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자,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날 알아본 레스토랑 매니저 덕에 금세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레스토랑이라고는 해도 인테리어는 옛날 경양식 집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모든 자리가 독실로 되어있어 마음 편히 식사를 즐기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지루하고 힘든 일상에 끼니는 대충 떼우기 십상이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사치스럽게 외식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그야말로 소울푸드.

사방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군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와서 기대감이 앞섰지만 성급하게 굴지는 않기로 했다.

침착하게 메뉴판을 집어들고는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메인은 당연히 스테이크지.”

이곳은 그날 제공되는 고기의 정보가 메뉴판에 상세히 나와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에서 취급하는 고기 자체가 희귀하다 보니 당연했다.

오늘은 두 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A는 28살 여자, 그리고 B... 12살 남자.”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육질 자체야 여자고기가 더 부드럽지만 어린고기 특유의 야들함도 포기하기 어렵다.

그리고 고기를 결정한다 해도 어느 부위를 어떻게 먹을 것이냐도 선택해야 했다.

물론 곁들임과 추가 메뉴구성도 생각해야 한다.

오늘을 위해 위장용량을 한껏 키워 놓았으니 꽉 채우기 전까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다.

“메인은 여자로 하고 나머지 서브 메뉴를 남자애 고기로 만들면 그럭저럭 괜찮겠다.”

그렇게 결정 하고는 서브 메뉴를 고르기 위해 다시 메뉴판을 들여다 보았다.

“육회도 나쁘진 않은데 그렇게 하기엔 메인이랑 너무 부딪힐 것 같단 말이지...

철저하게 보조해주는 메뉴였으면 좋겠는데.... 그럼 차라리 국물을 내버리지자.”

주문할 메뉴를 머릿속에 그려 본 후 호출벨을 눌렀다.

“네 어떤걸로 하시겠습니까?

“우선 스테이크하나 할게요. 300g짜리 해주시는데 고기는 A로 해주시고 부위는 안심으로 해주세요.”

허벅지 살이나 종아리살 스테이크도 별미지만 오늘은 정석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00그램.... 그럼 굽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미디움 레어로 해주세요. 그리고 여기 B 고기로 탕 끓여주실 수 있죠? 곰탕 말고 맑은 국물로요.”

“네, 부위는 어디로 해드릴까요?”

어차피 국물용이니 이왕이면 그럴싸해 보이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혹시 손은 아직 있나요? 형태 안망가지게 손질 최소로 해서 통째로 조리해주세요.”

“형태를 유지한채... 알겠습니다.”

“손질하다 나온 고기조각들은 튀겨서 샐러드에 같이 올려주세요. 드레싱은... 그냥 셰프 드레싱으로 해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와인도 준비 되어 있는데 어떠십니까?”

“당연히 마셔야죠. 레드와인에서 추천해주시고.... 2%? 아니 3% 첨가해주세요.

오늘은 AB형이 좋겠네요.”

고기 풍미를 더 높이기 위해 평소보다 농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리고 국물이 있는 날엔 텁텁한 맛이 적은 AB형이 제격이다.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만족스러운 주문을 마치자 곧 전채가 깔리기 시작했다.

갓 구워낸 빵과 버터.

양송이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프.

가능하면 메인 요리로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눈앞에 있는 유혹을 이기긴 힘들었다.

결국 난 빵 한조각을 집어들어 버터를 발랐다.

폭신하고 따끈한 느낌. 그 온기에 막 바른 버터가 사르르 녹아드는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 버터 역시 젖소 따위의 우유로 만든 보통의 버터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깊은향이 나고 훨씬 더 혀에 휘감기는 맛이다.

크게 한입 베어 물고는 충분히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스프. 제법 큰 고깃덩이가 들어있어 입맛을 돋우기엔 최고였다.

마음 같아선 후루룩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메인요리를 위해 조금 참기로 했다.

대신 들고있던 빵을 스프에 적셨다.

스푼으로 뜨듯이 요령있게 들어올리자 고기 몇조각이 딸려 왔다.

아주 만족스러워 하며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버텨향 사이로 스프에 녹아든 고기의 향이 가득 퍼져 나갔다.

전채라고는 하지만 메인이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정신을 뺏기면 안된다.

역시 내가 고대하던 진짜는 따로있으니까.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때쯤, 드디어 메인요리가 도착했다.



정 가운데는 안심 스테이크. 가니쉬로는 구운 버섯과 양파, 미니 양배추.

그리고 그 바로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고기국.

역시나 내 주문대로 손 하나가 통째로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내 취향을 반영하듯 작은 공기밥 하나도 딸려있었고,

샐러드와 와인도 빠짐없이 준비되었다.

얼핏 대중없어 보이는 조합이지만 경험상 절대 실패가 없는 조합이었다.

흥분감을 감추며 우선 와인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향긋한 포도향 사이로 철분 특유의 쌉싸름한 맛에 식욕이 최고조에 달했다.

즉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나이프를 넣자마자 육즙이 터져나왔다.

한조각 그럴싸하게 잘라서는 포크로 집어서 단면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으로 갈수록 선홍빛을 띄는 고기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구워졌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향과 특유의 식감 덕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식감은 살짝 덜 익힌 돼지고기와 비슷했지만 맛이나 향은 소고기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환상적인 맛.

다음은 샐러드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고 스푼으로 고깃국을 떠 마셨다.

아까와는 방향성이 다른 황홀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역시 내 선택은 옳았다. 이 조합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다시 한번 샐러드를 집어먹었다.

다만 이번엔 튀긴 고기들도 함께다.

손목 살인지 아니면 고기손질중 나온 살코기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삭함과 고소함이 샐러드 소스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었다.

별 기대 없던 샐러드가 다크호스로 떠오르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직 남아있는 식전빵. 스테이크. 그리고 샐러드.

빵하나를 집어들어 칼로 반을 갈라서는 한쪽면에 버터를 발랐다.

그리고 스테이크를 두툼하게 썰어 깔고는 소스를 뿌리고 구운 양파와 버섯을 약간.

그 위에는 샐러드다.

마지막으로 남은 빵으로 덮으면 즉석 스테이크 버거가 완성된다.

정석이라고 볼수는 없지만 이역시 실패하지 않을거란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조심스레 버거를 집어들고는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역시 내 생각은 옳았다.

풍부한 육즙이 빵과 야채와 어우러져 전혀 새로운 맛을 내고 있었다.

난 스스로를 칭찬하며 순식간에 전부 먹어치우고는 와인 한모금을 마셨다.

“다음은... 아 그래 밥. 저게 있었지.”

사실 밥은 양식이든 뭐든 어디에도 잘어울린다.

돈까스를 먹을때도 스쿱으로 떠주는 새모이같은 밥 대신 큼직한 한공기를 선호하는 나이니 만큼

곁들임으로서 밥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반은... 스테이크 덮밥. 반은 탕에 말아먹으면 딱이네. 그전에..”

난 탕에 있던 손을 꺼내어 접시에 내려놓았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새하얀 손은 그 형태는 물론 손톱까지 온전히 있는 상태였다.

난 나이프를 요리조리 돌리며 손에서 살코기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대충 뽑아낸 뼈들은 입안에서 몇바퀴 굴렀다나오면 깨끗해졌다.

잠시후 꽤나 수북하게 살들을 분리해 낸 나는 고기 절반을 탕에 넣고 남은 절반은 스테이크 소스에 버무렸다.

간장소스도 좋지만 이런 스테이크 소스도 훌륭한 맛을 낸다.

그리고 곧장 밥 절반을 탕에 말고는 남은 밥으로 스테이크 덮밥 제조에 들어갔다.

얇게 썬 스테이크를 올리고 그 위에 구운 양파.

남은 스테이크 소스를 얹은 뒤 고추냉이를 올려 마무리.

이것들이 끝내기용 메뉴였다.

먼저 국물에 만 밥 한숟가락. 그리고 스테이크 덮밥 한입.

알싸한 고추냉이가 코를 자극하면 버무려 놓은 살코기를 한입.

다음으로 와인을 한모금 마시고 안주삼아 또 국물 한입.

동서양을 아우르는 조합.

불러오는 배가 야속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식사는 모든 접시가 싹싹 비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국물 한방울 마저 다 마시고는 슬슬 배를 만져 보았다.

이미 빵빵하게 불러와 있었지만 후식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름진걸 잔뜩 먹었으니 딸기 시럽을 잔뜩 뿌린 바닐라 아이스크림 정도가 좋은 선택이다.

딸기시럽엔 피 2%를 첨가하기로 했다.

시럽 첨가물엔 달작지근한 O형이 제격이다.

입맛을 다시며 벨을 누르고는 디저트를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또오세요!”

계산을 마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만족스런 포만감 덕에 비싸디 비싼 음식 값이 그다지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가급적이면 자주 먹고 싶지만 평범한 회사원인 내 월급으론 달에 한번 먹는게 고작이다.

“할 수 없지 뭐. 더 먹고 싶으면 빚을 내던가 직접 사람을 잡던가 해야지.”

혼자 실없는 소리를 하며 피식 웃고는 느긋하게 집으로 향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