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가 새벽 1시를 가르키고 있을 무렵, 뜬금없이 나타난 그것은 나를 깜짝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육안으로 짐작하건데 3m가 넘는 신장,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4개의 눈알, 셀 수 없어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채로 방문 앞에 서 있는 그 것은 자신을 '사신' 이라고 칭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오한에 잠에서 깨어났다가 이러한 광경을 목격해버린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심에 다리를 덜덜

떨 수 밖에 없었다. 동상처럼 굳어져가는 나의 몸을 보며 이해한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사신'.


"어리석은 인간이여, 내가 그렇게도 소름끼치는가..."


내 의지가 무색하게 열리지 않는 입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괴생물체. 아니 생물체라고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를, 그 앞에서 한 없이 약한 인간이 감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힘들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론만 말하자면, 자네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일 전부터 병원에서 퇴원 건의를 들었을 때에도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의사의 멱살을 잡으며 오열하는 부모님과는 다르게 나는 너무 차분했고,

그 전부터 극심한 고통과 항생제로 삶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 때부터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고통을 더 이상 느끼지 못 했다.


"자네, 이렇게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끼는가?"

"... 네?"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것이 있나?"

"무.. 물론이죠!"


당연한 것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것들을 한 번 쯤 생각하곤 한다. 더군다나 나처럼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소원이라기 보단 필수적인 요소에 가까웠다.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한 4개의 눈빛이 나에게서 떼어지지 않았다.

곧 내 머리보다 커다란 입을 벌리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빨들이 꿈틀거렸다.


"좋다. 소원을 이루게 해 주지"


그렇게 말하던 사신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반지를 꺼냈다.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보석이 마음에 드는 반지였다.


"대신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해. 3번째 소원을 이루는 순간, 자네는 죽어."

"이 반지로 저를 다시 살려낼 수 있나요?"

"아니, 자네 목숨과 관련된 소원은 들어줄 수 없네"


아무렴 상관 없었다. 곧 죽을 목숨인데, 더 빨리 죽는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대신 재밌었으면 좋겠군. 법규에 위반되는 행위라서 말이야"


사신은 연신 고개를 숙이는 내 앞에서 소리없이 스르륵 사라졌다.

내 손가락에 껴진 반지는 그 어느 때보다 새빨갛게 빛나는 듯 했다.

















'일단 죽고 나서도 남을 수 있는 것으로 하자'


선뜻 오지 않는 잠을 뒤로 미룬 채, 7시간이나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남을 주변 사람에게,

특히 부모님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했다. 평소에 효도를 하지 못 하고,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밖에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목구멍에 넘어가는 침 마저도 한약처럼 쓰게 느껴졌다.


'일단 돈... 많이 있어야 겠지?'


엄마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한 병원비 5천만원. 지금 우리 가족의 형편으로는 큰 타격을 입힐 만한 액수였다. 그 돈 때문에

아버지가 야근을 도맡으시다가 쓰려지시고, 어머니가 부업으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시다가 뜨거운 탕을 놓치는 바람에

2도 화상을 입으셨다. 누구는 5천만원 때문에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데, 누구는 차 한대 가격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니.

반지를 어루만지다가, 이내 결심한 듯 외쳤다.


"지금 당장 50억을 만들어줘"


내 말에 반응한듯 새빨갛게 빛나는 반지 너머로, 산처럼 쌓인 5만원권 지폐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 바람에

단풍 잎이 쌓이듯, 천천히. 동시에 나는, 생명이 깎이는 느낌이라고 단정지어 버린, 극심한 고통이 오는 줄 꿈에도 몰랐다.

반지를 낀 손가락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

수 백개의 창이 꿇어앉은 나를 인정사정 없이 찔렀다. 곧 이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식인 물고기들이 내 몸을 물어뜯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내 몸이 불타올랐다. 머리가 쪼개지고, 심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온 몸의 뼈마디가 망치로 으스러지면서,

애써 놓치 못 하는 정신줄을 과감히 놓게 만들었다.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내 비명소리를 들은 엄마가 방문을 열었다.


"엄마... 아파..."


발작을 일으키면서 점점 눈이 감겼다. 어서 엄마의 포근한 품에 안기고 싶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가장 익숙했던 따뜻함. 항생제로 뒤집혀진 속을 매일같이 되돌려 놓았던 엄마였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50억 규모로 쌓인 돈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엄마의 옆 모습이었다.

















"헉.. 헉..."


벌떡 일어난 나는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여전히 내 방이었다.

오늘 갑자기 나타난 저 노란색 돈더미와 옆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엄마 때문에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방을 빠져나왔다. 어느 새 싱크대 구석에 자리잡은 거미줄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섰다.

의외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처없이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발걸음이 내키는대로, 나그네 마냥

떠도는 내 모습은 시끌벅적한 도시에 어긋나는 요소로 사람들에게 각인 되었을까.



퍽-



어깨를 미는 충격으로 인해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가방을 쥐어잡은 채 달려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한 여자가 쫓아오고 있었는데, 아마 남자가 여자의 가방을 훔쳤으리라 짐작했다.


"도둑이야!! 아저씨 저 놈 잡아줘요!!"


다급하게 소리치는 여자의 말을 아무도 듣지 못 하는 걸까, 아니면 괜히 참견하기 싫은 심리 때문일까.

사람이 적지 않은 번화가 거리에서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총각, 저 도둑놈좀 잡아줘... 부탁이야"


내 팔을 잡고 매달리는 여자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 남자를 잡을 수 없을 뿐더러 뛰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죄송해요...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아이고... 우리 아들 수술비인데... 아이고..."


힘에 부쳐 주저 앉은 40대 여자의 눈물에서 엄마의 눈물과 오버랩 된 것을 보고 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오른손을 들고 반지를 매만졌다. 수명이 깎인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도망가는 남자의 품에 있던 가방을 이 여자한테 돌려줘'


나도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연민이었을까, 정의감이었을까. 아니면 관심 없는 척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일까.

익숙한 고통이 점점 떠밀려왔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버렸다. 불과 2m 남짓한 거리에서 가방을 되찾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아줌마를 끝으로 고개를 떨궈버렸다. 손으로 지탱하는 것도 잠시,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커억, 헉... 헉..."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절대로 내 의도는 아니였다. 그저, 몸이 지금 상태에 충실할 뿐.


"아저씨, 괜찮으세요?"

"이봐 총각, 많이 아픈가?"


어느 새 주위를 둘러싼 몇몇 사람들이 내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왔다. 살이 꼬챙이로 찔리고 다리가 방망이로 다져지는

와중에, 저 멀리 사이렌이 울렸다. 염산에 녹고 있는 팔을 구급대원이 잡고 다 죽어가는 몸을 구급 들것에 올려놓았다.


"으아아악!!"


또 다시 정신을 잃는 와중에, 나를 에워싼 인파 속에 있는 여자를 어렵사리 발견했다.

다 피지 못한 손가락으로 품에 있는 가방을 가르켰다. 그거, 내가 구해준거야. 고맙다는 말은...




어?




아줌마, 왜 도망가는 거야? 왜 못 볼걸 봤다는 그런 눈을...

















사신은 흥미롭다는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소호흡기를 쓴 남자는, 누가 봐도 생명이 위태로워 보였다.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은 통곡을 하며 쓰러졌다. 남자가 덮은 이불을 꽉 쥐어 잡은 채,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의료진들로 인해 순간적으로 병실이 가득찼다.

의사는 손목에 있는 시계를 매만지더니, 굳은 결심을 한 듯 중얼거렸다.


"xx시 xx분. 아드님이 사망했습니다"


하얀 천으로 덮인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사신은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눈치챈 듯 했다.

사후경직으로 굳어져 가는 남자의 손가락에 껴 있는 반지만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한 걸까.

아니, 방금 눈치 챈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부모가 쓰러지고 의사들이 분주한 마당에 남자의 손에 껴있던

반지를 챙겨 주머니 속에 넣었다. 하긴, 그냥 버리기엔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이었으니.

흰 가운에 들어간 반지를 지그시 지켜보았던 사신은 옆에 떠 있는 무언가에게 껄껄 웃으며 말 했다.


"자네를 죽인 것은 그 자신도, 나도, 반지도 아니겠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