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헉...”
진혁은 숨을 몰아쉬며 전력으로 달렸다.
업고 있는 소년덕에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상혁이 난리를 쳐댄 통에 주변 모든 역귀는 마트쪽으로 갔고
상혁역시 그것들을 쉽게 떨치고 나오긴 힘들거란 사실이었다.
물론 진혁은 자신의 형이 거기서 죽을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절대 그럴 인간은 아니다.
어느정도 거리를 벌린 듯 하자 상혁은 안전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소년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상처가 심한데다 두려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이는 수지와 같거나 더 어릴까?
이토록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벌인 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저씨...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소년의 상태를 확인한 진혁이 복잡한 심정에 괴로워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자네, 괜찮은가?”
재빨리 칼을 뽑아들고 돌아서니 그곳엔 헬멧을 쓰고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놀라지 말게.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다친 것 같아서 도와주러 왔네.
근처에 내 집이 있으니 따라오게. 내가 치료해 줄 수 있네.”
진혁은 남자를 살펴보았다. 60대 중반정도 되어보이는 남자.
몸이 그리 다부진것도 아닌데 어떻게 역귀가 있는 도시에서 여태 살아남았을까?
하지만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밖에는 남자가 타고 온 듯한 전동차가 서있었다.
저거라면 소리가 크지않아 역귀를 꾀이지 않을거고
또 도망치기도 수월할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꼭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진혁은 즉시 칼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보단 이애가 급하니 좀 도와주세요.”
남자는 그제야 쓰러진 소년의 모습을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다 이지경이 된건가? 그 괴물놈한테 당한건 아닐테고...”
진혁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네. 역귀만도 못한 어른놈이 이랬죠. 저보단 이애를 치료해야 합니다.”
진혁은 남자의 도움으로 아이를 전동차에 태우고 이동할 수 있었다.
남자의 집은 지하에 있었다.
일 층 창고에 전동차를 넣어놓고 계단을 통해 그대로 지하로 내려가면
갖가지 공구와 발전기들로 가득찬 공간이 나온다.
집이라기보단 작업장에 가까웠지만 역귀를 상대로는 더할나위 없이 안전해 보였다.
남자가 침대를 내어주어 아이를 눕힐 수 있었다.
간단히 치료하고 진통제를 먹이니 다행히 아이는 금세 안정을 되찾고 잠들었다.
함숨 돌리고 진혁의 상처까지 돌보고 나자 남자가 말했다.
“황철영일세. 그냥 황반장이라고 불러주게. 내가 이래뵈도 공장 기술자거든.”
“최진혁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긴 뭘. 나도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정말 기뻤네.
솔직히 나만 남아있는 줄 알았어.
그보다 어찌된 일인가? 저아인 어쩌다 저렇게 된거고.”
믿을만한 사람 같았기에 진혁은 대략적으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거주지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
상우 수지 남매를 만난 이야기.
진아 집에 은신처를 꾸린 이야기.
그리고 마트에서 상혁을 만난이야기....
단 이빨 얘기만은 제외했다.
소년은 그저 역귀를 두려워한 상혁이 제물을 바친답시고 미친 짓을 벌였다고만 이야기 한 것이다.
“세상이 흉흉하니 사람까지 흉흉해 지는구만. 그래선 안되는데 말이야.”
황반장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반장님. 저희랑 같이 가시죠. 안그래도 곧바로 준비해서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거주지는 안전할테니 그곳까지 같이 가시죠.
기술자시면 분명 큰 도움이 될겁니다.”
황반장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물론 따라가야지. 안그래도 혼자있기 적적한 참이었네.
그리고 내가 쓸모가 있다면야 당연히 가야지.
저 전동차가 도움이 될걸세.
내가 개조를 좀 해서 힘도 좋고 속도도 빨라.
서너명 태우고도 바람처럼 달릴걸세.
짐칸도 연결할 수 있으니 공간도 널널하고.
그 괴물놈들... 그러니까 역귀 라고 했나?
그놈들은 절대 못쫒아 올거야.”
진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린 뒤 말했다.
“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빨리 준비 하는게 좋겠습니다.
반장님 전동차에 짐칸을 연결해 주시고 짐은 최소한만 싸주세요.
바로 진아씨 집으로 가서 전부 태운 다음 출발 하는걸로 해야겠습니다.”
“알겠네. 몇분이면 충분할걸세.”
“준비는 다 한거같아요.”
상우의 말에 진아는 짐들을 살펴보았다.
각자가 멜수 있는 가방에 식량을 나눠 담고 꼭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넣었으니
당장 문제가 생겨도 가방만 들고 움직이면 되었다.
“그래. 이왕이면 급히 떠날일은 없었으면 하지만 그래도 준비해놔야겠지.
수지는?”
“진혁 삼촌 기다린다고 밖에 있어요.”
진아 역시 진혁이 조금 걱정되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물론 당장 걱정한다고 뭐가 될 것도 아니었으니 우선은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안으로 불러와. 부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안에서 기다리자.”
진아의 말에 상우는 곧바로 수지를 부르러 나갔다.
밖으로 나가보니 수지는 부적들을 구경하며 문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누나가 들어오래. 위험하니까 안에서 기다리자.”
수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쉬움이 남는지 자꾸 문을 돌아봤다.
그때, 문이 덜컹거렸다.
상우는 놀랐지만 수지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진혁 삼촌이에요?”
곧 문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삼촌이야. 문열어줘. 우리 빨리 도망가야 돼!”
그제야 상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반갑게 진혁을 맞으려 할 때,
방금전 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진혁의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목소리 비슷하지? 난 이렇게 간지럽게 말 안하지만.
그보다 삼촌이라니 이놈 진짜 제정신인가?”
상혁이 느긋하게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황반장의 전동차는 기대이상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골프카트 크기의 운송용 전동차. 전기로 움직이니 소리는 아주 조용했다.
2인승 이라지만 황반장의 솜씨 덕인지 출력도 좋았고 리어카 정도 크기의 짐칸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이거라면 다친 소년을 데리고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조건만 맞는다면 단 하루 만에 거주지에 도착 할수도 있을 것이다.
진혁은 일이 잘풀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당집의 푸른 대문 앞에 섰다.
쿵쿵쿵.
가볍게 두드리자 곧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어? 들어와. 들어와.”
진혁을 맞이한 것은 진수였다.
진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진혁은 곧바로 진수의 멱살을 잡아채서는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야이씨.. 이새끼는 뭐 눈만 마주치면 지랄이야. 지랄은. 이거놔. 뒤지기 싫으면.”
“너 뭐야?”
진혁이 묻자 진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놔. 놓고 들어가서 우리 대장님이랑 얘기해.”
잠시 진수를 노려보던 진혁은 진수를 놔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상혁이 앉아있었다.
“앉아.”
“다들 어디있어?”
“알고 싶으면 일단 앉으라고.”
진혁은 상혁에게 칼을 겨눈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후 진수가 황반장의 손을 묶어서는 데리고 들어왔다.
“그 손 못놔?”
진혁이 소리쳤지만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상혁이라면 진아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을거란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것들이랑 같이 묶어둬.”
진혁의 생각이 맞았는지 상혁은 그렇게 명령했고
진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황반장을 이끌고 안쪽방으로 사라졌다.
“일단 앉아. 칼 내려놓고 차분하게 얘기해 보자고.
아니면 그냥 다 죽여버리고 끝낼까?”
진혁은 그제야 칼을 내려놓고 식탁에 마주앉았다.
“그래. 서로 욕하고 소리지르는거 말고. 칼들고 싸우는거 말고.
총들고 협박하는거 말고.
이렇게 앉아서 형제끼리 차분하게 한번 얘기해보자.
허심탄회하게.
지금은 시간이 좀 있잖아?”
진혁은 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래. 우리가 좀 제대로 얘기할 때가 되긴 했지.”
상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군대를 만드는거야!
나한테 뭐 대대장! 이런자리 주시겠지.
부대이름도 정해놨어. 이빨부대!
크! 난 이빨이 이렇게 멋있는 말인지 몰랐잖아.
그거 알아? 대장님이 나한테 멋있게 딱 그랬거든.
‘이게 바로 이빨이다. 이거야말로 역귀놈들을 죽일 무기인 것이다~~~!’
이러시니까 막 눈에선 빛이 좔좔좔 나오고 후광이 딱 비치는데...
와 난 그냥 울뻔했잖아.”
좁은 방안에 묶인 사람들을 앞에 두고 진수는 다시 떠들고 있었다.
마트에서 데려온 아이중 새로운 이빨이 된 한명.
진아와 상우, 수지 남매. 마지막으로 들어온 황반장까지.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지만 진아와 황반장은 진수의 수다를 귀담아 들으며 정보를 캐내려 하고 있었다.
“아주 대단한 분이신가 보구만.”
황반장이 슬쩍 운을 떼자 진수는 더욱 신명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럼. 대단하시고 아주 위대하시지.
봐. 혼세에는 영웅이 필요하고 지저분한 세상에는 왕이 필요한 법이지.
그게 우리 대장님이란 거야.
잔악무도한 역귀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실 분!
난 그분 보자마자 딱 이렇게 말했어.
‘주인이시여~ 이 종은 온 힘을 다해 그대를 섬! 기겠나이다~~.’
그러니까 대장님이 나한테....”
“이빨이란건 뭔데요?”
진아의 물음에 진수는 다시금 떠들었다.
“어? 궁금해? 아 궁금하면 또 말해줘야지. 봐.
저애 보이지. 묶여있는 꼬마애. 저게 이빨이야.
그럼 이빨이 왜 필요할까? 응? 한번 맞춰봐.”
대충 예상가는게 있던 황반장은 슬쩍 운을 떼었다.
“애들이 역귀를 상대할 때 필요한건가?”
진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늙은이가 아주 똑똑하네.
이게 원래 그래요. 정의를 위해선 뭐가 필요하다?
희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역귀를 없앨라면은 애새끼들의 피가 필요하다 이말이야.”
그 말에 수지와 상우는 물론 진아마저 겁에 질렸다.
“그런 말이 있어요. ‘방법이 있다면 길은 열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장님이 이렇게 애들을 모으시는거지.
어? 가장 신뢰하는 심복인 이 나를 앞세워서 말이야.
당장은 뭐 그냥 유치원이지만 좀만 지나면 이제 학교가 되고,
또 마을이 되고, 그리고 이제 그 뭐라시더라?
아. 뭔가 좀 야리하고 말랑한 그...
어 그렇지 이빨공장을 만들어서 가동을 하신단거 아니야.
그럼 이제 무기를 만들고. 그럼 또 군대가 만들어지고.
이제 역귀들을 싹 밀어버린 다음에 새왕국을 세우신다 이거지.”
이후로 진수가 신나게 떠들어대는 통에 모두가 이빨의 존재.
그리고 상혁의 계획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네 목표는 뭔데?”
상혁의 물음이었다.
어떻게 얘기할까 생각하던 진혁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아저씨처럼 사람들 구하고 새로운 거주지를 세울거야.
역귀걱정 없이 평화로운곳.
식량도 자체 생산하고 안락하게 편히 살 수 있는곳.
그렇게 하나를 완성하면 다른곳에다 또하나를 만들고.
사람들 보금자리를 점점 늘려나갈거야.”
그 말에 상혁은 웃었다.
“그래. 그런 소리를 할줄 알았어.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자.
그게 현실적으로 맞을까?
역귀들 피해서 구석구석에다가 부락을 만들고 숨어사는게?
역귀들한테 땅이며 뭐며 다 내어주고 그냥 연명이나 하자고?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서?”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최선이 아니야. 멍청한 판단이지.
너도 알잖아. 역귀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 아니야.
마음만 먹으면 전부 죽이고 몰아낼 수 있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알잖아. 애들은 평범하게 학교다니면서 뛰어놀고.
사람들은 느긋하게 산책도 하고 또 내키면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그 세상으로 다시 되돌릴수가 있다고.
이게 그렇게 터무니 없는 생각일까?
이렇게 되돌리는게 가능한데 그걸 전부 포기하고 바퀴벌레가 되겠다고?”
상혁은 조금 흥분해서 목소리가높아졌다.
진혁 역시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게 가능하려면 몇 명이 죽어야 하는데?
지금 이 나라에 돌아다니고 있는 역귀가 몇인데?
십만? 백만? 이러는 동안에도 점점 늘겠지.
반대로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리 크게잡아도 천만이겠지? 점점 줄거고.
그중에 10살이 안된 아이들을 몇일까?
그 애들을 전부 죽이면 역귀를 다 없앨 수 있어?
좋아 있다고 치고. 그게 맞아? 그렇다고 당당히 말할거야?”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일은 아니겠지. 희생이 엄청날거고.
그래도 가능하잖아.
시간이 걸릴뿐이지 가능은 해.
5년이건 10년이건 시간만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역귀는 말이야. 우리세대에서 끝내야돼.
우리는 더럽고 비참하고 버러지 같이 살지언정.
우리 후세에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근데 넌 뭐야. 네가 낳을 자식. 손자. 또 그 손자의 손자까지
바닥에 착 달라붙어서 괴물놈들 눈치나 보고 살게 만들려고?
나 좋자고 하는 짓 아니야. 다 인류를 위한거지.
우리 인간!
나한테 계획이 있어. 그러니까.....”
“그래서...”
진혁은 상혁의 말을 끊고 차갑게 말했다.
“그 미쳐 날뛰는 인류애를 지키려고 하영이를 희생시켰어?”
상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네가 뭘 말하고 싶은줄은 알겠는데 방향을 잘못 정했어.
내가 그때 결정 안내렸으면 너랑 그 마을 사람들 전부다 죽었어.
네놈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그따위 시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것도
다 우리 딸 하영이가 희생해서야 알아?
나라고 맘 편했을거 같아? 그 어린애한테 날붙이 들이댈 때 난 뭐 신났겠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마.
내 각오는 고작 그따위 안일한게 아니니까.”
“그럼 예지는?”
“뭐?”
“당신 와이프 예지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치맛자락 찢어서 그 네살박이 어린애 몸에 난 상처를 동여매고 엉엉 울던 예지는!!
그 애도 형을 이해했을까?”
상혁은 침묵했다.
말문이 막혀서라기 보다는 들끓는 감정을 억누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피 철철 흘리면서 탈진할 때까지 울던 하영이!
애 열이 안떨어진다면서 하영이를 꼭 끌어안고 오열하던 예지!
난 아직도 그 모습이 악몽에 나와. 알아?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옳은 결정이니 이따위 소리를 해댈동안!!
그날 밤을 못넘기고 떠난 하영이를 묻으면서 예지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 형한테 모진 소리 한마디 안하고 그대로 목을 매단 예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상혁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토하듯 뱉어낸 진혁은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했다.
“형.... 우리가 예지 처음 본 날 기억해?
20년 전에 아저씨가 우리 데려왔던날.
그날 본 아저씨 딸. 6살짜리 여자애 예지.
난 똑똑히 기억나.
우리가 처음 본 그날부터 20년 동안 난 예지가 우는걸 한번도 본적이 없었어.
심지어, 우리가 도망칠 수 있는 딱 5초 벌어주겠다고
아저씨가 마지막 싸움을 하러 갔을때도 예지는 안울었어.
근데 그런 예지가 오열을 했다고.
거기서 뭔가 느끼는게 없어?”
상혁은 드디어 진정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알아.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최악의 쓰레기 짓이었지.
그러면 이번엔 내가 한번 물어보자. 그럼 그때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했을까?
우리들. 간신히 도망치고 있던 수십명의 사람들이랑 역귀 사이에 선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했을까?”
진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그걸 선택하지는 말았어야지.”
상혁은 눈을 감았다.
“너무 감정적인 대답이야. 그건 답이 되지 못해.”
“아니, 감정적인 대답 아니야. 배운대로 말한거 뿐이지.
사람이 되어야 한단 아저씨 가르침 대로..”
“아저씨 얘기 그만해!!”
상혁은 더 참지 못하고 식탁을 치며 일어났다.
잠시간 씩씩대던 상혁은 조금은 진정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내딸 하은이. 그리고 사랑하는 예지. 그 둘은 나한테도 평생의 상처야.
옳은 선택이니 어쩌니 이딴 말들이 다 도피용 인것도 맞아.
하지만 아저씨는 전부 틀렸어.
이빨을 썼어야해. 짐승이 되는한이 있어도 이빨을 써서 다 없앴어야 했다고.
먼 옛날 역귀들 잡아 넣은 그 멍청한 놈들이건, 우리 전에 있던 그 수많은 후계자라는 놈들이건.
하다못해 아저씨가 최후의 순간에 목숨바쳐 시간을 벌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역귀들을 토벌했어야 했다고.
더 큰 희생을 막았어야지.
역귀들을 다 없앴으면 이런 비극도 없었겠지.
그래서 난 짐승이 되기로 한거야.
빌어먹을 역귀 새끼들을 다 죽이고 전부 재건할거라고.
우리 다음세대. 그리고 그 다음세대. 또 그 다음세대들을 위해서.
수천명을 죽여서 몇억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난 누구보다 냉철하고 잔인해질거야.”
진혁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내가 구할 수 있는 전부를 구할거야. 단 한명도 희생시키지 않고.
어린애들 피로 강제로 만든 평화 따위 다 허상이야.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 힘들어도 다 같이 살아야지.
방법은 있을거야. 포기만 안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우리는 못해도 우리 다음 세대. 그리도 또 그다음 세대에는 답을 찾을거야.
죽은 아이들을 밟고 올라가느니 새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지.”
그리고 한동안 둘다 서로를 노려볼뿐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 같았다.
“그래. 적어도 나한테 협력할 생각은 없다는 거지?
마찬가지로 나도 네 말에 동조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이제 말로 하는 설득은 끝이야.”
상혁은 검은 칼을 뽑았다.
진혁 역시 칼을 뽑아들었다.
“칼 내려놔. 방안에 있는 놈들 다 죽는꼴 보기 싫으면.
넌 선택권이 없다니까?
그냥 거주지가 어딘지만 말해.
그럼 너랑 네 추종자들 전부다 그냥 보내줄게.
그 사람들이랑 새로 시작하면 되잖아.”
하지만 진혁은 대답도 없이 상혁에게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보내주긴 누가 누굴 보내줘. 내가 형 못보내.
다시는 헛소리 못하게 해줄테니까 어금니 꽉 깨물어.”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내기는 했지만 상혁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뭐야 이새끼? 너 이러면 안에 있는 놈들 다 죽어?”
그 말에도 진혁은 주저없이 테이블을 걷어차며 상혁에게 달려들었다.
평소 무기를 들었을 때 만은 언제나 진혁을 압도하던 상혁이었지만
좁은 공간인데다 예상치 못한 진혁의 폭주에 여유가 없었다.
반격할 틈이 보이지 않자 상혁은 방 안쪽에 있는 진수에게 소리쳤다.
“야! 거기 있는 계집애 죽여!!!”
진혁이 공격을 아예 멈추거나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틈을 노릴 생각이었지만
상혁의 예상과는 달리 진혁은 전혀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상혁은 다급해졌다.
“야이 미친새끼야. 진짜 다 죽일 거야?”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황반장과 진아가 아이들을 이끌고 나왔다.
‘하 그 멍청한 새끼가....’
상혁은 점점 더 휘몰아치는 진혁의 칼을 막아내며 욕을 내뱉었다.
“그래서 역귀들이 전부다 평정이 된다? 그럼 이제 우리 대장님이 왕이 되시고
난 뭐 국무총리. 아님 뭐 영의정? 그런자리 딱 얻어서 보좌를 하는거지.
응? 내팔자도 피는거야. 사람들은 이제 굽신 거리고 여자들은 줄을서고....
그래서 좀 고민중인게 정실부인을 두고 또 첩들을 따로 두는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첫째부인 둘째부인 이렇게 번호를 매기는 게 좋을까?”
들을만한 이야기는 물론 알고 싶지 않은 얘기까지 주절주절 떠드는 진수에게 다들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떠드는데 온 정신을 쏟아부은 덕에 황반장이 등 뒤에서 하고있는 공작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뒷주머니에서 면도칼만한 날붙이를 꺼낸 황반장은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줄을 끊어내고는 기회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기 미안하지만 화장실이 급해서 그런데 도와주면 안되겠나?”
황반장의 말에 진수는 귀찮은 티를 팍팍내며 짜증을 내었다.
“하, 참 저 노인네 누가 늙은이 아니랄까봐 또 티를 내네.
여기 뭐 놀러온것도 아니고 인질이면 인질답게 좀 참아보셔.
내가 뭐 노인복지사도 아니고 뒷바라지를 시킬라고 아주...”
뜻대로 되지 않아 난감해 하던 그때, 눈치 빠른 진아가 나서주었다.
“저기... 저도 가고싶은데요...”
이번엔 진수의 반응이 조금 바뀌었다.
“거 아가씨가.. 화장실을 가고싶다고? 그럼 또 얘기가 다르지.
그럼 노인네는 잠시 기다리시고 아가씨는 또 내가 도와드려야겠네.
자 일어나. 그렇지. 그렇지. 내가 도와줄테니까 가자고.”
진수가 능글능글 웃으며 진아에게 다가오자 황반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호신용 전기충격기가 쥐어져 있었다.
“뭐야.. 헉!!!”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진수는 제대로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감전된 채 고꾸라졌다.
“어때? 매콤하지? 이것도 내가 출력을 왕창 올려놨거든.”
기분좋게 말한 뒤 진수의 손발을 묶은 황반장은 진아와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진아가 진수에게 발길질 하려는 상우를 말리는 사이 황반장은 귀에 손을 대고 말했다.
“됐어. 다들 무사하네. 이 수다스러운 녀석도 제압했고.”
이어폰을 통해 이를 전달 받은 진혁은 완벽한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거침없이 칼을 뽑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날 죽이겠다고?
전부 구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주제에. 참 편리한 정의관이네.”
“죽이진 않아. 그래도 그 허무맹랑한 짓거리는 멈춰야지.
잘 묶어서 가둬놓을거야.”
정글도를 거세게 휘두르는 진혁을 상대로 이 좁은 집안은 상혁에게 불리했다.
진혁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가서 싸우기만 한다면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기에
몸을 뺄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진혁은 쉽게 놔줄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상혁은 결국 억지로라도 빈틈을 만들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 알만해. 네놈이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존경해 마지않는 아저씨의 뒤를 잇겠단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넌 그럴 그릇이 못 되거든.
기껏해야 아저씨 흉내나 내는 가짜 주제에.
솔직해 져봐.
제일 중요할 때 넌 뭘했는데?
역귀가 나타난 그날, 아저씨가 마지막 싸움을 하러 떠난 그때.
그리고 내가 사람들을 지키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그때.
넌 뭘했냐고.
그냥 병신처럼 가만히 있었잖아?
뭔가를 하려면 그때 했어야지.
넌 아저씨를 이어갈 자격이 없어.”
그 말에 진혁은 아주 잠시 움찔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상혁에겐 충분했다.
상혁은 즉시 허리춤에 있던 물건의 핀을 뽑아서는
거친 공방에 감히 끼어들지 못한채 지켜만 보고 있는 진아와 아이들 쪽으로 던졌다.
“안돼!!”
당황하는 진혁을 뒤로 하고 상혁은 여유있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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