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본부에서 예비 히어로들을 긴급 소집했다.

히어로 본부는 엘 시티 서부에 있는 고립된 지역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화와 동화 이렇게 두 국가로 분단된 화국의 중립 구역 바로 옆에 있다.

규정상 민간인은 절대 거주할 수 없다.

덕분에 근방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휴전 상태를 유지한 터라 중립지역 근방은 개발되지 않아 자연의 상태 그대로다.

그래서 경치가 좋다.

본부 북서쪽에는 바다까지 있어 내전으로 분단만 안 되었으면 끝내주는 휴양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집된 예비 히어로들은 일단 긴급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대기 명령을 받았다.

나를 포함한 예비 히어로 8인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대기실은 규모가 꽤 컸다.

나는 혼자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휴일에도 보네요"


혼자 있고 싶었는데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 옆에 앉아버렸다.

돌풍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돌풍이 어디에 앉는지 확인할 걸 그랬다.


"네 그러게 말입니다."


짧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어젯밤 일은 미안합니다."


돌풍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여서 깜짝 놀랐다.


"앗, 뭐가요?"


"그 화재 현장 지원 못 갔잖아요. 저도 가서 돕고 싶었는데 명령 때문에, 아시잖습니까? 저희 아직 예비 히어로라서 눈치 많이 보는 거"


돌풍은 상당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지원 오지 않은 다른 히어로들이 야속했지만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예비 히어로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알기에.


"이해합니다."


"마음씨도 넓으시다. 진짜 디오 님 마인드부터 다른 거 같습니다. 진짜 히어로입니다. 리얼 히어로"


돌풍은 내게 엄지를 추켜세워 보였다. 앞에서 스틸 윙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돌풍의 오버스러운 리액션에 민망해진 나는 대충 둘러댔다.


"돌풍 씨도 리얼 히어로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불순한 의도로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불순한 의도로 히어로가 되셨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히어로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앞에 있던 스틸 윙, 그 옆에서 스트레칭 하던 인파워도 뒤를 돌아봤다.

심지어 조용히 책을 보던 장전까지 고개를 돌려 돌풍을 바라봤다.


"저는 인기가 얻고 싶어서 히어로가 된 거라"


"크흠"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런 내 모습에 돌풍은 신이 났는지 텐션이 더욱 높아졌다.


"예비 히어로가 되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사진 찍어달라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무도 모릅디다? 정말 비참했던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제가 고글까지 써도 못 알아 본다는 거에요!"


돌풍 덕분에 분위기가 좀 밝아졌다.

돌풍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스틸 윙이 장전에게 물었다.


"장전"


장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어제 쐈던 마취총 남았습니까? 돌풍한테 한 방 먹여요"


장전은 고개를 슬쩍 들고 돌풍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긴 있는데 아껴 써야 해서"


장난기 하나 없는 그의 표정에 스틸 윙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농담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산만했던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던 소드맨도 수련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후 문이 열리고 히어로 대장 수리가 들어왔다.


"예비 히어로분들 우선 휴일인데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상황이 급한 상황이라 짧게 브리핑해드리겠습니다. 주목해주세요."


수리는 대기실 앞쪽에 서서 브리핑을 준비했다.

예비 히어로들의 시선은 모두 수리에게 집중되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오늘 오후 4시경 빌런 프로듀스의 진검이 24시간 안에 FS건설의 박영택 사장을 살해한다고 예고했습니다. 예고 시간은 20시간 정도 남았고 현재 박영택 사장은 엘 타운에서 경찰의 경호를 받는 상황입니다. 경찰 측에서는 히어로 부서에 지원을 요청했고 저희 히어로 부서는 가능한 많은 히어로들을 지원하기로 협의했습니다."


수리는 빠르지만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했다.

깔끔한 브리핑이었지만 동의하기 힘들었다.

FS건설의 박영택 사장이 재계의 거물이긴 하지만 최근 사건들로 봤을 때 구린 사람인 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을 경호하는데 경찰 병력도 모자라 대부분의 히어로까지 투입되다니 납득하기 힘들었다.


"사람 하나 경호하는데 그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 겁니까?"


내가 손을 들고 질문하자 수리가 대답했다.


"진검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빌런 프로듀스에서 영입한 공식 빌런은 두 명입니다. 공개 지원으로 영입된 진검 나머지 한 명은 비공개 지원으로 영입되어 아직 어떤 인물인지 정보가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빌런 프로듀스는 자체적으로 뱅가드라고 불리는 특수부대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력이 미지수인 이상 저희도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 하나 경호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진검의 손에 박영택이 죽으면 경찰은 물론 히어로 부서의 입지까지 흔들립니다. 이건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가 걸린 중대한 사안입니다."


수리는 대답을 마치고 명단을 꺼냈다.


"디오, 인파워, 장전"


"네"


"이 세분을 제외한 예비 히어로분들은 엘 타운에 배치될 거니 출동 준비를 빨리해주십시오. 10분 안에 격납고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호명된 세분은 히어로 본부에 남아서 경위서를 써주시고, 지원 요청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시면 됩니다. 그럼 브리핑 마칩니다. 어서 움직여 주십시오."


"잠깐만요! 왜 저희 세 명은 본부에 남는 겁니까?"


인파워가 묻자 수리가 상당히 차가운 톤으로 정색하며 대답했다.


"세 분은 징계 예정이라 일단 제외했습니다. 특히나 현장에서는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상관과 트러블을 일으키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니까 세분은 지원 요청이 있을 때까지 본부에서 대기하시면 되겠습니다."


수리는 말을 마치고 대기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어제 일 때문에 제대로 찍혔나 봐요."


돌풍이 인파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인파워는 분한 표정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쩌겠습니까, 예비 히어로인 게 죄지. 괜찮을 겁니다."


스틸 윙은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인파워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른 예비 히어로들은 서둘러 각자의 장비를 착용하고 격납고로 향했다.

나, 인파워 장전만 대기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꼬인다.

예비 히어로가 되기까지는 괜찮았는데 확실히 뭔가 꼬이고 있다.

나와 인파워는 본부의 명령에 불복종한 게 컸다.

명령을 무시하고 컨테이너 촌에 지원을 하러 간 게 히어로답지 못한 행동이었던 걸까?

나와 인파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적인 문제였다.

상관과의 트러블.

아마도 오메가 솔저와 있었던 갈등이 주된 이유 같았다.

장전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오메가 솔저가 먼저 예비 히어로들을 깎아내려서 시작된 갈등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정식 히어로가 되어도 고생 꽤나 할 거 같았다.

어쩌면 정식 히어로로 발탁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이럴 거면 휴일에 집에서 편하게 쉬게 놔두지,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전투능력 상위권인 나랑 디오군을 빼다니"


상심한 듯한 인파워와 달리 장전은 평상시 그대로였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 보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장전 씨는 괜찮습니까?"


"오히려 좋습니다. 그런 사람 경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켜도 거부했을 겁니다."


장전의 표정은 확고했다.

인파워는 뭐 저런 녀석이 있지? 라는 표정으로 장전을 바라봤다.

오메가 솔저와의 갈등도 그렇고 장전은 히어로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시간은 흐르고 초조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장전은 책을 읽었고, 인파워는 경위서를 다 쓰고 어느샌가 잠들어 있었다.

특별히 할 게 없어서 핸드폰으로 빌런 진검의 실시간 카운트 다운을 보고 있었다.

시간은 12시간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이 정도 지났는데 아직 별 일이 없는 걸로 봐서 빌런 프로듀스 쪽도 신중히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경찰과 히어로가 협력하기에 빌런 프로듀스 입장에서도 상대하기 부담스러울 것이다.





책을 읽던 장전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나가더니 문을 열었다.


"어디 가십니까?"


"잠깐 화장실 좀"


장전은 짧게 대답하고는 문을 닫았다.





남은 시간 12시간. 카운트다운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히어로 본부는 고요했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순간 카운트다운을 보여주던 핸드폰이 꺼졌다.

핸드폰뿐만이 아니라 대기실의 전등도 꺼졌다.


"뭐지? 정전인가?"


문을 열고 복도를 보자 복도의 불도 모두 꺼져있었다.

이상했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건물이 흔들렸다.

폭발음이 들린 위치는 아래쪽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곳으로 이동했다.

건물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째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거지?'


이 정도 폭발이면 난리가 났을 상황인데도 히어로 본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커다란 건물에 아무도 없는 거 같았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선 상황실로 향했다.

상황실의 모니터며 PC며 모든 장치가 꺼져 있었고 대원들 역시 모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일어나 보세요!!"


의식을 잃은 대원은 다행히 숨은 붙어있었다.

하지만 깨워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히어로들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통신 장비가 먹통이었다.


-쾅!


지하 쪽에서 폭발음이 재차 들렸다.

확인해 보기 위해 서둘러 내려갔다.

지하 1층에 가보니 문이 부서져 있었고 흙먼지가 가득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순간 발에 뭔가 걸렸다.

아래를 보니 지하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었다.

여기저기 기절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이동했다.

순간 끝에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구십니까? 괜찮으십니까?"


검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그림자가 비상 전등에 다가서자 본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검은색 옷에 단발머리를 한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검이 들려있었다.

빌런 진검이었다.

진검은 나를 보자 검을 고쳐 잡고 자세를 취했다.


"히어로는 전부 엘 타운에 있는 거 아니었나?"


"진검? 왜 여기에?"


"어떻게 된 겁니까? 히어로는 전부 엘 타운에 있다고 했잖아요. "


진검은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저 사람은 히어로가 아닙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분명히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럼 저 복장은 뭡니까? 누가 봐도 히어로인데"


"예비 히어로 디오입니다."


"아니!! 그럼 히어로가 있는 거잖아요. 예비 히어로는 히어로가 아닙니까?"


진검은 당황해하며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진검의 고함에도 그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비 히어로와 히어로는 엄연히 다릅니다."


조곤조곤 할 말 다 하는 차분한 말투.

진검 뒤에 있던 남자가 거리를 좁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장전이었다.

그는 검은색 전신 슈트에 눈에는 조준경을 착용한 채 내 앞에 나타났다.

아직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빌런 진검과 장전이 함께 있는 거지?


"잠깐만 디오가 있다고요?"


또 다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앞으로 뛰어왔다.

내가 경계 태세를 취하자 뒤로 물러났다.

그는 헬멧을 벗고 미소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디오 씨, 빌런 프로듀서의 브이 피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