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는 어떠한 표정도 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지켜보는 민재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재희의 돌발상황은 자신이 수습하기 버거운 행동으로 나타난다. 민재는 지금 재희가 어떤 행동을 할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다.


재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최예지의 등장으로 자신의 영웅스토리에 가장 예상하기 힘든 변수의 인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모든 스토리는 재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재희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브리핑 사건을 예상한 듯, 낄낄거리며, 그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두 개의 변수가 동시에 발생하여, 복합적인 이익관계가 상충하고, 지금과 같은 결론이 발생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의 사건은 신선함이나, 충격으로 다가오고, 두 번째 사 건 부터는 호기심 발생한다. 세 번째 부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진실의 왜곡, 즉 음모를 계획하게 된다. 네 번째 사건부터는 관심이 시들한 것처럼 보이다, 다섯 번째 사 건 부터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이슈로 떠오른다.


허영수기자를 지목한 이유도 그렇다. 재희는 철저히 사람을 분석한 후 허영수를 택했고, 그에게만 모든 정보를 넘겼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척 하지만, 그도 결국 사람이기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한다. 그도 사회에 찌든 속물에 불과하다.


최달성팀장은 허영수기자와는 상반되는 인물이다.
그는 진심으로 진실을 추구한다. 그래서 재희는 최달성 팀장을 택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하지만 재희가 이 둘을 택한 이유는 이게 다가 아니다. 이 둘을 지목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25년 전 사건




이 둘은 25년 전 사건의 관계자들이었다.







재희일행이 탄 차량은 빠르게 병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누구도 한마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차안은 고요하다. 고급세단의 정숙함을 자랑하듯, 그들의 숨소리와,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간혹 들리고 있고, 재희의 기이한 웃음소리가 차안을 채워간다.



“히히-......히히히”




재희 일행의 차량중 선발대로 도착한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병원의 정문으로 진입한다.
그 이후에 도착한 재희의 차량은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주차를 하고, 재희와 민재가 내린다. 선발대로 도착한 그 무리들은 병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듯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지고 깨부수며, 고래고래 소리를 친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보안 요원과 한참 몸싸움을 하고, 소란스런 틈을 타 재희와 민재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성재를 지키는 형사 일행도 로비 쪽으로 향한다.


재희의 스타일을 잘 아는 민재는 지금 이 방법이 재희에게 달갑지 않은 방법인걸 알고 있다. 언제나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재희였으나, 재희의 돌발행동으로, 어쩔 수 없는 방법을 선택했다. 재희도 민재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인지, 아님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지 못해서 인지, 민재의 처리방식에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재희가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재희 일행의 난동으로 병동은 텅텅 비어있다. 민재는 재희를 에스코트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대기하고, 재희는 성재가 있는 중환자실을 바라보며, 복도를 거닐고 있다.


성재의 이름이 붙어 있는 병실에 도착 한 민재는 전면 창 너머로 여러 가지 기계장치가 붙어있는 성재를 바라본다. 그리곤 그의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성재의 척추에 표식을 남겼던 날카로운 물체를 꺼낸다. 재희는 한참을 성재를 바라보다. 있는 힘껏 그 날카로운 물체를 유리창에 내려찍는다. 그리곤 그의 본능이 재희를 지배한다.


“성재야 살아야 돼 알았지?”
“내가 꼭 물어볼게 있거든 히히-”
“죽지 마- 죽으면 니 가족들은 다 죽는다?- 히히 히히”


재희는 본인의 손바닥을 칼로 그으며, 본인의 혈흔으로 유리 벽면에 문구를 남긴다.
그리곤 몸을 돌려 황급히 복도를 지나 민재가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의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복도와 엘리베이터에 흔적을 남긴다. 그 모습을 본 민재는 황급히 간호사실에 있는 알코올거즈로 흔적을 지우며, 재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민재는 말없이 재희에게 손수건을 건네보려다, 그만둔다. 인간의 동정심으로 재희에게 다가가선 안 되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다음은 최예지씨 병원으로 갑시다.”


민재는 그제야 한 숨 돌린 표정을 짓는다. 아까와 같은 본능이 아닌 이성적인 사고를 재희는 하고 있다. 민재는 재희의 그럼 모습에 안도를 한 것인지, 아님 반가운 것인지 평소보다 힘주어 대답한다.


“네- 회장님”
“아직 경찰들이 있어 만나보긴 쉽지 않을 겁니다.”


“알아요.”
“의사들 잠깐 잡아두고 계세요”


“그리고 이성재씨 살리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민재는 무리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후 철수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곤 재희 일행은 그 곳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예지가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뭐? 알았어. 바로 갈께.”


달성은 성재의 병원에서 난동이 있었고, 그 틈을 타서 누군가 이성재에게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 방문자가 어떤 표식을 남겼다는 보고도 포함되어 있다.


달성은 주치의의 말을 어떻게 예지에게 전해야 할지 예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고민하고 있다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남형사와 김순경에게 경비 강화하라고 지시를 한 후 성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출발하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향한다.


그리곤 검정색 세탄 한 대가 미끄러지듯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에 정차를 하고,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느 한 남성이 내린다. 그는 야밤에 검정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고,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와, 각 잡힌 얼굴 윤곽이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매우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달성은 그 남성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가 달성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도 몸을 뒤로 돌려 그를 관찰한다.


달성은 한 손에선 피가 흐르고 있기에, 치료를 하러 온 부잣집 자제정도로 생각하고, 본인의 의심을 지운 채 달성의 차량을 몰고 급하게 성재가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최달성 아직 눈썰미는 있고만”

“네?-”

“준비는 다 됐죠?”

“네- 회장님”

재희는 1층의 대기 장소에서 민재에게 의사 가운을 건네받고, 선글라스 대신 검정색 뿔테안경을 착용한다. 의사 가운을 입고 난 후 그 다음 행보에 대해 지시를 한다. 민재는 무리에게 전화를 걸어 응급실로 들어가라고 지시하고, 응급실은 그 무리들의 신음 소리로 무척이나 시끄러워 진다. 응급실 당직이던 의사는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의사들을 소집하고 있으며, 그 사이 재희는 포섭된 간호사 한 명과 함께 11층으로 향한다.


[딩동- 11층입니다.]


11층을 알리는 밝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재희와 간호사는 예지에게로 향한다.
문밖에는 김순경과 남형사가 보이고 있다. 달성의 지시로 새벽시간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진찰인가요?”

“네? 네-”

재희의 옆에 있던 간호사가 말을 한다.
남형사는 간호사 옆에 있는 재희를 보고 의심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어간다.


“근대 지금 시간에도 진찰을 해요?”


재희는 어수룩한 간호사의 연기가 계속 지속되면, 발각될 것 같아 재희가 직접해명을 한다.


“윤박사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잠시만 확인 좀 해볼게요.”


남형사는 달성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진찰이라는데 좀 의심돼서요?”


재희는 오랜만에 심장이 쪼여오는 기분 좋은 느낌을 받는다.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운 상황
그 상황을 즐기는 재희다.

재희는 그들을 제압할 수단은 많기에 어떤 결과 이건 상관없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남형사를 응시한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형사는 한 손을 뒤통수 쪽에 갔다 데며, 15도 정도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경비 강화를 지시하셔서 어쩔 수 없이”
“어서 들어가 보세요.”


재희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달성은 이미 예지의 임신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간호사는 평소 본인이 하던 일이기에 진찰하는 모습의 연출은 어수룩해 보이지 않게 능숙히 처리해 나갔다. 남형사와 김순경은 처음 의심을 하듯 병실문의 조그마한 유리창을 통해 재희의 모습을 쳐다보았지만, 간호사의 모습을 보고 이내 고개를 돌려 그 둘이서 잡담을 한다.


재희는 천천히 예지를 쳐다본다. 그녀의 외적 모습과 본인이 아까 봐온 이력의 내용과 대조하며, 습관처럼 그녀를 분석하고 있다. 재희는 머리부터 천천히 시선을 옮겼으며, 유독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곳은 그녀의 하복부이다.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그녀의 몸속. 재희는 한 번도 지어본적 없는 측은한 눈길로 그 곳을 바라본다.


예지는 악몽을 꾸는 듯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들고 있다. 재희는 측은한 마음을 표현하듯 반쯤 내려간 이불을 예지의 가슴높이까지 올려 준 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그 감정과 재희는 대화를 한다.



“지금 그 행동 뭐야?”
“너 왜 날 신경 쓰이게 하지?”
“넌 나에게 없는 감정이잖아”
“또 이런 망측한 표정은 뭐야?”
“넌 이 여자가 가엾니?”
“불쌍해?”
“넌 그냥 내가 읽어온 교과서에만 존재하라고”
“나에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너도 없애 버릴 테니까”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곤 그 감정과 대화를 끝낸다.
재희는 본인의 측은한 감정에 의해 지금의 상황을 인지한지 못하고 예지의 병실을 급하게 빠져 나온다. 남형사가 인사를 건넸지만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지나 지하주차장에 대기 중인 민재를 만난다.


재희는 재빨리 차에 올라타고 출발하라고 지시하곤,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후 천천히 움켜쥔 주먹을 펼치며, 아까의 측은한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어 본다.


“김 전무님-”


“네- 회장님”


“가족이 있나요?”


“네? 네- 여식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걱정 마세요. 그런 의미는 아니니까”


민재는 몇 년간 재희의 곁에 있었지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민재는 어렵게 룸미러를 통해 재희의 표정을 살핀다. 평소와 같았다면,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즉각 대답하며, 실행에 옮겼겠지만, 이번은 그의 여식이었던 것이다.


항상 그 의미는 하룻밤 상대로 즐기겠단 의미였으나, 이번에는 달라 보였다. 그리고 재희 또한 민재에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마지막말에 못까지 박았다. 민재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의 측은한 표정에 확신이 선 듯 질문에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내일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재희는 민재에게 여식이 있다 는걸 알고 있고, 그 여식도 현재 예지와 같은 임신 중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재희는 아까 예지에게 느꼈던 마음이 민재의 여식에게도 표현이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최예지씨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네요.”


“네 회장님 방법 강구하겠습니다.”


“아시죠? 아까처럼 무식한 방법으론 안 됩니다.”
“처음은 신기하고 충격적이어서 용서하는 겁니다.”



민재는 재희에게서 처음 “용서”라는 단어를 들었다.
자비? 용서? 배려? 따윈 없는 냉혈아 재희가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정확한 의미를 알고 내뱉은 재희. 민재는 재희의 그런 변화가 좋은 듯 그가 알아볼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준비 된 거 실행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젠 최달성씨가 진짜 영웅이 될 시간입니다.”



재희는 아까의 측은한 미소는 사라지고, 그 의 악마 같은 미소가 입가에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