤지?

그러니 이빨 부대에 들어와. 필요한 건 전부 줄 테니.

여기 역귀 놈들한테 가족이 죽은 사람 있나?

그렇다면 복수해야지.

죽는 게 무섭고 역귀가 무서워?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준다니까?

그러니 당연히 대장님을 따라야지. 이빨 부대로 들어와.

그깟 화약 냄새나는 쇳덩어리는 치우고 이빨을 드는 거야!

그리고 역귀들을 전부 다 물어뜯어 버리자!”

광신도 같은 진수의 말에 최대위는 믿음이 안 갔지만 점점 혹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수백 발의 총알도, 수십 발의 포탄도 역귀 한 마리를 저지하지 못했다.

꼭 묽은 부침개 반죽을 칼로 자르려는 것과 같은 모양새로

터져나간 살들을 순식간에 복구하며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조각내고 찢어내도 순식간에 수급하는 역귀들은 공포를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그런 역귀를 진수는 어렵지 않게 제압해 냈다.

적어도 이용할 가치는 있어 보였다.

“좋아. 나와 부대원 전부 들어간다.

하지만 네 부하가 되는 건 아니야. 그 대장이란 작자의 부하도 아니지.

동등한 관계에서 역귀들을 상대하고 싶다.

이후 향방에 대해서는 그자를 만나서 이야기해보는 거로 하지.”

진수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아주 좋은 결정이야.

어차피 너희 모두 대장님을 보게 되면 바로 무릎을 꿇고 거두어 주시길 바랄 테니까.

좋아. 첫 번째 이빨 부대가 탄생했구만.

그럼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

당연히 부대 깃발을 만들어야지.

내가 부대 마크를 한번 생각해봤거든?

빨간 배경에 이제 송곳니가 칼처럼 쫙 되어있는....”

최대위는 진수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아니. 우선 무기부터 확보한다.”

그런 최대위의 눈에는 깊이 모를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진혁은 대강 정리를 마친 뒤, 홀로 마을 회관 옆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진혁입니다 어르신.”

촌장은 반갑게 진혁을 맞아주었다.

“그래. 다들 괜찮던가?

다른 이들은 다 좋아보이긴 했네만, 자네가 몸이 성치 않은 것 같아 걱정이야.

당분간은 푹 쉬게.

터전을 닦는것도 좋지만 몸이 상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촌장의 말이었지만 사실 진혁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진혁은 곧장 본론을 이야기 했다.

“사실.... 밖에서 사람들을 찾다가 형을 만났습니다.”

진혁이 대략적인 일들을 이야기하자 촌장은 안타깝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잘못된 길이야.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지.

태영이처럼 훌륭한 스승을 두고 어찌 그리 삐뚤어졌는지...”

진혁은 그런 촌장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전 형을 막아야겠습니다. 이대로 둘수는 없어요.

말로 안되면 강제로라도 막겠습니다.”

촌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생각은 알겠네.

다만 너무 조급해 하지 말게. 자네 몸이 성치도 않은데 함부로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우선은 여기서 쉬면서 차분히 계획을 세워보게.”

황반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실... 그것과 관련해서 상의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아저씨는 훌륭한 분이고 좋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전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언제나 역귀와 싸우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도망만 다녀서는 형을 잡을 수 없을겁니다.

이번에도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형이 역귀들을 불러모으는 바람에...

도망치는게 고작이었습니다.

아니 전부 죽을 상황까지 몰려서 아저씨처럼 마지막 싸움을 하려고 했는데

다들 절 말려주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져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제가 겁쟁이라 그랬는지 반드시 살아돌아오겠다 약속 했고,

결국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도망치는 것 말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다고.

아저씨는 절대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빨같은 것 말고 적어도 역귀들을 상대할 만한 다른 대책을....”

촌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어렵게 입을 뗐다.

“월광신녀님을 기억하겠지? 한때 만신이라 불리던 무녀셨지.

예전엔 어린 태영이를 가르치기도 하셨고 말이야.

태영이가 너희를 거두었을때쯤, 신녀님은 내게 이걸 맡기셨지.

언젠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줄 때가 올거라면서....”

촌장은 진혁에게 길다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사실 태영이에게 넘겨줘야겠거니 생각해서 잘 가지고 있다가

역귀가 나타나자 마자 건네 주려했지.

하지만 태영이는 받지 않았어.

자기는 주인이 아니라고 하더구만.

태영이가 죽고나서는 그때 억지로 넘길걸 하는 후회를 참 많이 했다네.

근데 일이 이리되고 보니 아무래도 신녀님은 지금을 염두해둔게 아닌가 싶네.”

진혁은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열어보게.”

상자를 열자 기묘한 무늬가 음각되어있는 칼 하나가 고고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재주는 좀 있나? 그림 잘그려?”

상혁의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었네. 자 이거 보이지? 똑같이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

나한테 이런건 안맞거든.”

상혁은 펼쳐진 책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동그라미와 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 사이를 뜻모를 문자들이 채워진 그림이었다.

“실수라도 하면 골치아프니까 자다가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 둬.

앞으로 쓸일 많을거야.

그것만 잘해도 사람대접 받을 테니 목숨걸고 연마해.

난 이 집좀 뒤져보고 와야겠어.”

상혁은 여자를 방에 남겨둔 채 집안을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역귀는 못들어오는 것 같은데.... 당나무 때문인가?”

상혁은 오색천을 잔뜩 매단 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전지대라는건 제법 매력적이었지만 역귀 사냥이 목적인 상혁에게 이곳은 그리 좋은 거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큰도시로 가야한다. 생존자도 많고 역귀들도 많은 곳으로 가서 역귀사냥과 이빨부대원 차출을 병행 하는 것이다.

이빨부대.

상혁은 진수가 멋대로 지어놓은 그 단어를 떠올리며 웃었다.

유치하긴 했지만 간단명료하니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하고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

책에서 이빨의 효율적인 사용법을 확인했다.

물론 이 역시 어린아이들의 희생이 필요했지만

기존 이빨 사용법보다 훨씬더 효율적이기에 역귀 사냥은 수월해 질게 분명했다.

게다가 잘하면 막연하게 생각하던 이빨공장 역시 근시일 내에 완성 할 수도 있다.

상혁의 목표인 역귀토벌. 이제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상혁은 세부적인 부분들까지 생각한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여자가 그림에 익숙해지는게 먼저다.

방안에 들어가자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듯 했기에 상혁은 여유를 가지고 이곳에 얼마간 머물기로 했다.

다만 지나치게 긴장한 듯 떨리는 여자의 손을 보고는 조금은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마. 어차피 시간이 걸릴건 알고 있고, 그거 잘 못한다고 죽이고 그러지 않아.

그냥 기술 배운다 생각하고 천천히 해.”

여자의 떨림이 조금은 멈추었다.

상혁은 말없이 그림을 연습하는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혜정이에요. 신혜정.”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음의 여유가 생긴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상혁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게 뭔지 말해 주시면 안되요?”

특별히 비밀도 아니었기에 상혁은 큰 고민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 책 말이야. 옛날에 역귀를 가둔 인간들이 연구해서 쓴 책 같아.

역귀들의 정체라든가 자기네들이 조사한 것, 알아낸 것 따위를 써놨는데

그중에서 상당히 쓸만한 정보가 있더라고.

이제 그 사람들도 생각한거지. 이빨이란게 효과는 좋아도 쓰기가 영 까다롭거든.

항상 어린애 끼도 돌아다녀야 하고, 몇 번 휘두를때마다 새로 찔러야 하고.

또 찜찜할거 아니야. 매번 애들 생살을 찢어야 한다는게.

그래서 다른 방법을 연구해서 새로운 사용법을 찾았어.

근데 그 사용법이란게 이빨 사용법보다 편하긴 해도 인륜적으로는 더 못할짓이라서 쓰지는 않은모양이야.

그래서 뭐 거의 알려지지 않은거겠지.

아무튼 그 그림은 새로운 이빨 사용법에 필요한거야.”

혜정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그런거지. 기존 이빨 사용법은 비싼물건을 일시불로 사는거야.

지출은 크지만 그거만 버티면 끝이지. 상처랑 출혈 빼고는 별게 없어.

그런데 새로운 이빨은 그걸 평생 할부로 나누는 거야.

다달이 낼 돈은 적긴 하지만 이자가 많이 붙어.

그러니까 뭐 당장 상처는 없는 대신 몸약해지고 병잘오고 기력 떨어지고 쉽게 다치고...

평생을 시름시름 앓는거지. 동티난거마냥.”

혜정은 불편함을 느끼며 자신이 그리고 있는걸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이게 거기에 들어가는 부적 같은 건가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 그러니까 충분히 연습해 둬. 이제 그걸 칼로 그릴 수 있어야 돼.

애들 피부에다 새겨넣을 테니까.”

혜정의 손이 완전히 멈추었다.

조심스레 상혁을 돌아본 혜정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상혁과 눈이 마주쳤다.

“왜? 못하겠어? 싫으면 포기하고 이빨공장에서 일해도 돼.

이 방법이면 이빨공장 효율이 말도 못하게 올라갈테니 여자라면 누구든 환영이거든.”

상혁의 말에 혜정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을 애써 밀어넣고는 조용히 다시 그림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 칼은 이빨만큼 강력하지는 않네.

하지만 아이들의 희생없이도 역귀들을 제압할 수 있지.”

진혁은 칼을 꺼내들어 가만히 살펴 보았다.

상혁이 즐겨쓰는 환도와 비슷해 보였지만 더 크고 묵직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이걸 쓰지 않았습니까?

희생없이 역귀를 상대할 수 있다면 아저씨도 다른사람들도....”

촌장은 손을 들어 진혁의 말을 막았다.

“아무 조건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네. 다만 아이들을 희생시키지 않을뿐.

이건 자기 자신을 희생양 삼아 역귀를 베는 칼이야.

만들기가 쉽지 않지. 오래전 수세대에 걸쳐 장인들과 무당들이 간신히 벼려낸 칼이라네.”

“자기 자신을 희생양 삼는다는 말씀은....”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아이들 피 대신 칼 주인의 피를 필요로 하지.

물론 자기자신을 찔러야 하는건 아니고 역귀를 베어내면 베어낼수록

이 칼이 주인의 피를 취할게야. 휘두를수록 생기를 뺏긴다고 생각하면 편할걸세.

게다가 사람을 가리는 신묘한 물건이라 단 한사람의 주인만 가지지.

태영이가 이 칼을 받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 일게야.

자신보다 더 잘 쓸 사람이 있다 생각한거겠지.”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내려놓았다.

스승인 태영이 거절한 물건이었다.

단 한사람만 사용할수 있다면 이걸 감히 자신이 들 수 있을까?

“아저씨가 거절하셨다면... 전 어림도 없습니다.”

촌장은 말없이 칼이 든 상자를 진혁쪽으로 밀었다.

“아니. 태영이가 거절했기에 자네가 들어야 하는 것이야.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자네는 지나칠 정도로 태영이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네.

이걸 받고 나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게.

자네의 각오가 어떤지 말이야.

그리고 태영이의 그림자를 벗어나 자네의 길을 가게.”

촌장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곧장 진혁을 내보냈다.

진혁은 반강제로 상자를 받아서는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는 상자에 든 물건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이걸 쓸 자격이 있을까?”

진혁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내가 내걸 조건은 명확해.

첫째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

네놈은 이빨이빨 거리면서 헛소리 해대지만 아이들은 도구가 아니야.

역귀들을 없애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뿐 그들을 함부로 대하고 죽일 권리는 없다.

두 번째로 구조할 수 있는 모든 민간인을 구조한다.

더 이상 사람이 죽는걸 보고 싶지 않으니 구조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다.

당연히 이빨공장이니 이딴 끔찍한 소릴 다시 한번 입에 올렸다간 대가리에 총알이 틀어박힐테니 그리알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숫자가 몇이건,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역귀들은 전부다 처리한다.

역귀 한 마리면 수백이 죽을 수 있다.

그러니 눈에 띄는 역귀들은 무조건적으로 토벌한다.”

진수는 최대위가 하는 말에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뭔.... 지금은 군인도 아니면서 뭐가 그렇게 까탈스러워.

내가 나 좋자고 그래?

다 대의를 위한 거라니까.

이거도 전쟁이잖아. 아니야?

전쟁이면 또 무기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또 공장을 돌려야...”

최대위는 즉시 권총을 빼들고는 진수에게 겨누었다.

“내가 두 번째에 뭐라고 했지?”

진수는 양손을 들어보이며 뒷걸음질 쳤다.

“하 참 나 돌아버리겠네. 초장부터 완전히 잘못걸렸어.

뭐 그래 좋아. 너 하고픈 대로 다 해봐.

대신 쓸만한 사람들은 계속 뽑아서 이빨부대 규모는 키워야돼. 알겠지?

어차피 내 할 일은 부대만드는거니까.”

최대위는 총을 내리고는 돌아섰다.

그곳엔 사람들 여럿이 묶인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대부분 어른들이었지만 아이들도 몇몇 섞여있었다.

“저를 저주해도 좋습니다.

이 끔찍한 세상과 싸우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용서 받을수는 없겠지만 죽는 순간까지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그리고 자녀분들 그 누구도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건 대의를 위한것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최대위가 말을 마치자 병사들이 아이들만 골라서 데려가기 시작했다.

부모인듯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지켜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처음엔 애원하던 사람들의 말은 어느새 욕설로 바뀌었다.

욕설 다음은 저주. 저주 다음으로는 흐느끼는 소리만 남았다.

최대위는 씁쓸한 얼굴을 한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미친놈. 결국 하는짓은 똑같을거면서 괜히 무게나 쳐 잡고 지랄이네.”

진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지만 더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최대위와 부대원들이 엄청난 힘이 될것임에는 분명했다.

상혁이 좋은 인재를 영입했다며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저씨. 제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진혁은 집앞 평상에 걸터앉아 눈앞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네요. 진혁씨가 아저씨한테 혼잣말 하는거.”

고개를 들어보니 진아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혁의 옆에 앉은 진아는 진혁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바보 같을 정도로 혼잣말 많이 했었잖아요.

늘 아저씨한테 보고하고 물어보듯이.

근데 시간 지나면서 혼잣말도 줄고 또 멋진 모습도 많이 보여줬고.

보기 좋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왜 또 아저씨 생각이 나셨을까요?”

진혁은 진아의 말에 민망해 하면서 다시금 촌장의 말을 떠올렸다.

‘자네는 지나칠 정도로 태영이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네.

이제 그림자를 벗어나 자네의 길을 가게.’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고민거리가 생기고 결정할 일이 생길때마다 아저씨한테 말하듯이 혼잣말을 했어요.

왠지 아저씨가 답을 알려줄 것 같아서.

요 며칠 안그랬는데 생각 정리가 안되니까 또 버릇이 튀어나왔나봐요.”

진아는 옆에 놓인 상자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대단한 분이고 존경스런 분이니까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너무 의지하는건 안되요.

진혁씨도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니까 스스로 답을 내려봐요.

가끔 버겁다 싶으면 저희한테 조금은 도와달라해도 되구요.

아저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의지가 되지 않겠어요?”

진혁은 고마운 마음에 진아를 보곤 웃어보였다.

“그러네요. 제가 그동안 너무 아저씨한테만 의지했나봐요.

사실 자신 없었거든요.

형이 너무 잘나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못나서 그랬는지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어요.

아저씨를 존경하고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서 매번 흉내를 낸거죠.”

진아는 조용히 진혁의 손을 잡아주었다.

“진혁씨가 우리한테 살아돌아오겠다 약속한 그날.

그날 진혁씨 진짜 멋있었던거 알아요?

그건 아저씨 흉내가 아니었어요.

진혁씨가 온전히 진혁씨 의지로 움직인거잖아요.

아저씨의 가르침을 져버리면서까지요.

진혁씨는 뭐든 잘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세요.

전 잘 모르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진혁씨는 자격 있어요.”

그 말에 진혁은 힘을 얻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게요. 음.... 가끔 어리광도 받아드릴게요.”

진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나오는건 막을 수 없었다.

진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아니면.. 지금 좀 안아드릴까요?”

진혁은 진아에게 안기는 대신 자신의 손을 잡고있는 진아의 손에 반대손을 포개며 말했다.

“그건 나중에요. 지금은 구경꾼들이 너무 많네요.”

의아해 하는 진아와 잠시 눈을 마주친 진혁은 고개를 돌려 집쪽에 소리쳤다.

“너네 안잘거야?”

곧 상우와 아이들이 후다닥 방으로 뛰어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혁과 진아는 웃으며 일어났다.

“우리도 들어가요. 너무 늦었네요.”

진혁은 진아를 데려다 주기위해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한손엔 상자를 다른 한손은 진아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며칠간 죽어라 연습한 덕의 혜정의 그림은 점차 자리가 잡혀갔다.

물론 아직 많이 부족했기에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책상에 앉아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집중해서인지 근육통이 온 혜정이 불편한 어깨를 움직이자 상혁은 혜정을 불렀다.

“잠깐 쉬는게 좋겠어. 혹사한다고 뭐가 되는건 아니니까.

따뜻한거라도 마시면서 잠시 편히 앉아있어.”

혜정은 고개를 기쁜 얼굴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집안에는 풍족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물자가 있었다.

곡식 보관 창고가 따로 있던 데다가 미리 준비했는지 아니면 역귀사태 이후 재주껏 모아온 것인지

각종 식량과 물품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혜정은 커피 두잔을 끓여 거실로 돌아와서는 상혁에게 한잔 건네었다.

“드세요. 향이 참 좋아요.”

상혁은 고개한번 까딱이지 않고 커피를 받아들였다.

조심히 상혁의 건너편 소파에 앉은 혜정은 상혁의 눈치를 보며 입을 움찔거렸다.

“할말 있으면 해. 물어볼 것 있으면 물어보고. 의미없는 날씨 얘기 같은것만 아니면 괜찮아.”

혜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 괴물들을 다 없애실건가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는요?”

“그놈들이 나타나기 전으로 다 돌려놔야지. 아니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지.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만 가능해. 무슨짓을 해서라도 가능하게 만들거야.”

상혁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혜정은 고개를 숙여 커피잔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요.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괴물들한테 죽은게 아니에요.

군인들이 그 괴물들 막는다고 우리 엄마 사는 동네를 폭격했어요.

정작 괴물들은 그 폐허속에서 멀쩡하게 기어나왔고

죽은건 우리엄마랑 불쌍한 사람들 뿐이었어요.

그래놓고 마을 폭격한 군대는 전부다 도망갔대요.

수습도 안하고. 사과도 안하고.

그래서 전 괴물보다 사람들이 더 싫어요.”

상혁은 별다른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혜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괴물들 다 죽이고. 나쁜 사람들도 다 죽이고.

더 좋은 세상 만들 수 있게 제가 열심히 도울게요.”

상혁은 웃으며 혜정을 보고 물었다.

“그럼 나는? 난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혜정은 고개를 들고 상혁을 마주보았지만 금세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상혁은 깨끗하게 비운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갔다 올테니 적당히 쉬다가 연습하고 있어. 일단 그게 완성이 되어야 뭐라도 할수 있으니까.”

혜정은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가만히 잔만 내려다 보고있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