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방법
1. 2. 3. 4. 같은 숫자: 개눈깔
ㄱ. ㄴ.ㄷ.ㄹ. 같은 한글: 주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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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그의 마지막 말



저기, 아마도 내가 오늘 그쪽을 죽여야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용서받지 못했거든.




0.생일 축하합니다, 나.


500에 20. 자살명소로 소문난 뒷산의 무연고자들의 무덤이 잘보이는 곳에 위치한 허름한 원룸.

처음 여기에 들어올 때부터 결심한 것이 있다.

바로 계약이 끝나는 날.

그것도 내 생일날.

나도 세상과의 인연을 끊기로.

황량한 산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의 시체들이 즐비하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잘 어울리는 말이 없다.

단지 하나, 귀신 나무라고 불리는 커다란, 그리고 기분나쁠 정도로 혼자만 생기있는 붉은 나무 하나를 제외하면...

붉은 나무가 귀신나무라고 불리는 이유는 하나다.

유일하게 가지가 튼튼해서 목을 매달기 적당하기 때문이다.

준비해둔 밧줄을 꺼내어 적당한 높이의 가지에 단단히 묶었다.

신변정리는 이미 마쳤다. 오래 전에.

남은 건 이 몸뚱이 뿐이다.

몇 백 번이고 상상해온 과정이 일어나려고 한다. 그만큼 침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밧줄을 붙잡은 손이 벌벌벌 떨렸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죽어야만 한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을 해봤어도, 내 인생은 더욱 시궁창으로 떨어질 뿐이다.

뭐?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지랄 마. 난 이미 지옥에서 살았는데 지옥이 무서울까?

그렇지만 결심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해가 저물 때가 되서야 겨우 머리를 들이밀게 된 것이다.

"커헉....!"

목이 졸려온다. 롤러코스터가 떨어질 때의 오싹함이 계속 허리를 오르내렸다.

-이히히히히

바람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혀가 튀어나올 때, 귀신나무의 거친 표면에 눈으로 피를 흘리는 무표정한 수 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들은 '이제 곧 너도 우리 중 하나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히히히히히.

수 많은 무표정한 얼굴들을 헤치고 웃는 노파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삶? 복수?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어두워졌다. 노파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삶? 복수?

꽉 조여진 밧줄을 느슨하게 만드려고 손으로 쥐어보았지만 더 조여들 뿐이었다. 노파는 이제 지척에 다가와 불쾌한 숨을 내뿜어대었다.

-삶? 복수?

주마등이 지나간다. 주마등이라고 해봤자 씹창난 인생이 씹창나는 과정이었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내 인생을 씹창내놓은 그 여자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더욱 더.

-삶? 복수?

노파의 등 뒤로 나타는 무수한 얼굴들도 말하기 시작했다.

-복수를 선택하지 마, 복수를 선택하지 마.

이가 갈렸다. 내 인생을 망가트려놓은 그 여자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나만 이꼴이다. 어차피 이대로 살아봤자 망가진 인생인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 복수?

노파가 재촉하며 묻는다.

-복수를 선택하지 마, 복수를 선택하지 마.

무표정의 얼굴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말린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있었다.

"......복수!"

대답을 듣고서는 노파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노파의 큰 입이 점점 더 크게 찢어졌다. 커진 입은 내게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이윽고 나를 지저분하게 집어삼켰다.













ㄱ. 하얀색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주미야~ 나와봐, 지금 밖에....!"

교회에 가는 시간도 아닌데 아침 일찍부터 경아가 호들갑스럽게 불러 나가보니 첫눈입니다.

매년 이맘때쯤엔 항상 오는 것이 눈이지만,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게 됩니다.

여름에 태어난 경아네 집 백구는 처음 보는 눈이 신기한 듯 혀를 내밀다가, 도톰하게 쌓여있는 눈 위로 팔짝팔짝 뛰고,

동네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고,

쓰러진 남자는 벌벌 떨고 있..........엥?

"경아야, 저거 사람 아니야?"

"옴마야, 사람 맞는거 같아! 어떡해, 울 엄마 불러올게!"

경아가 호들갑 떨며 집으로 쏙 들어간 사이 전 쓰러진 사람을 흔들었습니다.

"아저씨, 일어나봐요!"

나는 무작정 남자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어디...?"

"왜 이런데서 이러고 있어요! 그것도 얇은 옷만 입고서! 얼어죽으려고 작정했어요?"

남자는 아직 정신차리지 못했는지, 풀린 눈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죽여야해.... 복수......난 복수를 택했....."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제 팔목을 세게 붙잡고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미희 어디있어."

주미희...?

그건 내 이름인데.






1.자살은 실패

망할. 왜 이렇게 된거지?

힘 빠진 몸은 무기력하게 늘어질 뿐이었다.

빨리 주미희를 찾아야 하는데.

찾아서.....









ㄴ. 개눈깔

가을 옷을 입고 쓰러져있던 남자를 교회로 데리고 가 밥을 먹였습니다.

"넌....?"

"아, 제 이름은..."

원래 이름을 대도 되는 걸까요. 전 분명 들었거든요. 주미희에게 복수하겠다는 그 말을. 죽여야한다는 그 말을.

"주미야!"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경아가 저를 불렀습니다.

"주미....주미구나. 그래. 고마워, 주미야."

다행히도 아저씨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아저씨는요?"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제 이름 들으셨잖아요. 아저씨도 말해야죠."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답했습니다.

"개눈깔. 그렇게 불러."

"왜 개눈깔인데요?"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국밥을 먹었습니다. 혹시 실례라도 했나 싶어 말을 슬쩍 돌렸습니다. 정말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자연스러웠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주미희는 왜 찾는거에요?"

"그 여자가 내 인생을 망쳤거든."

나는 문득, 나와 이름이 같은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망쳤는데요?"

남자는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걷어 가려졌던 한 쪽 눈을 보여주었습니다.

"봐, 이게 그 여자의 작품이야."

나는 깜짝놀라 뒤로 자빠졌습니다. 부서진 벌집을 본 적이 있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걷힌 머리카락 뒤의 피부는 부서진 벌집의 단면처럼 울퉁불퉁하고도 징그러웠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징그럽고도 무서운 것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얼기설기 엮인 피부 사이에는 흉칙하게 일그러진, 개눈깔로 불릴법한 눈이 증오를 가득 담아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2.잘못된 시간대

기시감이 든다.

그러고보니 자살을 기도한 후 얼마나 지난거지?

왜 눈을 떠보니 처음보는, 그러면서도 익숙한 동네인거지?

"오늘 몇일이야?"

궁금해 물어보니,

"12월 20일이요."

어쩐지 춥다했더니, 3달이나 지난건가.

하지만 걸려있는 달력.





빌어먹을!





1975년이다.





주미희가 아직 내 인생을 망치기 전, 18살일 때.















ㄷ. 복수도 밥을 먹어야 한다.

며칠 동안 교회에 머무르던 개눈깔 아저씨는 일용직을 구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복수도 밥을 먹어야 하는거라나 뭐라나.









3......까지 364일.

좆망했다.

신용카드는 발급일이 2019년이었고 유효기한이 2024년까지다.

우리나라 지폐 신권은 2007년부터 발행되었다.

스마트폰은 당연히 나오기도 전이기에 항상 통화권 이탈 표시가 떠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1975년에선 내 신용카드, 현금, 전부 다 쓸 수 없는 종이와 플라스틱 쪼가리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망할.











ㄹ. 무엇을 위해 당신은 기도하나요?

개눈깔 아저씨는 일하지 않을 때는 늘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봐, 저 노가다 개눈깔 새끼 또 기도하는 거."

"하긴 기도 말고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어?"

그 독실한 모습에 민철 오빠와 그 패거리는 비웃었고,

목사님은 그를 신실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워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의심스러웠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을 때의 개눈깔 아저씨는, 내게 주미희에게 복수를 해야한다고 하던 그 눈빛에 독기가 어린 아저씨가 아니었습니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나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간 질문에, 개눈깔 아저씨는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대답해주었습니다.

"기도하는 거 아니야. 도망쳐온거지."

"하느님은 아저씨를 보듬어주실거에요."

"내 눈깔이 병신될 때 그 하느님은 뭘 하셨다니?"

덤덤한 어조지만 비꼼이 다분한 말에 화가 났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비꼬며 역으로 질문했습니다.

"아저씨는 그럼 왜 하느님한테로 도망왔는데요?"

"주미희, 그 악마 같은 여자가 교회를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거든."



다시 그 여자였습니다.



나와 이름이 같은 그 여자.

















4......까지 274일


그나저나 요즘 들어 주미라는 이름의 여자애가 자주 말을 걸어온다.

최대한 말을 아끼며 살아가고는 있는데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이 여간 성가시지 않다.

"아저씨, 아저씨. 계란 삶은 것 좀 있는데 좀 드세요."

"....고맙긴한데, 네 일이나 신경써."

"아이, 전 알아서 잘 하고 있어요. 통역사 되려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걸요! 엄마는 시집이나 잘 가라고 하지만, 전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도 보고, 많은 걸 느껴보고 싶어요. 미국에는 사과에 사탕을 씌워서 판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여기로 왔을 때 구해준 애이니 왠만해선 다 답해주긴 하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대요. 우리 엄마가 알면 다리 분지르고 쫓아내겠지만요. 히히."

귀찮은데.

주미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말을 걸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주미의 친한 친구 박경아와 그 언니 박미희가 주미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야, 왜 계속 저 아저씨한테 말 걸어. 무서운데."

"왠지 친근해서 그래. 경아야."

"맞아, 나도 저 사람 좀 무서워. 저번에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만 듣고 눈 무섭게 돌아가면서 화내더라고. 이상한 사람이야. 내 성씨를 듣고 사과하긴 했는데, 좀 이상해.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래."

그럴 때면 주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미희 언니. 그러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라도 친구가 필요해요."


가식. 가식이다.



분명 가식일 것이다.

















ㅁ. 예비살인자

"얘."

개눈깔 아저씨가 무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한테 말걸지 마."

"왜요?"

나는 내가 싫다거나 그런 이유를 댈 줄 알았습니다. 개눈깔 아저씨는 눈을 굴리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나는 살인자거든."

"그러면 왜 감방에 안들어가 있는데요?"

"아직 안 죽여서."

"저번에 그 여자 이야기하는거에요? 주미희?"

"그래."

"그 여자를 만나면 죽일건가요?"

"당연하지."

"그 여자가 아저씨의 눈을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건가요?"

"그것뿐만이면 죽일 생각 안해. 그 여자는 내게 거대한 빚도 지웠어. 그걸 갚느라 나는 내 젊음을 잃었지."

개눈깔 아저씨는 다시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습니다.











5.?*~&#까지 250일.


하루에 한 번씩, 문자가 온다.

[?*~&#까지 250일.]

처음 이곳에 떨어진 날부터 365일에서 시작되던 날짜가 하루하루 줄어간다.

발신자는 표시제한.

분명 무언가의 카운트다운이다.

하지만 글자가 깨져 앞은 읽을 수 없다.

아마 '복수'까지 앞으로 250일이라는 뜻이겠지.

카운트다운이 다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서 주미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ㅂ. 개눈깔의 이유





폭삭 늙어있는 얼굴에 지친 눈동자. 개눈깔 아저씨는 목소리는 대학생처럼 젊었지만 세상 모든 불행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그 여자는 아저씨의 눈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세상엔 여자에게 못된 짓을 하려다가 도리어 당하는 남자도 있는 법입니다.

나는 개눈깔 아저씨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쌍커풀 진 쪽 눈깔을 보면 자기 인생을 망친 남자가 생각난다고 하더라고."

"고작 그런 이유로요?"

"뭐, 그 여자에겐 중요한 이유였겠지."













6.*#&×까지 225일.


땀을 흘려 일하면 손에 쥐어지는 몇 만원. 오랜만에 손에 쥐어보는 돈에 새삼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일하면 일하는만큼의 보수를 받는다. 그 동안의 삶에서는 부정당했던 상식이다.

돈도 써본 놈이 잘 써본다고, 나 역시도 그랬다. 돈을 받기 전까지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분명 그랬는데. 막상 돈을 받으니 뭘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처음 돈을 받은 날에는 잘 드는 칼을 샀다.

둘째 날에는 농약을 샀다.

셋째 날에는 밧줄을 샀다.

넷째 날부터는 그냥 통닭을 샀다. 맛있었다.

통장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그 몇 만원이 고스란히 수중에 남는다는 것이 기뻤다.

빚을 갚고 나면 늘 사라졌던 돈이, 그런 돈이, 내 손에 그대로 남아있다. 통닭이 짜다. 어느 정도로 짜냐 묻는다면, 눈 앞이 흐려질 정도로 짜다. 결국 나는 때 탄 소매로 눈을 문질러 닦을 수 밖에 없었다.









ㅅ. 왜?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는데요."

개눈깔 아저씨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습니다.

내 말을 듣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일단 한 번 말을 던져봤습니다.

"그 여자가 아저씨의 눈을 그렇게 만들 동안 왜 아저씨는 저항하지 않았죠? 왜 빚까지 떠안은 거에요?"

"......그 여자를 사랑했으니까. 나에겐 그 여자가 전부였으니까."

"그렇다면 아저씨는 왜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하는데요?"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까."













7.?*~&#까지 216일

"그러면 그 뒤에 그 여자는 벌을 받았나요?"

"그래. 그렇지만 충분하지는 못했어."

"왜요?"

"경찰도, 변호사도, 그 여자의 편이었거든. 난 인권변호사가 이 작은 땅에 그리도 많은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버러지 자식들."

"그러면 왜 그들은 그 여자의 편을 들었어요?"

나는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주미희가 모두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미희의 기구한 일생탓이었다.

그 기구한 사연탓에, 주미희가 가해자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되었고, 나도 화풀이 당해 마땅한 인간이 되었다.

주미희는 얼마 길지 않은 형을 살고 나온 뒤 십 몇 년 후가 지나서야 나를 찾아왔다. 나를 찾아온 주미희는 자신은 배운 것도 없고 모아둔 것도 없고 친구도 만들 수 없었고, 가족에게도 성인이 되자마자 버림 받았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 때쯤엔 사랑은 거의 없었지만 인간으로서 주미희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주미희와 같이 살며 주미희가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도우려고 했다.

주미는 이해할 수 있을까?

"너희 집은 어때? 가족은 화목해?"

"아버지가 엄하시긴 한데, 저희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거야."

"왜요?"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미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 없을테니까.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사랑 받고 자랐다면 이런 갈증 같은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점점 나를 죽이는데도 당장의 목마름에 바닷물을 퍼마시는 사람의 심정을 모를테니까.

작은 카페를 차리면, 주미희와 나, 어쩌면 둘이 잘 살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간의 미움과 원망이 기적처럼 녹아내리고, 서로의 상처도 나아가며 살 수도 있을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적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지극히 뻔하고도, 반전이 없는, 그런 사람.

주미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거대한 빚을 지우고 도망가버렸다.

주미희는 그러면 안됐다.

적어도 주미희는 절대로 내게 그래서는 안됐었다.

"내가, 용서했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모두 내게 그 여자를 용서하라고 했어. 그래서 난 용서했어."

그 때, 내 눈을 지져 아주 병신으로 만들어버렸을 때, 처벌이 약했던 이유에는 내가 주미희를 용서한 것도 있었으니까.

























ㅇ. 그 여자

그 여자가 내가 아닌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야 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제서야 저는 거짓말을 멈추었습니다.

사실 거짓말까지는 아니고 얼버무린것이지만, 그냥 아저씨가 모르던 사실을 슬쩍 흘리기로 했습니다.

"저랑 이름이 같은 사람이 그런 짓을 하다니, 끔찍해요."












8.아



18살


시언동에 사는 여자애



이름은 주미희



너였구나. 처음부터 너였어.



주미희 이 씨발년.



또 날, 또 날 속였어!



내게 빚을 넘겼던 그 때처럼, 날 속였던 그 때처럼!



지금 죽여야 해. 죽여버려야 해.



칼은 가져오지 않았지만 내겐 주미희를 죽일 다른 방법이 있었다.



주미희의 흰 목덜미가 보인다.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주미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저 가느다란 목덜미를 내 손아귀로 움켜쥔다면,



그렇기만 한다면.......













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슬퍼요."

개눈깔 아저씨는 빚을 갚느라 뭐든 했다고 합니다. 대학교 등록금을 다시 빼서 갚고, 다시 돈을 벌고, 메꾸고. 상한 밥을 먹고, 제적당하고, 취업에서는 얼굴 때문에 무시당하고.

개눈깔 아저씨는 무서운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당해야했던 일이 더욱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아저씨는 그런 일을 당해야했던 걸까요. 개눈깔 아저씨,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요."

제 말에 개눈깔 아저씨는 들어올렸던 손을 내리더니, 허망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습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9.당신의 동정심

서럽게 우는 주미희의 모습에 나는 결국 주미희를 죽이지 못했다.

이 때의 그녀에게는 동정심이 있었구나 싶었다

나를 만날 때도 그 동정심이, 아니 그 절반의 절반이라도 그 동정심이 남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봤다.

소용 없는 상상이다.

미래의 주미희는 이미 내 인생을 처절하게 망가트렸고,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주미희는 내가 아는 미래의 주미희와는 달랐다. 나를 불쌍히 여기며 눈물짓는 18살의 순수한 소녀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잠깐 주미희를 죽이는 것을 미뤄두기로 했다.

















ㅊ.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세요, 아멘.

벌써 나도 고 3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가면 잘생긴 대학생 오빠들도, 친절한 친구들도 잔뜩 만들 수 있겠지요.

기대됩니다

"미희! 대학은 어디로 갈 생각이야?"

민철 오빠가 부드럽게 미소짓습니다. 안경 너머의 딱정벌레 같이 검은 눈이 반짝였습니다.

사실, 지망 학교는 민철 오빠가 다니는 곳이지만, 괜스레 부담스러워 말을 흐렸습니다.

"아, 저 그냥..... 영어영문학과 생각하고 있어요."

"주미! 나랑 문방구 가기로 했잖아~"

멀리 떨어져 있던 경아에게 눈빛을 보내자 용케 알아채고 제 곁으로 와줬습니다.

"아무래도 민철 오빠가 너한테 관심있나본데."

"어휴, 난 싫어! 느끼하게 생겼고, 키도 작잖아."

"그래, 민철 오빠랑은 친하게 안 지내는 게 좋아. 조금.... 소문이 나빠."

민철 오빠가 조금 못생기긴 했어도,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무슨 소문?"

그렇게 물어봤지만, 경아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10.주미희의 생일

오늘은 주미희의 생일이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주미희는 자라서, 내 인생을 망쳐놓겠지.

그래서 이번엔 농약을 탄 주스를 준비했다.

"아저씨, 오늘이 제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쩌다보니 그냥."

"아저씨 생일은 언제인데요?"

"이미 지났어. 저번 달이거든."

"어머,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러면 챙겼을텐데!"

"필요 없어. 원래 그런 거 안 챙겼으니까."

"그래도."

"......그러면 그냥 축하한다고만 해줘. 9월 20일이야. 내 생일."


어차피 축하할 수도 없겠지만.

"네! 기억해둘게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미희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런데, 주미희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꼬물거렸다.

"그런데 등 뒤에 그건 뭐냐?"









ㅋ. 생일선물

민철 오빠에게는 향기나는 공책을 받았습니다.

경아와 미희 언니한테는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강아지 키우고 싶다며, 네가 잘 키워라."

강아지!

강아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강아지를 업어들고 개눈깔 아저씨에게 달려갔습니다.

"오늘 생일이지. 생일 선물이야."

그러자 아저씨는 주스를 내미는 것입니다.

아저씨의 생일은 안타깝게도 지나버려서 챙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등 뒤에 그건 뭐냐?"

"아, 성진이에요."

".....성진? 그거 사람 이름 아니냐?"

"그래도 이름은 예쁜 거 붙여줘야죠."

"바둑이나 점박이는 어때."

"옛날에, 듣기로는 누군가의 이름은 삶을 결정한대요. 그래서 예전부터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구요, 이거. 만약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을 위해서 어떤 이름을 지어줘야 할지. 성, 진.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아이라는 뜻이에요. 어때요?"

"그런 뜻이 있었어?"

"그럼요. 좋은 뜻을 줘야 그대로 오래 살테니까요. 크게 되지도 밝게 빛나지 않아도 되니까, 이 아이가 스스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강아지의 등에 얼굴을 파묻자 꼬순내가 났습니다. 꼬불거리는 털에 가려져 그 때 개눈깔 아저씨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역시 멍멍이 이름으론 거창하고 좀 사람 이름 같은가? 엄마 말대로 하양이로 짓는 게 낫겠죠?"

아저씨의 손에서 주스가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습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주스병이 깨졌습니다.







11. 어이없어

강아지를 위해서 이름을 지어주다니.

그래놓고서 그렇게 환하게 웃다니.

반칙이야.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내가 아는 너의 모습으로 나타났어야지.

세상 모든 것을 원망하는 그런 악독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어야지.

나에게 못할 짓을 하고도 환하게 웃던 나쁜 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어야지.

네가 이러면, 내가 널 죽일 수 없잖아.











ㅌ. 개눈깔 아저씨의 기도

"아저씨, 뭘 위해서 기도하나요?"

"너를 위해서."

의외의 대답에, 저도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저도 아저씨를 위해서 기도할게요."

아저씨는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가, 위를 바라보았다가, 아저씨의 모은 손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네가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기왕이면 대학입학시험도 잘 보라고 해주세요. 전 통역사가 되고 싶거든요. 통역사가 되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돌아보고 싶어요."

"그러면 네가 올바른 영문과 학생이 되기를. 그래서 네가 바라던 멋있는 통역사가 되기를 빌게."

"그러면 저는 아저씨가 결국엔 행복해지기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저씨는 기도를 하다가, 물기어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고마워."

























12.,#*#?×까지 30일.


주미희를 죽이려고 사둔 칼은 녹슬었고, 농약은 모두 버려버렸다.

그래, 이거면 된거다.

마지막으로 밧줄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처음엔 주미희를 죽여버리고 다시 자살할 생각이었지만, 다시는 그런 생각은 안하려고 한다.

그 때, 2021년에서 나는 왜 죽으려고 했더라?

맞아, 모든 빚을 다 갚고, 모든 게 허망해져서 죽으려고 했어.

그런데 막상 죽으려고 하니 일부러 잊으려 했던 억울함이 마구 올라오더라.

하지만 이제는 그냥, 그 억울함을 놔줘야지. 주미희도 놔줘야지. 너무 오랫동안 주미희에게 매여 살았어.

지독했던 짝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가망이 없던, 뒷맛이 좋지 않은 그런 짝사랑.

오랜만에 다시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열심히 일하느라 한 동안 보지 않은 핸드폰에는 다량의 문자가 와 있었다.


[#*#?×까지 194일]





[#*#?×까지 193일]





[#*#?×까지 192일]





[#*#?×까지 191일]





[#*#?×까지 190일]





[#*#?×까지 189일]





[#*#?×까지 188일]





.





가장 최근의 문자까지 내렸다.

그제 온 문자부터는 글씨가 깨지지 않은 상태였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그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욕설을 뱉으며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어째서? 액정이 바닥에 부딪혀 거미줄처럼 줄이 주욱 가며 깨졌다. 하지만 이미 와 있는 문자의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죽음까지 30일.]





















ㅍ. 대학 합격

드디어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오, 미희, 나랑 같은 학교에 합격했다면서?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하더니, 결국 해냈구나. 술 좀 마시지 않을래? 대학가서 술 못마시면 공부만 한 샌님 취급 받는 거 알지? 오빠가 가르쳐줄테니까 오늘은 몰래 나와."

평소의 부모님은 엄하시지만 오늘만은 괜찮겠죠. 대학교에 합격했으니까. 술을 못해서 쪽팔릴 일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네!"

늦은 밤, 하양이의 눈을 피해 교회에 가자 민철 오빠와 그 친구들은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미희 이리 와."

술잔을 들자, 민철 오빠가 따라주었습니다.

마실 때마다 채워지는 술,

"미희도 이제 숙녀가 다 됐네."

점점 빙글도는 세상.

"그러니까, 알려줄게 있어서 내가 불렀잖아."

한 없이 올라가는 기분.

"그게 뭔데요오?"

"그건 말이야....."

"주미희가 지금은 몰라도 되는거지."

그리고 나타나는 개눈깔 아저씨.

"야, 이 씹. 병신 새끼야. 왜 남의 술자리에 끼어드냐?"

"아, 술맛 떨어지네....."

욕설을 퍼붓는 민철 오빠와 그 친구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눈깔 아저씨는 시퍼렇게 저만을 노려보았습니다.

"생일 축하한다고 해줘."

"아저씨 생일 저저저번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오?"

"그래도 그냥, 그냥 축하한다고 해줘."

"헤헤, 생일 축하해요!"

개눈깔 아저씨는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그래, 그 소리가 한 번 들어보고 싶었어."

그리고 술이 확, 깨버렸습니다. 한창 욕설을 퍼붓던 민철 오빠의 친구들도 굳은채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개눈깔 아저씨는 환하게 웃은채로 큰 칼을 꺼내들었습니다.

















13.죽음까지 1일.

처음에 자살하려고 했을 때, 목소리는 내게 물었다.

삶이냐고, 복수냐고.

나는 이미 삶이 씹창나있어서 복수를 선택했다. 기왕이면 복수를 하고 살아가는게 좋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난 복수를 택했다.

저울의 한쪽에 삶이 걸려있다면 건너편에는 당연히 죽음이란 게 걸려있을 줄은 모르고.

내가 이 시간대로 온 자체가 죽기 위해 온 거였던거다.












...........그렇다면 내가 살인자가 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아저씨, 이건 뭐에다 쓰시려고 산거에요?"

슈퍼주인이 의심하는 눈초리다. 비굴해보이는 미소를 내보이며 대답하자, 그 의심은 곧바로 수그러들었다.

"아, 고기를 썰어먹으려는데 무뎌서 잘 안들더라고요. 이거, 고기는 잘 잘리죠.....?"























14.마침내, 살인자


"꺄아아아아악!"

피를 뒤집어쓴 주미희의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방금 막 눈알을 쑤신 칼을 다시 뽑아들어 마저 배때지에 박았다. 최대한 날이 상하지 않게 뼈를 피하고 내장만을 찌르려고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주미희는 기절할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아저씨, 왜 이러는거에요. 주, 주, 주, 죽여야 할 건 주미희라면서요. 민철 오빠가 아니잖아요, 왜 가, 갑자기 민철 오빠를?"

주미희는 그렇게나 부들부들 떨면서도, 울면서도 내게 물었다.

"생각해보니까, 내 인생을 망친 건 주미희만이 아니었더라고. 그 전에 주미희의 인생을 망쳤던 다른 인간이 있었어."





























ㅎ. 경찰이 왔을 때.





경찰은 무심하게 제게 물었습니다.



"갑자기 사라지다니 말이 돼요?"



"하지만 정말, 정말 그랬는걸요..... 그냥 눈 앞에서 사라졌어요."



민철 오빠가 죽었습니다. 옆에 목격자도 있어서 제가 범인으로 몰리지는 않았지만, 저는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눈깔 아저씨는 교회 건물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피가 끼얹어진 상태로 한참 멍하니 주저앉아있다가 겨우 아저씨를 기억해내고 뒤쫓자,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 증발한 듯 중간에 끊긴, 눈 위로 찍힌 발자국 뿐이었습니다.



"범인에 대해서 아는 건 그게 다야?"



"네, 정말 그게 다에요."



"다른 행동을 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고?"



"네..... 정말 몰라요."



"아니, 목사님께 듣자하니 그쪽은 그 남자랑 친하게 지냈다면서. 그런데 이름도 모른다고?"



"그냥, 그 사람이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아했어요. 개눈깔로 부르라고 해서 모두 그렇게 불렀어요."



경찰은 미심쩍다는 듯이 절 위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저...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제 물음에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나와 수첩, 그리고 천장을 번갈아보다가 겨우 대답했습니다.



"아무래도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 아가씨가 잘 기억이 안나는 모양이네. 푹 쉬고, 혹시 생각나는 것이 있거든 말하러 와."



"네."



경찰서를 나설 때, 하얀 눈이 다시 천천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계집애가 일찍일찍 다녀야지!"



하며 성을 내며 저를 방 안으로 넣어버리려고 했고,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너 여자가 그래서 어떻게 될려고 그래! 술? 너 술 마셨어?"



나는 멍한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민철 오빠가 나한테 요상스러운 짓을 하려고 했대요. 내가 숙녀가 다 됐다며 알려줄게 있다고 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그게 우스워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어요."



".....어디 아프니?"



나는 아프지 않은데 왜 걱정하는 걸까요? 정말 아픈 건 온 몸이 난도질되어 죽은 민철오빠인데요. 나는 머플러를 풀어서 보여주었습니다.



"아니에요. 아프지 않아요. 이거 보세요. 이거 김민철 피에요. 히히."



그 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수화기를 든 어머니의 표정이 놀람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슬픔으로 천천히 변해갑니다.



"경아한테 이야기 들었어. 힘들었겠다. 오늘은 푹 쉬어. 그리고 혼내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외출금지다."



그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개눈깔 아저씨는 민철오빠를 찌르고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게 우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개눈깔 아저씨는 천천히 돌아서 제쪽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며 비죽비죽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마. 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 당할 게 뻔하니까."



저는 그 말을 지켰습니다. 경찰에게도, 경아에게도, 어머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피 묻은 칼을 들고 다가온 그가 내게 했던 마지막 말을.





















15.그의 마지막 말





저기, 아마도 내가 오늘 그쪽을 죽여야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용서받지 못했거든.



그렇지만 그냥 안 죽일게.



당신이 날 이해했듯, 당신을 이해할 거거든.



어린 나이에 꿈을 포함해서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 서러웠을 당신을 이해할게.



원망이 어린 나에게까지 흘러온 것, 증오하고 원망할 게 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이해할게.



처음에 자살하려고 했을 때, 목소리는 내게 물었지.



삶이냐고, 복수냐고.



나는 이미 삶이 씹창나있어서 복수를 선택했어. 기왕이면 복수를 하고 살아가는게 좋잖아.



그런 생각으로 난 복수를 택했어.



저울의 한쪽에 삶이 걸려있다면 건너편에는 당연히 죽음이란 게 걸려있을 줄은 모르고.



내가 이 시간으로 온 자체가 죽기 위해 온 거였던거야.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대는 내가 생기기도 전의 시간대거든.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 중 하나인 당신을 증오하고 원망했어.



하지만 어린 당신을 보니 당신도 나만큼이나 무력하게 휘말린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나도 이해하기로 한거야. 다시 말하지만, 용서는 안해.



당신이 누렸어야 할 삶을 돌려줄게.



행복하게 살아. 불행해지지 마.



멀리서 내가 당신의 삶을 지켜봤을 때, 저렇게 살고 있구나, 하면서 오늘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도록.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안돼.



뺏기면서 살아온 인생이지만 그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



댁은 내 눈도 지져버리고 내게 빚을 지우고, 내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그것만은 안돼.



그것마저 뺏어가지는 마. 부탁이야.



자식을 낳거든 성진이라는 이름으로는 짓지마.











그건 내 이름이야.













내 이름이라고.



















16.나의 증오하는





그리고 그토록 사랑 받고 싶었던





엄마.

















































후일담.









가. 그래서 죽기로 했는데





안녕하세요, 벌레입니다.





이름은 없어요.





공무원이 되고 싶었지만 5년째 집 안의 벌레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빠 퇴직금 야금야금 까먹다가,





이제야 죽을 용기가 생겼습니다.





오늘은 벌레를 잡는 날입니다.

올가미를 튼튼하게 묶고, 준비를 합니다.

이 나무에 목을 매달은 사람들은 전부 무연고자입니다.

신분증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도, 신원을 조회하면 조회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그 시체를 본 사람들도, 누구든 한 명은 그 사람을 알 법도 한데,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마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존재를 지워주는 게 아닐까요.

중학교 때 왕따 당해 자퇴 후, 제 인생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 나무에 정말 신비한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완전히 저를 이 세상에서 없애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을 매달았습니다.

-삶? 복수?

기괴한 얼굴의 할머니가 나무의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삶? 복수?

그리고 제게 물었습니다.

-삶? 복수?

웃고 있는 할머니의 뒤를 보니 여러 얼굴들은 무표정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복수하지 마, 복수하지 마.

표정은 없는데 왜 이렇게 슬퍼보이는 걸까요?

-복수하지 마, 복수하지 마.

눈 한 쪽이 흉하게 일그러진 남자가 제일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복수하지 마, 복수하지 마.

-삶? 죽음?

엄마가 해주던 미역국이 기억났습니다. 떨어지면 자길 원망하라던 엄마의 그 미역국의 맛이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아빠가 생각났습니다. 시험이 끝난 날에는 조용히 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꼬깃한 5만원 한 장이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복수? 삶?

웃는 할머니가 묻습니다.

-복수를 선택하지 마, 복수를 선택하지 마.

할머니 뒤의 얼굴들이 외칩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사, 삶!"

-쯧.

웃고 있던 할머니가 혀를 찼습니다. 그와 동시에 줄이 탁, 끊어지고, 저는 땅 위로 떨어졌습니다.

한창 동안 쿨럭대며 목을 부여잡았습니다. 표정이 없이 울고 있던 얼굴들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 갔습니다.

매우 늦은 밤,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퉁퉁 부은 눈으로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정민아, 걱정했어. 걱정했다고. 다시는, 다시는 나쁜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나. 드디어 합격

그 날은 유독 날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엄마! 나....."











다. 귀신나무

가끔씩 내가 7년 전에 목을 매달고 죽으려고 했던 그 나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 때 나타났던 얼굴들은 뭐였을까요.

뭐였길래 복수를 말렸을까요.

나 이전에 그 나무에서 목을 매달았던 사람들이었을까요?

만약 내가 그 때 복수를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알 수 없지만 할머니 뒷쪽에 있던 그 무표정한 얼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슬퍼집니다.

소주를 사들고 그 주변에 부으려고 찾아갔습니다.

소주를 붓자, 나무에서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때, 삶은?]

"여전히 힘들어."

[그래, 그렇구나.]

그로부터 며칠 뒤, 그 나무에서 사람이 많이 죽는다는 이유로 드디어 베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흉물스러운 나무가 베어졌다는 소식에 인근 주민들은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뒤로는 흉흉한 소문이 들었습니다.

그 나무를 벨 때, 새빨간 피 같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고, 그 단면에서는 지옥에서 나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멈추지를 않았다는, 그런 소문이요

..........그 나무에 목을 매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만약 내세라는 곳이 있다면, 더 이상 죽고 싶을만큼 괴롭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