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샌 탓에 아침에 자야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멋대로 돌아가는 뇌가 자꾸 그 장면을 되뇌었다.

어둑한 가로등 아래에서 인피니트 펀치가 도둑의 얼굴에 꽂히는 순간이 무한 반복되었다.

방범 실습이 끝나고 범죄자를 처단한 인파워는 가산점을 받았다.

나 역시 그의 파트너였기에 같이 받았다.

다른 예비 히어로들은 축하한다며 박수를 쳐줬다.

편의점 주인에게 감사의 말과 히어로들이 광고를 찍은 에너지드링크도 받았다.

인파워는 선량한 시민의 자산을 지켰고, 도둑을 잡았다.

히어로로써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장육부가 엉킨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후우! 정신 차리자"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밑에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내가 동경하는 히어로 썬（SUN）의 굿즈들과 기사 스크랩 등, 나의 팬심이 고스란히 담긴 상자였다.

히어로 시험 준비가 힘들 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월간 히어로 5월호 특별판.

비닐에 감싸진 잡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목차를 넘겨 곧장 16페이지를 열었다.

코스튬을 입은 썬의 모습이 한 페이지 가득 실려있다.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태양과 같은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코스튬은 태양을 상징하는 마크와 붉은 색과 노란색 흰 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머리에 쓴 헬멧부터 슈즈까지 유명 디자이너가 썬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했다고 알려졌다.

태양처럼 눈 부신 히어로.

그 뒷장에는 그의 인터뷰 전문이 있다.

달달 외울 정도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정독한다.

그의 가치관, 신념이 내 가슴속 깊숙이 스며든다.


Q. 히어로를 간단하게 표현해주세요!

A. 힘 센 공무원?

Q. 힘 센 공무원이요?

A. 히어로라고 해서 거창할 거 없습니다. 그저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힘이 조금 센 공무원일뿐. 저는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문득 궁금증이 떠올랐다.

썬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썬도 인파워와 마찬가지로 그 도둑을 처단했을까?

만약 인파워가 아니라 썬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 행동을 좋게 봤을까?

히어로 네임은 디오（DO）면서 정작 망설이느라 어떤 행동도 못했다.

스스로 행동할 줄 모르는 히어로라니, 정말 최악이다.


-우우웅 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같이 히어로 시험을 준비했던 제이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제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어로 실습 후기 좀 들려줘"





카페에서 히어로 실습 때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인파워와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자 가만히 듣던 제이의 미간이 찌푸려 졌다.


"인파워처럼 범죄자를 무지막지하게 대하는 그런 히어로가 없던 건 아니긴 한데 좀 과한 거 아니냐? 실적을 위한 거라고 생각은 되는데 그런 잡범을 상대로 뭐, 무슨 펀치?


"인피니~트 펀치"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실었다.


"즉결심판권의 남용아니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제이의 대답에 살짝 안심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도둑인데 불쌍하더라, 그 도둑 내가 자원봉사 할때 무료 급식 먹으러 오던 사람이었어. 무료 급식이 없어져서 배가고파서 훔쳤대. 히어로가 되면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었는데"


"그러면 도와주지 그랬어? 왜 안 도와줬어?"


제이가 멀뚱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끔 제이가 무심하게 던지는 말이 내 폐부를 찌를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말문이 막혔다.


"상황이 좀"


"벌써 월급 히어로냐?"


월급 히어로, 반 히어로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히어로를 조롱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말 그대로 월급 받으려고 히어로 활동을 하는 타성에 젖은 히어로들을 지칭한다.

비슷한 말로 유사 히어로, 히어로 조무사 등이 있다.

모든 히어로들을 싸잡아서 매도하는 건 좋지 않지만

직업 의식이 없는 히어로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받아들였다.

제이의 무지막지한 팩트 폭력에 뼈가 아려왔다.


"아"


'그래도 범죄자잖아'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인파워와 다를 게 없었다.

마지막 양심으로 겨우 입을 틀어막았다.

어쩌면 내가 속이 답답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히어로 시험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주던 제이가 실망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썬을 좋아하더니 진짜 썬처럼 되려고 하네"


제이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내가 존경하는 썬까지 들먹이며 비아냥거렸다.


"뭐? 이건 선을 좀 넘는데?"


"내가 틀린 말 했어? 썬은 태양처럼 햇볕 잘드는 양지만 비추지, 빛이 들지 않는 음지는 비추지 않아. 썬은 존경할만한 히어로가 아니야. 하긴 너는 양지에 살고 있어서 모르겠구나"


-쿵!


분을 참지 못하고, 제이를 노려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화를 식히기 위해 앞에 있던 아이스 커피를 원샷했다.

다른 건 몰라도 썬에 대한 모욕은 참기 힘들었다.


"나 간다"


짧게 말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썬처럼 하면 될 줄 알았다.

답이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은 의구심이 든다.

어떤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지.





어젯 밤보다 더 어두운 밤.

야간 방범 실습은 예정대로 이어졌다.

잠을 못자서 살짝 피곤했지만 낮에 커피를 마셔서 견딜만 했다.

오히려 육체적 피로도보다 정신적 피로도가 높았다.

그 원인은 인파워 때문이었다.

그와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지만 어제 일 때문에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제발 파트너가 바뀌길 바랐지만 공무원은 어제와 같은 파트너와 순찰을 돌라고 말했다.

어제처럼 히어로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순찰을 돌았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아래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밤거리를 걸으니 어제 있었던 일이 자꾸 생각이 났다.

긴 침묵이 이어질 텐데 어떻게 버티지?

고민하던 차에 인파워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어제 행동에 후회없습니다"


"네?"


느닷없는 발언에 당황했지만 어떤 의도로 입을 열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어제 디오군이 제 주먹을 왜 막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범죄자에게 강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강한 처벌이요?"


그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범죄자들은 처벌이 약하거나 없으면 계속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많이 봤습니다. 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없이 사는 인간들, 처벌이 약해서 같은 범죄를 또 저지르는 인간들"


"어제 같은 경우는 경범죄였습니다. 그렇게까지"


"경범죄요?"


인파워가 정색하며 내 말을 끊었다.

그는 숨을 고르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가벼운 처벌은 봤어도, 세상에 가벼운 범죄가 어디 있습니까?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처벌이 강해야 두려워서라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강요할 생각도 없습니다. 이건 저만의 정의이고, 저는 타협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인파워는 확고했다.

자신만의 정의가 뚜렷했다.

그래서 어제 망설임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머뭇거리던 나와는 달랐다.

히어로가 되기 위해 썬을 따라하던 나와는 달랐다.

빈 깡통인 내가 그의 정의관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기껏 예비 히어로까지 왔는데 물음표만 늘어난다.

히어로가 적성이랑 맞지 않는 건가, 나는 왜 히어로가 되고 싶었지?





10년 전





그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었다.

주말인데 하늘도 파랗고 바람도 선선했다.

아빠는 날씨도 좋은데 외식을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시험공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사실 밖에서 한 끼정도는 먹어도 아무 상관없었는데, 예민했던 시기이기도 했고, 귀찮은 것도 있었다.

가족들과의 외식은 언제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부모님은 아쉬워했지만 나를 이해해 주셨다.

그렇게 나를 제외한 아빠, 엄마, 동생은 외식을 하러 파사（PASA） 쇼핑센터로 갔다.

당시 가장 규모도 크고 핫한 플레이스였다.

게다가 거기에 새로 입점한 레스토랑이 꽤 괜찮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족들이 외식을 하러 가고, 집에 혼자 남았다.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야, 너 어디야?"


"집인데?"


"집이야? 다행이다. 너 뉴스 못 봤어? 너네 동네에 새로 생긴 파사 쇼핑센터 무너졌어"


친구의 전화를 받고 TV를 켰다.

바로 뉴스가 나왔다.


[긴급 속보] 파사 쇼핑센터 붕괴


뉴스를 보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가슴속으로 아니기를 바라며 전화를 했지만 엄마, 아빠, 동생까지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쇼핑센터에 도착하니 그 거대한 건물이 있어야 할 곳에 잔해와 흙 먼지만이 가득했다.

심장이 빨리 뛰고, 목이 타들어 갔다.

먼지 때문에 눈이 따갑고 기침이 나왔지만 현장으로 다가갔다.

건물 잔해 주변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건물의 외관이었던 곳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뒤섞여 있었다.

주변 지역을 통제하던 경찰이 건물 잔해 밑에는 더 많은 사상자가 있다고 했다.


"이쪽에 생존자가 있는 거 같습니다."


"사람 소리가 들렸어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누군가의 외침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있었다.

경찰, 소방관, 시민들까지 힘을 모아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올리려 노력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여나 나의 가족일까 온 힘을 다했다.

손이 까져 피가 새어나오는 것도 모른채 힘을 냈다.

너무 힘을 줘서 눈물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콘크리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힘을 모읍시다. 하나, 둘~"


구조대 아저씨의 말에 다시 힘을 내었다.

모두가 힘을 내자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꿈쩍도 하지 않던 그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서서히 들렸다.


"오! 안에 사람이 보여요, 아직 살아있습니다."


콘크리트 더미가 가벼워진 느낌마저 들어서 옆을 바라보니 태양처럼 눈부신 사람이 같이 힘을 내고 있었다.

국가 공인 히어로 썬이었다.

그 당시 TV에서 몇 번 본 게 전부였는데 정말 빛이 났다.

그는 존재만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다.

썬말고 다른 히어로들도 있었지만 풍기는 아우라가 달랐다.

썬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콘크리트 밑에 있던 사람을 꺼내어 구조했다.

내 가족은 아니었지만 기뻤다.

희망을 품고 구조작업을 도우려 했지만 구조대원들이 안전상의 이유로 시민들을 현장에서 내보냈다.

나는 그저 가족들이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현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와중에 돋보이는 건 단연 썬이었다.

썬은 건물 잔해를 들어 올리며 생존자들을 구해냈다.

그는 쉴틈없이 움직였고, 그것은 밤을 지나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잔해에서 시신을 찾을 때마다 현장에는 곡소리가 울려퍼졌다.

피해자의 가족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모두가 생존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생존자를 찾는 것이 기적이었다.

사망 849명 부상 1352명 구조 76명.

사상 최악의 참사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나 역시 그 사고로 인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진 가족들을 보고 졸도를 해버렸다.

장례식까지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걸 다 잃었던 그 때, 뉴스에서 썬이 계란에 맞은 걸 봤다.

부실공사를 한 건설사 대표도 맞지 않았던 계란 세례를 썬이 맞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히어로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썬은 파사 쇼핑센터 붕괴사고를 언급했다.

그날 일이 떠올랐다.

사람들 옆에서 힘이 되어주던 그 모습.

나는 그날 장갑이 찢어지도록 건물 잔해를 나르고,

쉬지 않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힘썼던 그를 봤기에 그를 탓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힘이 되주었던 그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히어로 본부에서 연락드립니다. 지금 엘타운에서 화재가 났으니 순찰을 돌던 예비 히어로님들은 모두 엘타운으로 출동해 주십시오!"


순찰을 돌던 도중 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엘타운에서 발생한 화재사고 였다.

썬처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순간이 왔다.

어쩌면 내가 히어로가 되고 싶었더 이유를 찾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인파워와 함께 당장 엘 타운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