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째 쏟아져내린 눈 때문인지 조용한 겨울이였다.
아직 달력은 11월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지만
몇일째 내린 눈 때문인지 희미하게 들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제외한다면 평소의 동네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조용한 밤이였다.

안경알에 뿌옇게 서린 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자 소년은 뻘겋게 상기 되다못해 보랏빛으로 달아오른 손 끝으로
연신 안경알을 문질러댔다.
봉선화 꽃처럼 터질것 같은 손 끝이 아려오는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지으며 문질러대지만 잘되지않는듯
흥건히 젖은 안경을 다시금 쓰고 소년은 좌우를 살피며
골목 구석구석을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소년은 동네 외곽에 자리한 파출소에서 멀리 떨어지지않은
근처에 와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년이 뜀박질을 멈춘건, 그로부터 채 몇분이 지나지 않았을때였다.
시장어귀에서 그의 아버지가 5,000원을 주고 사온
군청색 싸구려 단화가 소년의 땀과 녹은 눈 때문에
검은색으로 젖어들어 소년의 얇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새빨간 무릎처럼 발가락 끝이 그것처럼 상기되어
고통스러워서도 아니었고
귓 볼과 양뺨이 칼로 저미는듯 슬며시 올라오는 통증때문도 아니었다.

소년이 한 겨울, 열심히 달려가며 찾아해메던 중년 남성의 뒷모습 때문이었을것이다.

중년 남성의 검게 익은 피부와 다부진 팔근육과는 별개로
한 없이 작아보이는 뒷 모습은 묘한 괴리감을 주었지만
자신의 얇은 비닐 조끼를 벚어 중년 남성의 어깨에 걸쳐주는
소년의 모습에서 망설임의 흔적을 찾아 볼수는 없었다.

-아빠, 가자..집에 가자

-...

말 없는 남자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 뭐라도 걸치고 나오지 그랬어? 춥다 얼른 가자.

-...

-아빠 찾으려고 내가 몇시간을 돌아다녔는지 알아?
옷이라도 따뜻하게 걸치고 나오던가, 나시에 반바지에
쓰레빠가 뭐야...얼른 가자 아빠...제발

-...초..원이가..

-응? 알았니까 가자

-초원...이...가...기다리...랬어...여기서...온다고...
여...기있으면...초원...이..도...온다..고...

-오긴 누가와!!! 제발! 정신차리고 가자고!
초원이도 집에서 아빠 기다리니까! 가자고!!!

-아..니야..초..원이..가

-아!!! 기다린다고 그랬잖아!
진짜!!! 초원이가! 기다린다 그랬다고!!!

소년은 추위로 달아오른 귓볼만큼이나 벌게진 얼굴로 악을 써대며 중년 남자의 거친 손을 잡아끌고 집 대문안까지 들어갔다.
그들의 안식처로 가는 반지하 계단과 현관문 앞에
세워진 소주병 2,30병에는 연신 쏟아지듯이 내린 눈에 소복히 덮여 있었고 소년이 현관문을 열자 달짝지근한 술 냄새와 비릿한 피내음이 콧속으로 들이닥쳐왔다.

소년의 아버지가 초점없는 눈으로 현관어귀에서 어정쩡하게
서있자 먼저 들어간 소년이 애써 힘으로 그를 거실 구석에 앉히고 낡고 구멍난 걸레로 누런 장판위에 흥건히 뿌려진
핏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아빠, 뭐라고 말 좀 해봐. 이게 다 뭐야..?
벌써 몇 번째야. 나 중학교 들어가면 이제 술 끊겠다며..
나 조금 있으면 중3인데, 아직도 이게 뭐야..?

-...

-여름에 병원 들어갔을때도 끊겠다며? 할수있다면서
믿어 달라면서 왜 자꾸 이러는거야..?
나 진짜 힘들어 아빠...우리 평범하게 살면안될까..?
지금보다 더 가난해져도 되니까...우리 둘이서 행복하면
안돼?

-...

-이제 진짜 다 지긋지긋해서 미칠것같아...
집 말아먹고 도망간 엄마도, 이러는 아빠도...

시뻘건 피를 어느정도 닦아내자 군데군데 페인 노란 장판이
드러나자 걸레를 구석에 던진뒤 아버지의 손을 부여 잡는
소년의 눈에는 곧 흘러내릴것만 같은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그런 소년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강산아! 왜 울어?! 울지마라. 아빠가 미안하다..울지마

아버지의 손 끝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떨려왔지만 아까와는 다른 사람인냥 눈 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강산은 그 모습이 좋은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는 아버지의 말투가 좋은건지 본인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

-아빠, 매일매일 아빠가 지금 같았으면 좋겠어..
술도 그만먹고, 다시 재활원 들어가자 아빠
나..너무 힘들어 이제..일주일에 한번씩 아빠가...

강산의 말이 채 끝나기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아빠가...

-...이렇게 자해하고 사라지고...치우고 너무 힘들어
우리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자 아빠

강산의 말에 아버지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벽지, 낡은 가구와
10년은 넘게 썼을 법한 큰 냉장고, 누런 장판과 벽에 걸린
알록달록한 색상의 시계, 그 옆에 걸린
본인과 아들 강산 그리고 이제 곧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딸 초원이, 이 세사람이 단란하게 찍은 가족사진,
작은 단칸방 한켠과 현관문앞에 늘어선 소주병들,
추위에 질려버려 부르튼 강산이의 입술, 본인과 강산의 얼어버린 손끝과 발가락, 본인 왼손목에 수없이 그어지고 아물어버린 자해흔적들..

시계의 작은 바늘은 어느덧 밤 11시에 다다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도 그랬구나..미안하다..오늘은 왜 나갔는지
기억이...

-괜찮아 아빠, 이제 괜찮아

강산은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어보이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중년 남자는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아들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손목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자해 않한것 같은데 저 피는 다 뭐지...오늘은 피가
많아보이는데..그리고 시간이 11시인데 초원이는 어디갔니?

-아빠 진짜 왜 그래!!!
왜 맨날 초원이만 찾고 걔만 걱정하는데!
나는? 이 개 고생하는 나는! 술 취하면 나는 매번 걔 몫까지
얻어 맞는데!!! 왜 나는 안중에도 없는건데!!!

강산의 악다구니에 서늘함을 느낀 아버지는 황급히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초원이!?! 시발 초원이! 아침에 기억 안나?
자기 방 가지고 싶다고 지랄하는거 내가 대신 쳐맞았는데?!!
그래서 내가 초원이 방도 만들어주고 보여줬잖아!

중년 남자는 빠르게 주위를 살펴봤지만 단칸방 어디에도
어린 딸의 방을 대신 할만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 이새끼, 초원이 어딧어?

다급한 물음에 강산은 오래되고 큰 냉장고를 열어제끼며 말했다.

-초원이 방 여기라고 했잖아 내가...

히죽거리는 입을 억지로 눌러 내리듯 묘하게 뒤틀린 강산의 웃음을 뒤로하고 눈에 들어온 냉장고 안에는 말라비틀어직
피딱지로 뒤덮인 초원이의 머리와 팔,다리가 제각기 한데 엉켜서 고깃덩이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간신히 기억해냈다.
아침부터 폭력을 썼던 일, 맞고만 있던 아들이 충동적으로
딸아이의 머리를 굴러다니는 소주병으로 내리친 뒤,
옆에 있던 식칼로 난잡하게 쑤시고던 일,
희미하게 꺼져가는 생명을 쥐어짜 자신에게 말했던 딸아이의 마지막 말까지.

-아..빠 가..어..ㄹ...르...ㄴ 겨...ㅇ..차..ㄹ..서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