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금요일 저녁, 여자친구가 제 회사（및 자취방 근처）까지 찾아왔어요.
저녁을 맛있는걸 먹고, 9월 말에 갈 제주도 여행에 대해서 숙소를 어떻게 잡을것인지 지도앱을 켜고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시간을 갖자고 하더라구요.
권태기인지, 마음이 뜬건지 모르겠다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는걸 처음으로 겪어봤네요...진짜더라구요
저는 왜 이걸 몰랐을까요?
카톡이 뜸해지는건 요새 하고 있는 취미 생활이 바빴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을 떼는 과정이었고,
썸원에서도 근 몇 주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로 표시하고 있었더라구요.
제가 눈치가 없는게 맞나봅니다.
자취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둘이 깊게 얘기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아마 봄?여름쯤부터 저를 좋아하는게 맞나 고민이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커플은 5년 넘게 사귀면서 대놓고 싸운적은 없고, 서로 서운함을 드러낸 적은 종종 있는데요, 작년에 여행을 다녀온 후 제 행동에서 서운함을 느꼈던 점을 추후에 데이트 중 얘기해서, 그때 저는 이러한 생각으로 행동을 한거고, 서운할줄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여자친구도 이에 대해서는 '역시 말하는게 맞았겠지? 우리 이런거 얘기하기로 했으니까' 정도의 반응으로 넘어갔구요.
근데 그 이후 혼자 여행도 갔다오면서 뭔가 저랑 성격이 안 맞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아니면 그 때 그게 '정뚝떨 포인트'였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취미로 하는 모임에서 장기연애와 다르게 재미를 느끼면서 우리 관계에서 권태를 느꼈을 수도 있구요.
얘기를 하면서, 그리고 결혼을 할 때 까지 취직을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대요. 저에 비해서 본인이 가진게 너무 없는것 같대요. 말하다보니 이게 더 큰 것 같기도 하대요.
아무튼, 2주간 생각할 시간을 갖고 13일에 얘기하고 싶대요.
많이 울고, 난 아직 많이 좋아한다고, 결혼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결국 지하철을 탈 때까지 말을 주워담지는 않더라구요.
그리고 주말부터는 카톡은 하는데, 서로 하트도, 사랑도 얘기하지 않고요, 마치 GPT끼리 얘기하는 것 같더라구요.
오늘 잘 잤어? 좋은 하루 보냈으면 좋겠다.
푹 잤으면 좋겠다 같은....
오늘 아침까지도 그랬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동기들과 만나면서/혹은 단톡에서 그들에게 상황을 공유했죠.
일부는 완전 T이고 무뚝뚝한 제가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고, 그녀에게 의존하듯이 2주 전에 빠르게 찾아가서 대화를 시도해야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뭔가 느낌을 받지 않겠냐고. 2주라는 긴 시간 동안 그냥 두면 오히려 마음만 식을거고, 13일에 헤어질 통보만 받게 될거라고.
근데 뭔가 끌리는 제안이 아니더라구요. 만약에 권태기라면 해결이 될 수도 있겠죠. 근데 마음이 뜬거라면? 나는 2주라도 채워서 아름답게 헤어질 기회조차 놓치고 추하게 차이게 되는게 아닌가?
아니? 어쩌면 마음이 뜬거라면 1주일 일찍 차이는게 뭐가 대수인데?
그래서 일단은 일찍 불러내보자, 라고 생각을 굳혀가다가...화장실을 가면서 문뜩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걔도, 나도, 서로 결혼 전에 놔줄 마지막 타이밍이라고 느끼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친구는 아직 20대 중후반이에요. 요즘 시기로 봤을 때, 당연히 뭘 가진게 없어야 하고, 당연히 취준생일 수 있죠. （4년제는 아니라서 졸업이 빨랐지만요）
저는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추진했을까요?
당연히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그녀가 취직할거라고 막연한 믿음?
근데 그녀가 결혼 전에 취직을 못할수도 있다고 얘기하니까
그걸 마주하기 싫어서 일찍 찾아가기 싫어했던걸까요?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더라구요
배우자가 파트타임만 하더라도,
전업주부여도
괜찮겠나? 그래도 결혼할 거냐라고?
저도 알고는 있었어요
부모님이 탐탁치 않아하는게 은근 보였고
저 또한 아내가 계약직만 전전한다면? 에서 멈칫 하게 되더라구요.
'내 스펙이면 더 좋은 조건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진짜 속물적인 생각도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그래서 제가 일찍 찾아가는게 망설여졌을 수도 있나봐요. 사실은 붙잡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저도 그녀가 지금 그런 취미 생활을 할 때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어요. 근데 내가 이걸 내비치면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 그녀가 압박을 느낄까봐,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었던것도 있는것 같아요. 취미 생활에 그만 집중하고 나에게 카톡을 더 열심히 해줘, 라고 말하는게 그녀가 안 그래도 현실적인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취미의 행복마저 뻇을까봐.
결국 제가 수영하러 오고갈때 자전거에서 생각했던 최악의 이지선다가 도래한거 같네요.
만약에 그걸 못참겠으면, 일찍 만나든, 2주 뒤에 만나든. 잡지 말아야겠죠. 다시 만난다 한들 서로에게 시간을 뺏는 결과만 만들겠죠.
내가 만약 모든걸 포용할 수 있다면, 현실적인 조건을 내려두고 너만 있으면 된다면, 그렇게 미래를 꾸려나가는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일찍 만나든, 나중에 만나든 얘기를 해야겠죠. 작년의 이슈도, 현실적인 문제도 난 다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달라지고 노력해보겠다고.
그 뒤에는 칼자루는 온전히 그녀가 쥐게 되겠죠. 그럼에도 헤어지는게 낫다고 판단한다면 6주년까지 1달 가량 남은 연애가 여기서 끝나겠네요.
지금은 어느정도 마음이 굳혀졌어요. 이 줄다리기에서 저는 제가 줄을 자를 수 있는 칼을 내려놓고 양손 꽉 줄을 잡으려고 합니다.
어제 짧은 전화통화로 수요일 저녁에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고, 저는 이 관계를 먼저 놓고 싶지 않음을, 너가 필요하다면 결혼을 준비할 시간을 기다리고 싶고, 너의 경제적 상황은 하나도 상관이 없고, 혹시 내가 배려 부족으로 상처입었음이 미안함을, 그리고 혹시 우리 관계가 나아질 수 있다면, 같이 걸어가줄 수 있냐고 물으려고 합니다.
그나마의 좋은 시그널을 찾자면 전화를 통해 서로 전화로 밥이나 약 등을 잘 챙겨먹었는지, 먼저 약속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한다거나, 저 또한 갑작스레 제안한걸 받아줘서 고맙다고 전한 정도가 있겠네요.
이제 저는 제 태도를 정했습니다. 아마 세 가지 정도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요.
제 설득을 듣고 돌아오거나,
제 설득이 전혀 이상한 포인트였기 때문에 오히려 실망하고 줄을 놓거나（이러지 않기 위해 먼저 생각을 많이 해보았는지, 혹시 지금은 어떤 감정이고 왜 그런지를 먼저 들은 후에 제 입장을 전달하겠지만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13일까지 결과를 보류하게 될 것 같아요.
행복을 빌어주세요.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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