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처참함만이 남았다.

대부분의 컨테이너가 불에 타버렸다.

워낙 시설이 열악하기도 했고, 부끄럽게도 현장에 인력 투입도 늦어진 탓에 벌어진 참사였다.

달이 지고 해가 뜨니, 그 참혹한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예상치 못했던 화재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

혹은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덩그러니 남아 잿더미 앞에서 울었다.

그들을 감히 위로할 수가 없었다.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조금만 빨리 왔었더라면.

애석하게도 나를 포함한 4명의 예비 히어로를 제외하고는

어떤 히어로도 컨테이너촌 화재에 투입되지 않았다.

심지어 나와 인파워는 본부의 명령까지 어기면서 온 것이었다.

본부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 컨테이너 빌라에 살던 아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시민들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어로라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방화범 버닝이 가장 화재 현장에서 빛이 났다.

마지막 불씨가 꺼지고서야 버닝은 바닥에 앉았다.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곳도 당신이 불을 지른 겁니까?"


인파워는 주저앉아있던 버닝을 손으로 툭 건드리며 물었다.


"내가 내 집을 태우겠습니까? 그리고 난 비싼 거만 태워요"


버닝은 지쳤는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냥 확인해 본 겁니다."


버닝은 인파워의 대답을 듣고 피식 웃었다.

나는 버닝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버닝 씨의 능력, 세상을 지키는 데 쓸 수 있잖습니까? 왜 그런 나쁜 길로 가는 겁니까?"


내 질문에 버닝은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쓰기를 바라서였다.

밤새 화재 현장에서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버닝이었다.

영상 속 자동차에 불을 지른 사람이랑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진.


"히어로 씨?"


"네"


"이런 세상이 지킬 가치가 있습니까?"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지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한 번 정도는 제대로 뒤집어져야 한다고 봐요. 당신들은 히어로로서 세상을 지키세요, 나는 빌런으로서 세상을 바꿀 테니까"


지키고 싶은 세상이 아닌 바꾸고 싶은 세상.

버닝의 말이 심장에 박혔다.

아무 말 못 하는 나를 보며 버닝이 웃으며 말을 붙였다.


"하하, 참고로 뒤에 있던 거창한 말은 빌런 프로듀스 홍보영상에서 들었던 말이에요."


-드드드드드


위쪽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위쪽을 바라보던 버닝의 표정이 굳었다.

하늘에는 헬기 한 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헬기는 점점 지상과 가까워졌다.

모두가 위를 올려다볼 때, 인파워가 방심하고 있던 버닝을 잡아 제압했다.


"뭡니까?"


"히어로로서 일을 하는 겁니다. 이미 본부에 연락해놓은 상황입니다. 저항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파워가 말을 마치자마자 헬기에서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누군가 내려왔다.

빠른 속도로 곧장 추락할 거 같았다. 그는 지상에 다다르자 속도를 늦춰 사뿐히 착지했다.

검은 망토에 멀끔한 얼굴. 비행능력을 가지고 있는 현 히어로 대장 수리였다.

뒤이어 로프가 내려오고 특수부대 출신 히어로 오메가 솔저까지 줄을 타고 내려왔다.

버닝은 인파워에게 잡힌 채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불 끄러 온 거야? 너무 늦었는데?"


버닝의 도발에 오메가 솔저가 천천히 다가가며 대답했다.


"너 잡으러 온 거다"


버닝을 노려보던 오메가 솔저가 고개를 돌렸다.


"예비 히어로들!"


"네!"


오메가 솔저의 부름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스틸 윙과 인파워까지 그의 카리스마에 눌렸다.

그는 예비 히어로들을 쭉 한 번 훑고는 말을 이었다.


"명령 불복종에 범죄자랑 노닥거리기까지? 버닝의 위치 보고는 고의로 늦게 한 건가?"


사실 보고할 생각도 못 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불을 끄고, 사람들을 구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더구나 버닝 덕분에 구한 사람들도 많았다. 잠시나마 그가 범죄자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스틸 윙이 대답하자 오메가 솔저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의가 아니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스틸 윙은 고개를 숙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화재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한 그녀가 혼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뜨거!"


인파워가 버닝을 놓치며 소리쳤다.

버닝은 손에 불꽃을 만들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모두가 그의 손아귀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경계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불을 쏠 기세로 히어로들을 노려봤다.


"혼자서 우리들을 상대하겠다고?"


오메가 솔저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숨 막히는 대치상황, 버닝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이제 막 불을 꺼서 불길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거든? 어?"


-털썩!


순간 버닝이 의식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버닝 위로 화살이 날아와 땅에 박혔다.

간발의 차이였다.

만약 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화살에 맞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놀랐는데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던 장전이 불쑥 나타나며 말했다.


"예비 히어로 장전입니다. 제가 마취총 쐈습니다. 화살보다 빨랐네요."


유유히 걸어 나오는 장전을 보며 오메가 솔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예비 히어로들은 전부 쓸모없는 녀석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괜찮은 놈이 있었구만"


오메가 솔저의 발언에 장전은 시크한 표정으로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대답했다.


"재난 현장도 예비 히어로들이 지원하고, 빌런도 예비 히어로들이 잡았습니다. 누가 쓸모없는 겁니까?"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메가 솔저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이 새끼가!"


화가 나서 목청이 높아진 오메가 솔저를 수리 대장이 나서서 저지했다.


"오메가 솔저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장전도 그쯤 하십시오."


수리의 말에 장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수리는 특유의 젠틀함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별명인 하늘의 신사다운 모습이었다.

반면에 오메가 솔저는 분이 안 풀렸는지 계속해서 장전을 노려봤다.

도대체 누가 히어로인지 빌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고 기절한 버닝은 헬기에 실렸다.


"버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헬기에 올라타려는 수리 대장에게 물었다.


"걱정되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잠시 망설였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빌런 프로듀스와 관련된 초인 범죄자들은 히어로 본부에서 맡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럼 나중에 본부에서 만납시다."


"본부에서요?"


"경위서를 쓰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징계도 피하기는 힘들 겁니다."


헬기가 이륙하고 멀어질 때까지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시민들을 도왔다고 징계라니.

빌어먹을.

기절하듯 자고 일어났다.

이틀 야간 방범을 한 뒤라 피로가 쌓여있었다.

거기다가 화재 현장에서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뛰다 보니 무리를 했다.

그나마 오늘은 쉬는 날이라 큰 부담 없이 쉴 수 있었다.

히어로에게 휴일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공무원이라 최소한의 휴일은 보장된다.

할 게 없어서 TV를 켰다.

뉴스 채널을 고르자 뉴스에서 엘 타운 방화사건 브리핑이 생방송 중이었다.


"엘 타운 방화 사건은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약 170대에 달하는 자동차가 전소되는 상당한 재산 피해가 있었습니다. 범인은 히어로들에게 체포되었으며 현재 히어로 본부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경찰은 빌런 프로듀스라는 테러조직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며 이는 히어로 부서와 함께 협력하여 진행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경찰청장은 딱딱한 어조와 표정으로 브리핑을 이어가는데 기자석에서 기자 하나가 외쳤다.


"FS건설 쇼핑센터 비리 관련 내부고발을 한 국토부 공무원이 실종된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경찰청장의 표정에 당황함이 묻어났다.


"그 사건은 이번 사건과 별개의 사건입니다. 엘 타운 방화 사건 브리핑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찰청장은 황급히 브리핑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소파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다른 기사를 찾아보기 위해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다.

기사를 찾는 내내 속이 단단한 돌덩이로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컨테이너촌 화재 사고는 찾아서 봐야 할 정도로 이슈화되지 않았다.

사상자도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갔다.

마치 단체로 모른 척이라도 하는 거 같았다.

정의로워 보였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

제이의 말이 떠올랐다.

양지의 히어로.

히어로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햇볕이 드는 곳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컨테이너촌이라는 음지에 사는 사람들의 목숨보다 양지에 있는 부자들의 슈퍼카가 소중했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의 터전이 불길에 삼켜질 동안 불에 탄 슈퍼카를 옮기고 있었으니.

탁자 위에 불에 그을린 복면이 보였다.

DO.

두?

어떻게 행동하라는 거야?





무너진 컨테이너 속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빠, 엄마, 동생의 목소리였다.

순간 컨테이너 더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컨테이너 더미를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썬이 보였다.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썬, 도와주세요!!"


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도와주지 않는 겁니까?"


나의 절규에 썬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목숨보다 명령이 소중합니까?"


"우린 공무원이니까요."


가족들의 비명이 더욱 더 거세게 들렸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썬의 말이 다시 보였다. '힘센' 공무원이 아니라 힘센 '공무원'이었다.



생계를 위해 밥을 훔친 누군가는 뚜들겨 맞는다.

그에 반해 수천억을 해먹은 누군가는 호화롭게 잘살고 있다.

힘센 공무원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 이런 세상이 지킬 가치가 있습니까?


버닝의 말이 떠올랐다.


"빌런 프로듀스"


빌런 프로듀스 영상 채널에 들어가 봤다.

검색창에 빌런을 입력하자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들이 나왔다.

랭킹 1위 영상은 진검이 축구선수 제임스의 다리를 절단하는 영상이었다.

스크롤을 조금 내리자 버닝이 엘 타운의 자동차를 모조리 태우는 영상도 있었다.

실시간 급등 영상 딱지도 붙어있었다.

영상에 들어가 댓글들을 보니 범죄자에게 우호적인 댓글들이 넘쳐났다.

세상을 바꿔 달라는 부탁, 국회를 폭파해 달라는 미션 제안, 옷 스타일이 멋지다는 칭찬까지

보는 동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시대가 이런 변화를 원하는 것인가.


세상을 바꾸는 빌런.


-딩동


순간 영상 하나가 새로 올라왔다는 알림이 떴다.

스크롤을 올려 최신 영상을 조회하자 영상 하나가 떴다.


방송 시작 [빌런 프로듀스 빌런 진검]


궁금해서 들어가 봤다.

영상은 실시간 생방송이었고, 잠시 기다리자 검은 화면이 바뀌고 영상이 나왔다.

얼마 전에 있던 뉴스 영상이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FS건설 박영택 사장이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얼마 전 국토부 직원의 내부고발로 밝혀진 쇼핑센터 건설허가 비리 사건이 의혹만 남기고 수사가 종료되었습니다. 검찰은 증거 불충분과 내부고발을 했던 직원이 실종된 관계로 수사를 종료했다는 입장인데요"


순간 뉴스 화면이 멈추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4시간 안에 FS건설 박영택은 죽습니다."


영상으로 그의 목소리를 접했음에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건 진짜였다.

진검이 제임스에게 했던 행동을 보면 단순히 어그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실시간 영상 화면에 스톱워치가 떴다.


[24:00:00]


[23:59:59]


카운트 다운과 함께 빌런 진검의 예고 살인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