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다니엘 매클레인


절망하는 사제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건 십자가인가?

아니면 치사량의 수면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름 모를 밴드의 존나 쩌는 기타 사운드인가?

크리스틴에게 받은 MP3의 전원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귀를 파고드는 사운드에 눈이 감긴다.

쵸크슬램에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나를 평생 지탱해주던 십자가가 박살 나는 기분이 든다. 수면제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자, 쓰라린 목 넘김에 인상이 구겨진다.

죽음을 앞두고 떠오르는 건 평생 섬겨왔던 주님도, 나를 유혹하던 악마도 아니었다.

뇌리에 남을 정도로 예의가 없었던 정신과 의사였다.


- 많이 드시면 주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다니엘 매클레인의 삶은 온전히 본인의 것이었는가?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선한 사람 등 사제로서의 평가는 꽤 괜찮았다.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어쩌면 신의 말씀이라는 명목하에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에게 버려졌고, 본 적도 없는 신을 섬기며 그의 말씀대로 살아왔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다니엘 매클레인은 행복할 수 있는 존재였는가?





한스 신부님과 단둘이 차를 탈 때면 늘 조심한다. 언제 그의 설교가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성당이 아닌 밖에서 그의 설교를 듣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라디오도 종교 방송이나 뉴스밖에 못 듣게 했다. 한스 신부님은 예전부터 그랬다.

록 음악을 들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고, 내가 어렸을 당시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프로레슬링조차 못 보게 하셨다.

당시 유명했던 프로레슬러의 피니쉬 기술을 따라 했다가 한스 신부님께 들켜서 성당의 모든 의자를 닦아야 했었다.


"사제가 될 자가 쵸크슬램이라니!!"


벼락 호통에 놀람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스 신부님이 기술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한스 신부님의 목적지는 도시의 큰 병원이었다. 신부님도 연세가 꽤 있던 터라 걱정이 되었다.

모두 늙는다지만 그는 유독 빠르게 늙는 거 같다. 백발 머리에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움푹 박혀있다.

신부님이 웃을 때마다 주름이 보이는데, 그의 주름에는 내 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부님 혹시 몸이 편찮으십니까?"


"비록 늙긴 했어도 아직 건강합니다. 병원은 저 때문에 가는 게 아닙니다. "


한스 신부님은 옅은 웃음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그럼 병원은 무슨 일로 가는 겁니까?"


"성당을 후원해주시던 분이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하셔서 가는 겁니다."


"혹시 하워드 씨인가요?"


"아닙니다."


최근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하워드 씨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긴 그는 대형 병원의 입원비를 감당할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다.

성당에 오시는 형제 자매님들 중에 누가 건강이 안 좋았는지 머릿속에 떠올리지만 딱히 없다.


"어떤 분이 아프신 건가요? 신부님이 이렇게 찾아뵐 정도면 제가 아는 분일 텐데"


"다니엘 사제는 본 적이 없을 겁니다."


"제가 본 적이 없을 거라고요? 도대체 누구시길래"


어렸을 때부터 성당에서 먹고 자란 내가 본 적이 없다니,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매클레인 회장님이라고 기업가이신데 성당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보육원도 그분이 지어주신 겁니다."


매클레인 회장, 나와 성이 같았다. 물론 내 이름은 보육원 수녀님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그나저나 내가 자라온 보육원을 지어주신 분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성당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 마음씨 좋은 분들이 봉헌해주시긴 하지만 보육원을 지어주실 정도의 재력가는 처음이었다.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으면 한스 신부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뵈는지, 이건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다.


"성당에 보육원을 지어주시다니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런 분들이 정말 사회에서 성공하신 분들이죠."


내 말에 한스 신부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결코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물론 그 분의 재력과 사회에 공헌한 걸 보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스스로가 행복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큰 아픔을 겪으셨기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한스 신부님 이마의 주름이 더욱더 깊어진다.


"아내와 자녀 셋을 모두 잃으셨습니다. 아내와 자녀 둘을 사고로 떠나 보냈고, 막내아들조차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하더군요. 한때는 그런 이유로 신을 부정하기도 하셨죠."


"저런, 끔찍한 일을 당하셨네요."


부모에게 버려져 가족이 없는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성당에 오시는 분들만 봐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것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슬픔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앙심이 깊으신 분들조차 신을 원망할 정도니까 말이다.

좋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신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 물음표가 생긴다.

하지만 어찌 인간이 감히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랴.


"가시는 길이라도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면서 차량부터 병원까지 우리를 안내 했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 멋들어진 중년의 신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매클레인 회장님의 집사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


그는 집사라는 직책을 빼다 박은 것처럼 생겼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멋진 콧수염, 단정한 차림새, 정돈된 말투. 매체에서 보던 부잣집 집사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 시킨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집사님, 회장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의사 말로는 이번 고비는 넘기기 힘들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의식이 있어서 말씀은 하시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집사님과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병실로 향했다.

초호화 병실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경호원들은 부담스러울 만큼 깍듯이 우리에게 인사했다.


"자리 좀 비워주겠나?"


집사의 말에 경호원들이 자리를 비켜줬다. 회장님은 잿빛 얼굴을 찡그린 채 누워계셨다.

그는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브루스? 정말 브루스니?"


"네?"


그는 나를 브루스라고 불렀다. 물론 내 이름은 브루스가 아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매클레인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당황하자 집사가 내 귀에 슬며시 속삭였다.


"막내 도련님으로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자주 그러시니 맞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집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 손 좀 잡아 주겠니?"


회장님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고 가늘었다.

온기가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여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주님께서 보살펴 주실 겁니다."


내 말에 그는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입을 뗐다.


"너를 다시 만나 기쁘고 미안하구나, 브루스 정말 미안했다. 너는 너를 위해, 너의 행복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구나."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그의 말이 가슴에 박혀 심장이 아려왔다.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마음속 공백이 조금은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를 향해 몇 마디 더 하고는 기력이 다했는지 숨을 거치게 몰아쉬었다.


"이제 회장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한스 신부님과 함께 회장님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병실 밖으로 나가자 집사님이 검은 서류가방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한스 신부님, 그리고 다니엘 사제님. 이건 회장님의 마음입니다. 부디 사양 말고 받아 주십시오."


가방 속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도의 대가로 무언가를 받는다는 게 찝찝했다.

어쩔 줄 몰라 한스 신부님을 바라봤다. 한스 신부님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그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나를 한 번 쓱 바라봤다.

묘한 잡음이 느껴졌다. 병원을 빠져나와 차 트렁크에 가방을 넣을 때까지 나와 한스 신부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태껏 한스 신부님을 봐왔지만 처음 보는 표정과 행동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와 동시에 가방에 뭐가 들어 있는지 신경이 쓰였다.





성당으로 돌아가는 길, 엄청나게 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입을 열기가 너무 힘들었다.

자동차 안에서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순간, 정적을 깬 건 한스 신부님께 온 전화 한 통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수녀님?"


귀가 잘 안 들려서 통화 음량을 크게 해놓은 한스 신부님 덕에 통화 내용을 조금 엿들을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안나 수녀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수사관들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통화내용에 쏠려 있었다.

한스 신부님은 곁눈질로 나를 슬쩍 봤다. 나는 최대한 운전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저를 무슨 이유로?"


-성당 자금 횡령으로 왔다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지금 가는 중이니,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한스 신부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한스 신부님은 내가 통화내용을 듣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그는 도시를 빠져나와 성당에 거의 다다를 때쯤 내게 말했다.


"다니엘 사제님 차를 잠시 세워주시겠습니까?"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한스 신부님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서 건네받은 가방부터 안나 수녀님과의 통화까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스 신부님은 그런 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다니엘 사제, 트렁크를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네"


신부님의 말대로 트렁크를 열었다. 나와 신부님은 자동차 뒤 트렁크에 나란히 서서 검은색 서류 가방 두 개를 내려다봤다.

마음속으로 가방 안에서 무엇이 나와도 놀라지 않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딸깍


가방이 열리고, 가방 안을 빼곡히 채운 돈다발이 보인다. 실제로 처음 보는 돈뭉치에 입이 벌어졌다.

머릿속으로 돌린 시뮬레이션이 완충 작용을 해서 그런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대한 이성을 유지할 뿐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게 다 뭡니까?"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속삭이듯 말했다.


"돈입니다. 각각 15만 달러씩 30만 달러 정도 되겠군요."


호들갑 떠는 나와 다르게 한스 신부님은 돈 가방 앞에서 덤덤했다.

문득 한스 신부님 몰래 봤던 마피아 영화가 떠오른다.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트렁크의 돈을 확인하고서 상대 조직원들이 자동차에 총을 난사했다.

구멍이 숭숭 뚫릴 정도로 총알이 날아왔었는데 이상하게 주인공과 그의 동료는 단 한발의 총알도 맞지 않았다.

주인공이라서 그랬었나.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주변을 살핀다.


"성당에 수사를 왔다고 하니 이 두 가방은 숨기도록 합시다."


"한스 신부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다니엘 사제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라고 혼냈었는데 막상 저는 그렇게 못 살았으니"


신부님은 돈 가방 두 개를 꺼내고는 트렁크 문을 닫았다.


"저는 아마 지옥에 가겠군요."


그게 한스 신부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가방을 숨기고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으로 갈 때까지 한스 신부님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 기도하라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던 분이 기도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으셨다.

성당에 도착하니 수사관들이 성당에서 발견된 현금들을 옮기고 있었다.

가방, 주머니, 박스 등에 담긴 현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나중에 알게 된 횡령금액은 약 160만 달러, 모두 성당에서 현금으로 발견되었다.

도대체 그 많은 현금을 어떻게 감쪽같이 숨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회장님께 받았던 가방에 있던 돈까지 합치면 약 190만 달러 정도였다.

한스 신부님은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보육원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스 신부님을 보며 자라왔다.

그가 이렇게 탐욕스러운 사람일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옷에 구멍이 나면 꿰매 입고, 한 푼이라도 아껴서 힘든 사람들에게 베풀던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천사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었다.

도대체 왜 그러셨지?

한스 신부님께 묻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수사 도중 투신자살을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명예스러운 그의 죽음에는 추모조차 금지되었다.

한스 신부님의 횡령과 죽음, 그 여파는 상당했고, 성당 사람들이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성당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린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져버린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한스 신부님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도 비난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와 함께 성당을 운영한 안나 수녀님도, 어렸을 때부터 그를 따랐던 나 역시 파렴치한 횡령범이 되어 있었다.

의심받고 또 의심받았다.

수녀님은 잘 견디시나 싶더니 며칠을 앓아누우셨다.

나 역시 그 이후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왜 조사를 받을 때 나는 돈 가방의 존재를 말하지 못했을까?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그날 한스 신부님과 함께 받은 가방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충분히 말을 할 수 있었음에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감정은 점차 두려움으로 번져 나를 서서히 갉아 먹었다.

죄책감이라는 사슬에 묶여 잠을 잘 수가 없어, 극심한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살은 점점 빠지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드리웠다. 그

런 내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성당에 다니던 분이 괜찮은 정신과 의사가 있다며 소개해줬다.

이대로 가다간 미쳐버릴 거 같아 정신과를 찾아갔다.

정신과는 처음이라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평범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들어가자 정신과 의사가 나를 반겼다. 멀끔하게 생긴 그는 나를 보며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다니엘... 사제님? 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네, 편하신 대로"


그는 긴장해 있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미소였다.


"그 성당 맞죠?"


의사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나를 떠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뉴스에서 봤습니다. 그 횡령 사건이 일어났던 성당"


그는 눈치를 보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어떻게서든 내 입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제님은 연관되시지 않은 거잖아요, 그렇죠?"


그의 질문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신물이 올라왔다. 내 반응에 그는 에둘러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개해주셨던 분이 사제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하셔서, 허허"


그의 마른 웃음을 보니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면 마음이 가벼워질 거 같았는데 정반대였다.

머릿속에 한스 신부님과 함께 받았던 검은 가방이 떠오른다.

내가 당당할 수 없는 이유이자,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잠을 못 주무신 다고요?"


"네"


"얼마나 못 주무신 겁니까?"


"한 달이 좀 안 된 거 같습니다."


"스트레스성 수면 장애로 보이네요. 원래 수면제를 바로 처방하지는 않는데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사제시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거슬렸다.


"사제라 처방해 준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교인들은 자살하지 않잖아요?"


터무니없이 무례한 그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더욱 선을 넘으며 말했다.


"그 자살한 횡령범은 엄밀히 말하면 신부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 앞으로 수면제 통을 내밀었다.


"마침 신제품이 있습니다. 효과가 좋으니 복용해 보세요."


그는 으쓱이며 탁자를 톡톡 쳤다. 마치 빨리 가져가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수면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기 힘들어 빨리 뒤돌았다.

나가려고 문을 여는데 뒤에서 의사가 말했다.


"많이 드시면 주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수면제를 먹으면 억지로 잠을 잘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어째서인지 기도가 되지 않았다.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돈 가방을 건네는 한스 신부님이 떠올랐다.

좋은 기도문을 말하려 하면 목구멍에서 꽉 막혀 튀어나오지 않았다.

최악이었다.

나 같은 놈이 이런 정신 상태로 대표로 기도를 하다니.

주말 예배 시간, 단상에 올라 한스 신부님 대신 기도를 드리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머뭇거리는 내게 시선이 쏠린다.

형제자매님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조차 두려웠다.

억지로 호흡을 삼키며 단어를 하나하나 내뱉었다.

억지로 기도를 하는 내 모습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힘겹게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뛰쳐나와 성당 뒤편에 있는 정원에 토악질했다.

지금 내 모습은 얼마나 역겨울까?


"괜찮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크리스틴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녀는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왔던지라 신앙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와 편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후우, 괜찮습니다."


"너 얼굴이 죽어 있는데? 전혀 안 괜찮아 보여"


"좀 피곤해서 그런 겁니다."


"좀 피곤하다고 꽃에 구토하지는 않아"


정원에 피어난 꽃이 토사물로 뒤덮여 있었다.


" 진짜 괜찮습니다."


"누구도 네 탓을 하지 않아, 한스 신부님이 나빴던 거지. 너는 잘못 없어"


크리스틴은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이 있습니다."


내가 돈 가방을 가지고 있는 걸 알아도 크리스틴이 이해해 줄까?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기분 전환 겸 드라이브나 할까?"


그녀가 자동차 열쇠를 흔들었다.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하지만 기분 전환은 그녀가 필요해 보인다.


"괜찮을까요?"


드라이브 한 번으로 사람의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이브를 하는 잠깐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크리스틴의 차에 올랐다.

나는 곧 크리스틴과의 드라이브는 정말로 현실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자동차에 몸을 실은 지 5분도 안 되어서 교통사고로 주님을 만날 뻔했다.


"이러다 죽겠습니다!!"


차에 틀어 놓은 시끄러운 록 음악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치며 말했다.


"뭐라고? 더 밟으라고?! 하하하하"


크리스틴은 깔깔거리며 웃더니 속도를 더욱 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웃음은 가짜다.

그녀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나는 알 수 있었다.

크리스틴은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아버지인 맥스 하워드의 병색이 악화 되어 수술 없이는 살기 힘들 거라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녀가 과연 진짜로 웃을 수 있을까?

한참을 달리던 그녀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이번에 수술 못하면 아빠가 죽는데"


"유감이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성당에 돈을 갖다 바치지 말고 모아둘 걸 그랬어, 그거 모았으면 아빠 수술비는 되지 않았을까?"


"수술비가 얼마나 하는데요?"


"이것저것 합치면 30만 달러 정도?"


"30만 달러요?"


한스 신부님께 받은 돈 가방의 액수와 딱 들어맞았다. 과연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답답했던 마음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것 때문이었나?

이 모든 게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인 걸까?

내게 30만 달러가 들어 있는 돈 가방이 생겨버린 이유를 찾아냈다.

고민의 시간은 잠깐이면 충분했다.


"크리스틴, 잠깐 나와보세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갑자기?"


운전대를 잡았다. 적어도 교통사고로 주님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액셀을 밟는 발이 가볍다. 그 돈 가방이면 크리스틴을 도울 수 있었다.

그날 한스 신부님과 함께 가방을 숨긴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성당에서 사용하는 오래된 창고였다. 창고 안에는 성당에서 특별한 날 사용하는 잡동사니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 성당에서 연극을 했을 때 사용했던 소품들, 자선행사 때 사용하던 테이블 등 성당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기는 성당 창고 아니야?"


"맞습니다."


"여기는 왜 온 거야?"


"드릴 게 있습니다."


"달란트는 필요 없는데?"


크리스틴은 창고에 놓인 달란트 뭉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달란트는 아닙니다."


나는 먼지 더미 속에서 산타클로스 복장을 꺼내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너무 이른걸?"


크리스틴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를 보여줬다.

묵직한 선물 보따리에 크리스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윽고 내가 보따리에서 검은 서류 가방 두 개를 꺼내자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다니엘?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줄래?"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열었다.


-딸깍


가방을 열어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돈다발을 본 그녀는 찰진 비속어를 내뱉었다.


"씨발, 뭔데?"


"30만 달러입니다."


"그러니까 망할 30만 달러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냐고?"


흥분한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목소리 좀 줄여요."


"이 돈이 다 뭐냐고"


그녀는 작게 말했지만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이건 한스 신부님이 잡혀가는 날 받은 돈 가방입니다."


"미쳤어? 너도 돈 빼먹은 거야?"


"이 돈은 성당을 후원해주시던 어떤 회장님이 기도의 대가로 저와 신부님께 준 돈입니다."


"다니엘, 너 돈 받고 기도해?"


크리스틴은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한스 신부님을 따라가 기도를 했을 뿐입니다. 저도 몰랐다고요!"


내 설명에도 그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경찰에 이야기했어?"


"아뇨"


"왜 말 안했어?"


그녀의 미간이 점점 좁혀진다.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왜 이 큰 돈이 저한테 생겼는지 하지만 이제는 왜 제게 30만 달러가 생겼는지 알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워드 씨의 수술 비용이 30만 달러라고 했죠?"


크리스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라고 하니 뭔가 그럴 듯했다.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크리스틴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가방을 노려봤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녀의 습관이다.

예배를 빼먹고 놀러 가기 전에도 저랬고, 처음 문신을 하기 전에도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같았다.

그녀의 손목에 그려진 기타 문신을 보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니엘, 너 말고 이 가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야?"


크리스틴은 한층 가라앉은 톤으로 물었다.


"한스 신부님과 저만 알고 있었으니, 이제는 저 혼자네요."


"정말로 기도의 대가로 받은 돈이지?"


"기도의 대가로 받은 돈입니다."


"근데 이 돈을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솔직히 저는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크리스틴에게는 지금 30만 달러가 필요하잖아요."


"이 돈이면 아빠의 수술비를 낼 수 있어."


"맞아요. 하워드 씨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 이 돈 가방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마치 가시면류관처럼 내 머리를 눌러댔다.

돈 가방을 어떻게서든 처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일에 돈을 쓸 수 있다면, 내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질 거 같았다.

주님께 감사했다.

크리스틴은 유혹에 흔들렸다.

마치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으려는 이브처럼.


"고마워, 아빠 수술비로 쓸게"


그녀는 돈 가방을 덥석 받았다.

가방을 손에 든 크리스틴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어폰이 제멋대로 엉켜있는 MP3를 내게 건넸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공짜로 받긴 그러니까, MP3는 싸구려지만 안에 있는 플레이리스트는 30만 달러 짜리야"


그녀는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수면제 한 알을 앞에 두고 기도했다.

내 행동이 주님의 뜻이기를 기도한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신의 말씀을 핑계로 문제를 외면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30만 달러라는 숫자가 마치 주님의 계시인 듯 모든 걸 주님의 뜻으로 돌린다.

여전히 나는 도망치고 있다. 하지만 도망치기만 해서는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도망만 치다가는 언젠가 막다른 길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끝은 낭떠러지일 수도 있다.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크리스틴에게 돈 가방을 넘긴 후 기도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의 뜻에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한 자신을 대견스러워했다.

하지만 평온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결국 낭떠러지까지 밀려났다.

예배를 드리는데 하워드 부인이 익숙한 서류 가방 두 개를 들고 성당 문을 열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뭔가 잘 안 풀렸다는 걸.

뒤에는 울면서 부인을 말리려는 크리스틴이 있었다.

내게는 그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시간이 멈추길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워드 부인의 얼굴에는 무수히 많은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분노, 실망, 슬픔 모두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녀는 성큼성큼 내 앞까지 다가와 가방을 놓았다.


"다니엘 사제, 우리는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거의 울며 말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는 오직 바닥에 떨어진 돈 가방만 보일 뿐이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당신을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습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한스 신부님도 모자라 당신까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절규가 성당을 가득 메운다.


"이 돈으로 남편을 살릴 수 있다 해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이건 정말 아닙니다."


하워드 부인은 손을 덜덜 떨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성당에 퍼진다.

성당에 있던 형제자매들의 이목이 쏠렸다. 나는 그들 앞에서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넋이 나간 얼굴로 마른 침만 삼킬 뿐이었다.

주님의 뜻을 어겨서 벌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조차 주님의 시험인가.


"이만 예배 마치겠습니다."


황급히 예배를 마무리 지었다. 덩그러니 떨어진 돈 가방을 모른 척 지나가며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웅성거림과 손가락질이 느껴졌지만 모두 없는 취급 했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못하게 성당 창고에 몸을 숨겼다.

수백 번 후회를 했다. 그날 가방을 받지 않았더라면, 한스 신부님이 잡혀갈 때 가방의 사실을 알렸더라면, 크리스틴에게 가방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럭저럭 다니엘 사제로서의 삶은 유지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대로 도망칠까? 어쩌면 좋지?

보육원에 버려진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늦은 밤 성당으로 돌아왔다.

성당에는 안나 수녀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돈 가방 두 개가 차곡히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안나 수녀님"


"다니엘 사제, 용서를 구하지 마십시오, 회개도 하지 마십시오"


수녀님의 얼굴은 단호했다. 나를 보살펴 주던 따스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를 구원해주길 바라며, 나를 인도해주길 바랐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는 내 모습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고요한 성당, 그녀는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가 알고 있는 안나 수녀님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나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그녀는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네?"


"더 이상 이 성당이 망가지는 걸 볼 수가 없습니다. 제발 죽어주세요."


수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수녀님에게 악마라도 씐 걸까?

아니 어쩌면 내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악마가 되어버린 것일까?

안나 수녀님은 마치 나를 다른 생명체를 취급하듯 바라봤다.


"죽음으로 모든 게 해결될까요?"


울먹이며 물었다.


"다니엘 사제를 포함한 모두가 편해질 겁니다."


편해지고 싶었다. 이 지옥과 같은 현실보다 진짜 지옥이 나을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방으로 향했다.

십자가를 짊어진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무겁다.

채찍에 맞은 것도 아닌데 온몸이 따끔하다.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내게 여러 번 기회를 주신 걸 지도 모른다.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바로 나였다.

수면제를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절망하는 사제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건 십자가인가?

아니면 치사량의 수면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름 모를 밴드의 존나 쩌는 기타 사운드인가?

크리스틴에게 받은 MP3의 전원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귀를 파고드는 사운드에 눈이 감겼다.

쵸크슬램에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평생 나를 지탱해주던 십자가가 박살 나는 기분이 든다.

수면제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자, 쓰라린 목 넘김에 인상이 구겨진다.

죽음을 앞두고 떠오르는 건 평생 섬겨왔던 주님도, 나를 유혹하던 악마도 아니었다.

뇌리에 남을 정도로 예의가 없었던 정신과 의사였다.


- 많이 드시면 주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건가, 의식은 흐려진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내게 다가온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죽어가는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마치 나의 죽음을 기다렸던 거 같다.

옅어지는 의식 속 귓가에 들리는 음악은 빌어먹을 정도로 신나는 멜로디였다.





1. 제임스 매클레인


행복할 줄 알았다.

오랜 무명생활 끝에 빛을 보게 되는 배우라던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 가수라던가, 역경을 딛고 일어나 메달을 따낸 스포츠 스타라던가.

영화에 나올 법한 해피엔딩.

그런 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적으로는.


어중간한 재능.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500cc 잔에 가득 담긴 싸구려 맥주의 거품처럼 그런 사람들은 넘쳐난다.

오디션 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다. 매번 천재는 나오고, 그들은 주인공이 된다.

나머지는 주인공의 도약을 위한 발판일 뿐.

거기서 내 재능은 어느 정도에 위치할까?

문득 기타를 잘 친다고,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해주었던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직도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을 보고 기뻐할까, 아니면 안쓰러워할까.

해가 바뀌었다. 나이는 1년에 한 번씩 꼭 먹는다. 그리고 나이를 먹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 그때부터 기대는 꺾여나간다.

싹둑싹둑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혹은 기대치가 잘려 나갈 때마다 주변을 본다.

나를 보며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부럽다던 주변의 눈빛에는 왠지 부러움보다는 안도감이 담겨 있는 거 같다.





'피해망상'이라고 했다.





불면증을 토로하던 내게 친구가 정신과 선생님을 추천해줬다.

정신과 상담의, 그는 상당히 잘나가는 사람으로 보였는데 왠지 상담을 받을 때마다 역효과가 나타났다.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더욱 불안해졌다.

오늘로 세 번째 상담을 받고 있는데 그는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내 성격상 잘 나가는 사람들을 대할 때 한없이 작아지는 것도 있지만 그는 나를 더욱 압박하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처방에는 불순한 의도가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 같다.


"당신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근데 저한테 기타 치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지 않습니까? 그게 죽으라는 소리지 뭡니까? 솔직히 그냥 귀찮죠? 저를 상대하는 게"


침을 튀이며 마구 쏘아붙였다.

내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억지로 부드러운 표정을 보이던 의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환자분은 지금 피해망상이 극에 달했습니다. 본인이 음악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다른 취미를 찾아보라는 말을 그렇게 오해하시다니"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그에 맞춰 나는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취미? 저는 음악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오해? 피해망상? 잠은 더 안 오고, 스트레스는 더 받고 있어요. 당신의 빌어먹을 처방 때문에!"


사실 생업이라고 표현했지만, 직업이라기엔 수입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적자였다. 음악으로 번 돈보다 쓴 돈이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

내가 마구 쏘아붙이자 의사는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목에는 꽤 비싸 보이는 명품 시계가 감겨있었다.

저번에 봤던 시계와는 또 다른 고가의 시계이다.

사실 지난번 의사가 찼던 시계를 검색해봤다.

시계의 가격에 달린 '0'의 개수에서 성공한 인생이 내비친다.

많은 환자가 그것에서 신뢰를 얻었을 것이다.

손바닥이 훑고 지나간 그의 얼굴은 차갑게 변해있었다.

마치 변신이라도 한 것처럼.


"잠이 안 온다고 했죠? 인정하겠습니다. 제 처방이 틀렸습니다. 수면제가 필요하네요. 당신한테는 되도록 수면제를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말투에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나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저한테만 되도록 수면제를 쓰고 싶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의사는 내 눈을 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건 내 기분 탓에 그렇게 보인 걸 수도 있겠다.


"자살할 거 같아서요"


내 귀를 의심했다. 황당해하는 내 앞에 그는 거칠게 약통을 내밀었다.

수면제였다.


"효과가 좋은 놈으로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잠이 안 오면 한 알만 드시고, 과다 복용하면 죽습니다. 음악을 하건 말건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당신 음악 들어줄 사람도 없잖아요.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의사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당신 상대하는 거 솔직히 지칩니다."


쇼크였다. 너무 감정이 북받쳐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고, 집에 거의 다 와서야 밀려오는 모멸감에 괜히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실컷 욕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깡통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텅 비어있고 시끄럽고 쓸모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오늘 병원에서 받은 충격과 어질러진 책상 위에 비어있는 에너지 음료수 캔이 그 이유였다.

그 깡통 옆에는 밑창이 닳은 슬리퍼를 신은 두 발이 올려져 있다. 발은 제멋대로 까딱거렸다.


"오늘도 못 잘 거 같아, 미치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평범하게 살 걸 그랬어. 나는 음악에 재능이 없나 봐. 어렸을 때는 틀림없이 유명해질 줄 알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핸드폰에 대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거슬리는 잡음과 함께 핸드폰 너머로 조쉬의 콧방귀 소리가 들려왔다.


"흥, 틀림없이 유명해질 줄 알았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건 여전하구나. 정신 차려! 음악으로 성공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뭔가 좀 보여줘라, 제발. 방구석에서 헛된 망상만 하지 말고 연습이나 해!"


질리도록 맛본 좌절감과 파고드는 우울함엔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패배자로 보내는 밤은 언제나 쓰렸다.

조쉬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격려를 듣고 싶어서였지만 돌아온 건 쓰디쓴 충고와 팩트였다.

조쉬의 말대로였다.

그늘진 방구석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까 의사의 말에 대꾸조차 못 했던 건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음악에 열정을 쏟아부으며 살았던 적이 분명히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음악은 실패한 인생을 변호하기 위한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되어버렸다.

딱 음반 발매 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지고부터 의욕을 잃어버렸다.

나이는 차고 있었고, 눈앞에서 결과물을 놓쳐버리니 그 때부터 음악은 즐거움이 아닌 도피처가 되었다.

그런 시간이 계속 이어질수록 점점 추해졌다.

열심히 음악을 했지만, 결과물은 없었다.

음악을 한 시간만큼 제임스 매클레인의 시간은 낭비되었다.

어렴풋이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점점 세상에서 쓸모없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점점 옅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니, 애초에 제임스 매클레인은 존재했던가?

울컥해진 나는 조쉬를 탓했다.


"우울증 걸린 친구한테 할 소리야? 약 없이는 잠도 못 잔다고!"


비겁한 변명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코너에 몰리니까 자신의 아픔을 방패 삼아 철저하게 이용한다.

최악이다.

조쉬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머릿속에 눈썹을 찌푸리고 아랫니를 꽉 다물고 있을 조쉬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징징거리며 푸념을 늘어놓을 때 조쉬의 표정은 늘 그랬다.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위로를 못 받을 바에 차라리 좀 더 독한 소리가 듣고 싶었다.

모욕이라고 느낄 정도로 통렬한 비판을 쏟아주길 내심 기대했다.

그 감정을 원동력으로 기타를 잡으려 했다.

분노는 귀한 동력원이기도 하니까.


"그래, 내가 미안하다. 힘내라"


무미건조한 사과와 함께 통화는 끊어졌다. 조쉬의 맥 빠지는 반응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친구에게조차 귀찮고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욕하기조차 아까운 인간.

낮에 있었던 의사의 말이 오버랩 된다.

우울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쓸어내렸다.

죽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나는 살기 위해 기타를 쳐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삶의 의욕을 찾아야 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조쉬에게 그리고 그 망할 의사에게 이날 본인을 무시한 걸 후회하게 해주고 싶었다.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내서 두 발을 찼다. 슬리퍼가 위로 힘껏 날아갔다. 그리고 우뚝 일어섰다.

맨발에 끈적이는 방바닥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뚜벅뚜벅 기타 쪽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기타 케이스의 먼지를 손으로 훑었다.


'James McClean'


먼지 아래 숨어 있던 이름이 보인다. 케이스 뚜껑을 열고 조심스레 기타를 꺼냈다.

얼마 만에 잡아 보는지. 연주할 곡은 'nth-child（n번째 아이）'

나름 필살기라고 생각했던 자작곡.

음반 제작 계약까지 갔다가 앨범 발매 직전에 엎어진 비운의 명곡이다.

비참한 결과물이지만 스스로 가장 만족했던 자작곡이었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자연스레 코드를 잡는다.

최고의 연주가 나올 거 같은 기분. 벅차오르는 감정을 다잡으며 손가락으로 줄을 튕겼다.

순간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줄이 끊어졌다.


"하, 씨발"


제임스 매클레인의 인생은 망했다.

누가 봐도 망한 인생이었다.

여기 줄 끊어진 기타처럼 어디에도 쓸모없는 인생이다.

기타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못난 주인이 잘못이지.

언젠가 기타에 사인을 남겨 내 음악을 사랑해준 팬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아니, 분명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다.

나는 음악으로 인해 행복했었다.

나에게 처음 기타를 가르쳐준 스승님은 내가 기타 천재라고 했다.

잘하는 게 딱히 없던 내게 그의 칭찬 한마디는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

내가 천재라니, 그때부터 나는 그의 레슨을 받으며 꿈을 키웠다.

다시 생각해보면 레슨 생을 모집하려는 그의 상술에 빠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가 가장 음악을 즐겁게 하던 시기였다. 기

타 스킬이 올라갈 때마다 희열을 느꼈고, 멜로디를 조합하는 즐거움에 밤을 새우던 때도 있었다.

스승님은 내가 유명한 아티스트가 될 거라고 했다.

근데 지금은?

말랑해진 손끝이 모든 걸 말해준다.

기타 줄을 제때 갈아주지 못할 정도로 손을 놓은 상태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스승님은 뭐라고 할까? 미안하다고 할까? 어쩌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 같은 존재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줄이 끊어진 기타를 케이스에 담았다.

슬로모션처럼 굉장히 느리게 움직였다.

아마도 스스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기타 잡을 일이 없다는 걸.

기타 케이스를 닫으며 나는 결심했다.

나는 곧 자살할 것이다.

유서 따위는 쓰고 싶지 않았다.

삼류조차 되지 못한 음악가지만 음악 하다 죽은 사람으로서 음악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스피커 음량을 최대로 올리고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nth-child 음원 파일을 열었다.

이 음악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혹시 아나? 어떤 예술가처럼 내가 죽은 후에 이 음악이 세상에 퍼질지?

씨발, 죽기 전까지 망상이다.

익숙한 기타 소리가 음악의 시작을 알린다.

마음은 차분해지지 않았다. 처방받은 수면제 통을 열었다.

재수 없는 의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살할까 봐 수면제 처방을 안 했다고? 씨발, 존나 유능한 의사였구만"


수면제를 한 움큼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알약을 입안 가득 머금은 채 냉장고에서 에너지 음료를 꺼내 들이켰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식도가 아려왔다.

캔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깡통 굴러가는 소리에 속이 울렁거린다.

동시에 에너지 음료 특유의 타우린 향이 올라온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주룩 흐른다.

빌어먹을 만큼 신나는 멜로디.


'이 노래가 이렇게까지 신났었나?'


침대가 들썩일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충동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절대로 기타를 잡지 않을 것이다.





2. 바튼 매클레인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오전 6시.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기상했지만, 몸에 피로가 쌓였는지 전혀 개운치 않았다.

약간의 두통과 더불어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요즘에는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지 피로가 풀리지 않고 축적된다.

특히 정신적 피로도가 컸다. 스트레스 더하기 스트레스.

모든 스트레스의 원흉은 투자 사기였다.

투자 계약을 맺고 계약서를 쓰자마자 자금 문제로 소송이 걸렸다.

변호사 말로는 법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라고 했다.

내게 계약을 제안했던 동문이자 동업자는 연락 두절이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그 덕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가질 수 있었다.

근데 그 인생이 계약서 몇 장 때문에 날아가게 생겼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도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

서서히 죽어가는 불쾌한 감정이 온몸에 스며든다.

그저 꿈일 뿐인데.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자기 관리 삼아 꾸준히 운동을 했지만, 최근에 일 때문에 운동을 쉬어서 그런지 온몸이 뻐근하다.

팔과 다리를 쭉 뻗고 몸을 늘리자 관절 마디마디에서 비명이 들린다.

매일 하는 건데도 오랜만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몸이 축 늘어졌다. 나는 축 처진 몸을 이끌고 프라모델 장식장을 한 번 훑었다.

프라모델은 어렸을 때부터 즐겨 온 취미였다.

성취감을 느끼기 딱 좋은 취미, 어떤 모델이라도 설명서대로 만들다 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그리고 바라는 대로.

회사를 차린 후에는 워낙 바빠서 이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인생도 조립만 하면 완성되는 프라모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실에서 믹서기 소리와 음악 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음악은 마리가 좋아하는 영화의 OST 'can't take my eyes off you'.

그녀가 평소처럼 나를 위해 과일 주스를 만드는 모양이다.

그녀는 요즘 부쩍 내 건강을 챙긴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마리가 나를 돌아봤다.

이른 아침이지만 정돈된 상태로 나를 맞이한다.

근데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다.

그녀는 좋아하는 파트임에도 불구하고 볼륨을 줄이더니, 걱정된 얼굴로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조그만 입술을 열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 울었어요?"


흠칫 놀라며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양 볼은 눈물 때문에 촉촉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마리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품을 크게 했나 봐"


너스레 떨며 말했지만, 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요즘 일 때문에 힘든 거 같은데 당신 정말 괜찮아요?"


"응, 괜찮아 진짜 괜찮아"


괜찮다고 말을 하던 내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얼굴이었을까?





"바튼 씨, 그 동업자한테 당하신 겁니다. 그것도 제대로"


사실상 변호사의 패배 선언이었다. 제대로 당했다. 얼마나 제대로 당했는지 빠져나갈 구멍조차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위약금을 지불하며 합의하는 쪽으로 변호사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징역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이쪽 업계에서 신뢰를 잃으면 곧 퇴출을 뜻했고, 나는 사기꾼이 되지 않기 위해 돈을 물어내야 했다.

바튼 매클레인, 촉망받던 투자회사 대표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건 사람 몇 명과 종이 몇 장이면 충분했다.

큰 금액의 위약금,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자산과 내 개인 자산을 모두 처분해야 했다.

그걸로도 사실 부족하기는 했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금융회사에 스카우트 되고, 그곳을 나와 스스로 차린 투자회사까지 모든 것이 순탄했다.

마치 근사한 인생이라는 프라모델을 잘 짜인 설명서대로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근데 그 프라모델이 근사한 인생이 아니라 망할 인생이었나 보다.

그랬다. 엘리트 코스였던 내 인생이 한 방에 무너졌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누군가 내 완벽한 인생을 시기해 망치려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인생이 이렇게 쉽게 망가질 리가 없다.

독한 마음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나였다.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가 이런 실패였다면 나는 열심히 달렸을까?

완성된 모습이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프라모델을 조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각은 쓸데없이 날카롭다. 너무 날카로워 스스로 마구 찔러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진다.

직원들에게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입금했다.

나를 믿고 들어온 직원들한테 미안했다. 면목 없었다.

하나하나 대표인 나를 믿고 따라줬는데 모든 걸 망쳐버렸다.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내 손으로 정리했다.

일, 지위, 돈, 인맥 얻기까지 무수한 노력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정리되었다.

애초에 내 손에 들어온 게 아닐 수도 있다.

손에 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에는 마리와 맞춘 반지만 남아있다.


'인생도 정리하기 쉬울까?'


집에 일찍 들어왔지만 할 게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게 투자를 제안했던 동문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여전히 무의미한 연결음만 반복된다.

믿었던 인맥에 발등을 찍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했다. 같이 망하면 망했지, 얻을 게 없을 텐데 사기를 쳤다.

의도적으로 나를 망치려는 행위였다. 나한테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갑자기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다.

신경질이 나서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날아간 핸드폰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순간 프라모델 장식장이 무너졌고,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가장 아꼈던 항공모함 프라모델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박살 났다.

아차 싶어서 가봤지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잔해들을 살피니 부품 자체가 박살 나서 복구가 불가능했다.

장식장 속 컬렉션을 만드는 데 수년의 노력과 시간이 들었었다.

근데 망가지는 건 1초면 충분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가.

마치 인생처럼.

설명서가 있어서 다시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부품이 망가져 새로 구해야 하고 다시금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다시 부품을 하나하나 다듬고 조립해야 한다.

그 행동을 반복하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프라모델이든 인생이든 망가지면 끝이다.

어쩌면 지금 내 인생은 박살 난 프라모델일지도 모른다. 복구할 수가 없다.

모든 걸 잊고 잠들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나 정신이 선명해 더욱 고통스러웠다.

마리가 올 때까지 프라모델 잔해들을 앞에 두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마리가 내게 명함을 건넸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정신과 의사의 명함이었다. 상담을 받아보라는 마리의 조심스러운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

실제로 수면을 취하지 못해 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TV 볼륨 하나에도 신경질이 났고, 평소 같으면 넘어갔을 사소한 문제로 언성이 높아졌다.

동거를 하는 마리가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그녀가 가장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상담을 받으러 가야 했다.





편한 차림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말끔하게 세팅을 하고 찾아갔다.

좋은 정장, 좋은 시계, 좋은 차. 어쩌면 나는 의사에게 생각보다 괜찮은 상태라는 걸 어필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깔끔했다.

인테리어부터 디자인까지 심플해서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익숙했다.


"바튼 매클레인 씨,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사는 나를 스캔했다. 그의 눈빛은 노골적으로 나를 훑었다.

그 시선에 모든 게 다 까발려지는, 벌거벗은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나의 실패가 겉으로 드러난 기분이다.


"거기 소파에 편히 앉으세요."


나의 불편함을 눈치챘는지 의사는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너무나 푹신해 자칫 잘못하면 빠져들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앉자마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근래 잠을 못 잤는데 이 소파라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감히 예측해보건대 이곳을 찾는 환자의 8할은 소파 때문일 것이다.


"커피는 드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요즘 잠을 못 자서"


"아! 불면증이 있으시군요."


"네"


"안타깝네요"


의사의 무성의한 대답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햇살 좋은 창가에서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창밖을 보며 내게는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수면제 처방해드릴 테니 한 알씩 드세요."


"끝인가요?"


"네"


"뭐 상담이라던가, 그런 건 없는 건가요?"


내 물음에 의사는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잠을 못 자서 온 거 아닙니까? 약이나 잘 드시고 푹 주무세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 성격으로 모든 고민은 혼자 해결했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같이 살고 있는 마리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신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건 내 성격이었다.

근데 이 의사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왜 잠을 못 자는지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근데 그는 고작 수면제 처방으로 끝내버렸다.

이건 직업윤리에 어긋나지 않나?

그렇다고 여기서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위로받고 싶은 건 아니지만, 기분이 언짢았다.


"상담은 끝난 겁니까?"


"네"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심지어 내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그는 창밖 풍경을 보며 커피나 홀짝였다. 지금 그에게 나는 티타임을 방해하는 귀찮은 인간일 것이다.


"한 알이면 되나요?"


"네, 한 알만 드세요. 많이 먹으면 죽으니까"


불쾌한 농담까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의사였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왔을 때, 내 앞으로 서류가 와있었다.

재산 압류에 관한 서류였다. 다행히 마리는 서류를 확인하지 않은 거 같다.

언젠가 마리가 내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내 곁에 있어 줄까?

집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리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고, 오늘 저녁은 기대해도 좋다며 편히 쉬라고 했다.

투자 사기를 당했고, 그것 때문에 전 재산을 잃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괜찮은 표정을 유지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리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거실에서 뉴스를 봤다.

하필이면 뉴스에 투자 사기를 당해 자살한 사람에 대한 소식이 나왔다.

한숨이 나왔다.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이야기였다.

뉴스에 나오는 불쌍한 인간이 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지?'


정답이 필요했다. 프라모델처럼 설명서라도 필요했다.

망한 인생을 복구하는 그런 설명서.

마리는 풀이 죽은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저녁을 차려줬다.

웃어 보였는데 그게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내 얼굴을 모르겠으니 말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리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물 한잔과 수면제 통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약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가.

편히 잠들고 싶었다. 수면제 하나를 먹으면 오늘은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옥 같은 내일을 또 버텨야 했다.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영원히 잠들 수 있었다.

편안하게 관속에 누워있는 끔찍한 상상을 한다.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민 끝에 한 알만 꺼내려 통을 기울였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약이 우르르 쏟아져 손에 가득 쌓였다.

이 정도면 치사량이 되려나?

나도 모르게 죽음에 대한 충동이 솟구친다.

순간 공기가 서늘해졌다. 갑자기 느껴진 한기에 뒤를 돌았다.

검은 실루엣이 거실 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몸이 굳었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검은 형체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눈도 깜빡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고 그것의 외양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은 나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바튼 매클레인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아무것도 못 하는 내 얼굴과 손에 가득한 수면제를 보고는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죽으려고?"


순간 바튼 매클레인은 의식을 잃었다.





방문 너머로 어렴풋이 믹서기 소리가 들린다.

마리는 부엌에서 여느 때와 같이 음악을 들으며 바튼 매클레인을 위한 과일 주스를 만들고 있었다.

매클레인은 쓱 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과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리며 하품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은 그대로 뭉개 둔 채, 곧장 문으로 향해 문을 열었다.

매클레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리의 뒷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순간 리듬에 맞춰 들썩이던 마리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기묘한 정적 속에 마리가 좋아하는 'can't take my eyes off you'만 흘러나올 뿐이다.

그녀는 약간의 텀을 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살짝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뒤에는 칼을 들고 있는 매클레인이 보였다.


"비상사태, 비상사태! 마리, 그는 이제 바튼 매클레인이 아닙니다"


그녀의 귀에 달린 초소형 이어폰에서 긴급 신호가 들려왔다. 매클레인은 칼을 높이 치켜들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4. 마이클 케인


"자살할까 봐 수면제 처방을 안 했다고? 씨발, 존나 유능한 의사였구만"


제임스 매클레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수면제를 한 움큼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알약을 입안 가득 머금은 채 냉장고에서 에너지 음료를 꺼내 들이켰다. 습관대로 그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그는 다 마신 캔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깡통 굴러가는 소리가 집안에 퍼지고, 그는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제임스는 눈을 질끈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죽음을 기다렸다.





제임스 매클레인의 모습이 모니터에 보인다.

정렬된 수많은 모니터에는 그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하는 모습이 다양한 각도로 담겨있다.


"제임스 매클레인이 약을 먹었습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직원 하나가 제임스의 현재 상태를 보고했다.


"오늘은 확실하게 자살을 했네요."


"제임스도 끝이네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제임스 매클레인이 먹은 것은 수면제가 아니라 복용자를 가사상태로 빠뜨리도록 제조된 특수한 약이었다.

그 약을 먹은 제임스는 침대에 누워 서서히 가사상태로 빠져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잘 정돈된 콧수염을 매만지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응급구조 팀 출동하세요."


그의 지시로 구조팀이 움직인다.

명령을 내리는 그는 마이클 케인, 매클레인 가문의 집사로 프로젝트의 총책임을 맡고 있다.

집사는 구조 명령을 내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nth-child를 흥얼거렸다.

그의 손은 이미 기타 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모니터를 보던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래 괜찮지 않나요? 멜로디 라인도 좋고, 무엇보다 기타 연주가 예술입니다."


"네, 그러네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마이클은 황급히 화면을 다시 봤다.

모니터 속에서 구조팀 대원들이 제임스 매클레인의 집에 들어갔다.

그들은 서둘러 침대에 누워있는 제임스에게 주사를 놓고 응급조치를 취했다.

모니터에 제임스가 입에 거품을 문 채, 의식을 잃은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마이클은 모니터를 심각하게 지켜봤다.

매클레인이 죽으면 안 되는 프로젝트였다.

모든 직원들이 숨을 죽이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윽고 제임스 매클레인에게 응급조치를 취하던 구조팀에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보고 받은 마이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사무실 마이크를 전체로 돌렸다. 그리고 모두에게 전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에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직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제임스 매클레인 자살 시나리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전 직원이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축제 분위기 속 직원 하나가 스피커 음량을 키운다.

건물 내부 스피커로 nth-child가 흘러나왔고 몇몇 직원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신나는 멜로디에 모두가 들썩였다.

마이클 역시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제임스 매클레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마이클은 코 끝이 시큰거렸다.

얼굴을 찡그리자 주름이 더욱 깊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많은 주름이 있었고, 주름에는 많은 감정이 새겨져 있었다.

제임스 매클레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길고도 짧은 여정의 마무리였다.

그는 책상 서랍을 뒤적이더니 노트를 꺼냈다.

노트의 표지에는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 목록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노트의 페이지를 넘기며 제임스 매클레인을 찾았다.


제임스 매클레인

- 13살부터 나타난 인격

- 음악에 엄청난 재능이 있음 （특히 기타에 소질이 있음）

- 고유 뇌파가 있어서 대응 가능


노트에는 제임스 매클레인의 성격, 건강상태, 습관, 인간관계, 성장과정, 좋아하는 음식, 음악 취향 등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적혀있었다.

마이클이 제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작성한 리스트였다.

리스트를 쭉 보던 마이클은 목록 상단에 적힌 제임스 매클레인이라는 이름을 한참 보다가, 만년필로 두 줄을 그어 이름을 지웠다.

만년필 뚜껑을 닫는 그의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흥얼거림을 멈춘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그는 마른 손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제임스 매클레인은 죽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중 하나였지만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제임스 매클레인은 마이클에게 각별했다.

제임스에게 처음 기타 코드를 알려주던 게 생각이 났다.

작은 손으로 기타 코드를 힘겹게 잡던 어린 제임스 매클레인이 아른거린다.

그 기억을 시작으로 제임스 매클레인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음악을 가르쳐 준 것도 마이클이었고, 그에게서 음악을 빼앗은 것도 마이클이었다.

다시는 제임스의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이클은 한숨을 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이클 케인, 그는 매클레인 가문의 집사로 맬컴 매클레인 회장의 명령 하에 매클레인 가문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후계자,

브루스 매클레인의 다중 인격들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브루스 매클레인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형 그리고 누나를 사고로 잃은 후, 그 충격으로 인격이 분리되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 맬컴 매클레인 회장은 후계자 양성을 위해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입해

브루스 매클레인과 분리된 인격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매클레인 회장이 병환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 시점부터 마이클이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했다.

매클레인 회장과는 다르게 그는 브루스 매클레인에게 몸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브루스 매클레인은 분리된 인격이 아닌 브루스 매클레인 그 자체로 살아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유지되던 매클레인의 다중인격 관리를 끝내기 위해 브루스 매클레인을 제외한 모든 인격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과 전문 박사에게 조언을 구했고, 인격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상당히 비인도적이었다. 분리된 인격이 죽음을 겪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계획된 구성 안에서 매클레인의 인격을 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브루스 매클레인의 신체에 부담이 갈 수 있었다.

게다가 타살의 경우 변수가 많이 생기는 관계로, 실행함에 있어 큰 리스크가 따랐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앞서 제임스가 보여준 약물을 통한 자살 시도였다.

신체 훼손과 부작용이 가장 적은 방법으로 마이클은 이 방법으로 브루스 매클레인으로부터 분리된 인격들을 제거하려 했다.

물론 매클레인이 진짜로 죽기 직전에 그의 신체만은 살려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당사자가 자살하고 싶도록 정신적으로 무너뜨려야 했다.

그리고 매클레인이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에 빠뜨리는 모든 과정은 마이클이 주도했다.

오랜 시간 동안 '매클레인들'을 바라본 그는 너무나도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자살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첫 시작은 다니엘 매클레인이었다. 그쯤 맬컴 회장은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된 마이클은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천천히 실행했다.

그는 다니엘이 믿고 따르던 한스 신부부터 제거했다.

물론 한스 신부는 실제 신부가 아닌 신부 역할을 맡은 연기자로 다니엘의 인생을 관리하기 위해 꾸며진 연극 중 일부였다.

자신이 부모에게 버려져 성당에 맡겨진 불쌍한 소년이라고 생각하는 다니엘에게 한스 신부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한스 신부 배역을 맡은 연기자가 마지막 대본을 보더니, 마이클에게 물었다.


"정말 이 대본대로 진행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니엘 사제가 한스 신부에게 많이 실망하겠군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다.


"제 대사 좀 보세요. 다니엘이 불쌍할 지경이에요."


안나 수녀 역할을 맡은 배우 역시 탐탁지 않아했다.


"그를 절망에 빠뜨리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두 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이클의 각본대로 다니엘이 믿고 따르던 한스 신부를 악인으로 만들고, 죽게 만들었다.

그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한스 신부에게 느낀 배반감 그리고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평온하게 지내던 다니엘은 흔들렸다.

마이클은 다니엘이 정신적으로 괴로워할 만한 상황들을 잘 만들어 냈다.

한스 신부에게 받은 돈 가방, 크리스틴의 가정사, 하워드 부인의 분노, 거기에 믿었던 안나 수녀님에게 버림받기까지.

결국 사제였던 다니엘은 믿음을 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다니엘이 죽은 날, 맬컴 회장도 세상을 떠났다.

마이클에게 죄책감은 딱히 없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생에서 다니엘은 필요 없었다.

본래 분리된 인격이었고, 다니엘의 삶이 행복할 수 없다고 믿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신의 말씀을 따르고,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이 매클레인을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이클은 매클레인을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매클레인의 마지막도 마이클의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졌다.

제임스를 절망에 빠뜨린 모든 것들이 만들어진 각본이었다.

그를 자살로 이끌었던 모든 상황과 요소들은 모두 마이클이 심어둔 장치였다.

음반 발매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희망 고문하다가 마지막에 그 결과물을 빼앗았다.

제임스는 당연히 좌절했다.

마이클은 좌절한 제임스의 재능을 깎아내리며 더욱 몰아붙였다.

밴드 멤버들을 떠나보내며 그를 서서히 고립시켰고, 가짜 정신과 의사를 통해 마지막까지 그를 지탱하던 음악마저 못하게 만들었다.

조쉬 역시 제임스 매클레인의 친구 역할을 맡은 연기자였다.

제임스가 자살한 날 마지막으로 행해진 조쉬와의 통화는 제임스를 죽음으로 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마이클은 잔인하게도 제임스 매클레인의 기타 줄까지 잘 끊어지도록 갉아 놓았다.

그는 제임스에게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선사했다.

완벽한 시나리오.

제임스 매클레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제임스가 죽은 다음 날, 케인은 다음 시나리오를 위한 보고를 받았다.

"다음 인격은 뇌파 분석 결과 97% 확률로 바튼 매클레인입니다. 제임스 매클레인의 인격은 확실히 제거된 것으로 보이고, 2% 정도의 확률로 다른 인격이 나오거나 1% 확률로 새로운 인격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보고를 마친 직원은 마이클에게 자료를 건넸다.

"흠, 바튼 매클레인? 바튼 매클레인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그가 투자한 기업의 재무 상황을 악화시켰고, 외부 투자자를 끌어들인 바튼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또한 지불해야 할 위약금을 전부 바튼 매클레인에게 넘길 계획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동업자와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누구보다 성공을 갈망하던 바튼에게는 큰 시련이 되겠군요. 돈과 사회적 지위가 한순간에 날아간다면 그는 삶의 의욕을 잃을 것입니다. 여기에 마리와의 관계도 악화시켜서 바튼 매클레인의 일과 인간관계를 동시에 무너뜨려서 그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갑시다"

마이클은 바튼 매클레인의 자살 시나리오를 보며 흡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바튼 매클레인은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 했을 정도로 강인한 인간이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바튼이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라는 건 모두 아실 겁니다. 침대, 이불, 탁자 등 그의 집안에 있던 모든 것들 전부 그대로 세팅해 둔 거 맞죠?"


"네 전부 그대로 보존하였습니다."


"바튼의 손톱, 발톱 길이 지난번과 동일하게 관리해 주시고, 책 꽂힌 위치, 페이지 전부 꼼꼼히 체크해 주세요.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제품들 유통기한 확인해서 전부 수정하세요. 바튼 매클레인은 디테일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제임스 매클레인의 물건들은 어떻게 할까요?"


마이클은 잠시 멈칫했다. 가장 아끼던 제임스를 떠나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대답했다.


"제임스의 물건들은 혹시 모르니 하나도 버리지 말고 모두 창고에 보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개인적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셔도 됩니다."


"바튼 매클레인은 선택받은 거 아니었나요? 전 그가 마지막까지 남을 줄 알았어요. 무엇보다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마이클은 눈을 감았다 떴다. 직원의 말이 맞았다. 바튼 매클레인은 기업을 이끌어나갈 후계자로 딱이었다.

사업가 기질이 있었고, 성공에 대한 열망은 다른 어떤 매클레인 보다 강했다.

그래서 매클레인 회장은 자신의 아들보다 바튼 매클레인이 기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회장님이 죽은 지금 책임자는 마이클이었다.

회장님의 말로를 가장 옆에서 지켜본 마이클은 알고 있었다.

회장님의 인생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난 브루스 매클레인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적어도 그는 바튼으로 살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회장님께서 그런 삶을 살았듯이"


제임스의 인격이 죽고, 매클레인이 의식을 잃은 동안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바튼 매클레인을 맞이할 위한 준비를 했다.

유통기한을 수정한 제품들이 냉장고에서 교체되었고, 그의 컴퓨터, 침대 머리맡에 시계까지 모두 시간을 조정했다.

그동안 쌓여있던 먼지도 적당히 닦아내었다. 너무 깨끗하게 닦아내도 문제가 생겼다.

바튼은 워낙 예민한 탓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지난번 깨끗하게 모니터를 닦아버린 탓에 바튼이 이상함을 느꼈고, 방에 누군가 들어온 거 같다고 말했다.

다행히 마리가 임기응변으로 방 청소를 해둔 걸로 넘어갈 수 있었다.

자신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걸 원치 않는 바튼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큰 위기는 넘겼다.

바튼의 인격은 브루스 매클레인이 15살이 되었을 때 나타났다.

그는 다른 인격들에 비해 너무나 예민해서, 마이클은 바튼의 인격을 관리할 때면 항상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자신의 시간이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의심을 할 정도로 바튼은 머리가 좋았다.

결국 다쳐서 의식을 잃었던 정도로 무마했지만 그 후 바튼의 인격을 관리하는 세트장은 디테일하게 관리되었다.

바튼의 세트장 관리가 어느 정도 끝나고 바튼의 방으로 매클레인이 실려왔다.

정확히는 수면 마취 상태였다. 그의 머리카락, 수염, 손톱, 발톱은 딱 전의 상태와 동일하게 유지시켰다.

잠옷 역시 그가 잠들었을 당시 그대로 복원했다.

직원들은 바튼을 침대에 눕히고, 카메라 상태를 점검한 뒤 모두 빠져나왔다.





모니터 화면에 바튼 매클레인이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수면을 취했다.

머리맡에 있는 디지털 알람시계가 5시 59분을 가리켰다.


"곧 바튼 매클레인이 기상할 것입니다. 모두 위치로 가시고, 마리도 준비됐지요?"


케인의 물음에 5번 모니터 화면 속의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래를 흥얼거리며 믹서기를 작동시켰다.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알람이 울렸다.


"바튼 매클레인 자살 시나리오 시작합니다."


바튼 매클레인이 일어나 시계의 알람을 끈다. 그는 평소와 같았다.

늘 하던 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근데 그의 얼굴이 이상했다.


"2번 카메라 클로즈업"


"네"


카메라 속 바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클로즈업된 화면에 나온 바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바튼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처음 보는 경우입니다."


마이클은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바튼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매클레인의 인격 중에서 감정 변화가 가장 적은 바튼이기에 모두가 당황했다.

바튼 역시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우울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마이클은 불길함에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며칠 뒤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알람시계는 5시 55분을 가리켰다. 바튼의 기상 시간인 6시가 다가올수록 마이클은 초조해졌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지만 왠지 불길했다.

전날 바튼 매클레인이 수면제를 먹기 전에 망설이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어제 바튼이 수면제 먹을 때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마이클은 모니터를 바라보던 직원에게 물었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긴 했습니다. 자살충동 아니었을까요?"


"자살 충동이라... 그렇다면 좋은 징조인데 느낌이 이상합니다."


어제 바튼은 손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쏟았다가 하나만 남기고 모두 집어넣었다.

단순 해프닝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 바튼은 이상했다.

마이클은 예전에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매클레인들을 보다 보면 가끔 오는 싸한 분위기, 문득 잊고 지냈던 그 사람이 떠오른다.

시계는 어느덧 5시 59분을 가리켰다.


"곧 바튼 매클레인이 기상할 것입니다. 모두 준비하시고, 마리?"


5번 모니터 속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믹서기를 작동시켰다. 곧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알림이 울렸다.


"바튼 매클레인 자살 시나리오 시작합니다."


바튼 매클레인이 인상을 쓰고 하품을 하더니, 이불을 거칠게 걷으며 일어났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 바튼 매클레인의 루틴이 아니었다.

가끔은 로봇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루틴을 지키던 바튼이 평상시와 달랐다.

바튼은 스트레칭도 생략하고 곧장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뭔가 이상합니다. 바튼의 행동이 예측 범위 밖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직원이 마이클을 보며 말했다.

마이클은 바튼이 눈을 떴을 때 그가 바튼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다.

그는 마이크를 전체로 돌리고 말했다.


"비상사태, 그는 바튼 매클레인이 아닙니다. 대응팀 바로 출동하세요."


"비상사태, 비상사태! 마리, 그는 이제 바튼 매클레인이 아닙니다"


문이 열리고, 긴급 신호를 받은 마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바튼 매클레인이 과일을 손질하기 위해 꺼내 놓았던 칼을 집어 들었다.

마리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매클레인은 칼을 높이 들었다.

그가 칼을 휘두르는 순간 대응팀이 도착해 매클레인에게 진정제를 쐈다.

매클레인이 휘두른 칼이 신체에 닿기 직전 바닥으로 떨어졌다.

매클레인도 그대로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대응팀, 매클레인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후우"


긴박했던 상황이 마무리되자 마이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셜리 매클레인이라니..."


직원이 마이클에게 물었다.


"셜리 매클레인이요? 그는 10년 전에 소멸된 인격 아닙니까?"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셜리가 돌아온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니라 그녀입니다."


"그녀요?"


"셜리는 자신이 여자라고 믿고 있는 인격이니까요"





5. 셜리 매클레인


마이클은 셜리를 마주한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당시 브루스의 나이는 17살.

마이클은 브루스가 13살일 때부터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를 관리한 지 4년 차 되던 해에 셜리의 인격이 나타났다.

그날은 예정대로 였다면 다니엘의 인격이 나와야 했다. 그래서 매클레인의 몸을 성당 보육원 세트장에 있는 다니엘의 방에 세팅해 두었다.

연기자들도 한스 신부, 안나 수녀 등 다니엘 관련 인물들로 투입되었다.

다니엘의 인격을 다루는 건 어렵지는 않았다. 장난기가 있긴 했지만 제임스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은 아니어서 않아 변수가 적었다.

게다가 신앙심이 있어 성당 내부의 규율 곧잘 따랐기에 마이클에게는 관리하기 쉬운 인격 중 하나였다.

모니터 속 다니엘이 눈을 떴다.


"다니엘 기상했습니다."


다니엘의 기상 시간은 그래도 규칙적인 편이었다.

물론 로봇 수준으로 정확하게 일어나는 바튼에 비하면 불규칙했지만 성당 보육원에서는 일과가 있기에 대체로 예상 가능 범위였다.

그때까지는 모니터를 바라보던 모두가 다니엘이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일어나자마자 혼란스럽다는 듯 머리를 더듬었다.

그의 눈빛이 이상했다.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에 있던 거울을 바라봤다.

마이클은 처음에 다니엘이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지만 거울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그가 다니엘의 인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인격이 나올 확률이 몇 퍼센트라고 했었죠?"


"1 퍼센트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인격이 나타난 거 같습니다."


모니터 속 다니엘이 바지를 내리고는 부풀어 오른 자신의 아랫도리를 경멸하듯 바라봤다.

그는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마이클은 그가 패닉에 빠진 모습을 보고 안색이 바뀌었다.


"대응팀 투입하겠습니다. 서두르세요!!"


대응팀은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거나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투입되는 인력이었다.

마이클은 직감적으로 새로운 인격이 그동안의 인격과는 다르게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는 걸 느꼈다.

순간 모니터에 있던 매클레인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미친 듯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대응팀 빨리!!!"


체격이 건장한 남자들이 다니엘이 있는 곳에 들이닥쳤다. 모니터 속 매클레인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대응팀에 맞서 그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매클레인을 완력으로 제압한 직원들은 그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진정제를 투여했다.

침대 밖으로 삐져나와 발버둥 치던 매클레인의 두 다리는 서서히 힘이 풀렸다.

대응팀은 기절한 매클레인을 구속하고 응급실로 데려갔다.


"1 퍼센트 확률로 굉장한 인격이 등장했네요"


새로운 인격을 마주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나타나자마자 자해를 하는 인격이라니, 마이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15살에 바튼 매클레인이 나온 이후 2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인격입니다."


"새로운 인격이라니, 플랜을 새로 짜야할 거 같습니다."


"일단 뇌파부터 분석해야 합니다."


새로운 인격의 등장에 직원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단 매클레인의 부상부터 치료하고, 그가 의식을 회복하기 전까지 어떻게 인격을 관리할지 방안을 마련해 봅시다."


상황을 정리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 마이클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서랍을 열어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 목록이라고 적혀있는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긴다.

첫 페이지에는 매클레인의 본래 인격인 브루스 매클레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특징과 생활습관 등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모두 넘기자, 다니엘의 이름이 나왔다.

브루스가 12살에 나타났다는 다니엘의 인격, 마이클이 브루스를 처음 맡았을 때는 브루스와 다니엘 두 개의 인격뿐이었다.

노트의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자 제임스의 이름이 보인다.

제임스는 브루스가 13살이 되었을 때 나타났다.

마이클이 브루스와의 유대가 깊지 않은 시점에 나타났고, 특징이나 생활습관은 대부분 음악과 관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15살에 나타난 바튼, 유난히 까다로운 그에 대한 정보가 노트에 빼곡히 적혀 있다.

페이지를 모두 넘기자, 뒤쪽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진다.

마이클은 페이지 상단에 매클레인이라고 적었다.

앞쪽은 새로운 이름을 위해 비워두었다.

이것으로 다섯 번째다.

이쯤 되니 이번에 새로 나온 매클레인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자신이 부모에게 버려져 성당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니엘,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제임스,

뼛속까지 엘리트주의인 바튼까지, 매클레인의 인격들은 같은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마이클은 그들의 생활과 가치관에 맞춰서 그들의 인생을 관리했다.

새로운 매클레인 역시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에 맞는 관리가 필요했다.

마이클은 새로운 인격에 대응하기 위한 전담 팀을 꾸렸다.

프로젝트 팀원들은 새로운 매클레인의 불안정한 상태에 맞춰 대응 방안을 마련했다.





"매클레인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매클레인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마이클은 의사 가운을 입고 의사로 위장했다.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 혼란스러울 때는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설정이 최고였다.

마이클은 매클레인이 있는 응급실로 갔다.

두 팔이 묶여있는 매클레인은 반쯤 풀린 눈으로 마이클을 바라봤다.


"부상 정도는 어떻습니까?"


마이클은 의료 담당에게 물었다.


"성기에 경미한 타박상이 있는데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경미한 타박상이면 금방 회복되겠군요."


"문제는 계속 자해를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매클레인이 자해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제임스나 다니엘의 경우 부주의한 행동으로 부상을 당한 적은 있었지만 어떤 매클레인도 자해를 하지는 않았었다.

마이클은 새로운 매클레인을 바라봤다.

전에 봐왔던 인격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다. 그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마이클은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떤 인격인지 알아야 그에 맞춰 관리를 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매클레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안녕하세요, 마이클입니다."


매클레인은 인사 대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혹시 이름이 뭔지 기억이 납니까?"


그는 눈을 몇 번 꿈뻑이더니 입을 열었다.


"셜리 매클레인"


"셜리? 이름이 예쁘네요. 누가 지어준 이름인가요?"


"저보고 셜리라고 그랬어요"


"누가요?"


"어떤 소녀가"


"소녀요?"


"예쁜 여자애가 저한테 셜리라고 그랬어요."


셜리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라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마이클은 그의 배경을 좀 더 알아내기 위해 좀 더 캐물었다.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저도 처음 봐서 잘 몰라요. 예쁘다는 점이랑 이름밖에"


"그 소녀 이름이 뭡니까?"


"엘렌이라고 했어요."


소녀의 이름을 말하는 셜리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셜리는 여기 오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떤 남자들이 와서 저를 잡아갔어요."


"그건 저희 병원의 직원들이었습니다. 강제로 끌고 온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셜리 씨가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이클은 셜리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이클은 셜리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 어쩔 줄 모르는 입꼬리, 꼼지락거리는 몸뚱이, 셜리는 마치 자신의 몸이 낯설기라도 한 듯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근데 왜 갑자기 자신의 몸을 때린 겁니까?"


"그건 몸이 갑자기 변해서 그랬어요."


"갑자기 변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몸은 여자가 아니잖아요."


셜리의 대답에 마이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동안 브루스의 인격들은 성별이 전부 남자였다.

근데 새로운 인격 셜리는 자신이 본래 여자의 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응할지 막막해졌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마이클은 셜리를 보며 말했다.


"사실 이곳은 정신 병원입니다. 그리고 셜리는 본인이 남자인데 여자라고 믿고 계십니다."


마이클의 말에 셜리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사실 정신병원이라는 설정은 회의에서 추천된 내용이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새로운 매클레인을 관리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설정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 몸은 여자 몸이어야 한다구요"


"아닙니다. 셜리는 분명히 남자고, 여자라고 믿는 거뿐입니다. 당신에게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여자한테 남자라고 하는 당신이 더욱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요?"


셜리는 자신을 철저하게 여자라고 믿었다.

마이클은 셜리와 대화를 더 나눴지만 그에 대해서 많은 걸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여자였다는 것 외에 자신의 가족이라던가 배경이라던가 자신과 관련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결국 마이클이 알아낸 건 셜리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지어준 엘렌이라는 소녀 그리고 그의 몸이 여자였다는 사실 뿐이었다.


"근데 이건 언제 풀어주나요?"


구속이 답답했던 셜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한 차례 대화도 끝났겠다.

조금은 진정된 듯한 셜리의 부탁에 구속을 풀어줬다.

셜리는 풀어주자마자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머리칼부터 얼굴, 가슴, 배를 지나 하반신을 더듬던 그의 손이 멈춘다.


"말도 안 돼"


"뭐가요?"


"왜 남자 몸인 거죠?"


"셜리, 진정해요."


자신의 몸을 만지던 셜리는 다시 이성을 잃더니 자해를 하려 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직원들이 달려들어 그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다.

진정된 줄 알았던 셜리의 폭주에 마이클은 당황했다.

셜리는 유독 자신의 신체, 정확히 말하면 성기를 훼손하려 했다.

직원들에게 제압된 셜리는 마이클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 몸은 여자야!! 여자라고!!"


눈을 크게 뜨고 발악하는 매클레인의 모습을 차마 바라보기 힘들었던 마이클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이클은 어쩔 수 없이 셜리를 다시 구속했다. 이것이 셜리와 마이클의 첫 만남이었다.





셜리 매클레인, 그는 역대 최고로 골치 아픈 인격이었다.

자신을 여자라고 믿고 성기를 훼손하려는 통제가 불가능한 인격.

셜리 매클레인의 인격은 며칠 동안 지속되다가 다른 인격으로 바뀌었다.

마이클은 셜리 매클레인의 인격이 나타난 동안 그의 뇌파를 분석했다.

하지만 그의 뇌파는 너무나 불안정해 예측이 불가능했다.

브루스, 다니엘, 제임스, 바튼의 인격은 고유의 뇌파가 존재해 출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상정할 수 있었는데 셜리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다른 인격들의 뇌파를 넘나드는 뇌파를 가지고 있어, 언제 그의 인격이 나타날지 아무도 몰랐다.

덕분에 마이클은 셜리 전담 대응팀을 꾸려야 했다.

갑자기 셜리가 나타나서 자해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상태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도 브루스 매클레인이 19살이 될 때까지 셜리의 인격은 나타나지 않았다.

본래의 인격인 브루스를 비롯해 다니엘, 제임스, 바튼의 인격이 번갈아가며 나타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잠자코 있던 셜리 매클레인은 2년 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셜리와 마이클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셜리는 두 번째 만남에서 마이클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날은 마이클이 제임스에게 레슨을 해주는 날이었다.


"제임스 매클레인이 잠들었습니다."


상황실에 있는 팀원의 보고대로 제임스는 기타를 멘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마이클은 그의 곁에 앉아 잠들어 있는 제임스를 바라봤다.

기타를 꼭 끌어안고 자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거 같아 흐뭇했다.

마이클 본인도 음악인을 꿈꾸었던 시기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친형과 함께 음악을 했었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음악을 포기했다. 그

래서 였는지 마이클은 제임스가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고 반가워했다.

비록 브루스의 인격 중 하나였지만 마이클은 제임스를 진심으로 아끼고 응원했다.

그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하던 제임스의 기타 선생님 역할을 자처했다.

직접 그의 스승이 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그쯤 제임스는 작곡에 푹 빠져 있었다. 전날도 작곡을 하느라 밤을 새웠다.

음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멜로디를 만드는 재미에 빠져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정작 마이클에게 레슨을 받는 시간에는 잠이 들어버렸다.

물론 어젯밤 상황을 지켜봤던 마이클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편히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흐으음"


잠들어 있던 제임스가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그는 기지개를 활짝 켜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기타 끈을 거칠게 풀었다.

기타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기타를 끔찍이 생각하는 제임스라면 저렇게 기타를 놓을 리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매클레인은 마이클을 바라봤다.

마이클은 공기가 변했음을 감지했다.


"대응팀 준비해주세요"


마이클은 매클레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상황실에 연락했다.

매클레인은 눈을 부릅뜨고 마이클을 바라봤다.

그는 마이클을 향해 섬뜩한 미소를 보였다.


"직업이 다양하시네요?"


"네?"


"정신과 의사에 기타 선생님 그리고 집사까지?"


"당신은..."


마이클은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오랜만이에요. 셜리 매클레인입니다."


셜리는 찡긋 눈웃음을 보였다. 갑작스러운 셜리의 등장에 마이클은 몸이 굳어버렸다.

어떤 말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어설픈 거짓말로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이클은 셜리가 자해를 할지도 모르니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순간 셜리가 악보를 그리던 펜을 빠르게 집어 들었다.

마이클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을 잡아 자해하는 걸 막았다.

셜리는 다급해 보이는 마이클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정색을 하며 마이클을 응시한다.


"귀한 도련님 몸에 흠집을 내면 안 되겠죠?"


마이클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면에 셜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여유를 보였다.

셜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알아요. 이 몸에 주인이 따로 있는 걸"


마이클은 셜리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당황한 마이클은 모르는 척 둘러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모른 척하지 마요. 이 몸은 여러 매클레인들이 돌아가면서 사용하잖아요. 이름도 나열할 수 있어요. 제임스, 다니엘, 바튼, 브루스 거기에 셜리까지?"


셜리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매클레인들을 세었다.

그는 브루스 매클레인에 존재하는 모든 인격을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셜리에게 더 이상 숨기는 건 무의미했다.


"대응팀 들어오세요."


레슨실의 문이 열리고 대응팀이 들어왔다.


"또 묶어 놓을 건가요?"


"물론입니다. 당신은 너무 위험하니까요"


"매클레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도 되겠어요?"


"그 유일한 후계자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게 도움이 될까요?"


셜리는 구속당하면서도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는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묶였다.

그만큼 셜리는 위험했다.

충동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한 그의 행동을 막으려면 이렇게 묶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은 그를 구속해 놓은 상태로 격리시켰다.

다른 인격을 관리하듯 풀어놓은 상태로 그를 관리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셜리는 자신이 다중인격 중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는데,

마이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

문가의 의견이 필요했다.

마이클은 브루스 매클레인이 처음으로 인격이 분리되었을 때 그를 상담했던 정신과 전문의 숀 박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마이클의 부름에 흔쾌히 와주었다.

마이클은 숀 박사에게 비밀리에 유지되던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 관리 세트장을 공개했다.

압도적인 스케일에 숀 박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클레인 가문에서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분리된 인격들을 하나하나 관리하다니 대단하군요."


"회장님의 뜻입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들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숀 박사는 무척 놀라워했다.

각기 다른 인격들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건 많은 자원이 들어가야 가능했다.

그리고 매클레인 가문은 돈과 인력이 충분하기에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

그렇게 매클레인 가문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후계자를 위해, 막대한 돈을 들이며 다중 인격들의 다중 인생을 철저히 관리했다.


"근데 저는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브루스 도련님의 몸에 새로운 인격이 나타났는데, 그는 자신이 다중 인격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마이클의 말에 숀은 크게 놀랐다.


"자신이 인격 중 하나라는 걸 인지하고 받아들였다고요?"


"그렇습니다."


"처음 보는 케이스입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흔히 다중 인격 장애라고 불리는 정신 질환을 겪는 환자들은 자신이 분리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분리된 인격이라고 알려주더라도 부정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정말 특이한 케이스군요."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셜리는 본인 이외의 인격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이외의 인격들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경우입니다. 제가 한 번 상담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걸 위해 모셔왔으니까요."


마이클은 셜리가 있는 방으로 숀을 데려갔다. 그리고 숀의 요청대로 그 둘만 남겨두었다.

물론 방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감시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숀 박사입니다."


"오랜만이라니,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숀의 인사에 셜리는 까칠하게 반응했다.


"브루스 매클레인이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12살 때 봤으니 벌써 7년 전이군요."


"그건 브루스고 저는 셜리입니다. 그러니까 초면인 거죠?"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당신을 상담하러 온 숀 박사입니다."


"셜리 매클레인입니다."


"원래는 편안한 상태로 상담을 해야 하는데, 셜리는 상당히 불편하 상태군요."


숀은 묶여있는 셜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럼 풀어주면 되잖아요"


"자해를 하셔서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자해라기보다는 여자 몸에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려고 한 거뿐입니다."


"그 불필요한 부분이 혹시?"


숀의 물음에 셜리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봤다.


"여기? 어딘지 알죠?"


"듣던 대로 본인이 여자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자여야 합니다."


셜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유독 병적으로 자신의 신체적 성별에 집착을 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이 얼굴 보이세요? 이 피부랑 눈, 코, 입을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셜리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브루스 매클레인은 그의 어머니, 안나 매클레인을 꼭 빼닮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깨끗한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빼어났다.


"동의합니다. 굉장히 아름다우십니다."


숀은 웃으며 셜리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공감대를 형성하려 셜리의 말에 동조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죠? 이 몸은 여자여야 해요. 여자가 돼서 예쁘게 꾸미면 그 소녀가 다시 돌아와 줄 거예요"


소녀라는 말에 모니터를 바라보던 마이클의 미간이 좁혀진다.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셜리라는 이름도 엘렌이라는 소녀가 지어주었다고 했었다.


"그 소녀가 누굽니까?"


"엘렌,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애를 위해서라면 제 몸과 마음 모든 걸 바칠 수 있어요."


셜리는 뭔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정상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아뇨,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말해요."


"저도 엘렌이라는 소녀를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저도 못 만나고 있는데요?"


"당신도 만나지 못하는 겁니까?"


"이렇게 묶여있는데 어떻게 만나요?"


"그것도 그렇네요. 근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만난 겁니까?"


"누굴 만나요?"


"다니엘, 제임스, 바튼, 브루스"


숀이 매클레인들을 나열하자 셜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이 몸을 차지하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들의 존재를 알고 계신 겁니까? 실제로 만난 적도 없는데"


숀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물어봤다.

숀의 대화 스킬에 셜리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숨어서 지켜봤어요. 제임스가 기타를 치는 것도, 다니엘이 기도를 드리는 것도, 바튼이 공부를 하는 것도, 브루스가 질질 짜고 있는 것까지 전부 숨어서 지켜봤어요."


"왜 숨어서 지켜본 겁니까?"


"내 몸이 아니니까요, 그들이 몸을 차지했을 때는 조용히 있어야죠. 들키면 곤란하니까요. 그리고 숨어서 지켜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셜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게 재밌습니까?"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잖아요. 내일 당장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다음 날 먹으려고 간식을 아껴두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도 다음으로 미뤄요. 언제 몸을 빼앗길지 모르는데 자신의 연인한테 사랑한다는 표현도 못해요. 내 앞에 엘렌이 있었다면 나는 당장 사랑한다고 말했을 거예요. 가끔은 그런 그들이 불쌍해요."


"본인도 같은 처지 아닙니까?"


"같은 처지는 맞죠, 근데 그들과는 달라요."


셜리는 다른 인격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었다.


"뭐가 다른 겁니까? 똑같이 분리된 인격 아닙니까?"


"저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잖아요. 나는 내 몸이 없다는 걸 알아요. 지금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내일 당장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어요."


셜리는 약간 울먹거리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그들은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요. 자신들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짧은지 몰라요. 그래서 이 몸에 대한 간절함이 없어요. 나는 내일 당장 내 존재가 사라질까 봐 불안함에 떨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흥분한 셜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군요"


모니터로 상황을 지켜보던 마이클은 서늘한 기운에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가 바라본 셜리의 눈에는 공포심과 광기가 동시에 서려있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과 스스로를 끔찍이 아끼는 두 감정이 충돌해 광적인 집착을 만들어 냈다.

마이클은 셜리와 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위험한 존재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싫어요. 겨우 몸을 차지했는데 이렇게 묶여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풀어줘요. 이 순간만이라도 나로 살고 싶으니까"


셜리는 눈썹을 들썩이며 숀을 설득했다. 하지만 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됩니다."


"풀어줘요"


"안 됩니다."


"풀어주라고!!!"


셜리는 소리를 지르며 분노했다.

숀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많이 흥분하셔서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겠군요.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셜리는 돌아서 방을 나가는 숀의 뒤통수에 대고 입에 담기 힘든 심한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





마이클은 셜리와 상담을 끝내고 나온 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셜리 매클레인이 다른 인격들처럼 관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숀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음에 대답했다.


"무리입니다. 자신이 분리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데다가 다른 인격들을 숨어서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다른 인격이 나타날 때도 셜리는 늘 존재하고 있던 겁니다. 그는 매클레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셜리가 나타난 게 몇 번째입니까?"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두 번째입니다. 브루스 매클레인이 17살 때 처음 나타난 이후 2년 만에 나타난 겁니다."


"다른 인격들에 비해서 나타나는 횟수가 적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몸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합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인격들에 대한 적개심까지 가지고 있어 매우 위험합니다."


"어떻게 위험하다는 겁니까?"


"셜리는 매클레인의 몸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본래 인격이 분리된 인격에 의해 밀려난 사례는 의외로 꽤 있습니다."


"최악이군요. 막을 방법이 없을까요?"


"셜리 매클레인의 인격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격을 제거하는 게 가능합니까?"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효과가 검증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인격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약물을 투입해 가사 상태로 빠뜨리는 방법인데 실제로 치료가 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준비는 저희 쪽에서 해두겠습니다."


마이클은 다급해졌다.

셜리 매클레인은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브루스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브루스의 몸에 존재하는 모든 인격들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마이클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셜리가 매클레인의 몸을 온전히 차지한다고 생각하자 마이클은 소름이 끼쳤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을 확인한다는 겁니까?"


"저는 이쪽 일을 하면서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상담해 봤습니다. 근데 셜리는 그들과 조금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다른 양상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셜리는 본인이 여자라고 주장하지만 성 정체성은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왜 여성의 몸을 원할까요? 자해까지 하면서"


"그저 신체만 여성이길 바라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숀 박사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했지만 소름 끼치는 내용이었다.

정체성이 남자임에도 여자가 되려고 하다니.

셜리 매클레인은 여러모로 께름칙했다.





숀은 셜리와 면담을 하며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숀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셜리의 목적과 더불어 그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해 줬다.

마이클은 준비를 서둘렀다. 셜리의 인격이 숨어버리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빠르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마이클은 우선 회장님께 동의를 구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신체를 가사 상태로 빠뜨려야 하는 사안이었기에 회장님의 동의가 필요했다.


"브루스의 몸을 가사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마이클, 브루스가 마지막 남은 매클레인 가문의 후계자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마이클의 설명을 듣던 맬컴 회장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자신의 하나 남은 자식을 가사 상태로 빠뜨린다니, 어떤 부모도 흔쾌히 받아드릴 수 없었다.


"숀 박사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고, 투입될 약물은 이미 안전성이 검증되었습니다. 브루스 도련님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실제로 시행된 사례를 보더라도 후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경우는 없었습니다."


마이클은 약물의 안전성을 언급하며 회장을 설득했다.


"그 정도의 리스크를 걸 정도로 새로운 인격이 위험한 겐가?"


"어떤 인격보다도 위험합니다."


"자네가 관리를 하면 되지 않은가?"


"관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는 자신이 분리된 인격임을 인지하고 있고 무엇보다 자해를 시도합니다."


"자해?"


"네, 그는 자신의 성기를 훼손하려 몇 번이나 시도했습니다."


"성기를?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그는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인격입니다."


마이클의 말에 맬컴 회장은 망치에 두드려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네, 그 생각이 행동까지 이어져 상당히 위험합니다."


"알겠네, 허락하겠네. 반드시 그 인격을 제거하게나"


매클레인 회장은 셜리의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고 끝내 허락했다.

마이클은 회장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사 상태로 유도할 수 있는 약을 구했다.

이제 셜리만 제거하면 끝이었다.

다행히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셜리의 인격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마이클은 의료진을 대동해서 셜리가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왜 온 거지?"


셜리는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마이클을 노려봤다.

하지만 마이클은 아무렇지 않은 침착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늘 셜리 매클레인을 제거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오늘 당신을 죽게 만드는 약물을 투입할 겁니다."


"미쳤어? 매클레인 가문의 후계자한테?"


"실제로 죽는 건 아닙니다. 가사 상태에 빠질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인격은 죽습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하지?"


"약물 투입 준비해주세요."


마이클은 아랑곳하지 않고 셜리의 인격을 제거할 준비를 했다.

의료진이 주사를 들고 셜리에게 향했다.

셜리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마이클을 보며 소리쳤다.


"선생님?! 저 제임스예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는 죽으면 안 돼요. 아직 음악도 못 만들었다고요!!"


마이클은 싸늘한 얼굴로 셜리를 노려봤다.


"제임스 흉내는 그만 두시죠."


마이클의 반응에 셜리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나도 내 몸을 갖고 싶어!! 나도 보통 사람처럼 내 인생을 살고 싶다고!!"


의료진은 셜리의 팔에 주사를 꽂았다. 주사 바늘이 들어가자 셜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안 돼!!!"


"다 끝났습니다."


약물 투입이 끝나자 셜리는 체념한 듯 꺼져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내 삶은 어디에 있을까? 엘렌이 보고 싶어"


곧 셜리는 눈이 뒤집어지더니 의식을 잃었다.

매클레인의 체온이 내려가고 심장박동이 현저히 느려졌다.


"매클레인의 신체가 가사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소생 준비해주세요."


의료진은 약물을 투입하고 제세동기를 이용해 심장박동을 인위적으로 올렸다.

체온이 올라가고 느려졌던 심장 박동이 점차 정상 수치로 회복되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매클레인이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을 때 셜리만 아니면 성공이었다.

마이클은 초조한 마음으로 매클레인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매클레인의 의식이 돌아왔다.

매클레인은 눈을 뜨고 마이클을 바라봤다.


"여기가 어디죠?"


매클레인은 건조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마이클?"


"브루스 도련님"


브루스 매클레인이 깨어났다.





셜리를 제거하는 시도는 성공이었다.

그렇게 매클레인이 19살 되던 해에 셜리 매클레인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줄 알았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셜리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이클의 노트에 적혀있던 셜리 매클레인이라는 이름에도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셜리의 인격이 제거된 이후, 어느 순간부터 브루스의 인격이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다.

브루스의 인격은 다른 인격들에 묻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마이클은 그 사건에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

무조건 브루스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매클레인 회장이 죽음을 앞둔 상황,

마이클은 매클레인 가문의 사라진 후계자,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을 되찾기 위해 다른 인격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계획대로 다니엘의 인격, 제임스의 인격까지 죽게 만들었다. 바튼까지 제거되면 브루스의 인격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갑자기 소멸된 줄 알았던 셜리의 인격이 나타나 버렸다.





충격적인 매클레인의 아침이었다.

모니터에는 칼을 휘두르려다 진정제에 맞고 쓰러진 셜리 매클레인이 보였다.

현장에 있던 마리는 당황한 나머지 울고 있었다.

대응팀은 쓰러져 있는 셜리에게서 흉기를 빼앗고, 구속했다.

시간이 지나고 기절해 있었던 매클레인이 일어났다.

마이클의 예상대로 셜리 매클레인이었다.

10년 만의 재회, 의식이 돌아온 셜리는 늘 그랬듯 묶인 채 마이클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많이 늙으셨네요."


셜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마이클을 훑었다.


"어떻게 다시 나온 겁니까?"


"나도 모르겠는데요? 눈을 떠보니 이 몸이네요.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서 순서가 나한테 왔나 봐요."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니..."


"이 몸에 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셜리는 눈을 크게 뜨고 마이클을 바라봤다.


"그 몸은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입니다."


마이클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다니엘도 제임스도 바튼도 브루스도 전부 죽고 싶어 했는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몸을 갖는 게 좋지 않나요?"


"당신을 위해 그들이 목숨을 끊은 게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건데요?"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을 찾아주기 위한 거였습니다."


"브루스를 위해서? 진짜요? 원래 원하던 건 그게 아니었잖아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당신과 매클레인 회장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셜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몸은 원래 브루스 매클레인의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 몸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뿐이고요."


"진짜로 브루스가 이 몸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요? 아닐 수도 있잖아요."


셜리의 질문에 마이클의 동공이 흔들렸다.

브루스 매클레인이 본체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 브루스를 마주했을 때부터 매클레인의 본체는 브루스였다.


"브루스가 그 몸의 주인입니다. 어서 브루스에게 몸을 돌려줘요."


"왜 하필 브루스 매클레인이에요? 그는 살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자신의 삶에 의욕이 없다니까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인간에게 이 몸을 주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다른 인격은 어때요? 당신은 제임스를 아꼈잖아요. 난 다 알고 있어요."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 제임스가 행복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겁니까?"


"저 역시 제임스가 음악으로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임스의 인생은 제가 그를 위해 만들어 놓은 가짜니까요."


"다니엘도?"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인생은 모두 제가 계획한 가짜입니다."


"바튼은? 회장님이 원하시지 않았나요? 회장님의 계획은 브루스가 아닌 바튼을 매클레인의 몸에 남기는 거 아니었나요?"


셜리의 말에 마이클이 움찔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이제 와서 브루스를 찾는다니, 브루스를 가장 먼저 버린 사람들은 당신이잖아요."


셜리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맬컴 매클레인은 브루스 매클레인 본래 인격이 아닌 바튼 매클레인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었고 마이클은 회장의 명령을 따랐다.





10년 전, 셜리의 인격을 제거하고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이 돌아왔을 때 마이클은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곧 브루스의 다중 인격을 고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셜리의 인격을 제거한 후, 한동안 브루스 매클레인 본래의 인격이 유지되었다.

마이클은 이 소식을 맬컴 회장에게 전했다.

소식을 들은 맬컴은 오랜만에 브루스가 있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맬컴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잃은 후 가족들과 지내던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었다.

마이클은 그런 회장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후계자로 점찍었던 장남의 죽음이 가장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덕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아들 브루스에게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집에 함께 있게 된 부자였지만 단 한 차례의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다.

맬컴에게 브루스는 자신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후계자이자, 죽은 장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아들이었다.

맬컴은 정신 질환까지 있어 인격이 수시로 바뀌는 자신의 아들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맬컴은 기업을 운영하느라 바빴고, 브루스는 인격이 계속 바뀌어 두 부자가 서로 마주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맬컴은 브루스에 대한 관리를 전적으로 마이클에게 맡겨두었다.

커다란 저택에서 아버지에게 외면당한 브루스 매클레인이 의지할 곳은 집사 마이클뿐이었다.





마이클은 맬컴 회장에게 브루스의 인격 관리에 대한 경과를 보고했다.


"그 불안정한 인격은 완전히 제거된 것인가?"


"지켜봐야 알겠지만 확실히 제거된 것으로 보인답니다. 브루스 도련님의 인격도 안정적으로 유지 중입니다."


"그럼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이겠군."


"맞습니다. 브루스 도련님을 제외한 다른 인격들을 제거하면 더 이상 인격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할 줄 알았던 맬컴 회장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맬컴 회장은 시가를 꺼내 물며 마이클에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매클레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브루스는 어떤가?"


"아직은 부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잘 해내실 거라고 봅니다."


"내 앞이라고 해서 애써 포장할 필요는 없네, 나도 잘 알아. 브루스는 부적격자야. 그런 녀석이 후계자가 되었다가는 우리 가문은 망해버릴 거야"


자신의 아들에 대한 맬컴의 평가는 가차 없었다.

원래 후계자로 삼았던 맬컴의 장남이 너무나 뛰어난 인물이라 브루스는 그 기대에 못 미쳤다.

맬컴의 장남은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 야망이 넘쳤고, 빠지는 부분 없이 완벽한 아들이었다.

맬컴에게 큰 자랑거리였던 그가 비행기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는 브루스가 유일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겁도 많아 매사에 포기가 빠른 나약하고, 의욕 없는 아들이었다.

그런 브루스가 맬컴 회장을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했다.


"다중 인격을 치료하면 괜찮아지지 않겠습니까?"


마이클은 에둘러 말하며 브루스를 변호했다.


"아니, 녀석은 태어났을 때부터 불량품이었어. 그래서 말인데 바튼 매클레인이라는 인격이 괜찮아 보이던데"


"네?"


"브루스와는 다르게 명석하고, 어떻게 살아야 성공하는지 알고 있어. 브루스에게서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야망도 있고 말이야. 여러모로 비교해서 브루스보다 훨씬 뛰어나지"


마이클은 맬컴 회장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맬컴은 브루스 매클레인이 아닌 바튼 매클레인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래도 회장님..."


"이쯤 말했으면 자네도 이해했겠지? 그러니 브루스를 치료하는 건 미뤄두게나.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혹시 누가 아나? 바튼보다 뛰어난 인격이 튀어나올지"


"알겠습니다."





맬컴 회장의 명령으로 브루스 매클레인에게서 분리된 인격들을 제거하는 작업은 미뤄지게 되었다.

셜리의 인격을 제거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다니엘, 제임스, 바튼의 인격이 번갈아 나타났다.

하지만 브루스의 인격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맬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도 브루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맬컴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의 아들 브루스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다니엘이 브루스를 대신해 죽어가는 맬컴 회장을 위한 기도를 드렸을 뿐이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맬컴 회장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사람은 왜 죽기 전에야 깨달음을 얻는지, 막대한 부와 명예도 맬컴 회장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는 가족을 잃고, 하나 남은 자신의 아들을 버린 불행한 남자로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마이클에게 엄청난 부담을 떠넘겼다.

마이클은 어떤 매클레인을 남겨둘지 선택해야 했다.

그 시점에 남아 있는 매클레인은 다니엘, 제임스, 바튼 그리고 잠적해버린 브루스였다.

그리고 마이클은 자신이 원래 생각했던 대로 브루스에게 인생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다니엘과 제임스 그리고 바튼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상황을 설계했다.

다니엘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어 죽이고, 제임스에게 꿈과 희망을 빼앗고, 바튼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그들이 죽으면 묻혀있던 브루스가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10년 만에 나타난 셜리 매클레인이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걸 풀어줘, 유일하게 남은 매클레인의 후계자를 평생 묶어둘 순 없잖아?"


마이클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버렸다. 그는 브루스에게 인생을 돌려주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형제, 자매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인생까지 빼앗긴 그 소년에게 삶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마이클은 온몸이 구속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셜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셜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루스에게 몸을 돌려주십시오."


그의 행동에 셜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거 알아? 나는 이 몸을 차지할 때마다 묶여있던 거? 난 내 삶을 제대로 즐긴 적도 없어. 다니엘처럼 의지할 사람이 있던 것도, 제임스처럼 미치도록 무언가에 열광한 적도, 바튼처럼 성실히 살아본 적도 없다고!! 내 삶을 살고 싶어, 단 하루라도 좋으니"


셜리는 절규했다. 그만큼 자유로운 삶은 그에게 있어 꿈과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셜리가 절망에 가장 가까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기에 더욱 절망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진짜가 아니었으니까.


"브루스 도련님의 몸을 돌려주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는 알아?"


"어떤 삶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고민을 하던 셜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줘. 나도 내 삶을 이렇게 묶여만 있는 기억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못했던 모든 걸 다 해보고 싶어"


"무엇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자해를 멈추고, 성별을 바꾸는 것만 아니면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걸 풀어줘, 그리고 옷부터 사러 가자"





마이클은 그를 데리고 쇼핑을 나섰고, 당연히 셜리는 여성복을 원했다.

화려한 드레스와 원피스 등 셜리는 다양한 옷들을 직접 입어 보았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체구가 작은 편이라 여성복을 입는 것에 큰 무리가 없었다.

전체를 대여한 백화점 안에서 셜리는 마음껏 쇼핑했다.

자신이 고른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심취했다.

어린 소녀처럼 웃는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셜리가 원한 건 의류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발을 고르고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아름다운 드레스에 긴 머리에 메이크업까지 받은 셜리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원한 건 자신의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었다.

마이클은 셜리의 부탁대로 유명한 스튜디오를 대관하고, 전문 포토그래퍼까지 고용했다.

그리고 셜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첫 번째 사진이 찍히고, 셜리는 결과물을 확인했다.

사진 속 셜리 매클레인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원하는 셜리의 의지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여자의 모습으로 찍힌 사진을 바라보던 셜리는 울음을 삼켰다.

이윽고 셜리의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는 사진을 바라보며 오열했다.

스튜디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그는 펑펑 울었다.

그가 울음을 토해내며 숨을 내뱉을 때마다 삶에 대한 미련이 흩어진다.

한참을 울던 셜리는 눈물에 번진 화장을 고치고 다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사둔 옷과 소품들이 아직도 많이 남은 상태였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남기기 위해, 이 세상에 셜리 매클레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이건 정말 예술이군요."


포토 그래퍼는 카메라 속에 담긴 셜리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는 사진이 나왔다.

사진에는 매끄러운 어깨를 드러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셜리가 고혹적인 눈빛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작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소원을 성취한 셜리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그렇게 셜리 매클레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마이클의 걱정과 반대로 셜리는 평범한 일상을 즐겼다.

소리를 지르거나 자해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풍경을 보러 여행을 다니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았다.





"즐거운 인생이었어, 더 욕심나기 전에 여기까지만 살게"


"엘렌을 못 만났는데 괜찮습니까?"


"어차피 엘렌을 못 만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셜리는 스스로 떠난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움보다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떠나는 방법은 다른 매클레인들과 동일했다.

셜리는 자신 앞에 놓인 약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약을 먹으면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걸 먹고도 내가 다시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셜리의 농담 섞인 질문에 마이클은 웃어버렸다.


"또 쇼핑을 하고 사진을 찍어야겠죠?"


셜리는 마이클에게 밀봉된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진짜 매클레인을 찾고 싶으면 매클레인에게 이 봉투를 보여줘요."


"진짜 매클레인?"


마이클의 머리에 셜리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브루스 매클레인이 본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진짜 매클레인이요."


봉투를 거네 받은 마이클이 셜리에게 물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의 인생, 나의 전부, 나의 사랑"


셜리는 미소를 짓더니 떨리는 손으로 약을 집었다.

그는 긴장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이클?"


"네"


"매클레인이 어떻게 되든 당신 삶을 살아요"


셜리는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약을 한 움큼 집어삼켰다.

그게 셜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셜리가 떠나고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은 며칠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매클레인의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매클레인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매클레인이 눈을 떴다. 그는 힘겹게 마른 입술을 뗐다.


"여기가 어디죠?"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나요?"


"브루스 도련님?"


"마이클, 많이 늙었네요."


브루스 매클레인이 깨어났다.





6. 브루스 매클레인


오랜만에 깨어난 브루스 매클레인은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봤다.

그는 10년 만에 바라본 자신의 얼굴을 굉장히 낯설어했다.

반가움, 신기함, 그리움, 슬픔 많은 많은 감정이 뒤섞여 거울 속 매클레인의 얼굴을 채운다. 브

루스의 인격이 사라졌던 10년, 그에게 10년이라는 세월은 공백뿐이었다.


"도련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마이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브루스를 바라봤다.

그가 깨어날 때 패닉 상태에 빠질 경우를 대비해 응급팀까지 준비했지만 의외로 브루스는 덤덤했다.

오히려 그런 브루스의 침착함이 마이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가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길 바랐다.


"몸은 괜찮은데 너무 어색해요. 제 몸 같지가 않아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요."


"10년이 흘렀습니다."


"어제 저는 19살이었어요."


"브루스 도련님께선 오랜 시간 동안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대답을 들은 브루스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근데 왜 제가 다시 깨어난 겁니까?"


"브루스 님을 되찾기 위해 다른 인격들을 전부 제거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제가 여기 있냐는 겁니다."


브루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건 바튼 매클레인 아니었나요?"


브루스가 바튼 매클레인 이야기를 꺼내자 마이클은 멈칫했다. 마이클은 브루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바튼 매클레인은 제거되었습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마이클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는 후계자로 부적격하니까 바튼의 인격을 남기자고 하셨잖아요, 저에게는 불과 며칠 전 있었던 일입니다."


"듣고 계셨던 겁니까?"


"저를 죽인 건 아버지와 당신입니다."


마이클은 그제야 셜리가 어떻게 그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셜리는 브루스 매클레인 안에서 함께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맬컴 회장이 브루스보다 바튼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브루스는 그날 오랜만에 집에 온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아버지의 서재로 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우연히 그들이 나눈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자신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다른 인격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치료를 미루라는 아버지의 말에 브루스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것은 브루스의 내면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부적격한 아들, 정신 질환으로 분리된 인격보다 못난 인간, 시간이 흘렀어도 브루스는 아버지에게 불량품이었다.


"브루스 도련님..."


브루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그날 나는 죽었습니다. 근데 왜, 도대체 왜 불량품인 제가 남은 겁니까? 아버지가 나를 선택하셨을 리는 없는데"


"회장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하하, 그래서 불량품인 제가 선택된 건가요? 전 제 의지대로 살아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 덕분에 몸을 되찾은 거군요."


브루스는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맬컴 회장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눈을 뜬 건 자신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가 살아있을 이유조차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회장님이 선택한 건 브루스 도련님이었습니다."


브루스에게 마이클의 말은 전부 변명으로 들렸다.


"제가 아니라 후계자를 찾으신 거겠죠. 그 잘난 매클레인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니까"


"그 몸은 이제 온전히 브루스 도련님의 몸입니다. 다른 인격들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러니 도련님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됩니다."


"전 제 인생을 살 줄 모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며칠이 지나 있고, 길게는 몇 달 아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통째로 날아갔습니다. 나한테 내일은 당연한 게 아니예요. 단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길 바랐습니다."


브루스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는 그간 응축된 감정을 전부 발산하듯 소리 내 울었다.


"도련님..."


마이클이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브루스 도련님이 행복하길 바란 거였는데 그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셜리의 말이 떠올랐다.


-다니엘도 제임스도 바튼도 브루스도 전부 죽고 싶어 했는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몸을 갖는 게 좋지 않나요?


브루스 매클레인과 셜리 매클레인 둘 다 자신의 인격이 바뀐다는 걸 알았다.

그들의 삶에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둘의 차이점은 브루스는 본체고, 셜리는 본체가 아니라는 점.

두 인격은 내일 당장 자신의 인격이 바뀔지 모르는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그 막연한 공포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몸의 주인인 브루스는 죽음을 원했고, 분리된 인격인 셜리는 삶을 원했다.

셜리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격이 죽고 싶어 했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인격들이 죽음을 바란 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브루스를 제외한 다른 매클레인들이 자살을 선택한 건 전부 마이클의 설계 때문이었다.

만약 마이클이 그들을 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은 신을 섬기며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제임스는 음반이 잘 되지 않더라도 음악을 즐기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바튼 역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람이니까.

마이클이 그들의 삶이 불행할 거라고 재단했지만 그건 본인이 매클레인이 아닌 이상 아무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교리대로 살더라도 하루하루 웃을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해 배가 조금 고프더라도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인생에 좌절을 겪더라도 언제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니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작은 돌부리도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고, 별 거 아닌 상황이 시련이 될 수 있다.

비슷한 삶 속에서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일어난다.

삶 밖에 있는 누군가가 그들이 행복 혹은 불행할 거라고 판단하는 건 오만이다.

다니엘, 제임스, 바튼 모두 마이클의 설계가 아니었다면 행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루스 매클레인은 달랐다.

마이클은 브루스를 위한 어떠한 자살 시나리오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루스는 삶에 대한 의욕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좋은 배경을 가진 그가 스스로 살기를 거부했던 것이었다.

10년 동안 그가 나타나지 않은 건 아버지와 마이클에게 버림받은 그가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10년 만에 깨어난 브루스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포기하려 했다.

브루스가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킨 그날, 마이클은 죽어가는 브루스 매클레인을 품에 안았다.

저택의 커다란 욕조에서 손목을 긋고 몸을 담근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욕조에는 붉은 피가 고여있었고, 브루스는 욕조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조기에 발견되어 브루스의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없었다.

목숨이 조금 연장되었을 뿐,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브루스를 바꿀 수는 없었다.

병실에서 깨어난 브루스는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마이클에게 조용히 말했다.


"살고 싶지 않아요. 저도 그들처럼 사라지고 싶어요. 어쩌면 나는 진짜 매클레인이 아닐지도 몰라요"


브루스는 갈라져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브루스 도련님이 진짜 매클레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진짜란 말입니까?"


"저도 제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브루스는 흐느껴 울었다. 마이클은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답답했다.

분리된 그의 인격들처럼 관리를 해주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브루스의 삶을 가짜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문득 마이클의 머릿속에 셜리가 죽기 전에 건넨 봉투가 떠올랐다.


- 진짜 매클레인을 찾고 싶으면 매클레인에게 이 봉투를 보여줘요.


매클레인 가문의 집사로서 마지막 후계자를 지켜야 했다.

그날 마이클의 머릿속에 진짜 매클레인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마이클은 셜리에게 받았던 봉투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 보려다가 몇 번을 참았다.

모든 것은 진짜 매클레인을 위해서였다. 그

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고, 다음 날 셜리에게 받은 봉투를 브루스 매클레인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브루스는 반쯤 풀린 눈으로 봉투를 보며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그 봉투를 통해 진짜 매클레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이클이 자리를 떠나고, 봉투를 꺼내 내용물을 본 브루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큰소리로 목놓아 울었다.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울부짖었다.

오열하는 브루스에게서 셜리가 비쳤다.






셜리가 건넨 봉투의 내용물을 보고 나서부터 브루스는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진짜 매클레인이 된 것처럼 살아갔다.

혹시 몰라 마이클이 사람을 붙여 감시를 했지만 이상 징후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끊으려 하지 않았다.

자살 시도는커녕 오히려 브루스는 삶의 의욕을 찾은 듯했다.

음식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전

문 경영인을 통해 기업을 운영했고, 매클레인 가문의 후계자로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삶에 집중했다.

잃어버린 10년을 몰아서 살기라도 하듯 하루하루에 충실했다.

마이클은 갑자기 바뀌어 버린 그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지만 브루스의 인격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마이클은 브루스 매클레인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인격들을 관리하던 프로젝트는 완전히 끝났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관해 두었던 매클레인들과 관련된 물건들을 모두 정리했다.

제임스, 다니엘, 바튼의 인생이 담기 물건들이 하나둘 버려졌다.

그들의 인생이 담겨 있는 짐들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많았다.

짐을 잔뜩 실은 트럭 하나가 마이클 앞으로 지나갔다.

짐 칸에는 익숙한 기타 케이스가 보였다.


"잠깐만요"


마이클의 부름에 직원은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마이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이클은 그렇게 매클레인들과 작별했다.





브루스는 마이클에게 수고와 감사의 의미로 긴 휴가를 줬다.

매클레인 가문을 위해 헌신한 마이클을 위한 선물이었다.

마이클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브루스 매클레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고 휴가를 받았다.

매클레인들을 관리하느라 빈틈없이 메워져 있던 마이클의 삶에는 빈 공간이 생겼다.

그는 빈 공간들을 채우며 1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브루스 매클레인의 일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잘해주었기에 마이클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는 휴가를 즐기며 셜리의 조언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 매클레인이 어떻게 되든 당신 삶을 살아요





휴가 중 마이클은 휴양지에서 숀 박사를 마주했다.


"마이클, 반갑습니다."


"숀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더는 걱정이 없으시겠군요."


숀은 브루스 매클레인이 돌아와 자신의 삶을 찾은 것을 축하했다.


"숀 박사님 덕분입니다."


둘은 지난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숀 박사가 말했다.


"제가 예전에 셜리 매클레인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드린 적 있었죠?"


"네, 기억이 납니다."


"셜리 매클레인과 유사한 사례를 찾았습니다."


"유사한 사례라면?"


"성 정체성이 남자인데 여성의 신체를 원하는 경우 말입니다. 여성의 신체를 얻음으로써 특정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경우에 그런 심리를 보이더군요. 실제로 체육계에서 남성인 선수가 비교적 쉬운 경쟁을 위해 여성으로 성별을 바꾼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군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성전환을 한다는 사실은 마이클을 놀라게 만들었다.


"근데 셜리 매클레인이 어떤 목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원했는지는 모두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셜리 매클레인이 여장을 하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단순히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여성의 몸을 원하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그건 셜리 매클레인만이 알고 있겠죠"





셜리 매클레인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후 셜리 매클레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 속, 텔레비전을 보던 마이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 매클레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브루스 매클레인이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마이클은 브루스 매클레인이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소식에 너무 놀란 나머지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확인해보니 뉴스의 내용은 진짜였다.

매클레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퍼졌다.

마이클은 충격에 주저앉았다.

그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오른다.

셜리 매클레인.

설마 자신이 없는 사이에 셜리가 브루스의 몸을 차지하고 연기를 한 것인가?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부질없었다.

이미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은 성전환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신체적으로 여성이 되었다.

셜리가 계획한 게 분명했다.

마이클은 셜리에게 완벽하게 속았다.

마이클은 곧장 브루스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셜리를 마주했다.

매클레인은 마이클을 보고 웃었다.


"셜리?"


웃고 있는 매클레인을 보며 마이클이 셜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매클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엘렌 매클레인입니다."


엘렌 매클레인? 마이클의 기억 속에 엘렌이라는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엘렌이라면 셜리에게 이름을 지어준 소녀의 이름이었다.

셜리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 소녀.





7. n번째 매클레인


"너무 예쁘다"


12살의 브루스 매클레인은 누나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옷과 장신구들로 자신을 치장했다.

누나의 가발을 머리에 쓰고, 자신의 다리보다 길어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 브루스는 마치 만화 속 공주님처럼 아름다웠다.

그 무렵 브루스는 자신이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옥 같은 피부에 조금씩 자라나는 수염이 너무나도 싫었고, 목에서 부풀어 오르는 목젖도 떼어버리고 싶었다.


"왜 나는 남자로 태어난 걸까?"


브루스는 거울 속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는 거울 속 여자로 살고 싶었다.

순간 거울 속의 매클레인이 말을 걸었다.


"너 정말 예쁘구나, 첫눈에 반했어. 이름이 뭐니?"


"안녕? 난 엘렌이야, 넌 이름이 뭐니?"


"나는 이름이 없어"


"그래? 그러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게. 셜리 어때? 셜리 매클레인"


"셜리?"


"마음에 들어?"


네가 지어준 이름이라면 뭐라도 좋아"


"반가워, 셜리"


"고마워 엘렌, 너처럼 예쁜 소녀는 처음 보는 거 같아."


"예쁜 소녀? 정말 고마워!"


매클레인은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순간 거울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운다.

맬컴 회장이었다.

맬컴은 브루스가 여장을 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브루스!!! 이게 무슨 짓이니?!"


"아, 아빠"


-짝!


맬컴의 두꺼운 손바닥이 여린 브루스의 얼굴을 향했다.

따귀를 맞은 브루스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하얀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내 놈이 돼가지고 이딴 짓을 하다니, 그래 가지고 어떻게 매클레인 가문을 이끌겠어? 너희 형이 죽은 지금 네가 유일한 후계자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라! 제발 정신 차려!!"


맬컴은 브루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호통쳤다.

어린 브루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

남자니까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구나.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구나라고 느낀 브루스는 절망했다.

그때부터 브루스는 내면에 있던 엘렌 매클레인을 지웠다.

머리도 짧게 자르고, 자신이 아닌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살았다.

하지만 셜리는 알고 있었다.

매클레인이 누구보다 엘렌으로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셜리는 자신이 첫눈에 반한 엘렌 매클레인을 되찾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셜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브루스 매클레인의 몸을 여자로 만들려 했다.

그 방법이 다소 과격해서 문제였지만 셜리는 그만큼 엘렌 매클레인을 되찾고 싶었다.





셜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잡았다.

마이클의 도움으로 여장을 하고 사진을 찍은 셜리는 다시 보게 된 사진 속 엘렌 매클레인을 보고 말을 잃었다.

그는 펑펑 울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엘렌을 되찾기 위해 그날 찍은 아름다운 매클레인이 담긴 사진을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사진 아래쪽에 메시지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이클에게 전했다.

진짜 매클레인을 보고 싶으면 매클레인에게 건네 달라는 말과 함께.





브루스는 마이클에게서 받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매클레인은 기다란 머리를 늘어 뜨리고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매혹적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자신이 늘 꿈꾸던 여자로서의 삶이었다.

사진 아래쪽에는 휘갈긴 글씨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 엘렌, 넌 여전히 아름다워. 너를 너무나 사랑하는 셜리가


브루스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한참 동안 흐느껴 울었다.

브루스는 결심했다.

세상이 어떻게 보든 엘렌 매클레인으로 살기로.

그는 마이클에게 휴가를 주고 그 기간 동안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성전환 수술을 준비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엘렌으로 살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려 왔는데 그 정도 고통은 얼마든 견딜 수 있었다.

목소리, 골격, 체형 등 서서히 바뀔 때마다 브루스는 그것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전환 수술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브루스 매클레인은 공식적으로 엘렌 매클레인이 되었다.

트랜스젠더가 된 매클레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그것이 그녀를 알리는 첫 번째 뉴스였다.

그녀의 사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엘렌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지 모른다는 걸.

엘렌 매클레인은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





엘렌 매클레인의 책상 위로 마이클이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죠?"


"사직서입니다."


사직서를 받은 엘렌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저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만두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제 선택이었으니까요."


"도련, 아니, 아가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만두시는 겁니까?"


"쉬면서 제 인생을 사니까 좋더라고요."


마이클의 대답에 엘렌은 활짝 웃었다.


"휴가를 괜히 줬네요."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죠?"


머뭇거리던 마이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갖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허름한 술집, 마이클이 어깨에 기타를 매고 술집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 올랐다.

그가 메고 있는 기타에는 제임스 매클레인의 사인이 있었다.

마이클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관중들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며 공연을 기다렸고, 몇몇 관중은 관심도 없는지 술을 마실 뿐이었다.

그는 주름진 손을 기타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마이클 케인입니다. 우선 오늘 제게 공연을 하도록 허락해 주신 제 친형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이클의 무대 인사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마이클의 형은 마이클을 보며 술잔을 들어 보였다.

긴장이 조금 풀린 마이클의 얼굴에 여유가 피어난다.

그는 숨을 한 번 내뱉고 말을 이었다.


"오랜만의 무대라 긴장이 되네요."


술집 안에 있던 손님들이 격려를 하기 위해 박수를 쳐줬다.


"오늘 제가 들려드릴 곡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비운의 명곡입니다."


곡의 제목을 말하려는 마이클의 입술이 즐거움에 씰룩거린다.


"제가 들려드릴 곡은..."


사람들의 시선이 마이클에게 향한다.


"n번째..."


빌어먹을 정도로 신나는 기타 사운드가 술집을 가득 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