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났다. 대충 숙제를 내고 시덥잖은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짐을 싸는 4명의 학생들을 뒤로 하고 교실을 나온다. 아무도 없는 조그마한 교무실에 들어가, 달력을 꺼냈다. 토요일은 12시 수업부터 고2 내신 대비 시작하고, 일요일은 정규 수업만.. 맞다, 중학생들 보강도 해야 되네? 그래도 내일은 저녁 수업밖에 없어서 다행이다.
달력을 내려놓고 프린트기로 가서, 이젠 보기만해도 토가 나오는 모의고사 기출 문제를 또 프린트한다. 보고 또 보는 지문을 다시 보며 이건 설의법이고 이건 영탄법이니 하는 비슷비슷한 설명을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했고 내년에도 할 것이다. 그래, 한 치 앞을 모를 그런 프리랜서의 삶보다는 변치 않는 삶이 훨 낫지, 하는 나를 비웃듯 카드사가 문자를 날린다. 그래, 변치 않는 것에는 내 박봉도 포함된다. 뭐 어쩌겠어? 촌동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3년을 어영부영 날려먹고 재수 끝에 들어간 대학. 그리고 나는 또 두번째 기회를 안일하게 날려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노동'을 하겠다는데 박봉은 감수해야지. 이제와서 뭐가 바뀌길 기대하진 않는다. 내 인생은 항상 이랬는데 뭐. 갑자기 짜증이 확 차오른다. 낡은 학원, 원장, 중고딩들... 모든 것이. 망할. 프린트기는 윙윙거리며 종이를 내뱉고, 멍하니 그걸 바라보는 내 머릿 속에서 생각은 꼬리를 문다. 스테이플러로 찍은 프린트물을 책상에 내던지듯 내려 놓고, 머리를 대충 묶으며 생각했다. 몰라, 어떻게든 살겠지.
종이를 대충 모아 가방에 쑤셔 넣고 지하철역으로 발을 옮기다, 문득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도 어차피 저녁 수업인데, 대충 밤바다나 보다가 근처 모텔에서 자고 올까? 아니면 모래사장에서 밤을 새도 좋다. 내 좁아터진 원룸만 아니면 뭐 어때? 이젠 그 낡은 방에 신물이 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역이다. 마침 막차가 오고 있었다.
종착역을 알리는 방송에 잠에서 깼다. 언제 잠이 든 거지? 비몽사몽한 눈으로 개찰구를 나왔다. 여기서 바다로 가려면 또 한 정거장 쯤은 걸어야 한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다. 이 밤에 괜히 바다를 본다고 설쳤나.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날대로 나, 이젠 바다를 보고 싶다기보다는 보고 가겠다는 의무감에 발을 옮겼다. 역 밖으로 나오니 세상은 온통 밤이었다. 불 꺼진 거대한 빌딩들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밤이 뭉쳐진 것처럼. 딱히 감성에 젖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인터넷 뉴스를 빠르게 넘기며 걸음을 걸었다. 대선에 대한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관심 없다. 몇개를 대충 훑어보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스토리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내 친구들은 즐겁고 화려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몇개를 휙휙 넘기다가 폰을 집어넣었다.
높은 빌딩 사이로 수평선이 보인다. 오는 내내 쌓인 짜증이 쑥 내려갈 만큼. 달빛에 비친 모래사장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보아하니 바람도 차갑고 파도는 평소보다 훨씬 심해보였다. 겨울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쩐지 사람이 없다 했는데 날씨가 안좋아서 그렇구나. 뭐 어때? 조용하고 좋지. 모래사장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편의점에서 사온 소주를 꺼내 마신다. 날씨는 몹시도 추웠지만 술은 목을 타고 뜨겁게 내렸다. 내 인생은 '몰라'의 연속이다. 뭐 하나 특출난 것 없이 지역의 적당한 대학에 입학하여 그저 남들이 하면 하는 대로 안하면 안하는대로 살아왔다. 쳇바퀴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뭘 진득하게 붙잡아 본 적이 없다. 그저 평생 이렇게 사는 걸까? 대체 스스로 뭘 이룬거지? 소주 하나 더 따면서, 바다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냥.. 평생 올해처럼 살겠지. 가끔 이런 일탈 같지 않은 일탈도 해보면서. 이제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몇시쯤 되었지? 눈이 바닷바람을 맞아, 너무 뻑뻑했다. 그래 렌즈도 빼고, 화장도 지워야하고.. 슬슬 들어가야겠다. 조금 취했나보다.
그렇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달 없는 밤의 바다는 아름다우니까. 사실 밤과 바다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자극해야 정상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끝 모를 깊은 물이 두렵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두려움을 꾹 누르고 바다를 느껴보면 곧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보다보면, 밤바다가 따뜻하게도 느껴질 것이다. 따뜻하게. 해도 달도 뜨지 않는,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어둠이 오면.. 바다는 밤과 몸을 섞는다. 밤과 바다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거대한 덩어리가 된다. 격렬하게 숨을 쉬며, 서로를 애무하며, 땅으로 기어온다. 저 깊은 물 속에서, 어둠은 몸을 마구 뒤척이며 우리를 부른다. 손짓하며 따뜻한 품을 양껏 벌린다. 어둠이 화려한 빌딩들을 짓누른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밤바다와 나만 남았다. 땅의 모든 것은 바다에서 왔다. 때가 되면.. 땅의 모든 것은 돌아가야 마땅하다. 나는 소주를 마저 비우고, 바다로 발을 옮긴다.
밤바다는 신비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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