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직접적이진 않지만,

사소하고도 끊임없는 반대로 가랑비에 옷이 젖듯

화가로의 꿈은 어릴 적에 서서히 접어야 했다.

부모님은 방정식이 뭔지도 모르는 나에게 수학자가 되기를 강요했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럼에도 난 꾸준히 연습장 한 켠에 그림을 그려냈고,

결국 낙서를 하는 것이 인생의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내게 있어 스무살까지의 삶이란 참 고단했다.

처절한 인생수업을 어려서 경험하고,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각종 아프리카 식물을 재배하는 방법과 그걸 들고 춤추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아주 먼 길을 돌아 한국에 돌아왔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느새 부모님의 뜻대로

어느 대학교 수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초년생이던 당시엔 스타크래프트 광풍이 전국에 불었고,

이어 인터넷 카페가 한참 유행이었다.

지금도 네띠앙에서 했던 광고는 기억이 난다.（

난 외롭고 적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특기를 살려

모 포털의 무료벽화봉사카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번에 쓰는 이야기는 그 벽화동호회에서 만난 친한 지인 5명과 함께

직접 경험한 이야기이다.



 （잘 그리진 못하지만 표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앞서 말했듯 낙서를 하던 알량한 실력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아마 즉흥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당시 우리는 종종 그랬으니까.

나와 핑크넥타이（여/누나）, 똥덩어리（남/동생）, 소금사리（여/동생）,

징쓰（여/동생）, 토막거인（남/형）은 내 노란색 포르쉐 964와 토막거인형의 검정 코란도에 2명, 4명씩 나눠타고

여주로 여행을 떠났다.

미술관련 동호회의 특성상 평범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내 기억엔 다 어딘가 특별한 것을 품고 빛나는 사람들이었다.

시끌벅쩍하고 의미없는 수다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실 감탄사가 대화의 대부분이었던 것도 같다.

근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었다.

여주로 가던 도중 육교에 걸린 도자기축제 현수막을 본

우리는 눈이 반짝였다. 저기다! 저길 가는거야.

도자기 축제장에 도착하여 일단 군것질부터 하였다.

그리고 큰 전시장에 들어가 멋진 도자기작품들을 감상했다.

한 켠에는 물레를 돌려 직접 도자기를 만드는 체험이 있었는데,

재미있어 보였으나 지나쳤다.

그렇게 축제장에 들어서서 2시간정도 둘러보니

더 할 것이 없었다.

그대로 차를 끌고 축제장을 나와 목적지없이 조금 달리니

슬슬 차들이 배가 고프다고 주유등을 번쩍거렸다.

문득 길가로 보이는 주유소에 차를 대었는데,

운좋게도 이 한적한 주유소를 둘러싼 고즈넉한 풍경이 편안하고 보기좋았다.

다들 나른한 기분으로 차에서 기어나와 화장실에 가기도 하고, 기지개를 펴기도 하였다.

그때 주유소 시멘트바닥을 요란하게 긁으며

반대편에 승용차 한대가 들어왔다.

뒤따라 온 길먼지들이 아지랑이를 살짝 풍기는데

차에서 캐쥬얼 양복을 입은 중년남성 한명이 내렸다.

뒤이어 다른 문이 열리며 아줌마들 3분이 시끄럽게 대화를 하며 내렸다.

아줌마들은 화장실로 향했고, 중년남성은 주유준비를 끝내더니

우두커니 기름을 넣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내 차를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붙였다.

"워매... 요 노란 차는 겁내 좋아보이네요. 시골동네서 첨봐 첨봐."

나도 이 차에 대해선

1990년식 포르쉐 911의 3세대 모델인 포르쉐 964라는 정도밖에 모르지만,

그래도 포르쉐라고 이 특이한 개구리같은 모습에 이런 어르신들을

마주치는 일은 다반사였고.. 난 자동적으로 매번 이렇게 대답한다.

"아.. 네 포르쉐에요. 근데, 10년도 넘은 똥 차라.. ㅎㅎ.."

"그랴도 워매 예쁘네. 어디 서울서 오셨소? 아이구 나가 인사도 안했지?"

"아 네 뭐.. 괜찮습니다. ㅎㅎ 예 서울에서 왔어요"

대뜸 손을 덥썩 내밀더니 내게 인사를 청했다.

"나가 요 여주 관광안내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였다.

"아 그러세요~~!!! 예 저희는 그냥 놀러왔습니다. 학생들이에요."

"반갑소.. 워매 여주로 놀러왔소~? 다음으로 어디로 갑니까."

"아.... 저희 그냥 사실 어디갈지 몰라서 .. 떠돌다가 여기 기름이 떨어져서

들어왔어요."

중년남성의 눈이 커지더니 더 반갑게

아직 놓지 않은 내 손을 흔들어댔다.

"어?... 그럼 잘됐네.. 여기 아지메들 관광시켜준다고 내가 델꾸 다니는데,

여그 고달사지라고 유명한 절이 있는데.. 지금 거로 가는데 함께 갈텐가.."

핑크넥타이누나하고 토막거인형이 내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때마침 끼어들었다.

"어 좋죠~~! 저희도 지금 어디 갈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었거든요."

"와 이것도 인연인데, 그럼 저희야 감사하게 따라가겠습니다~"

중년남성은 싱글벙글 웃으며 화장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줌마들에게 우리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여그 서울서 온 학생들이라네. 나가 저기 고달사지 안내해준다고 했는데,

같이 갈라는가?"

아줌마들은 시종일관 싱글벙글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아따 학생들이 싱싱하구만. 아~! 같이 가면 좋지요.

우리도 젊은 기운도 좀 얻고 ㅎㅎㅎㅎ"

그렇게 차 세 대가 고달사지라는 곳으로 향했다.

초가을. 오후가 천천히 저녁으로 바뀌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달렸을까.

[고달사지]라고 쓰인 오래된 푯말이 길가에 있다가

후다닥 차 뒤로 지나갔다.

고달사지라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있네

커다란 느티나무가 저 앞에 보이기 시작했고,

산과 나무로 빽빽했던 왼쪽의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하더니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넓은 대지가 시원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고달사지였다.

잡풀이 우거진 주변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당당하게 앞장선 중년남성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정말 엄청나게 넓었다. （

이 넓은 터에 건물이 들어섰을 융성했던 과거의 모습이 절로 궁금해졌다.

혜목산에 위치한 고달사는 고달이라는 석공이 석조물을 모두 조성하였는데,

불사가 끝난 후 불교에 귀의하여 도를 닦은 후 큰스님이 되어 고달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까지는 고달사가 등장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도 번창하였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서는 폐사된 걸로 보아 그 사이 어느 시쯤에 불타 없어진 걸로 보인다.

중년남성분은 시종일관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한동안 주변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설명을 다시더니

넓디 넓은 절터를 뒤로 하고 산길로 우릴 이끌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고달사지 승탑이라고 국보 4호가 있습니다."

산길로 접어들려는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에서 우르르 내려왔다.

뭔가 굉장히 바쁜 일이 있는 건지 무표정이었다.

중년남성분은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오늘 뭔 일 있습니까?"

그러자 그중 한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우리쪽으로 돌리더니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합장했다.

"오늘 승탑에서 마을축제를 합니다."

라고 짧게 말하더니 앞선 무리들을 따라 서둘러 가버렸다.

머리가 덥수룩한 걸 보니 스님은 아닌 거 같았고,

합장을 하는 걸 보니 수행자인가?

땅거미가 스리슬쩍 지기 시작하는데,

우리들은 그저 기가막힌 우연들이 반복되는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신나는 마음 뿐이었다.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