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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혁이 정훈의 집에 찾아갔을 때 이미 누군가 그의 집앞에 서있었다.
기자라든가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동네 아주머니 몇명 정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집앞에 홀로 서있던 사람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보는걸 원치 않았기에
주혁은 멀찍이 떨어져서는 노인이 자리를 뜨길 기다렸다.
한참 동안이나 문을 두드리던 그 노인이 힘겨운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을 때,
주혁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노인이 떠나간 그 자리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안에 계십니까? 만나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열심히 불러보았지만 안에서는 역시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정훈이 출소한지 고작 2주가 지났을 뿐이지만 그간 많은 사람이 왔다갔던 모양이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그냥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여전히 답이 없자 주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는 김주혁이라고 합니다. 저도... 선생님이 죽인 그 사람에게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간에 침묵이 이어진 끝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들어오게.”
그리고 곧 문이 열리며 초췌한 얼굴의 남자가 주혁을 안으로 들였다.
“지저분하지만 어디든 적당히 치워놓고 앉게. 대접할건 마땅히 없으니 그리 알고.”
주혁이 너저분한 물건들을 치워놓고 자리에 앉자, 정훈 역시 주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말이 하고 싶어서 왔나. 살인자라고 욕하고 싶은겐가? 아니면 원수를 갚아줘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주혁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둘을 다 말하고 싶습니다.
감사하다 말하고 싶기도 하고 너무 했다고 말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 말에 정훈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건 또 처음보는 반응이구만. 보통 둘중 하나였지.
자기 가족 죽게한 그 쓰레기 새끼를 대신 죽여줬다면서 치켜세우는 녀석.
그리고 고작 사고일 뿐인데 자기 감정에 못이겨 살인을 저질렀다면서 깍아내리는 녀석.”
“둘다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어찌되었건 그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당연히 저도 화가 납니다.
처음 그가 죽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 통쾌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결국 그건 사고였습니다.
선생님이나 제 가족.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족들은 미치광이 살인마 때문이 아니라
그냥 버스에 탔다가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에 받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거죠.”
정훈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차분히 말했다.
“그래. 사고였지. 음주운전도 아니었고 졸음운전도 아닌 단순 과실.
그건 나도 알아. 수백번은 들었어. 하지만 그래서?
살인이 아니라 단순 사고면 내딸이 다시 돌아오나?
음주운전이 아니면 아내가 다시 살아나?
자넨 어떤가? 가족을 잃었다면서.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면 좀 마음이 편해지고 납득이 되던가?”
주혁은 입을 다물었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달라질건 없지. 확실한건 난 그놈을 죽였고 죗값은 다 치렀어.
몇 년 동안 군말없이 감옥에서 썩으면서 말이야.
후회될 것도 없고 잘못된 것도 없으니 설교를 듣고 싶지도 않고 추켜세우길 바라지도 않아.
그런 얘기를 할거라면 그냥 돌아가게.”
“아뇨. 아닙니다.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게 아닙니다. 다만, 조금 복잡한 이야기겠지만 먼저 제 말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주혁은 자세를 고쳐 앉고는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사실 선생님 소식을 뉴스로 듣기전까지.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 트럭기사를 죽이기 직전까지 전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누구보다 행복을 꿈꾸던 제 약혼녀.
사랑하는 제 여자를 죽게한 그놈을 용서하는게 맞을지. 아니, 살려두는게 맞을지.
그놈이 피해자 가족들 앞에 나타나 울면서 사죄를 하던 그 때,
누군가는 용서를 하고 누군가는 욕을 했지만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품에 숨겨놓은 망치를 꼭 쥔채,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끝내 움직이지 못했죠.
그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수십번 그를 죽였고 또 수십번 용서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함에 숨이 턱턱 막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무 슬프고 답답해서 정말 죽을 것 같던 그때 선생님이 그를 죽여주신 겁니다.
그 순간만큼은 전 정말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훈은 주혁의 말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 청년도 다른 이들과 다를바 없었다.
정작 움직여야 할때는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자기 편을 들면서 추켜세우는 머저리.
그 놈들을 볼때마다 자신의 분노와 각오가 퇴색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말씀 드렸다시피 그 사람을 죽인건 정의로운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분노로 인한 복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정확히는 해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만 쫒아내려던 정훈은 주혁의 말에 호기심을 느끼며 재차 물었다.
“그래서 요점이 뭐야?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애매모호한 소리나 늘어놓으려고 온건 아닐거 같은데.”
“네. 그럼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죽이는 일. 그건 해서는 안될일인 동시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했어야만 하는 일이었지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누군가 나 대신 움직여 주었구나. 내손을 더럽히지 않았구나.
하지만 그렇게 안심한것도 잠시뿐이었고, 곧 말못할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제가 선생님 대신 그놈을 납치하고 선생님 대신 그놈을 죽여서
그놈의 살조각 하나 뼛조각 하나 남지 않게 모조리 씹어 먹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당당히 죗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게 죽은 제 아내를 위한 일이었고 제가 감당해야할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 일을 뺏겨버린 겁니다.
선생님께 감사한 만큼 또 원망스러웠고
또 제 마음이 편해진 만큼 그녀에게 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짐을 내려 놓고자 선생님을 찾아온겁니다.
더 이상 후회하고 머뭇거리지 않기 위해서.”
길고긴 이야기가 끝이 났지만 정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혁이 단호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망치를 꺼내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늦었지만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려합니다.
그를 죽인 선생님을 죽임으로서 제 의무를 다하는 거지요.
그리고 선생님처럼 죗값을 정확히 치르고 그녀에게 사죄할 생각입니다.
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수가 없어요.”
주혁은 망치를 높이 든채 단호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혹시 자네, 문밖에 있던 노인을 봤는가? 몇시간이고 문을 두드리던 노인말일세.”
상황에 맞지 않는 침착한 정훈의 말에 주혁은 망치를 든 자세 그대로 멈춰서서는 문앞에 있던 노인을 떠올렸다.
“내가 퇴소하고 나서 매일같이 찾아오는 노인이지.
칠십이 넘은데다가 지병이 있어서 얼마나 더 살지 알수가 없어.
그런데 그 노인은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세 번 밥먹는때 말고는 항상 문앞에 와있어.
날 만나서 용서를 구하겠다고 말이야. 그 노인이 누군지 알겠나?”
주혁은 멍하니 손을 내리고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트럭기사 녀석의 아버지. 내가 죽인 그놈 아버지야.
그렇다면 그놈 아버지는 왜 매일같이 나에게 와서 용서를 구할까?”
주혁은 자기가 하려던 일도 잊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 자기 아들이 한짓에 책임감을 느껴서...”
거기까지 말했지만 그건 정답이 아닐게 분명했다.
역시나 남자는 주혁의 말을 더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틀렸어. 자기 아들을 구하고 싶어서야.
자네 한번 생각해봐. 난 그놈을 죽였단 죄목으로 감옥에 다녀왔지.
그런데 시체가 발견되었었나?
아니지. 난 바다에 버렸다고 증언했고 시체는 결국 찾지 못했어.”
주혁의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네는 운이 좋구만. 아직 늦지 않았어.
나를 죽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남아있으니.
자 이제 그걸 내려놓고 날 따라오게.”
남자를 따라간 곳은 길에서도 멀찌감치 떨어진 노인의 집이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그 낡은 집 지하실에 끔찍한 무언가가 묶여있었다.
“손발을 자르고 혀도 베어버렸지. 눈을 찌르고 고막도 찢어놨어.
죽는건 말이야 너무 편한 벌이거든. 앞도 못보고 귀도 안들리고 말도 못해.
죽고 싶겠지만 자살할 방법이 없지. 그러니 어쩌겠나?
늙고 병든 자기 아버지가 챙겨주는 밥을 억지로 씹어삼키며 살아남는 수밖에.”
주혁은 눈앞에 있는 것을 차마 마주 볼수 없었다.
팔다리가 없는 살덩어리가 꾸물대며 쇠사슬에 묶여있는 모습은 충격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노인은 구석에서 남자의 눈치를 보며 걱정스레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공기가 탁해서 기분이 별로지? 밖에서 얘기하는게 좋겠군.”
밖으로 나온 주혁은 복잡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고 두고 고통을 줘야했어. 놈을 그냥 죽여서는 안된단 말이지.
그래서 일을 꾸민거야.
놈을 납치해서 고깃덩어리로 만든 다음 노인네에게 찾아갔지.
지하실에 그 살덩이를 꽉 묶어 놓고는 말했어.
아들내미가 숨통이 끊어지는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숨겨놓고 잘 돌보라고.
혹여나 경찰에 연락하거나 밖으로 빼돌리면 곧장 사람들이 찾아와 전부 죽여버린다고 협박도 해놨어.
그 덕에 놈은 추악하게 살아남은거지. 내가 감옥에 다녀오는 긴 시간동안.
죽어가는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먹여주는 음식을 씹는 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되나?”
“서..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왜, 뭐가 문제인데?
아깐 복수를 위해 날 죽이겠다고 설치더니만 고작 이따위 걸로 생각이 바뀌었나?
자네 각오가 겨우 그거밖에 안돼?”
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제 슬슬 끝낼 생각이었어.
어차피 저 노인네 얼마 더 살지도 못할테니 같이 묶어 놓고 둘다 굶어죽길 기다릴 셈이었지.
하지만 자네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어.
자네에게 기회를 주겠단 말이야.”
주혁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자네가 책임지게.
노인네가 죽고난 이후부터 자네가 이놈을 연명시키는거야.
소리도 못듣고 앞도 못보는 놈은 지 아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기한테 먹을걸 챙겨주는 사람이 아비인지 원수인지도 모르겠지.
얼마나 지나야 눈치 챌까?
5년 10년?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만족할 만큼.
아니, 자네의 죽은 아내가 만족할 만큼 그놈을 지켜보는거지.
추악하게 아득바득 살아남은 녀석이 고통받는 모습을 말이야.
물론 긴 시간이겠지만 자네도 나처럼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지낼 각오를 하지 않았나?”
주혁은 죽은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매일밤 그리워하던 얼굴.
그리고 반대로 방금 보았던 트럭기사의 끔찍한 모습도 떠올려보았다.
마음속으로 수십번이나 죽였던 얼굴.
“죽이는건 너무 자애롭지. 자네 각오를 보여주게. 이번에 망설이면 자네 아내가 얼마나 실망하겠나?”
그말에 주혁은 각오를 다잡고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을 본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래. 결심했구만?”
주혁은 한층더 확신에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각오가 되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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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넴이음슴 |
최고입니다. 중국 역사이야기에 나오던 사람돼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작가님 이야기가 더 쇼킹하고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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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2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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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헌 |
와..ㅡ.진짜 몰입하면서 봤어요 전 공게 옛날부터 눈팅했었는데 넵튠님의 필력과 참신한 소재는 옛날 공게 레전드님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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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1 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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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넴이음슴 |
최고입니다. 중국 역사이야기에 나오던 사람돼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작가님 이야기가 더 쇼킹하고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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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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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헌 |
와..ㅡ.진짜 몰입하면서 봤어요 전 공게 옛날부터 눈팅했었는데 넵튠님의 필력과 참신한 소재는 옛날 공게 레전드님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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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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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라르 |
너무 잘 봤습니다. 몰입도 최강입니다. 개추 드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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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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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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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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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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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냥 |
도대체 뭘 그녀와 가족을 위해서 하겠다는거야? 결국 저렇게 하면서 진실로 구하는건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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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1 |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네티켓의 기본입니다.게시물에 상관없는 답글이나 추천유도성 답글을 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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