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홀로 조용한 도시를 거닐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차와 사람들로 북적여야할 대로변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적막이 당연하다는 듯 고요했다.

이 도시에 홀로 남은 사람인양 혼자서 걷던 남자는 붉은빛으로 물들여진 도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을 수놓는 핏빛 웅덩이를 보며 잠시 서 있던 남자는 새삼 몸을 떨며 옷을 여미었다.

바람이 차갑지는 않았기에 한기를 느껴서라기보다는 주변을 가득 채우는 핏자국들이 자아내는 섬뜩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저 텅 빈 도시의 분위기 때문에 속이 시려서일지도 모른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만 해도 양동이 서너 개는 다 채우고도 남을 양이었지만

기묘하게도 사람의 살점이나 시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그 부분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지 작은 한숨을 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핏자국을 보니 제법 시간이 지난듯해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찰박, 찰박, 찰박.

별다른 거부감 없이 말라붙고 있는 피 웅덩이를 밟아 가며 움직이던 남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발 앞에는 그럴싸한 권총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

슬쩍 봐도 멀쩡해 보이는 것이 당장 집어 들어서 방아쇠만 당겨도 이 도시의 적막을 모조리 날려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주 훌륭한 호신용품이 될 테지만 남자는 그걸 집어 드는 대신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쳤다.

​그런 그의 허리춤에는 투박하지만 살벌한 크기의 정글도가 매어져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무기 중 하나인 총이

​고작 냉병기에게 아주 처절하게 패배해버린 셈이다.

​“멍청하긴. 저딴 쇳덩어리로 뭘 어쩌겠다고. 하여간 과학 신봉자 놈들.

​그딴거 들고다닐바엔 차라리 운동을 해서 몸이나 키우던가.”

​씁쓸한 말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길 수 없다는걸 기억해. 싸울생각 하지 말고.

​싸울 때는 딱 한번.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목숨을 바쳐서 그때 딱 한번만 싸우는거야.

​알아들어?

​역귀놈들과 싸워서 살 수 있을거란 안일한 생각은 버리라고.

​그러니까 무조건 도망쳐. 힘쓸생각마. 순식간에 토막나고 싶지 않으면.

​총따위는 전혀 안통하니까 살기 위해선 빨리 달리는 수 밖에 없어.’

​지금까지 남자를 살아남도록 해준 조언이었다.

​이 피웅덩이는 그걸 몰랐던 사람들의 흔적인 것이다.

​이길 수 있을거라 믿은 사람들.

​그 결과야 보다시피 처절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 여기엔 생존자도 그 괴물놈들도 남아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실망스러운지 다행스러운지 그조차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저 오늘 하루도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래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살아남았네요.

​이왕 신경써주시는 김에 먹을거나 좀 챙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물이라던가.”

​한숨섞인 말을 내뱉으며 그 나름대로의 감사인사를 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해가 지기 전에 근처 건물들이라도 뒤져볼 요량이었다.

음식이나 물은 못구한다 해도 몸하나 뉘일 공간은 있을테니.







"정문은 철문에... 뒷문도 있고.... 창문도 작고.... 덮고 깔고 할만한 천쪼가리도 많네."

남자가 그럭저럭 하루밤을 보낼만한 장소를 찾아냈을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은 물통 바닥에 간신히 깔릴만큼 남아있었고, 식량은 아까 들른 곳에서 찾은 박하맛 사탕 하나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해가지기전에 뭐라도 찾아보는게 좋을것 같았다.

어두운 곳에서 사방을 뒤지고 다닐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빛을 비추고 돌아다녔다간 먼곳에서도 눈에 띌테니.

"어디로가야 될까요 아저씨.. 대형마트는 일단 뒤로 미뤄두고. 편의점에 뭐가 남아있을거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가정집은 들어가기도 번잡스럽고..."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가 향한곳은 숙소로 삼은 건물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3층짜리 상가건물이었다.

음식점 같은 곳이라면 식량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유용한 물건 같은걸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상가건물은 멀끔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괴물의 습격만 받았을 뿐, 사람들의 약탈은 없었던 듯 했다.

휴대폰 판매점. 세탁소. 문구점. 그 옆으로 분식집. 복권방. 전자담배.

2층은 태권도 학원이 있었고 3층은 이런저런 사무실이 있었다.

식당이 그리 많지 않아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그랬기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털어가진 않았을것이다.

그렇다면 뭐라도 남아있을지 모른다.

남자는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하며 귀를 잔뜩 기울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분식집.

식량이 최우선이었기에 쌀한톨이라도 남아있을지 보려는 것이다.

"..............."

평소 쉴틈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였지만 이럴때 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괴물들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인간들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다.

생존자를 찾아야 하는 입장의 그였지만

그가 대면할 사람이 괴물보다 나을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싹털어갔네. 어떻게 이렇게 얌전하게 다 챙겼대?"

가게 안 안전을 확인한 남자가 이곳저곳을 전부 뒤져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가게안이 아주 멀끔했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뒤져봤지만 먹을만한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약탈이 없었을거라 생각했는데 어떤 예의바른 도둑들이 이미 왔다간 모양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던 분식집이 텅 비어있자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다른곳을 뒤져봐야 뭔가 건질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역시 다른곳을 가봐야 할까?

그때, 위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못들었을만한 미세한 소리였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그는 그 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이거는... 역귀가 아니지."

그놈들이라면 이렇게 조용할리가 없다.

남자는 정글도를 뽑아들고는 천천히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찾았다.

2층은 전체가 태권도장이었다.

다만 지금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건 분명해 보였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갈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남자는 잠시 고민했다.

"조금... 위험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목을 가다듬고는 문너머에 대고 말했다.

"안에 계십니까? 생존자가 있으면 대답해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다시 조금 목소리를 키웠다.

"구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안전한 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놨습니다.

그곳으로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안에 계시다면 대답해주세요."

여전히 조용했다.

조금더 큰소리를 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안에서 앳된 남자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요.....?"

남자는 안도하며 대답했다.

"그래. 생존자 거주지를 만들어 놨어.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여기보단 훨씬 안전해.

어느정도 식량도 자급할 수 있고. 거기 데려가줄게. 너 혼자야?"

잠시 침묵이 있은 후에 대답이 들려왔다.

"...네."

'거짓말이구만.'

나쁜의도가 있어서는 아닌것 같았다. 그저, 남자를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해서일테니.

하지만 거짓말을 지적하는 대신 남자는 소년을 안심시켰다.

"그래. 이름이 뭐지? 몇살이야?"

"박상우. 열네살이요."

"그래. 지금까지 고생 많았지? 이제 괜찮아. 내가 도와줄테니가 나랑 같이 가자."

그 순간, 먼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아아악!!!"

사람의 비명소리 같은 그것.

하지만 보다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 소리의 정체를 아는 남자는 재빨리 벽에 달라붙어서는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

노을이 아름답게 물든 거리 한복판에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그림자의 끝에 그것이 있었다.

염산에 반쯤 녹은 사람 몸에 다른 사람의 시체조각을 섞어 반죽한다면 저러한 모습일까?

부풀고 뒤틀린 피부에 사방으로 뻗어나간 관절들.

썩어가는 몸과 이상한 곳에 제멋대로 박혀있는 눈 코 입.

그마저도 그 개수가 제각각이었다.

"역귀...."

역귀는 그 끔찍한 모습에 어울릴만한 기괴한 움직임으로 더욱더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상가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전한 곳이길 빌었지만 아직 역귀가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저놈 하나만 있을지 아니면 더 남아있을지는 모르지만 중요한건 저녀석에게 들키지 않는것이다.

아직 거리가 있었기에 남자는 조심스레 철문에 다가가 작게 이야기했다.

"문열어. 내가 도와줄게. 안전한 곳으로 가자. 지금 근처에 역귀가 있으니까 우선 들여보내줘.

날 믿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는 동안에도 역귀는 이곳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벌써 들킨 것일까?

제발 그러지만 않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철문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재빨리 들어가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고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들리지 않았는지 역귀는 별다른 변화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조용히만 있는다면 들키지는 않을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보니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소년이 경계심 어린 얼굴로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쉿! 조용히해. 바로 근처에 역귀가 있으니까.

일단 그거 내려놔. 자 나도 칼 집어넣을게? 알겠지?"

남자는 들고있던 칼을 집어넣고 상우를 안심시켰다.

그걸 본 상우는 몸을 숙이고 소리를 죽였지만, 막대기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불안하면 들고 있어도 되니까. 다짜고짜 휘두르지만 마. 소리내지도 말고."

숨을 죽이며 가만히 역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건물앞에 다다른 역귀는 별다른 걸 발견하지 못한 듯 몸을 돌려 다른쪽으로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었다.

역귀가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태권도장 안을 둘러보았다.

나름대로의 대비책이었는지 매트리스나 의자 따위를 쌓아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훌륭하네. 아주 열심히 했어. 고생 많았다. 잘 버텼고. 이제 나랑 같이 가자."

역귀라는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 나니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상우의 경계가 풀렸다.

아니, 풀리는 것을 넘어 남자의 칭찬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남자는 상우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그보다 아까 혼자라고 했는데. 확실해? 다른 사람들은 없어?"

남자의 말에 상우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말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난 믿어도 돼. 해코지 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했겠지."

상우는 조금더 고민하더니 태권도장 안쪽 사무실을 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나와."

곧 문이 열리며 어린 소녀 한명이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순간,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동생이에요. 다른 사람은 더 없어요."

".... 몇살이지?"

"어... 아홉살이요."

소녀의 수줍은 대답에 남자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상우가 불안감을 느끼려 할 때쯤, 남자는 다시 표정을 풀며 둘을 안심시켰다.

"그래. 동생 돌보고 지켜주느라 고생 많았다. 동생도 오빠말 잘듣고 참느라 애썼고.

이제 걱정마. 같이 안전한 곳으로 가자. 아 그전에 혹시 너희 먹을거 챙겨놓은거 있을까?"

다시 친절해진 남자의 태도에 상우는 불안감을 버리고 소녀가 나온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곳엔 분식집에서 가져온듯한 식량이 가지런히 정리 되어있었다.

참치캔이나 라면. 쌀도 있었고 통조림 몇종류도 보였다.

아껴 먹는다면 2주일은 버틸 수 있을 양이었다.

"어째 얌전하게 싹 털어갔다 싶더니만 진짜 얌전한 도둑이었네.....

오늘은 곧 해가 떨어지니까 내일 움직이자. 여기 얼마나 있었지? 그동안 역귀 본적 있어?"

"여기 들어온지는 일주일쯤 되었어요. 그전엔 아빠랑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식량 찾으려고 이 근처까지 왔다가 그 괴물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랑 아빠는 돌아가시고 저랑 동생만 도망쳐서 여기 숨어있었어요.

그동안 그 괴물... 역귀? 그건 못봤구요. 아까 그게 처음이었어요."

"그래. 역귀. 그놈들은 역귀야. 그러니까 그렇게 불러."

아무래도 아까 본 피웅덩이가 이 아이들의 생존자 그룹이었던 모양이다.

"좋아. 오늘밤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부터 움직이자.

곧 해도 떨어지고 나도 좀 쉬어야 하니까. 저거 좀 나눠먹어도 괜찮지? 어차피 이동할때 다 가져가지는 못할거야.

먹을거 아끼드라 힘들었을테니 오늘은 푸짐하게 먹고 푹 쉬자."

상우와 소녀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역시 그간 맘고생을 많이 한듯했다.

소녀의 순박한 얼굴을 보고 있던 남자는 다시금 불편함을 느꼈다.







"역귀는 무슨짓을 해도 못이겨. 그냥 그렇게 생각해.

시력, 청력, 후각 이런건 사람이랑 비슷하지만, 훨씬 더 좋은 녀석들도 있어.

그러니 그냥 최소 사람보다는 좋다고 생각해.

힘은 엄청 세니까 철문이나 바리케이드 같은 건 너무 믿지 마. 어차피 시간문제야.

제일 좋은 건 안 들키는 거고, 들켰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싸울 생각은 애초에 버려.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야 살아.

너희가 살아남은 건 도망쳐서야. 그거 하나만 기억해."

남자의 설명에 상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주지는 여기서 꽤 떨어져 있어. 자동차를 타고 가면 편하겠지만 소리 듣고 사방에서 역귀가 몰려들 테니 결국 걸어가야 해.

며칠은 걸어야 할 거야.

여기 먹을 게 많아서 몽땅 챙겨가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해.

짐은 무조건 가방에 넣을 정도만 챙기고 무게도 뛰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해.

알아들었지? 먹을 거 욕심부리느라 무겁게 들고 있다가는 그냥 잡혀버리는 거야.

일단 챙겨가다가 위험할 때 버린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들고 있던 거 때문에 죽는 사람들 수도 없이 봤으니까.

그리고 명심해. 역귀들이 달려들면 난 너희 못 구해.

아니 아무도 못 구해.

그러니 도와줄 생각 말고 그냥 무조건 도망쳐.

나 살 궁리만 하란 얘기야.

여동생한테 달려들어도 그렇고 나한테 달려들어도 그렇고.

챙기네 어쩌네 하다가는 다 죽는 거야. 알겠어?"

흥분한 듯 설명하는 남자의 말에 상우와 소녀는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이름이 뭐랬지?"

"수지요."

"그래. 최대한 조용히 시키면서 조심해서 따라와.

원래대로라면 마을 둘러보면서 생존자들이 더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역귀가 돌아다니는 걸 안 이상 여기서 여유 있게 돌아다닐 수는 없어.

이대로 거주지로 바로 이동할 테니까."

"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아저씨는 따로 있으니까.

내 이름 최진혁이니까 진혁 삼촌이라고 부르고.

준비 잘해.

제일 기본만 챙겨. 식량은 딱 정해준 만큼. 알겠지? 자 시작해."

아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확인한 진혁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만 해도 텅 빈 도시로 알고 여유 부렸는데 역귀도, 생존자도 남아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힘들어질 것 같았다.

"쉽지가 않네요. 아저씨."







도시는 여전히 적막했지만, 자세히 보면 움직임이 있었다.

어제의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아닌 사방을 경계하며 나아가는 진혁.

그리고 어린 여동생 수지를 챙기며 진혁의 뒤를 조심스레 쫓아가는 상우.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사방을 경계하면서 가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몇 발자국 옮긴 진혁은 멈춰서서 주변을 쭉 둘러보고 귀를 기울여 보고, 바람에 실린 냄새까지 확인한 뒤,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건물들의 창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상우는 출발 전 진혁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이동. 역귀 수색. 생존자 파악. 다시 이동. 역귀 수색. 생존자 파악.

이 패턴으로 갈 거야. 역귀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그놈들 징그러운 소리를 계속 질러대기도 하고. 지독한 냄새도 나니까.

문제는 이것들이 한둘이 아닌데다 다른 역귀들을 불러 모을 수도 있다는 거야.

일단 들키는 순간 그 근방에 있는 역귀들이 전부 다 달려든다고 생각해.

그러니 절대 들키지 마.

그리고 생존자가 더 있는지도 확인 해야 해.

탈출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가는 길목에서라도 생존자를 발견하면 데리고 갈 거야.

내 목적은 거주지에 사람들을 모아가는 거니까, 너도 도와.'

상우는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진혁의 말대로 생존자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 순간 진혁이 멈춰서서는 몸을 숙이고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멈추라는 신호.

상우와 수지는 즉시 숨을 죽이고 마찬가지로 몸을 숙였다.

잠시 그렇게 있던 진혁은 상우를 돌아보며 코를 두드려 보였다.

'아. 냄새.'

집중해서 숨을 들이쉬자 공기 중에 희미하게 역한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귀는 그 썩은 몸에 어울리는 지독한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긴다.

그 말뜻은 바람 불어오는 방향에 역귀가 있다는 뜻이다.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아이들 역시 역귀를 마주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익숙해 질 리는 없었다.

진혁은 주변을 경계하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상우가 긴장한 채 진혁이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때, 위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그래 거기 셋! 이쪽이야 이리로 올라와!"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상우에 눈에 들어온 건 건물 2층에서 창문을 내다보는 40대 남성이었다.

남성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여 작게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지금 밖은 위험하니까 얼른 이리 올라와. 여긴 식량도 있고 안전하니까. 어서!"

상우는 앞서가던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은 2층에 있던 중년남성을 가만히 보더니, 건물로 향했다.

"잠깐. 넌 앞으로 나서지 말고 동생 잘 챙겨.

그리고 긴장하지 말고 잘 준비하고 있다가 혹여나 내가 신호하면 동생 데리고 도망쳐."

진혁의 말에 상우는 잔뜩 긴장했다.

혹시 뭔가 알아채고 준비를 시키는 것일까?

2층에 도착하자 곧 문이 열리며 중년남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 어서 안으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혁은 그의 손을 낚아채어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남자는 억하고 소리를 내려 했지만 이미 남자가 솜씨 좋게 입까지 막아버린 덕에 둔탁하지만 작은 충격음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중년남성을 기절시킨 진혁은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역귀 울음소리 같은 것도 없다.

그제야 남자는 그를 바닥에 그대로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별다른 게 없었지만 명백하게 공기가 탁했다.

피 냄새.

"그놈 안으로 끌고 들어오고, 문 닫아. 상우는 끈 찾아서 그 남자 잘 묶어놓고. 아 입도 막아. 양말을 쑤셔 넣든가 해서.

너도 수지도 나 따라오지 말고 그냥 여기서 저놈 잘 지키고 있어."

진혁은 앞으로 보게 될 모습이 상상되어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 아저씨. 사람이란 게 참.. 그래요. 그쵸?"

가장 안쪽 방에 들어서자 진혁의 생각이 맞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엔 사람 시체토막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어림짐작해도 대여섯 명 분의 시체였다.

"그래. 미끼로는 이것만 한 게 없지. 여차하면 식량도 되고.

이 생각을 한게 네가 처음은 아니긴 한데 이건 좀 너무하네."

진혁이 씁쓸한 말을 내뱉으며 돌아서자 문 앞에는 충격받은 표정의 상우가 서 있었다.

"오지 말라니까. 뭐 좋다고 따라와서 그러고 있어. 나가, 문 닫게. 수지가 보면 엉엉 울겠다."

진혁의 손에 이끌려 돌아 나온 상우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

"왜 저런 거예요?"

"뭘 물어. 역귀가 사람한테 왜 달려드는데? 시체 때문 아니야.

그러니까 저렇게 쌓아두고 있다가 여차하면 던져줄 생각인 거지.

효과야 있겠지. 물론 그거만 믿고 있다간 순식간에 잡혀서 찢어지겠지만."

상우는 묶여있는 남자를 잠시 돌아보곤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 사람이 나쁜 놈이란 거?"

진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몰랐어. 그냥 인상이 별로길래 일단 의심하고 메다꽂은 거지.

내 예감이 맞은 거면 잘 대처한 거고

기분 탓이었던 거면..... 그냥 사과하고 데려가는 거고.

이런 상황이니 누구든 의심해야지."

약간 당황한 상우는 잠시 후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어... 그럼 저는 왜 의심 안 하셨어요?"

"했어. 근데 척 보기에도 순둥순둥해 보이고,

원체 약골이라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이기겠다 싶어서 내버려 둔 거지."

칭찬이라곤 할 수 없는 말에 상우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살짝 투덜거리려던 그때 수지가 끼어들었다.

"근데 역귀는 왜 사람을 잡아먹는 거예요?"

잠시 고민하던 진혁은 전부 다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어린애들이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니긴 한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애들 정서 생각하면서 돌려 말할 건 아닌 것 같다.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잘 듣고 이해해둬."

진혁의 말에 수지는 물론 진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역귀는 사람을 먹는 게 아니야. 정확히는 그놈들은 아무것도 안 먹지.

먹지도 자지도 않아.

그렇다고 죽지도 않지. 그야말로 괴물인 거야.

근데 살아있는 건 사람이고 짐승이고 무조건 달려들고 봐. 왜 그러냐 하면.

그 녀석들 몸이 시체로 만들어져 있거든.

이제 좀 징그러워지는데, 봐.

역귀란건 역병 괴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몸이 병 걸린 거 마냥 엉망이지.

피부도 망가지고 뼈도 삭고 살도 썩고.

그러니까 망가지는 몸을 대체하려고 사람이나 동물시체를 쓰는 거야.

살아있는 거에 달려들어서 시체를 찢어낸 다음 자기 몸에 붙이는 거지.

역귀 자세히 보진 않았겠지만 대충 끔찍하게 생긴 건 알지?

꼭 인형 서너 개를 녹여다 붙인 거처럼.

당연하지. 실제로 비슷한 과정이니까.

여기 찢어다 여기 붙이고 저기 찢어다 저기 붙이고.

그러다 보니 더 많이 붙인 놈은 더 커지고 힘도 세지지.

혐오스러운 것도 훨씬 더 혐오스러워지고."

진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것들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아빠는 유전자 실험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하고

어떤 분은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던데..."

진혁은 짜증이 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딴 거 아니야. 내가 이래서 과학 신봉자들이 싫어.

봐. 먹지도 자지도 않는 불로불사 괴물인데 그게 과학적으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해?

틀렸어. 난 녀석들 기원에 대해서 알아.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알려주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절대 과학적인 이유는 아니야.

너희도 알지? 역귀 사태 초반에 군인들이 화력만 믿고 소탕 나섰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총 따위는 안 통해. 과학적으로 풀 수도 없고.

그러니까 차라리 본인이 적당히 납득할만한 이유를 만들어.

천재지변 정도로 생각하라고.

바이러스. 돌연변이. 방사선. 이딴거 말고.

저주든 악마든 뭐든 간에.

그냥 그딴 끔찍한 게 돌아다니는 세상이 된 거라고."

그때 수지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여긴 지옥이에요?"

울음기 담긴 그 목소리에 진혁은 착잡한 얼굴로 수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지옥이면 안 되지. 그래. 마지막 말은 취소.

그냥 좀 나쁜 마법이라고 생각하자....

자, 시간 없으니까 남은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혹시 쓸만한 게 있는지 먹을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 저 방만 빼고.

난 역귀 감시할 테니까."

아이들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한 얘기로 사기를 떨어뜨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진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아저씨가 딱 나서야 사기도 오르고 분위기도 풀리는데.

참 나한테 그런 재주는 없나 봐요."

그렇게 중얼거린 진혁은 천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