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완전히 사라진 지하에서 움직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곳엔 언제 계단이 나올지 모르고 언제 승강장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게다가 소리를 낼수도 없으니 혹여나 실수로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밟았다간
자기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는채 역귀에게 잡혀 찢어질 운명인 것이다.
때문에 진혁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이미 역귀 몇 마리가 지하로 들어와서 진혁을 찾고 있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보통 시각이 차단되면 후각과 청각에 많이 의존하기 마련이지만
지금 이곳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역귀들이 내쁨는 썩은내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또한 역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뛰어다니는 탓에 소리에 의지 할수도 없었다.
그저 손과 발의 감각에만 의존하며 그저 우연히라도 역귀에게 부딪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한쪽손은 벽에 붙인 채 몸을 숙이고 아주 천천히 손으로 바닥을 짚어본뒤 오리걸음으로 한발자국 움직이고 다시 손을 천천히 휘젓는 것의 반복.
그 와중에도 역귀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는지 간간히 비명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럴때마다 다른 역귀들 역시 소리나는 방향으로 달려들었기에 지하는 아수라장이었다.
“크아아아악!!!”
뭔가 달려와 부딪히는 소리와 물건들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
3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큰소리가 나자 진혁은 소리없이 몸을 굴려 자리를 피했다.
곧이어 다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역귀들이 소리가 난쪽으로 달려들었다.
달려든 역귀는 바람소리가 들릴정도로 거칠게 온몸을 휘두르다가
별다른게 잡히지 않자 다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엎드린 자세로 잠시 시간을 보낸 진혁은 다시 자세를 다잡고 몸을 움직였다.
몸을 굴린탓에 벽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우선 벽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벽이라도 없으면 아무런 지침이 없다.
운이 좋다면 이대로 다시 돌아나가는 것만으로도 역귀를 따돌릴수 있을지 모른다.
진혁은 더욱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한참을 움직여도 벽이 손에 짚이지 않았다.
분명 굴러온 방향에 맞춰 그 이상을 이동한 것 같은데 벽따위는 만져지지 않는다.
혹시 방향이 잘못된 것일까?
다시 방향을 조금 바꾸고 손을 휘저었다.
역시나 닿는 것이 없었다.
진혁의 등뒤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역귀들은 화가났는지 더욱더 격렬하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이상태로 가다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한동안 바닥을 더듬으며 지표없이 움직이던 진혁의 손에 무언가 닿았다.
벽이길 기대했지만 그건 깡통일 뿐이었다.
급한 마음에 마구 손을 휘저었다면 큰소리를 내버렸을 것이고 그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아찔함을 느끼고 캔을 피해가려던 진혁은 생각을 바꿔서는 조용히 캔을 집어들었다.
조금 위험할 수 있지만, 이 상황에서는 최선일 것 같았다.
진혁은 역귀들의 소리를 가만히 가늠해 보고는 넓은 공간이라 여겨지는 곳을 향해 힘껏 캔을 던졌다.
곧 멀리날아간 캔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뒤이어 특유의 비명같은 울음과 함께 역귀들이 마구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번 몸을 굴려 거리를 벌린 진혁은 역귀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뒤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멀찌감치 보이는 희미한 빛을 향해 무작정 뛰어가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두웠지만 야투경을 착용한 상혁에게는 길이 명확하게 보였다.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만 골라 주저 없이 나아갔다.
그 덕에 역귀들을 피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뒤에 끌려가는 여자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긁히고 부딪혀도 참았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뒤를 따라야 했다.
“저기... 조금 천천히....”
여자는 말했지만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겁이나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따라가던 여자는 다급히 움직이다 발을 헛디뎌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여자가 끌려오지 않자 상혁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나. 큰 소리는 내지 말고. 역귀들한테도 귀는 있어. 내 발목을 잡으면 그대로 목을 쳐버릴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
여자는 소리없이 입술을 깨물고 일어섰다.
“왜? 손이라도 잡아주길 바래? 그 덜떨어진 놈 노리개로 던져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
그나마 똑똑해 보여서 데려가는거지. 그러니 뭐든 도움이 되어야 할거야.
쓸모없다 생각되면 주저없이 역귀들한테 던져버릴테니까.”
거칠게 쏘아붙인 상혁이었지만 이후 상혁의 걸음이 조금은 느려졌다.
마지막 남은 온정인지 아니면 그저 역귀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한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상혁은 가만히 생각했다.
‘아저씨도 모든걸 알지는 않아. 말해주지 않는것도 있고.
방법은 분명 있을거야. 우선 마을로 가서 전부 뒤져봐야돼.
좀더 효율적으로 이빨을 쓰는 방법이 있을거야.
방법만 알아내면 본격적으로 척살대를 만들어서 역귀를 사냥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시 진혁이를 찾아내야지.’
상혁과 여자는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이미 해가 떨어졌어. 이제 가야하네.”
황반장이 이야기 했지만 진아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끝까지 고집부리던 수지와 상우마저 전동차에 올랐지만 진아는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분명 올거에요.”
이곳에서 떠나면 진혁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단 생각에
진아는 억지인걸 알면서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보다못해 상우가 진아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 삼촌을 믿어봐요.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돌아올거에요.
우선 다친애를 치료해야죠. 수지도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고.”
진아는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
그 순간 도시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형체가 이리로 오고 있는건 확실했다.
진혁일까 싶어 상우가 소리치려 했지만 황반장이 나서서 조용히 시켰다.
“쉿. 진혁군인지 아직 확실치 않아.
역귀일수도 있고 그 성철이란 사람이나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조금 더 지켜봐야 해.”
가만히 형체를 지켜보고 있자니 확실히 움직임이 이상했다.
비틀대는 것 같기도 하고 꿈틀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역귀... 일까요?”
상우의 물음이었다.
황반장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고는 당장이라도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모두를 전동차에 태웠다.
그 형체는 보통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훨씬 느린데다 비틀거리고 있어 알아보는 것이 더 어려웠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 있던 진아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작게 말했다.
“진혁씨에요...”
상우가 전동차에서 내린 순간 비틀대며 걷던 진혁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상우와 진아는 서둘러 진혁에게 뛰어갔다.
고통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진혁은 상우와 진아가 달려오자 놀라 물었다.
“뭐에요 왜 여기 있어요. 먼저 가라고 했잖아요. 상우 너 누나 데리고 갔어야지 뭐하는거야?”
그 말에 진아는 속상해 하며 말했다.
“이런 꼴로 무슨 소리를 하는거에요. 어떻게 된거에요. 왜 제대로 걷지도 못해요 왜?”
진혁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귀떼에 둘러쌓여서 이정도면 기적이죠.
무조건 죽는거라고 수백번 들었는데....”
상우가 진혁을 부축했지만 진혁은 고통 때문인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제대로 얘기해요. 어딜 어떻게 다친거에요!”
진아가 쏘아붙이자 진혁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어두운 지하로 유인해서 잘 따돌린줄 알았는데 한놈이 눈치가 빨랐어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텐데 저한테 무작정 달려들더라구요.
다행히 잡히진 않았는데 트럭에 치인것마냥 날아갔죠 뭐.
어떻게든 잘 빠져나온 것 까진 좋은데.
어디가 어떻게 부러졌는지 엉망이네요.”
상우의 도움으로 전동차까지 돌아온 진혁은 모두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걱정끼쳐서. 그리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조금 다치긴 했는데 약속대로 이렇게 살아왔네요.”
진혁은 울먹이는 수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황반장에게 목례를 건넸다.
시현이에게 웃어보이고 상처입은 소년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부축해준 상우의 어깨까지 두드려준 진혁은
마지막으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진아와 마주했다.
둘다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누구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쭈뼛거리던 그때 상우가 지나가는 듯 진아에게 툭 던졌다.
“진혁 삼촌도, 오늘은 어리광 좀 부려도 될거 같은데요?”
그 말에 진아는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진혁을 끌어안았다.
진혁은 약간 당황했지만 곧 조용히 진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좋구만.”
황반장의 말이었다.
“좋네요.”
상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레 대답했다.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의 기쁨을 표현했다.
소년은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칼을 들고 자신을 쫒아오는 남자.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소년은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꼭 묶이기라도 한 것마냥 꼼짝도 못하는 소년에게 남자의 칼이 다가왔다.
칼에서 흘러나온 피들이 소년의 몸을 휘감았고
그 피들 하나하나에 날이 달린 듯 소년의 몸 구석구석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온몸을 갈아낼듯한 고통에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쉿!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그러니까 진정하고 가만히 누워.”
진아의 말을 들은 소년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창고에 몇몇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워있었다.
자신은 전동차 짐칸에 얇은 천 하나를 덮은 채였다.
그제야 간신히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지금은 새벽이야. 밤새 앓았어. 많이 힘들지? 상처는 괜찮아?”
진아가 묻자 소년은 잠시 잊고있던 상처 통증에 몸을 움찔거렸다.
팔, 다리, 허리, 등, 어깨까지 붕대를 감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상혁이나 진수가 대충 처리해놓은게 아닌 꼼꼼하게 다시 묶은 붕대를 본 소년은
고통과 서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들어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진아는 그런 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어보고 싶은게 많긴 한데, 그건 천천히 하자.
출발하려면 아직 좀 남았으니까 좀더 눈 붙여.
진혁씨네 마을 도착하면 상처도 제대로 다 치료하고 그러자. 알겠지?”
소년은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진아는 그런 소년을 한참 다독여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쪽에 앉아있는 진혁에게 다가갔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좀 더 주무시지 않구요.”
진혁은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원래 잠이 별로 없는 편이라 괜찮아요.
외곽이라 역귀도 없을거고 사람이 올만한 곳도 아니니까 진아씨야 말로 푹 주무세요.
보니까 그 꼬마애 돌보느라 잘 못자신 것 같던데.”
진아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할머니랑 오래 살아서 아침잠은 없어요.”
진혁은 고개를 저으며 누워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제가 딱 저애들 만할 때는 진짜 사고뭉치 꼬맹이였어요.
여기저기 놀러다니느라 바쁘고 자잘한 사고도 많이치고.
돌아보면 너무 철이 없었구나 싶기도 한데, 사실 그땐 그래도 될 때잖아요.
놀러도 다니고 형제끼리 친구끼리 싸우기도 하고 넘어져서 엉엉 울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이먹어 가면서 조금씩 철이 들고 책임감도 생기고 하는건데
저 애들은 너무 빨리 철이 들었어요.
어린 애들이 누릴 수 있는걸 못누리고 다 강제로 어른이 된거죠.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서 만약 마을에 가면 아이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아 역시 같은 바램이었다.
동생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걸 필요 없이.
나쁜 사람들에게 끌려다닐 필요도, 몸을 난도질 당할 필요도 없이.
그리고 모두를 구하겠다며 스스로 희생하겠단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이.
진아는 가만히 진혁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될거에요.”
그건 진아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박수지! 9살이야. 얘는 조시현. 나보다 한 살 어려.
우리 오빠는 박상우. 그리고 운전하는 분은 반장님!
그리구 진아언니랑 진혁삼촌! 이제 이름 말해줘.”
수지는 소년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한산한 도로를 유유히 달리는 전동차 위는 상쾌했기에 소년역시 한층 좋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윤성이. 한윤성. 열 살.”
“어? 내가 맞췄다 그치 수지 언니?”
시현이와 수지는 사전에 나이 맞추기라도 했는지 신이나서 그렇게 떠들었다.
금세 친해져서 기분좋게 이야기를 나누든 아이들을 보니 새벽에 했던 말이 생각나 진혁의 기분도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윤성이가 입은 상처를 볼때마다 속이 상했다.
어떻게든 상혁을 잡았어야 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자신의 형이 마음놓고 돌아다니는 이상 윤성이와 같은 피해자는 얼마든지 생길 것이다.
고심하던 진혁에게 황반장이 물어왔다.
“조금 무리하면 저녁 먹기 전에 도착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진혁은 곧바로 대답했다.
“반장님만 괜찮으시다면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챙겨온 식량이나 잡기들도 포기한 덕분에 물자도 부족하니까요.”
황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엔 쓸만한 물건들이 많았으면 좋겠구만.
내가 재주를 부리려면 재료가 필요한 법이라서 말이야.”
“만족하실 겁니다. 마을에 도움이 많이 될거에요. 잘 부탁 드립니다. 반장님.”
진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상우를 돌아보았다.
“너 공부 좀 했냐?”
상우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었었어요. 과학 동아리도 했었고.”
진혁은 웃으며 말했다.
“생긴게 딱 그래 보이더라. 너 반장님 부사수 하면서 잘 배워둬.
반장님. 얘 데리고 다니시면서 잔심부름 좀 시키세요.
바쁘실테니 제가 부하 하나 붙여드릴게요.”
상우는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전동차나 태양열 충전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관심을 보이던 상우였다.
“진아씨는 임시로 애들 보호자 좀 부탁드릴게요.
새로만든 마을에 사람들은 제법 있는데 아이들은 처음이거든요.
나중엔 선생님도 뽑을 생각인데 혹시 관심있으시면 후보로 넣어드릴게요.
너희들. 언니말 잘들어야 돼 알겠지? 윤성이는 도착하자마자 약사 아저씨한테 데려갈 테니까 걱정 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앞으로 편한 일만 있지는 않겠지만 진혁은 당분간 이 기분이 지속되기를 바랬다.
“내가 너희들에게 모두 줄 수 있다!!!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주고, 용기가 없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죄 지은자를 용서를 주고, 복수가 필요한 자에게 무기를 쥐어주마!!
대장님의 지휘아래 역귀들을 몰아내고 우리 세상을 만들것이야!!!
그러니 모두 나와라. 이빨부대로 들어와라!!”
진수는 마치 광신도처럼 도로 한복판에서 칼을 들고 외쳐대고 있었다.
상혁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 하나를 줄로 묶어 허리춤에 매단 채였다.
그날따라 역귀소리도 들리지 않는걸로 보아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진수는 포기 하지 않고 비슷한 말을 사방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진수의 노력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진수가 외치는 곳과 멀지 않은 건물에 군인 복장의 몇 명의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거 아닙니까?”
누군가 말했지만 최민규 대위는 대답하지 않고 진수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괴물 토벌 작전 실패.
괴물들에게 도륙당하던 부대원들.
부대의 와해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했던 나날.
이제 자신의 중대원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무명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건물안에 완전히 고립된 채 기약 없이 버티고만 있는 상황이었다.
남은 거라곤 역귀에 대한 공포심과 해소될 수 없는 분노 뿐.
그 상황에서 진수의 말은 최대위에게 이상한 기대감을 가지게했다.
“중대장님. 쫒아낼까요? 미친사람 같은데 괜히 괴물들 끌어들이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제야 최대위는 조용히 말했다.
“아니, 조금 더 지켜보지. 뭔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 저러겠지.”
다른 병사들은 조금 의문스러워했지만 별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이들은 전부 죽거나 도망쳤기 때문에
남은 인원들은 모두 최대위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부류였다.
진수는 여전히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때, 진수와 멀지 않은곳에서 역귀가 나타났다.
“크아아아아!!!!”
그리도 소리를 질러대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최대위를 포함한 모두는 긴장한채 혹여나 들키지 않을까 몸을 움츠렸지만
진수는 오히려 마침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보아라! 이것이 이빨의 힘이다! 대장님이 내려주신 힘이다!!!!”
진혁은 주저없이 옆에있던 아이에게 칼을 박아넣었다.
그리곤 달려오는 역귀를 마주했다.
“와라!! 죽여주마! 전부다 죽여주마!!!”
그리고 잠시 후,
최대위는 놀란 얼굴로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가서 저 사람 데려와. 얘기를 해봐야겠다.”
“이제 도착했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반장님.”
진혁은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건네며 전동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들이 멈춘곳은 막다른 시골길이었다.
눈앞에 넝쿨들이 잔뜩 자라있는 벽이 자리잡고 있는게 보였기에 상우가 물었다.
“혹시 비밀 문같은거라도 있는거에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기다리란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곧 넝쿨들이 자란 벽이 한쪽으로 움직이며 숨겨진 길이 드러났다.
“굴다리인데 넝쿨자란 벽으로 막아놓은거야. 이정도는 숨겨야 안전지대지.”
진혁은 자랑스레 말했지만 상우는 그냥 사파리 구경온 느낌이란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었다.
“아이고 고생했네 진혁이. 손님들이 많구만. 애썼겠어.”
안에서 벽을 움직이던 사람들이 진혁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진혁은 모두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마을 안으로 안내했다.
“활기차네요. 몇 명정도 있어요?”
진아의 물음에 진혁은 기억을 떠올려보고는 대답했다.
“오십몇명 될거에요.
옛날 길영마을 사람들. 도망치면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저나 다른 사람들이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들.
아직 부족한건 많지만 그래도 이제 슬슬 구색 갖추고 있죠.”
확실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진혁과 일행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꼭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온 느낌이 들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평범한 시골동네긴 한데 집도 충분하고 장비도 제법 있어요.
지하수가 연결되어 있어서 식수 걱정은 없구요.
농사짓던 분들도 많아서 식량 자급도 어느정도 가능하고.
태양열 발전기랑 휘발유로 돌아가는 산업용 발전기도 갖춰놔서 전기를 쓸수 있구요.
물론 아껴야 하니 제한적으로 쓰긴 하지만요.”
진혁은 자랑스레 말했다.
사실 별것 아닐수도 있겠지만 그 난리통에 이렇게 갖추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게 분명했다.
그들이 마을회관 건물에 도착하자 그곳엔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 기다리고있었다.
“인사드리세요. 예전엔 길영마을 촌장이셨고 지금은 여기 거주지 총 책임자세요.
김갑수 어르신이십니다.”
촌장은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뒤 진혁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자네가 고생 많았네. 다들 힘들테니 어서 쉴곳으로 모시게.
그리고 대략 정리가 되면 내게 찾아오겠나? 내 긴히 할말이 있네.”
진혁과 일행은 촌장에게 감사를 표했고 머물 집으로 향했다.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방도 세 개나 있었고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당분간은 같이 지내시는게 좋겠어요.
반장님은 안방 편히 쓰시면 되고, 상우랑 윤성이가 작은방.
진아씨는 수지, 시현이랑 같이 큰방 써주셔야 겠네요.”
그러자 황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늙은이 혼자 그 넓은 방 써서 뭐하게.
난 작은방이면 충분하니 안방은 아가씨랑 애들이 쓰는게 좋겠어.”
진아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 아이들을 위해 안방에 머물기로 했다.
“제가 머무는 집은 바로 옆에 있어요. 이따 한번 구경오세요.
아, 마을 사람 절반정도는 각자 배급받은 음식으로 식사준비를 하고
나머지 분들은 마을회관 옆 식당에서 같이 먹어요.
당분간은 거기서 드시면 됩니다. 마음에 드실거에요.
배식 담당 민옥이모 솜씨가 기가 막히거든요.
아, 윤성이는 참 약사 아저씨 먼저 보러가야겠다.
붕대나 소독약 같은건 충분할테니 걱정말고.
황반장님은 입구에서 본 김씨 아저씨께 물어보시면 뭔가 할일을 주실 거에요.
상우 데리고 다니면서 이 거주지 발전에 힘 좀 써주세요.
진아씨는 당분간 애들 잘 돌봐주면서 선생님 역할 좀 해주시구요.”
진혁은 뭔가 급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같이 머무르면서 천천히 마을에 대해 알려줄거라 생각한 진아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혹시 어디 가시나요? 빨리 정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진아의 말에 진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상우에게 말했다.
“애들 데리고 마을 둘러보고 있어. 사람들한테 인사도 좀 하고.
그동안 애들이 없어서 다들 좋아하실거야.
너무 멀리가지는 말고 알겠지?”
상우는 눈치빠르게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전 아무래도 바로 나가봐야할 것 같아요.”
진아는 놀랐지만 황반장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담담했다.
“자네 형이란 사람 때문인가?”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분명 살아있을 거에요. 살아남아서 또 끔찍한 짓거릴 준비하겠죠.
뭔가 뚜렸한 대책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냥 둘수는 없어요.
어떻게든 찾아서 뭐라도 해야죠.
두들겨 패서 데려오든 아니면 꽁꽁 묶어서 가둬놓든...”
진아는 무언가 말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뭐라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대신 황반장이 입을 열었다.
“뭐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내 말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좀 신중하길 바라네.
지금 자네 몸이 멀쩡한것도 아니고 또 이렇다 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나가는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야..
우선 몸을 추스르면서 대책을 마련해야지.
솔직히 말해서 자네 형은 역귀에 대한 대비책이 있지만 자네는 없어.
이미 시작부터 힘든 싸움이란 말일세.”
진혁은 뭐라 할말이 없었다.
사실 마음이 급해서 무작정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뿐 황반장의 말대로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었고
몸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우선 윤성이 데리고 그 약사분을 찾아가 치료에 전념하게.
그동안 계획을 짜보는거야. 나가는건 그때가 되어도 늦지 않아.
지금 무턱대고 나가는건 위험하니 조금만 여유를 가지게.”
황반장의 말과 진아의 간절한 표정을 본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우선 몸을 회복하며 대책 마련을 하기로 했다.
그 동안 상혁이 쓸데 없는 짓거리를 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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