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줄 요약부터 하면 그냥

'헤어졌어'

그냥 비웃고 가주거나
밑에 내용들은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싫으면 안 보면 돼

아마 너희가 싫어하는 얘기들이 다분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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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그대로야. 헤어졌어.

걔는 너희들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페미니스트였고, 처음 만날때만 해도 페미니스트인줄 몰랐어.

사귀고 나서 한 달쯤 됐을까? 얘 인스타를 둘러보던 중에 알게 됐지.
페미니즘 관련 사진을 올렸더라구
'아... 페미니스트구나'

처음에는 좀 무서웠어.
언제 나한테 갑자기 '한1남 6.9다 이기!'라고 말하지 않을까 두려웠으니까.
그래서 먼저 말 걸었어.
'혹시.. 그 사진...'
그랬더니 바로 밝히더라고. 맞다고.

근데 솔직히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나에게 대하는게 별 다르지는 않았어.
그걸 밝히기 전이든 후든, 나한테 과분할만큼 정말 좋은 애였고, 잘해줬고, 예뻤고, 어린 나이（난 26, 얘는 21）에 비해 철도 들었고.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에게 페미니즘 관련한 주제를 대화중에 가끔 꺼냈고 나도 함께 그 주제에 대해 얘기를 했다는거지.
솔직히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어. 싸울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오히려 싸우려고 드는건 나더라고
얘는 내 의견을 하나하나 다 들어줬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얘를 바꾸려고 노력했지.
얘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게 정말 소중한 것이었고 그걸 나와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보였지.
부정적으로 보면 '종교'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래도 나쁘게 보이지는 않더라 나는.

얘는 아픔이 많은 애였어.

아버지는 얘가 중학생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셔서 어머니와 남동생과 셋이 살고,
친가 쪽과 재산문제로 싸우고,
할머니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람이라 얘의 남동생과 얘를 심하게 차별대우하고,
어렸을때 성추행을 당한 경험도 있고,
뭐 등등

솔직히 얘는 그런 아픔들 때문에 페미니즘에 빠졌을지도 몰라.
근데 솔직히 저런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내가 뭐라 할말이 없더라고.
저런 애 앞에서까지
'여성의 인권이 뭐가 낮냐. 남성들도 요즘 역차별을 받고 있다!'
라고 말하기가 힘들었어 솔직히.
'부분적으로는 여성의 인권이 낮은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남성이 차별받는 부분이 있다'
라고는 말했지만 말야.

저렇게 말해줘도 얘는 다 들어줬어.
나와 싸우려고 들지 않았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했지.
또 다른 의견으로 들으려고 노력하는게 보이더라구.

그래서 솔직히 난 너희가 페미니스트에 대해 욕을 하고 '착한 페미니즘은 없다'라고 말할때마다 걔가 떠올랐어.
걔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나와 진지하게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를 나눠줬고, 내 의견에 존중해줬으니까.


이제 왜 헤어졌는지 말해줄게.

너희도 알다시피 '숲속친구들'이라고 있지.
확실히 사건이 판결나기전에는 중립을 유지하는것 말야.

난 1년동안 꾸준히 그 중립유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왔어 걔한테.
걔는 왠지 모르게 반대하는 입장이더라고.

오늘 혜화역 시위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나는 중립유지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했어.
그러자 오늘 얘가 밝히더라고.

"초등학교 3학년때 해외 홈스쿨링중에 길거리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라고

그러고 말하더라
"정말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말도 2차가해가 될 수 있다"
"가해자를 욕하지는 않더라도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위로는 해주면 안 되냐"
라는 거였지.

"내가 이 사실을 왜 말 못했는지 되돌아봐"
"오빠도 나를 못 믿고 중립을 유지할거라고 말하지 않을거라는 보장이 있어?"
라고 말했고, 나는 중립유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내 모습을 되돌아봤어.
그리고 뭐.. 이미 얘는 마음이 돌아섰더라고.

솔직히 이건 잘 모르겠어.
나나, 우리야 직접 성폭행피해를 경험해본게 아니니까.
그 피해자들 앞에서 중립을 유지하는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도 문득 들더라고.


그래 뭐, 여기까지야.

걔는 끝까지 착했어.
"우리는 그저 관점이 달랐던 것 뿐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평범한 여자를 만난다면 오빠는 더 행복했을거다."
"오빠는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정말 최선을 다해줬다는걸 나도 안다."
등등 뭐...

그래서 안 좋게 헤어지려고 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난 그렇게 못하겠더라고.
나에게 막 장난을 치면서 평소처럼 대하려고 하길래 그러지 말라고 했어.
그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끝났네.
카톡, 인스타, 페북 다 정리하고 보니까 참 오래도 사겼더라고.
좀 허탈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다 쿵쾅이고 정신병걸린 사람은 아니었어.
그저 사람 차이일 뿐이지.

1년정도 사귀면서 얘가 페미니스트라서 힘들었던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마냥 페미니즘에 대해서 욕하기가 좀 그러네 나는.
걔한테는 그게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졌지만 그럴만한 동기가 보였으니까.


너희에게는 불쾌하게 느꼈을 부분도 있었을거라 생각해.
근데 난 좀 혼란스럽다.

반대줘도 상관없어.
그냥 넋두리 한거니까.
ㅋㅋㅋ만 남기고 가도 되고 뭐....
알아서들 해.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