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 도착하자 20분 뒤에 기차가 온다는 통보를 받았다. 별 수 없이 느긋하게 대기석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평일 오후는 한 없이 평화로웠다. 매표소 직원도 졸린 모양인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녁에는 거의 몇 백 명이 개미떼처럼 우글우글 거리는 곳인데, 평소와 다른 광경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의미로는 굉장히 따분하다.

“아, 따분하네.”

심심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내 2명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가 봐도 헌팅이었다. 확실히 여자 쪽이 반반하게 생겼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금 날라리 같은 느낌? 하지만 너무 불량하지 않은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였는데 붙임머리를 사용한 것인지 머리카락 사이에 주홍빛이 섞여있었다. 가끔 머리카락 사이에 보이는 귀걸이는 나비모양이었다. 나비를 좋아하는지 주머니 밖으로 반쯤 나와 있는 휴대전화에도 나비모양 폰걸이가 걸려있었다. 눈빛은 새끼 호랑이처럼 매섭지만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다. 역시 반반하게 생겼다. 하지만 너무 기가 쌔보여서 나랑은 전혀 안 맞을 것 같은 타입이다.

“아, 싫다고 꺼지라고.”

우와, 생긴 대로 강렬한데?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는걸 보면 시간이 남아도는 게 확실하잖아? 그렇게 튕기지만 말고 밥이라고 한 끼 하러 가자니까?”

너무 뻔한 대사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에 기차역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 조금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의자를 한 칸 옮겼다.

“하아, 지금 난 바쁘다고. 제발 꺼져.”
“야야, 꺼지라는데? 완전 츤데레잖아?”
“츤데레 조오치!”

정의로운 사명감 따위 없는 난 그들의 대화를 한편의 드라마 보듯 귀를 기울였다.

“아, 씨발. 못 생긴 것들이 존나 지랄 떠네.”

저 고운 입술에서 무지막지한 말이 튀어나오자 내가 다 깜짝 놀랐다.

“뭐? 지금 뭐라고 했냐? 씨발년아?”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휘둘렀다. 여자는 얼마나 쌔게 맞은 건지 바닥을 뒹굴었다. 요즘 얘들은 왜 이렇게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거야?

“야, 돌았냐? 얼굴 좀 반반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냐?”
“아, 혀 깨물었어. 씨발……. 왜 갑자기 때리고 난리야.”

당연히 울거나 아프다고 할 거라고 생각한 내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뺨은 벌써 부풀어 올라 있었고, 입가에는 작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에 기가 눌린 것인지 남자들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때려놓고 나서야 정신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남자들은 더 강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뭘 꼴아봐! 한 대 더 터지고 싶어!?”
“…….”

그의 기백에 눌린 것인지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마치 내가 저 상황에 처하듯 괜히 긴장되었다.
그 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알림방송이 울려 퍼졌다.

- OOO호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

내가 타야할 기차다. 난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고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남성이라면 그녀를 돕고 싶어 하겠지만 난 딱히 그녀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만약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대학생 2명을 이길 정도의 능력은 나에게 없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이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