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흔히 말하는 건강체질이다.

어릴적부터 잔병치레 따위는 모르고 살았고,
감기라도 걸리면 가족들이 엄살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고,
그게 다 컴퓨터를 많이 해서 전자파 때문이라는 소릴 듣곤 했다.

그래서인지 헛 것을 보거나, 귀신 같은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일도 없었다.
정신질환으로 인해 군대는 다녀오지 않고 공익 근무를 했지만 신체적으로는 이상이 없다.

가위를 눌린 것도 30년 살면서 단 3차례 뿐이며,
그나마 그 3차례 중 2 차례는 가위라는 것에 눌렸구나, 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곧 풀려버려 그 것이 가위였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 내가 확실히 가위에 눌렸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경험은 18살적 여름의 일이다.

당시에 나는 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불우하다면 불우하고 요즘 세상에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할 수 있는 가정 형편 덕분에
나는 중학교도 겨우 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는 1개월 가량만 다니다 그만두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이 없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다단계로 집안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단 둘이 야반도주를 강행했다.
월세는 10개월이 넘게 밀려 쫓겨날 형편이었고 （실제로 쫓겨났다.）
할머니는 그나마 고모가 돌보시겠다며 모셔 갔지만 나는 데려가 주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다단계 때문에 친척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우리 가족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자기들끼리는 그래도 누군가 저 아일 데려가
보살펴 주겠지, 신경쓰지 말자 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도 거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3개월 가량을 친구집에서 지내는 것과 노숙을 전전하며 중학교를 다니며 졸업했고
고등학교 역시 비슷한 처지에서 다니다가 도저히 3년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약 1년 가량을 노숙생활을 하다 다시 아버지와 재회하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 번호로 매일 전화를 걸었는데 1월 경에 연락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회는 했지만 같이 사는 것은 힘든 상황이었다.

새어머니와 나 사이의 갈등이 엄청나게 심했던 때이기 때문에 같이 사는 건 어려운 일이었던 거다.
아마 같이 살았다면 뉴스에 떴을거다. 둘 중 한명이 나머지 한 명을 살해 했다거나 살해하려 했다는 식으로...
그래서 처음 아버지가 희망했던 것은 내가 기숙사가 달려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아주 쉽게 무너져 내렸는데 내가 2학년때부터 결석도 엄청나게 많이 해서 내신성적도 엄청난데다
시험 성적도 엄청나게 좋지 않은 인간으로 내가 갈수 있는 고등학교는 굉장히 한정적이었고,
적어도 그 중에 기숙사가 달려 있는 학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던 중 결국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직업학교라는 곳이었다.
1년간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하며 그 것을 바탕으로 취직까지 시켜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무엇보다 매혹적이었을 조건은 바로 기숙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직업학교에 17살에 들어가게 되었고 18살 1월에 취직이 확정되어 수료하게 되었다.（빠른년생임.）



공장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나는 용접기술을 배웠고 자격증도 따긴 했지만, 그다지 자신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회사에서 내게 맡긴 일은 용접일이 아닌 철판을 절단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플라즈마 절단기가 최신식이라 버튼 몇개만 조작해주면 알아서 잘라주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라곤 크레인으로 6미터 상당의 철판을 절삭판으로 옮겨오는 것과
도면을 토대로 그대로 잘라 밴딩하는 사람에게 옮겨주거나, 롤밴딩을 하는게 전부였다.

그리고 월급이 나오자마자 나는 술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깐 1월부터 생활비를 쪼개 술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월급이 나온 2월부터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결합되어 있었다.
첫째로 내가 비록 공부는 더럽게 못했을지언정 고등학교를 내 의사가 아닌 타의로 자퇴했다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둘째로 첫째의 사실이 새어머니가 다단계를 시작했고, 야반도주까지 강행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셋째로 공장에서 돌아오면 기계 돌아가는 웅웅 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리는 듯해서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잔업과 철야를 빠짐없이 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 치고는 상당히 큰 금액을 만질수 있었고, 잔업과 철야를 하는 바람에 그 돈을 쓸 곳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월급에서 세금도 떼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술을 꽤 잘 마시고, 원래부터 좋아하며, 술을 사주면 친구들을 많이 만날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내가 빠른년생이니 친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인 시절이다.
그래서 대체로 내가 전화를 걸어 술을 먹자고 하면 완곡히 거절하는 녀석들이 많았지만,
수능에 관심이 없는건지 자신의 앞길에 대해 관심이 없는건지 모를 녀석들이 꽤 많이 나오곤 했다.

개 중에는 가출을 한 녀석도 있고, 부모님과 성적문제로 다퉈 홧김에 나오는 녀석도 있고,
일탈이 필요하다며 연중무휴 일탈중인 녀석들도 있고 사정은 여러가지 였지만 어쨌든
주로 우리가 모이는 목적은 술이나 피시방이었다.

그렇게 2월부터 여름까지 철야가 없는 날이라면 나는 무조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술을 달고 살았다.
공장에서는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불량을 내는 것도 아니고, 출근을 안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남들보다 잔업이나 철야수가 적기는 커녕 오히려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으니 크게 간섭하지는 않았다.
어린 청소년이 술에 취해 골골대며 반년을 살아오고 있었지만 어른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던 거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지 새끼도 아닌데 뭐...


그 날은 바람막이를 입고 다닐 정도의 시기였으니 가을이 다 되어가는 초여름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부산 하단에서 일탈이 필요하다는 연중무휴 일탈파와 만나 술을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수능에 관심은 없어 보이는데 대학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을 보며 신기한 녀석이다,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나는 술 주정이 매우 심한 편이다.
그래서 술을 사주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내가 하도 술 주정이 심하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가 많이 취하면 어딘가에 버리고 돌아가라, 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하다니 의리라곤 찾아보기 힘든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1차가 삼겹살집이었고 2차가 감자탕집이었다. 3차로 해장국 집까지 간 것은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날이 파랗게 밝아오고 있는 동틀 녘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눈에 익은 장소, 하단 역 인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들을 뒤졌다. 만취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내게 자주 있는 일이었는데
지갑과 핸드폰은 다행히 가지고 있었지만 MP3는 사라진 채였다. 다시 mp3를 하나 사고 다시 노래를 찾아 다 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왈칵 나빠졌다. 그래서 편의점에 들어가 양주 한 병을 구매했다.

하단 역 계단에 앉아 양주를 마시고 있으니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취기에 거북해진 나는 걷기 시작했다. 혼자 술을 마시게 되면 자주 가던 공원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이어졌다.
그 당시에 했던 생각은 아마도 "친구들 중 누군가 내 mp3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 섞인 무언가였을거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일어났을때 무언가 없어지면 항상 하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니깐... 매번...

흔히 하구둑이라 부르는 인근의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양주를 마시던 나는
집에 들어갈 것인가 양주를 마저 다 마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잠이 들었던 거 같다.

술 병을 쥔 채, 등을 위로 한 상태로 벤치에서 잠이 들었던 걸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느낀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아직 하늘은 동틀녘의 청아한 빛이 채 다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불쾌했던 이유는 왠 미친 년이 내 등 위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미친 년인것을 알았느냐, 벤치 아래로 늘어진 발이 상당히 고왔기 때문이다.
창백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고 그냥 누가 봐도 그냥 젊은 여성의 발이구나, 할 정도의 발이었다.
그리고 이내 이게 혹시 가위일까, 라는 생각을 한 건 당연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다.

위에 올라탄 여성의 무게중심은 조금씩 앞뒤를 왕복하고 있었다.
그냥 허리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앞뒤로 상체를 조금씩 움직이는 듯한 그런 느낌.
그 상태로 눈동자를 돌려 위를 확인한 순간 미친년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양손을 모은 채로 내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하늘로 높이 들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손에 들린 물건이 칼이라는 사실과 그 년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죽인다, 안 죽인다, 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가위라는 사실도 잊은 채로 그냥 미친 년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다고 몸이 움직여질리가 있나. 그렇게 낑낑거리고 있다가 정신이 들었다.
공원에 산책 나온 아주머니 둘이 날 깨워줬기 때문인데....참 허무하지? 근데 인생이 그리 극적이지가 않더라구.
근데 가위라는게 몸이 안 움직여지는 게 맞나 싶기도 한게 아주머니들 말로는 내가 인상을 쓴채
두 팔을 땅에 끌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고 그랬거든. 참 신기했던 경험인데 그 당시에는 상당히 무서웠어.

여자의 얼굴은 잘 못 봤지만 영화나 괴담처럼 막 산발은 확실히 아니었어.
그냥 지금도 기억 나는건 관리를 잘 한듯한 그 새하얀 발과 얇은 발목 정도일까...


이 걸로 내 이야기는 끝이야.

서두에 말했다시피 나는 건강체질이라 가위에 잘 눌리지도 않고 이런 경험이 별로 없거든.
그냥 오랜만에 공포 게시판에 들어왔는데 정말 글이 많이 죽었구나... 몇년 전에는 하루에도 수십개씩 글이 올라왔었는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 나라도 글 하나 더 보태볼까 싶어서 글을 쓰게 된 거야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