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흑!! 흐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으으흐크크큭”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방을 뒤지고 있던 진혁과 아이들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역귀소리. 그것도 서너마리는 될 것 같았다.

혹시 피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것일까?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맞춘 것 같은데...”

재빨리 건물구조를 떠올리며 탈출로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입구는 하나뿐이었고 도망칠 길이라 봐야 입구에서 좌우 두가지 선택지뿐이었다.

만약 역귀들이 한쪽에서 몰려온다면 서둘러 나가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지만

양쪽에서 오고 있다면 도망칠 곳은 없어진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진혁은 무심코 수지를 돌아보았다.

겁먹은 얼굴로 오빠에게 매달려있는 수지를 묘한 표정으로 보고있던 진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시간 없어. 일단 여길 빠져나가야돼.

빨리 나가면 아직 가능성이 있어.

자 짐 챙겨. 바로 간다.”

“어.. 저 사람은요?”

상우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묶인 채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그냥 놔둬. 저런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으니.

그렇다고 벌한답시고 내가 죽이고 싶지도 않아.

사람을 죽인다... 그래... 안되지. 그럼 안되는 거잖아.

역귀한테 죽으면 천벌 받은거고 혹여나 살아남으면 그것도 팔자겠지.”

아이들은 더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짐을 챙겼다.

“이제 진짜 위험할거야.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차려.

조심히 날 따라 움직이다가 내가 뛰라고 하면 죽어라 뛰는거야.”

진혁은 아이들을 챙겨서는 건물 입구로 내려왔다.

“크아아아악!!!”

“으아악!”

소리는 여전히 나고 있었지만, 정확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건물입구에서 고개를 내밀고 밖을 봐도, 좌우 모두 얼마안가 코너길이 있는 통에 어디에서 역귀가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딜 선택해야 할까?

확률은 최대가 반반.

최악의 경우 양쪽 다 나타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진혁은 다시 한번 수지를 돌아보았다.

‘방법은 있어. 하지만 없다고 생각해.’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며 턱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나쁜 생각을 억지로 들이밀고는

다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선택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머리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기다리자... 난 왼쪽을 볼테니까 너흰 오른쪽을 봐.

양쪽 어디 하나에라도 역귀 그림자라도 비추면 바로 알려줘.

반대쪽으로 최대한 소리 죽여서 가는거야.

그러다가 내가 소리치면 그냥 무조건 뛰어.

무서워도 절대 뒤돌아 보지마.

잘 알아들었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역귀들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다들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했지만, 역귀의 끔찍한 울음소리는 도저히 진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죽음과도 같은 몇초가 지났다.

진혁이 바라보고 있던 골목에 희미한 넘실대는 그림자가 비쳤다.

“오른쪽으로 뛰어.”

진혁은 즉시 작지만 확실한 어조로 신호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발소리를 죽이고는 서둘러 오른쪽 길로 빠져나갔다.

진혁은 뒤를 보며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이 속도라면 이 길을 빠져나가 골목을 도는데 몇초면 된다.

과연 역귀를 피해 빠져나갈 수 있을까?

“키에에에엑!!!”

작은 기대감을 무참히 박살내듯 왼쪽 골목 귀퉁이에서 역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녀석은 제법 시체를 차지한 듯 훨씬 거대하고 흉측한 모습이었다.

역귀는 움직이는 진혁 일행을 발견하고는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뛰어!!!”

다급한 진혁의 외침에 아이들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진혁역시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소리로 보아 한 마리는 아닌 듯 했지만 그걸 확인하려 할 정도로 진혁은 어리석지 않았다.

“제발.. 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혁일행이 코너를 돌았을 때 너무 감사하게도 길을 막고있는 것은 없었다.

만약 역귀라도 튀어나왔으면 놀랄틈도 없이 조각났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역귀는 대부분 사람이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빠르고 지치지도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한번 들킨 이상 쉽게 도망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다른 역귀들을 불러들일테니 마냥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진혁은 어쩌면 칼을 뽑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번.. 한번은 싸울수 있어. 아니면... 이빨을 쓸수도 있고.”

진혁의 시선이 수지에게 머문 그 순간, 걱정하던 상황이 벌어졌다.

진혁일행이 향하던 길 먼곳.

그곳에 역귀가 있었다.

“크아악!!!!”

단 한 마리. 하지만 다행이랑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진혁의 손이 칼에 다가간 그순간. 멀지 않은곳에 붉은색과 흰색 깃발을 건 옛날식 기와집 하나가 보였다.

“저기로 들어가! 빨리!!!”

녹이 슨 파란 철문은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진혁과 아이들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

“크아아아악!!!”

“으으큭! 컥커��”

문밖에 역귀들의 소리가 들렸다.

담 너머로 역귀의 끄트머리가 슬쩍슬쩍씩 보이기도 했지만 역귀는 진혁일행을 놓친 듯 비틀대며 주변만 돌뿐 문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하.. 살았네.”

진혁의 안도에도 상우와 수지는 불안감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 상우의 눈에 이상한게 들어왔다.

“어? 이거.... 뭐에요?”

철문 안쪽과 벽에 커다란 부적들이 무서우리 만큼 잔뜩 붙어있었다.

“부적. 내가 그랬지. 저놈들 과학적인 접근으론 안된다고.

나도 잘 모르지만 저것들 부적같은거 약간은 통하나 보더라고.

이 정도로 효과적인건 나도 처음보지만.... 누군지 몰라도 엄청 대단한 무당인가봐.”

“저희 할머니 솜씨세요.”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진혁과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수한 옷차림의 여자였다.

집에서 걸어나오는 그녀는 창백했고 야위어 보였다.

“노쇠하신 몸으로 저걸 손수 다 만드셨어요. 괴물들이 나타났단 소식이 들리자 마자요.

기력이 다하신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괴물들이 이 도시에 왔는데 집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어요.

그 덕에 전 이렇게 살아남았죠.”

진혁은 다시금 철문과 벽을 가득 채운 부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걸로 역귀들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단 겁니까?”

진혁의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단한 물건이지만 할머니께선 영원하진 않을거라고 하셨어요.

점점 약해지는게 보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제가 어깨너머 배운걸로 보수하긴 했는데 그것도 이제 오래가진 않을거에요.”

조금 조악한 부적들이 군데 군데 덧붙여져 있는 것은 여자의 솜씨인 듯 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하다고 봐도 되겠죠?

그럼 여기서 조금만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대신 저희가 먹을게 좀 있으니 나눠드릴게요.

그리고 여기서 최대한 버티다가 나갈 방법을 찾아봐요.

안전한 거주지가 있으니까 그쪽으로 모셔드릴게요. 이애들이랑 같이.”

진혁의 말에 여자는 상당히 안도한 모습이었다.

“사실 얼마전에 먹을게 다 떨어졌었거든요.

혼자서 나갈 엄두도 안나서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때마침 찾아와주시다니 정말 할머니께서 도우셨나봐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요. 좁지만 편히 쉬실 수 있을거에요.”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혁은 한숨을 쉬고는 허리에 찬 칼을 내려다보았다.

“알아요 아저씨. 싸우는건 딱 한번뿐이고 다른 방법은 없죠.....

아니 근데.... 사실 있잖아요. 이빨이 있잖아요.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아는데도 내가 안쓸 수 있을지...내가 참을 수 있을지...”

진혁은 한숨을 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혁 일행이 떠나고 얼마가지 않아 피냄새를 맡은 역귀 한마리가 그들이 나온 건물 안으로 찾아들었다.

“크르르륵. 크아악!!!”

역귀의 비명소리에 묶여있던 남자, 진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렸다.

곧장 도망치려 했지만, 상우의 솜씨가 제법 꼼꼼했던 탓에 몸을 움직일수도 없었고 소리를 지를수도 없었다.

오히려 빠져나가려 바둥거릴수록 역귀의 관심을 끌 뿐이었다.

“읍읍읍읍!”

역귀는 냄새를 따라, 그리고 진수가 내는 소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크르르륵”

다섯 개가 넘는 눈을 각각 따로 굴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역귀와 마주한 순간

진수는 최후를 직감하고는 눈을 감았다.

퍽!!

둔탁한 소리에 움찔한 진수가 눈을 뜬 순간 보게된 것은

역귀의 잘린 몸뚱아리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든 그의 앞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손에 들고 등에는 또다른 칼을 메고 있는 검은옷의 사내가 서있었다.

둘 다 한국식 환도같았다.

사내의 허리춤에는 끈이 묶여있었고, 그 끈의 다른 한쪽은 진수의 시야가 닿지 않는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는 쓰러진 진수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물었다.

“누가이랬어?”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였다.

진수는 놀란 나머지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너 뭐야.. 저 괴물놈을 어떻게.....”

그러자 사내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다시 물을게. 누가이랬어?”

그제야 진수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모.. 몰라. 왠 남자 하나랑 애들 둘이었는데...문 열자마자 날 이렇게...”

“나랑 닮았어?”

“응?”

“내 얼굴이랑 닮았냐고.”

진수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눈매가 조금 더 매서웠지만 분명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 맞아. 닮았어. 자세히는 못봤지만 맞을거야. 비슷했어.”

그제야 사내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쓸데없이 물러 터져가지고는..”

사내는 그리 말하며 방 안쪽으로 향했다.

역시 방안을 가득 채운 피 냄새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사내가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허리에 묶인 끈도 딸려왔다.

곧 보이지 않던 반대 쪽 끈을 보게 된 진수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양손이 묶인 어린 소년.

마치 노예를 끌고 다니는듯 한 그 모습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진수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년은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고 두려운 것을 넘어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진수가 할말을 찾는 사이, 검은 옷의 사내는 가장 안쪽방에 있던 사체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충격적인 모습일 테지만 사내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소년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진수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신경쓰지마. 그냥 이빨이니까.

그보다 저거, 네가 한짓이야?”

진수는 거짓말을 할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는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특별히 선택권을 줄게.

첫 번째. 저런 짓거리를 한 벌로 여기에서 내 손에 죽는다.

두 번째. 내 밑에서 일하면서 죄를 씻어내고 새로운 삶을 찾는다.

자 선택해.”

사내는 피묻은 칼을 집어넣고 또다른 칼을 꺼내어 들었다.

진수는 칼과 쓰러진 역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이 사람은 보통이 아니다. 분명 뭔가 있다.

그리 생각하자 진수의 마음속에 죽어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진수는 대답할 것도 없이 비틀비틀 몸을 움직였다.

아직 팔다리가 묶여있었지만, 가까스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수 있었다.

“아주 좋아. 자 이제부터 널 묶어놓은 그놈들을 찾으러 갈거야. 풀어줄테니 앞장서.”

사내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물이 있어서 식수 걱정은 없어요. 가스도 아직 많이 남아서 불도 쓸 수 있구요.

음식을 너무 낭비하면 안되겠지만,

아이들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한 것 같아서 간단하게라도 요리를 좀 해볼까 하는데 어떨까요?”

무당의 손녀. 권진아의 제안이었다.

진혁 역시 모처럼 안전지대에 왔으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려 했기에 허락했다.

덕분에 집안은 평범한 저녁때의 가정집처럼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너희는 음식하는 것 좀 도와. 얘네들 제법 똘똘하니까 필요한건 다 시키세요.

전 집 조금만 돌아볼게요.”

그렇게 말한 진혁은 밖으로 나와 부적들을 살펴보았다.

“저희한테도 이런게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그쵸 아저씨?”

씁쓸하게 말하고는 집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담벼락마다 부적이 전부 붙어있어 역귀들은 접근을 못하는 것 같았다.

진아 말대로라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지만

진혁은 우선 당분간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을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확보 할 수 있으니 이 도시에서 생존자 수색을 더 진행할 계획인 것이다.

어차피 식량은 진혁이 혼자 나가서 공수해 오면 된다.

혼자 조심히 움직인다면 크게 문제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던 진혁은 준비가 다 되었다는 수지의 말에 안으로 들어갔다.

“진수성찬이네요.”

조촐한 식탁이었지만 진혁의 말은 과장이 아니라 진심어린 감탄이었다.

그간 제대로된 식사는커녕 식탁에 앉아본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은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따뜻한 쌀밥. 무를 송송 썰어 넣은 무국과 아이들 가방에서 꺼낸 김.

거기에 통조림 햄을 노릇하게 구워 놓았다.

진아가 아끼고 있던 김치를 꺼내 송송 썰어 담아내고 옥수수와 과일 통조림으로 만든 샐러드까지 차려놓으니

평범했지만 지금 상황에 좀처럼 보기 힘든 멋진 식사가 준비된 것이다.

식탁에 네명이 모여앉으니 모두가 한없이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수지 역시 감격스러웠는지 말을 꺼냈다.

“저 기도해도 되요? 맛있게 먹기전에 기도하고 싶어요.”

“그래. 괜찮으니까 한번 해봐.”

진아가 다정하게 말하자 수지는 가볍게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오빠랑 같이 있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삼촌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고 진아언니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행복하게 지켜주세요.”

상우는 기특해 하는 모습 이었지만, 진아는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혁 역시 애틋한 감정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끼며 수지가 기도를 마치길 기다렸다.

“그래.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자.”

기분좋게 식사를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진혁은 문득 고개를 떨구었다.

세 번.

오늘 그 짧은 시간 동안 정확히 세 번 나쁜 생각을 했다.

이제 두 번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한 진혁은 자신에게 맹세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네. 맞아요. 아저씨... 이걸 깰수는 없죠. 이빨은 절대 안쓸게요.’

그날 넷이 둘러앉은 식탁은 어느때 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부적이 얼마나 버틸수 있을까요?”

진혁의 물음에 진아는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 없어요. 일주일 일수도 있고 한달 일수도 있고, 사실 당장 힘을 잃어도 이상할건 없는 상태에요.

원래 부적이란게 명확하게 사용기한이 있는게 아니니까요.”

“진아씨가 부적을 더 만드는 건요?”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만든건 거의 효과가 없을거에요.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그렇다면 생존자 수색을 하면서 식량을 모으고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해야 할 것이다.

급작스레 부적이 힘을 잃는걸 대비해 진아와 아이들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것도 중요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당분간은 이곳에서 생존자들을 찾아볼 생각이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죠.

일단 거주지까지만 가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거에요.

어쩌면 진아씨 부적을 더 연구해서 효과를 볼수도 있을거구요.”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조금 걱정스러운 듯 했다.

“그 거주지라는곳... 안전할까요?”

“그러길 바래야죠. 그래도 열심히 준비 했어요.

능력있고 좋은 분들도 많이 계시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사람들을 잔뜩 모아서 완벽한 거주지로 만드는게 제 목표에요.

아저씨 목표기도 하고.”

아저씨란 말에 진아는 의아해했다.

“네? 아저씨요? 그러고 보니 입버릇처럼 아저씨란분 얘기를 자주 하시던데... 누구신가요?”

진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뭐 선생님이기도 하고 스승님이기도 하고 보호자기도 하고 은인이기도 하고... 좀 복잡해요.

그보다 애들 좀 불러주시겠어요? 지금은 역귀에 대해 이야기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쩌면 중요한 얘기는 아닐수도 있고 또 어쩌면 엄청 중요한 얘기가 될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좀 옛날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진아씨도 그렇고 너희들도 잘 들어두는게 좋을거야.”

진아와 아이들은 식탁에 마주 앉아 진혁의 말을 경청했다.

“역귀들은 사실 생각 이상으로 오래전에 나타났어요.

기록된게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큰 맥락은 맞을거에요.

몇백년전. 정말 아주아주 오래전에 전국이 역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그때 한 산골마을에서 역병을 막기 위해 뭔가 주술을 시도한거죠.

하지만 그 주술이 통제를 잃고 폭주하면서 역귀란 존재가 생겨난거에요.

그 때문에 역귀의 몸은 언제나 역병으로 고통받는 끔찍한 모습인거죠.

역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들으셨겠지만 중요한 포인트들은 이거에요.

역귀는 주술의 힘 때문에 죽지도 늙지도 않는다.

총을 맞아도 금세 회복하고 칼에 찔려도 금세 회복한다.

대신 망가지는 몸을 대체하기 위해 사람이나 짐승의 몸을 찢어다가 붙여 몸집을 불린다.

커질수록 강해지기도 하고 특정 역귀들은 일정량 이상의 시체를 수집하면

몸을 찢어서 새로운 역귀를 만들어 낸다.”

기분 나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다들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진혁씨는 그런걸 어떻게 아세요?”

진혁은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부터 할얘기에 그 내용도 포함되어있으니까 지루해도 조금 참고 들어주세요.

제가 역귀는 먼 옛날부터 있었다고 했죠?

그런데 역귀사태가 일어난건 고작 일년하고도 몇 개월이잖아요.

그럼 그사이에 역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잠시간 침묵한 후, 진혁은 이어서 말했다.

“오래전 산골마을에서 역귀들이 폭주를 했을 때, 엄청난 난리가 났었어요.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수많은 역귀들이 날뛰었던 거니까.

마을은 작았지만 훈련받은 경비대가 있어서 어떻게든 역귀를 막았는데

경비대까지 전멸하고 나니 막을 방도가 없었죠.

잘못했다간 역귀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겠지만,

다행히 전국에서 능력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역귀를 상대했어요.

군인부터 무당까지 전부 모여들어서 역귀들을 전부 봉인시킨거죠.

그 산골마을에 있던 동굴 속에다가요.

일이 마무리 되긴 했는데 역귀들이 풀려나가지 않도록 지킬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산골마을 생존자들과 역귀를 봉인한 사람들이 그곳에 새롭게 마을을 세웠죠.

역귀들과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한 마을의 영웅 이름을 따서

길영（吉嶺） 마을이라고 이름짓고 봉인을 지킨거에요.

역귀들을 관리하는 한편 대응책을 마련했죠.

애들 가르치고 주술 연구하고 뭐 그런거요.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명맥만 남고 유명무실해졌지만요.”

“그러다가 역귀들이 풀려나온 거군요...”

진아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뭐 봉인이 약해졌던가 역귀가 강해졌던가 둘중 하나겠죠.

아무튼 봉인은 깨졌고 동굴에서 역귀들이 몰려나왔어요.

수백년이 지나면서 역귀란건 그냥 구닥다리 전설쯤으로 여겨진데다,

길영마을도 이제 그냥 평범한 산골마을이랑 다를바 없었으니 막을 방도가 없었죠.

그렇게 역귀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어요.

주술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 믿어줄 사람도 없으니 나라에서 뭘 했겠어요?

총쏘고 포쏘고 불로 지지고....

그딴건 역귀한테 안통하니 군인들은 싸우는 족족 전멸.

반대로 역귀는 몸집 불리면서 숫자도 늘려갔고 결국 일년도 안되서 보시다시피 이런상황인거죠.

네. 대충 예상하셨겠지만 제가 길영마을 출신이에요.

뭐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역귀를 대비하고 있던 아저씨가 고아였던 저희 형제를 거두신 거지만.

기계 따위는 역귀를 상대할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몸쓰는법, 칼쓰는법을 가르치셨죠.

믿을건 몸뚱아리 뿐이고, 언젠가 싸워야 한다면 이 날붙이가 답일거라면서...

솔직히 주술이라든가 주문 같은걸 배우고 싶긴 했는데,

소실된지 오래인 것 같더라구요.”

주술이니 봉인이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잔뜩 나와서 다들 현실감이 떨어지는 듯 했지만

어차피 역귀라는 존재가 상식밖의 존재였으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쁜 마법... 그렇구나.”

상우는 얼마전 진혁이 한 말을 떠올리고는 그냥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진아는 진혁이 항상 말하는 아저씨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럼 그 아저씨란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진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역귀가 풀려난것에 책임감을 많이 느끼셨어요.

변명 같겠지만 사실 누구 잘못도 아닌데...

그래도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봐요.

길영마을 사람들 최대한 구해서 빠져나온 다음에

새롭게 거주지 만들고, 사람들 구해오시고,

역귀 대비도 하고, 분위기 살린다고 이상한 춤도 추고 하시다가...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을 하셨죠.

아저씨가 만든 거주지에 괴물들이 쳐들어왔을 때, 우릴 구하려고.

그날 얘긴 나중에 술 좀 들어가면 할게요.

아무튼 아저씨 목표가 좋은곳에 터를 잡아서 마을을 재건하는 거였어요.

아니 아저씨는 ‘인류의 희망’ 이라든가 ‘내일의 씨앗’ 이라든가

뭐 그렇게 말했는데 바라는건 그런거였겠죠.

역귀들을 몰아내고 평화로운 곳을 만드는거.

지금은 제 목표가 되기도 했구요.

그래서 거주지를 만들고 생존자를 찾고 있는거에요.”

진아와 상우는 이제야 대략적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진혁이 생존자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이유.

그리고 역귀에 대해 잘 알았던 이유.

물론 전부다 얘기해 준 것은 아닐테고

앞으로 알아야 할것들이 많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진혁과 조금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진아씨 할머님 신세좀 질게요.

아이들도 좀 부탁드리고. 전 혼자나가서 생존자를 더 찾아볼게요.

덤으로 식량도.

혼자라면 어지간해서는 몸을 빼낼 자신이 있지만 혹시 못돌아오면 안되니까

거주지 표시된 지도를 하나 드릴게요.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말고 잘 가지고 계세요.”

진혁이 진아에게 지도를 하나 건네자 수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죽으면 안되요....”

죽음이란 단어를 이해하기엔 어린나이지만

수지역시 지금껏 살아남으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 진혁은 수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걱정마. 난 안죽으니까.”

그렇게 말한 진혁은 진아에게 뒤를 부탁한 뒤 수색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맞아요 아저씨. 적어도 저런 애들은 죽음이란걸 모르는 세상을 만들어야죠.

나중에. 훨~씬 나중에 알아도 되니까.

그래서 저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렵니다.

아저씨 흉내나 좀 내면서.”

진혁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