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9시 50분. 모든 국군 장병들이 열심히 일과를 할 시기.

“아 뻐근하다.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뭐 이렇게 피곤하냐..”

나는 자리에 앉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제 늦게까지 얘기하시다 주무시니깐 피곤해서 그런거 아닙니까? 그러니깐 일찍좀 주무십쇼.”
“헉!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 조용히 얘기했는데!!”
“그걸 조용하다고 합니까? 문 밖에서도 들렸습니다. 큭큭”

박 일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잠을 설쳤으면 짜증날 만도 한데, 이렇게 웃어주는 건 박 일병밖에 없다. 다음부턴 더 조용히 얘기해야지.

“아, 그렇냐? 하하하 앞으론 제 시간에 잘게.”
“아 괜찮습니다. 말년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제 얘기는 꽤 재밌었습니다.”
“뭐?”

윽..그걸 다 들었다고? 내 흑역사도 말했는데..젠장

***

나는 이제 한 달쯤 지나면 말년휴가를 나간다. 떨어지는 낙엽도 호들갑을 떨며 피할 시기. 그래서 다른 부대는 나 정도 짬이면 아무것도 안하고 논다. 일거리도 없고, 갈 준비를 시켜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부대는 간부정예화 부대. 용사들이 일꾼이다. 그리고 딱히 일정 없는 지휘차 운전병은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잡병이다.

“어이 김 병장!!”

보급관이다. 젊은 나이에 상사를 단 엘리트 중의 엘리트. 허구한날 빵꾸가 나는 보급이었지만, 이 아저씨가 보급관을 한 뒤로 빵꾸 따윈 사라졌다. 무튼 작업하는 것이 거의 다 보급 쪽이다 보니 나는 보급병, 보급관과 가장 많이 부대낄 수밖에 없었다.

“김 병장! 이따가 박 일병이랑 탄약고 갈 일 있으니까 같이 가자!”

작업할 거 있으니 같이 해달라는 말이다.

“아... 그거 어제 다 마무리한 거 아니었습니까?”
“응? 뭔지 알고 그 소리냐? 오늘 할 거는 다른 거야.”
“....”

어제 분명히 내일은 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휴! 이제 다 끝났다! 고생했다! 보급관이 커피 하나씩 사줄게!!
”감사합니다!“

그래도 항상 이렇게 보상을 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칭찬으로 끝났으면 나의 애국심은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작업 도구 좀 실어라!“
”예!“

작업도구들은 다 예초기, 곡괭이, 삽, 페인트 통 등이었다. 다 흙투성이에 페인트 통은 잘못하면 차에 페인트를 흘릴 수도 있었다. 다 내가 청소해야 해서 최대한 조심해서 올린다.

”어이 김 병장! 뭐 마실거야?“
”앗 저는 그린티라떼 마시겠습니다.“
”그린티가 뭐야? 새로 나온거야?
“아.. 음... 녹차라떼입니다.”
“아~ 이 새끼 녹차라떼라고 하면 되지 쓸데없이 영어 쓰는 거 보소. 영어 공부하는 거 티내네.”

이 사람이 육군 상사라니.

“박 일병은 뭐 마시냐?”
“저는 아메리카노면 충분합니다!”
“좋아! 내려가자!”

우리는 탄약고를 내려와 차에 올라탔고, 나는 키를 차에 꽂고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탄약고로 날아갔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이....쾅!!!!!

헉. 말문이 막혔다. 탄약고 폭발하면 우리 다 죽는건데.

“.....보급관님? 방금 보셨습니까?
”어...음... 그런 것 같지?“
”어떡합니까? 가 봅니까?
“아냐. 나도 저런 일은 처음인데, 탄약고에 CCTV있으니까 상황병이 연대에 보고 했겠지. 우린 내려가자. 가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진 않겠지만, 탄약고가 폭발하면 어떡해.”

그것은 맞는 말이다.

***

우리는 셋이서 나란히 음료수를 사들고 대대로 내려갔다.

시끌시끌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대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아까 떨어진 것 때문이겠지.

“와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까 떨어진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거 북한이 쏜 겁니까? 우리 이제 전쟁나는거 아닙니까?”
“야야야 뭔소리야? 김 병장 소름돋게. 큭큭”

순간 철렁했다. 이제 한 달 남았는데 전쟁? 어림도 없지.

“충성! 복귀했습니다. 지원과장님!”
“엇! 아..예예 여기 다 왔습니다. 무사합니다. 예... 충성!”

우리가 복귀 신고를 하자, 전화를 하고 있던 지원과장이 반색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너네만 왔어? 보급관은?”
“화장실 갔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까 탄약고 뭐 떨어진 거 때문입니까?

그때 보급관이 들어왔다.

”오 지원과장님! 아까 제가...“
”보급관님! 다행입니다! 이따 보죠!!“

지원과장은 정신이 없는지 동문서답을 하고는 보급관을 지나쳐 나갔다.

”뭐야? 뭔데?“
”아까 뭐 떨어진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그때 탄약고에 있었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아~그렇겠다.“

그때 지원과장이 보급관을 불렀다.

”아 지금 가겠습니다! 너희는 너희 할 거 해. 고생했다!“
”예 충성!“

나는 다시 나의 지겨운 의자로 돌아갔다. 젠장.. 다시 1분이 1년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할 일은 많고, 왜 내 사수 때는 없었던 일들이 내가 인수인계 받자마자 늘어나는 것일까.

***

”으으으... 이제 이것만 마무리하면 끝이다..“

나는 기지개를 피며 시계를 보았다. 11시 45분. 이것까지 마무리하려면 애매한 시간인데..

”김 병장님! 식사 언제 하러 가십니까?“

박 일병이다. 벌써 할 일이 끝났나? 빠르구만.

”어어 나 이것만 마무리하고! 빨리 끝낼게!“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다시 컴퓨터를 보았다. 그런데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화면에는 작업하던 워드 파일이 아닌 파란 홀로그램 같은 화면이 나타나 있었다.

”어..?“

블루 스크린이다. 그럴 리가 없다. 세이브 안했는데... 제발

”으아아아아 씨발!!!! 개오바잖아!“
”워워 왜 그러십니까? 엇! 블루 스크린? 세이브 안하신 겁니까? 허허.. 짬이 얼만데..“
”하... 뒤질래? 살릴 수 있어...“

나는 이것저것 다 눌러봤지만, 컴퓨터의 화면은 바뀌지 않았다.

”야 이거 껐다 다시 키면 다 사라지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하... 돌아버리겠네..“

나는 전원을 끄기 위해 본체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런데 본체의 전원은 꺼졌지만 모니터는 꺼지지 않았다.
”뭐야? 왜 모니터 안꺼지냐?“
”전원 버튼 꾹 눌렀습니까?“
”어 존나 오래 눌렀는데? 왜 이러냐 이거?“
”그 콘센트 전원을 꺼보십쇼. 그거 하면 꺼지지 않겠습니까?“

틱
틱틱

콘센트 전원을 껐다 켜도 모니터의 화면은 그대로였다. 그때 보급관이 들어왔다.

”엇! 김 병장 네 컴퓨터도 이러냐?“
”앗! 보급관님! 이거 컴퓨터 이상합니다! 보급관님 컴퓨터도 이럽니까?
“어 내 컴퓨터도 이런다. 지금 참모부 컴퓨터 다 이런 상태야.”
“예? 왜 그런답니까? 이거 뭐 방산비리입니까?”
“하하하하 글쎄다. 윗대가리들이 주는게 다 그렇지 뭐... 어? 뭐가 나타나는데?”

보급관이 가리킨 내 컴퓨터의 파란 화면에는 깜빡깜빡 글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인간들]

인간들...? 뭐야이거?

“뭐지 이거...? 누가 적고있나?”
“그..글세 말입니다...”

글자는 이어서 계속 입력되었다.

[지금부터 게임을 하나 할 겁니다. 빠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참여하실 겁니다.]

“야 통신병! 여기 있냐? 컴퓨터가 좀 이상한데? 오 보급관!”

뒤에서 들리는 고성에 돌아보니, 작전과장이었다.

“충성!”

작전과장은 대충 경례를 받고, 보급관을 붙잡고 물었다.

“보급관! 이거 왜 이럽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아... 이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꺼봐도 꺼지지도 않습니다.”
“아 거참 바쁜데 정말... 통신과장은 어딜 간 거야?”

작전과장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컴퓨터에 다시 글자가 입력되기 시작했다.

“엇! 이거 보십쇼! 뭐가 또 나옵니다!”

[...]
[지금 게임을 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지금 너무 산만하군요 저에게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보급관님? 이거...”
“어..? 진짜 뭐지? 누가 어디서 적고 있나? 설마 해킹인가? 인트라넷을? 작전과장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급관이 작전과장을 불렀으나, 작전과장은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 잠시만요. 정보과장! 지금 어디서 뭐해! 컴퓨터 지금 단체로 맛이 간거 알아 몰라? 뭐? 지금...”

[음]

다시 컴퓨터에 글자가 입력되었다.

[어쩔수 없군요 이 중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면 집중을 하려나요]

뭔가 알 수 없는 소름이 끼쳤고, 우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통화하고 있는 작전과장에게 말을 걸었다.

“작..작전과장님? 잠시 정숙하셔야 될 것...”
“야! 지금 대대 컴퓨터가 다 블루..뭐시긴가 떳는데, 너는 팔자좋게 카페나 가고 있냐? 지금 당장 대대로....끄....꺼헉!”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작전과장의 머리가 없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런데 작전과장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참모부 사람들 거의 모두가 컴퓨터 상황을 해결해보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고 있었고, 당연히 잘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사람들의 언성이 꽤나 높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도...

퍽..퍼퍽...퍼퍼퍼퍽

전부 없어졌다.

[엇]
[살짝 고통만 줄 생각이었는데 이건 제 실수군요]
[그래도 조용히 되었네요 이제 저를 봐 주십시오]

나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피범벅인 참모부, 글씨가 나타나는 컴퓨터. 몰카인가? 꿈인가? 나도 죽나? 나 이제 곧 말년휴가인데... 곧 있으면 이런 지옥같은 곳에서 탈출인데... 나는 머리가 없어진 작전과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우웨에엑!!”

박 일병이 옆에서 속을 게워냈다. 그만큼 끔찍했다. 게임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상황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네요 시신경은 있는게 확실한데]

내 머리가 없어질까 싶어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아..있습니다. 보고 있습니다.”

젠장. 말도 재대로 나오지 않는다.

[오 다행이군요 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휴.
죽을 뻔 했다. 그 뭔가 조치라는 것이 이번엔 어디를 없애버릴지 모르니까.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턱이 덜덜 떨린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죠 여러분들은 저희와 놀이를 하나 해야 합니다 거부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거 하러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구체적인 건 알려줘도 모를 겁니다 이곳은 아직 문명이 부족하니까요 설명할 시간도 없고]

그 이후로도 컴퓨터는 계속 뭐라뭐라 얘기했지만, 나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대충 지들은 외계인이고 지구의 수준을 알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어디서 왔다고도 얘기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박 일병이 한 말은 기억한다.

“귀찮다면서 다 알려주네...헙!”

모두의 시선이 박 일병에게로 향했다. 이 자식 제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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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