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때, 이사 후 처음으로 가위를 눌렸다.
집안 사정이 나빠져 싼 집으로 옮긴게 화근이었는지,
아니면 친구들과 갑자기 헤어진 어린 날의 스트레스였는지, 가위가 눌릴 때마다 그것은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옛날 여느 집이든 있었던 노오란 빛깔을 띄는 그 장판, 그 장판을 "쩌적" 소리와 함께 온 집안 걷는 그것.
그것이 나타나면 나는 항상 눈을 꼭 감고 그것이 나를 못보고 지나치길 기다렸다.
아니, 나를 그냥 없는 사람인셈 쳤으면 했다.
거실과 방 하나, 화장실까지 거쳐 그것은 꼭 마지막에 내가 머물던 방으로 들어왔다.
내 방에 들어오면 나는 그것이 나가기까지 걸리는 시간 20초를 마음속으로 거꾸로 셌다.
내 방을 여기 저기를 아주 천천히 걷던 그것은 시간이 되면 나를 지나치고 다시 거실을 배회하다 어느순간 사라졌고
그러면 나는 가위에서 풀려, 겁에 질린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을 꼭 감은 탓인지, 어릴 적 나는 그것의 형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집안 사정이 괜찮아져 원래의 동네로 이사를 한 후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 후 성인이 된 나는 취업을 했었고 운이 좋게도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했었다.
사회초년생, 처음 입사한 회사, 할 줄 몰라도 호기롭게 뭐든 열심히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방팔방 배우고 습득하는 단계를 거쳐, 내게 주어진 업무에 치여 선배들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시기였다.
회사는 첫 이미지와 다르게 열정을 페이로, 야근은 당연시하게 여기는 회사였었다.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 밤마다 가위에 눌렸었고 어느 날 그것은 다시 나타났다.
상사에서 혼나고 불필요한 야근까지 하여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날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김없이 가위 눌린 내게 다시 나타났고 나는 어릴 때와 달리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내 주변을 걸어다닐 뿐, 나에게 해를 끼친다던가 무슨 행동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그것은 이번에 다르게 반응했다.
거실에서 나타나 어릴 때와 같이 안방, 작은방 등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내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 나는 바로 눈을 꼭 감았다.
내가 느끼기엔 그것은 내 방문 앞에서 한참을, 오래 멈춰서있었다.
'갔나?'라는 생각이 들 때 쯤, "끼이익" 방문의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것은 내 방안을 여느 때 처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릴 때 장판바닥에서만 들렸었던
'쩌적'
소리가 갑자기 다시 나기 시작했다.
뭔가 끈적한 것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마치 종이에 베여 피가 나는 손가락을 모른 채, 나중에 종이에서 손을 뗄 때 그 느낌, 그 느낌이 소리로 들린다면 이런 소리였을 것 같았다.
눈을 더 꼭 감고 어릴 때 처럼 숫자를 세며 그것이 나가길 기다렸다.
'쩌적' '...14'
'쩌적' '...11'
'쩌적' '...8'
'쩌적' '...5'
'쩌적' '...2'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다시 나갔고, 나는 안심하며 눈을 떴다.
근데 이상하게 가위가 풀리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꽉 죄이는 느낌이었다.
그것의 소리도 사라지지 않았다.
'쩌적'
그것은 소리상으로 내 방에서 부엌으로 가는 것 같았다.
'...끼이익'
부엌에 있는 어느 서랍을 여는 소리로 들렸었다.
부엌에서 무엇을 챙긴 그것은 다시 내 방으로 다가왔고,
나는 더욱 커진 두려움때문에 눈을 꼭 감고 다시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쩌적' '...14'
'쩌적' '...11'
'쩌적' '...8'
'쩌적' '...5'
'쩌적' '...1'
시간을 다 셌을 때 그것은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내 옆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나를 지긋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시금 숫자를 거꾸로 세며, 어릴 때처럼 빨리 가위가 풀리고 그것이 사라지길 빌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든 내가 갔을까 하는 마음에 살며시 실눈을 떴을 때,
'쩌적쩌저적저쩌적적쩌저적'
그것이 나를 보며 미친듯이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이미 떠진 눈을 감지 못하고 그저 TV에서 어린아이가 신나서 날뛰는 모습처럼 눈을 위로 치켜뜬 채 날뛰고 있는 그것을 볼 수 밖에 없을 때
나는 떠진 내 눈을 그것이 보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눈을 내리 깔며 내 눈과 마주쳤고 나는 기절해버렸었다.
그후 난 다시는 그것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잠을 자기 어려운 날엔 아예 밤을 새며 하루를 보내게 됐고 결국엔 몸이 상해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가끔씩 가위에 눌릴 때 나는 항상 눈을 꼭 감고 절대 뜨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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