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행렬이 좁고 가파른 산길로 이어졌다. 그들은 어린아이 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이루었다.

무기를 지닌 병사,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인, 거지와 학자, 시인과 농사꾼.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행렬이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공포로 가득찬 표정이었다. 그들은 불필요한 짐을 버리기도 하고

걸음의 폭을 넓히면서 속도를 높혔다. 우는 아이와 거친 호흡소리, 말의 울음소리들이 산 속에 울려퍼졌다.

며칠을 걸어 왔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졌고 지평선 너머의 끝없는 산맥으로 향하였다.

하나 둘씩 저마다의 고통으로 쓰러졌다. 굼주림에 아사하고 상처가 오염되어 괴사하고 발을 헛디뎌 낙사했다.

행렬의 끝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은 거친 호흡을 뱉으며 사람들과 멀어져갔다.

그때 한 소년이 노인을 부축했다. 노인은 소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나를 피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느냐?"



노인의 말에 소년이 답하였다.



" 할아버지를 부축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걸요. "



노인은 쉰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노인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몸을 기대었다.



" 혼자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

" 마지막으로 발을 뗀 곳에서 왔어요. "

" 영특하구나. "



말을 끝마친 노인은 소년의 모습을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고

눈빛은 또렷했으며 햇빛에 그을리지 않은 피부에서는 귀티가 흘렀다.

노인은 소년과 함께 무리에서 벗어나 샛길로 접어 들었다. 한참을 더 가자 버려진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다.



" 바다를 건너온 그들은 먹구름의 갑옷을 입고 천둥의 창으로 세상을 불태워버렸지. "



노인의 뒤에서 하늘을 덮은 연기로 인해 태양이 가려졌고 마치 하늘이 밤과 낮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오두막의 입구에 쓰러지듯 앉아 힘없이 말을 꺼냈다.



" 창과 화살로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을게야. 다만, "



길게 숨을 들이 마쉰 노인은 몇 마디를 삼키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가만히 노인을 들여다 보았다.



" 약속해줄 수 있겠느냐? "

" 약속은 서로간의 믿음이 없어서 맺는 일종의 자기위안이에요. "

" 허허허. 그렇다면 부탁해보마. "

" 말씀하세요. "

" 저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네. 하늘 아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게야. "

" 그것이 무엇이죠? "


노인은 껄껄껄 웃으며 단 한단어로 대답했다.






" 질병. "






저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절규와 공포로 산의 모든 나무들이 흔들렸다.

노인은 소리의 발상지로 고개를 돌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곳곳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 의학을 전수하마. 나는 시간이 없으니 이 다음은 너에게 맡기도록 할 것이야. "



노인은 옷 속에서 한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 바다민족이라는 역사의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



레이저 포인트를 손에 쥔 교수가 대학생들 앞에서 그림을 비추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강의실은 그의 목소리로 가득 메워졌고 많은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 지중해에서 중동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배를 타고 건너온 이들은 당시에 최강의 제국인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를 멸망시켰습니다. 여기서 아시리아는 바다민족의 침공 루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록은 공격당한 거의 모든 국가가 멸망했기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매우 적습니다. 다만 멸망국가의 폐허 속의 점토판이 발굴되면서 조금씩 윤곽을 들어내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 점토판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가 도시가 불에 타면서 점토판이 잘 구워졌기 때문입니다. "



몇 명의 학생들이 작게 웃었다.



" 점토판의 기록을 살펴보면 무기를 만들 금속이 부족하여 신전의 성물과 제기를 모두 녹여라는 내용과

동맹도시가 불에타는 것을 알지만 이쪽도 다급하여 지원군을 보내줄 수 없다는 내용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군요청을 거부한 점토판은 보내기도 전에 도시와 함께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



교수는 기침을 몇 번하고 자세를 바로고쳐 진지한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말했다.



" 이로인해 국가, 도시간의 모든 교역이 끊어지고 문명의 수준은 수백년 뒤로 후퇴합니다.

단적인 예로 펠로폰네스 지방은 인구의 90%를 잃게 됩니다.

폐허가 된 도시는 그 이후로 재건 되지 않았고 한참이나 지난 후, 그 위에 새로운 도시가 자리잡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그리스의 도시문명인 폴리스도 각지에서 일어난 이 처참한 투쟁 끝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선문자B를 포함한 모든 문자가 끊기고 이때의 기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단 하나만이 남게됩니다.

물론 구전으로만 남아 후시대로 전해져 호메로스가 작성하게 된 것이지만요.

바다민족이 어디서 왔는지 이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은 암흑시대를 만든 장본인이자 청동기시대를 끝내고

철기시대로 역사를 이끈 두 얼굴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



말을 끝마친 교수는 점토판과 지중해의 지도, 전투를 묘사한 여러장의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부가설명을 했다.

학생석에서 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손을 들고 말했다.



" 교수님. 그럼 바다민족은 어떻게 사라지게 된겁니까? "

" 확답할 수 없네만 현지인들 사이로 스며들어 혼혈이 탄생했고 자연스레 그들과 융화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네. "

"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 왜 그렇게 생각하나? "

"잿더미와 폐허만이 남은 적국에 머물러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약탈을 했다면 이를 보관해둘 곳이 있어야겠죠.

그러니까 그들의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고향처럼 말이죠. "

" 일리있네. 흥미롭군. "



무언가를 생각하던 교수는 덧붙여 말했다.



" 그렇지. 이번 과제는 이 바다민족이 어떻게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를 주제로 하면 되겠군. 이만 마치겠습니다. "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학생에게 옮겨졌다.

질문을 했던 학생은 주섬주섬 책을 가방으로 밀어넣으며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강의실 문에서 한 여학생과 부딪히고 말았다.



"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

" 네. 괜찮아요. 덕분에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

" 네? "

" 기록도 없는 암흑시대 역사, 그 중심에 있는 수수께끼의 민족에 관한 내용을 논문으로 작성하게 되서 말이에요. "



학생은 민망한 표정으로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여학생은 그런 학생의 표정을 보곤 푸- 하고 웃어버렸다.



" 농담이에요. 전 김가은. 그 쪽은요? "

" 아, 전 한솔이요. 박한솔. "

" 과제 기대할게요. "


가은은 그 말을 남기고 떨어진 책을 주워 갈 길을 갔다. 한솔은 한숨을 내쉬며 강의실을 나가려다 의자 밑에 놓여진

한권의 책을 발견했다. 책의 뒤표지에는 김가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서적이나 교과서라기에는 이상했다. 민무늬의 제목도 없는 얇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한솔은 주위를 둘러보고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 신의 갑옷을 입고 악을 위해 싸웠다. 」






필기체로 종이의 정중앙에 적힌 내용이었다.

한솔은 다음 장을 넘기려다 이내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에 가은의 책을 집어 넣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삭만한 고원에 위치한 작은 움집에서는 양이 아직 자라지도 않은 어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뼈만 남은 양은 배고픈 울음 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듣고 움집에서 한 청년이 걸어나왔다.

그는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한 손에는 낡아 곳곳이 뜯긴 한권의 책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인가에 있을 해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검은 망토를 땅바닥에 끌고 움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평선에 닿을 때 쯤, 그가 걸어간 길에는 잡초와 벌레들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말라 죽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