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명칭과 내용은 허구입니다.
이 이야기는 30년 전 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있던 일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시골 동네였다.
흔히 말하는 시내나 읍내는 커녕 사람 하나 안 지나가는 작은 산골. 읍내까지는 무려 차로 1시간이 걸렸다.
마을 뒤쪽의 산을 넘어가면 산능선을 따라 심어진 감자밭이 있었다. 그 감자밭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돌곤 했다. 감자밭 끝의 집이 저승으로 가는 길이다, 사람을 벌주기 위해 감자로 심어 감자에 가둬버린다, 이 감자밭의 주인은 저승사자다 등등...
그러나 확실한 건, 그 감자밭을 가꾸는 사람도,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본 적 없다는 것이다. 더 미스테리한건, 그럼에도 매년 감자들은 잘만 자라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출입금지'라 적혀 있는 판이 붙어 있는 성벽 뒤의 그 농장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왜 감자들은 잘만 자라고,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날 또 다시 생기는지. 그래서 일단 무작정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 넓은 밭에 문 하나 없겠냐며 한 바퀴를 다 돌았지만, 문은 보이지 않았다. 밭 끝에 있는 다 무너져가는 집으로 통해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곳으로 가기엔 길이 너무 험해 보였다.
결국 나는 성벽을 넘기로 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그 밭에 들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성벽을 넘자, 안 그래도 넓어보였던 밭이 더 넓어보였다. 그날은 유독 안개가 줄어들어 그런지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밭을 둘러보기로 했다.
밭을 돌아보면서 특이했던 점은 그 넓은 밭에 감자만 심어져 있다는 것, 줄기가 특이하게-사람의 팔처럼-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때가 4월 초 쯤이었는데 감자들의 줄기는 커녕 새싹도 안 보였다는 것이다.
내가 밭을 다 둘러보고 슬슬 나가려는데, 성벽이 그날 따라 유독 높아진 기분이었다. 어쨌든 나가야 하니 성벽을 넘으려 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몸이 작아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자에 갇혀가고 있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마치 뱃속의 태아처럼 점점 몸 쪽으로 접혀지고, 이내 정말 감자 형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난 내 의식이 멀쩡한 형태로 문방구 포켓볼에 갇힌 것 마냥 있어야 했다. 거의 반나절동안.
순간 땅이 나를, 아니 이 감자를 끌어들이는 느낌이 났다. 땅으로 끌려간 이 감자는 잠시 뒤 땅에 내 다리로 뿌리를 내렸다. 지금 해보면 정말 아프겠지만, 갑작스런 상황들에 나는 한동안 벌벌 떨고만 있었다. 소문이 진짜였나. 난 그저 이 밭이 궁금했을 뿐인데. 들어오지 말걸. 어른들은 내가 이 밭에 들어온 걸 아실까?
거의 반나절을 밭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졸렸던 나는 두려움도 잠시 잠에 들었다. 내가 깬 건 내 팔이 줄기처럼 땅 위로 뻗어나간 후였다. 그리고, 난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이건 분명, 사람 발소리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냥 지나쳤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팔과 다리의 고통을 견디며 버티고 있었다.
그 후 세 밤이 지나고, 내가 감자가 된 지 다섯 번째 날이었다. 슬슬 배고프고 목마를 법도 한데, 내가 잠 자는 사이에 물이라도 주는지 딱히 그런 것은 없었다. 고통은 여전했으나 슬슬 익숙해졌고, 점차 모든 욕구가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사람인 것 같았다. 이번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나갈 것 같다는 직감이 왔고, 정말 있는 힘을 다해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이번에도 못 들은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온몸을 흔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하려 한다고 될 게 아닌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일단 그거라도 해보기로 했다.
그 인기척이 내 앞으로 왔다. 그때 그 인기척이 말했다. "뭐야, 얘는 왜 여기 있지?" 남자 목소리였다. 그는 어딘가로 가더니, 잠시 후 땅이 파지는 느낌이 나면서 한 사람이 나를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다시 사람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순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다행이라는 감정 아니 생각 외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저 나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의 집으로 보이는 곳으로 갔다.
집 안은 깨끗했다. 그는 날 놔두고 잠시 어딜 나가더니 곧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니?"
내가 대답했다.
"저 산 너머에서요."
그 남자는 그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있더니 다시 나갔다. 그리고는 차를 가져왔다. 그가 마시라고 하자, 나는 그를 살짝 보며 일단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점차 사라져가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나는 그대로 한참을 울었다. 그와 동시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그걸 알았다는 듯이 밥을 주었다. 정말 살면서 가장 많이 먹었던 것 같다.
밥을 먹고 나니 졸려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 옆엔 아무도 없었다. 밖에 나가보니 갓을 쓴 한 사람과 그 남자가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 것 같아 내용이 궁금했던 나는 몰래 엿들었다.
"그러니까 저 애가 왜 거기 있던 건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저 애는 어떻게 하래?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
"직접 결정 하시랍니다. 알아서 하세요. 전 갑니다."
"야 잠깐만 기다ㄹ"
그러더니 갓을 쓴 사람이 대문을 열고 나갔다. 그 남자가 다시 문을 열었지만 이미 그 사람은 사라져버린 듯 했다.
그 남자가 돌아오려 하자 나는 얼른 내가 자던 곳으로 들어가 다시 자는 척을 했다. 그 남자는 내가 엿들은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곧 그는 주방으로 가 밥을 차리는 것 같았다.
그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난 후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왜 감자가 되었고, 그는 누구이고, 갓을 쓴 사람은 또 누구인지. 무엇보다 내가 그 밭에 들어간지 엿새나 지났으니, 가족들이 걱정하시고도 남았을 것이기에, 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 남자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그 집을 다 둘러보고, 밭을 돌아보고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그냥 나가기로 하고 대문을 열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건너편에 뭐가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상했다. 그럼 그는 도대체 어디를 간 것인가.
순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렇게 잠이 올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눈을 감기 전 앞에 그 남자가 보였다. 어서 그 남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잠이 들고 말았다.
꿈에서 당시 암 투병으로 고생하시던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지만, 할아버지는 말을 하시기는 커녕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앞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눈부셔서 그곳으로 가기 싫었지만, 할아버지가 손을 꽉 잡고 계셔서 어쩔 수 없이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빛이 나는 곳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영태야. 앞으로는 이 밭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말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살아야 한다. 알겠지?"
그리고는 한 초가에서 잠이 깼다. 방에서 나와 보니 내가 전날까지 있었던 곳이었다. 집을 나와 보니 그 초가는 소문의 저승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는, 소문의 그 집이었다. 대문을 열어보니 소리가 좀 심할 뿐 그냥 잘 열렸다.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을 할 틈도 없이 서둘러 산을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막 어디를 가려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보고는 울면서 껴안았다. 어머니는 무슨 일인지 안다는 듯 나를 안아주셨다. 그날은 4월 10일. 할아버지의 기일이었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어머니가 내가 집에 들어가기 전 병원에서 연락을 받기 전까지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는데, 꿈에 길을 가다가 끼고 있던 옥반지가 떨어져 잃어버렸는데, 할아버지가 나와서는 나와 내 아빠 그리고 할머니를 잘 돌봐달라고 하며 옥반지를 찾아주셨다고 한다. 나는 그래서 아직까지도 할아버지가 나를 구해주셨다고 믿고 있다.
다만, 왜 난 그곳에 이레나 있던 것처럼 느꼈음에도 밖에서는 반나절도 안 지났는지. 내가 왜 갑자기 감자가 되었는지.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그 집의 문이 열리는지 궁금해 다시 가보려 했으나, 그 밭에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있었기에 그 후 한 번도 그 산을 오른 적이 없었다. 아마 당분간은 그 남자를 볼 일이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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