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악마

















아무래도 라면을 끓일때 물을 너무 많이 넣은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옅은 국물의 색은 물과 스프의 비율이 맞지 않는다는걸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미 퉁퉁 불어버린 면을 입안에 집어넣자, 얼굴이 찡그러질 정도로 맛이 없었다.


더 이상 먹기는 그른듯해, 아직 절반도 채 먹지 않은 라면냄비를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음식을 남기면 안됀다는 말 정도는 잘 알고있었다.
지구 저편에는 이 불어터진 라면도 못 먹어서 굶어죽는 아이들이 많다는 말 또한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었고, 나는 나였다.
내가 그들처럼 살순 없지 않은가 ?


이제 이런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 방의 곳곳에는 찢어지거나 엉망이 되어버린 도화지들이 넘쳐났다.
이것들이 모두 단 하나의 수작을 위해 희생된 도화지들의 양이었다.
저 도화지들의 희생으로 그린 그림은 성공적이었다.


미술작품 공모전에 출판해 당당히 1위를 차지했으며, 내가 그린 다른 작품들 조차 모두 높은
점수를 받으며 상위권에 머물렀다.
이미 알고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강력한 신인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며
얼마안가 나만의 전시회가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있었다.
이 좁고 냄새나는 단칸방과, 맛없고 불어터진 라면과 이별한다는 소리였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가.


한달동안 밀가루 이외의 음식을 먹어본적없었던 날도 있었고, 밀린 집세를 받으려는
주인 할머니와 대판 싸운적 또한 있었고, 내가 자고있던 중 엄청나게 커다란 귀뚜라미가
내 입속으로 들어갈뻔한 적도 있었다.


이런 지옥과도 같은 생활과 안녕이라니.
너무도 행복했다. 모든게 꿈만같았고,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떨어지는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날의 아침 역시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피우며 눈을 떴었다.











"어, 나야 잘 지내지. 야 놀랄 준비해라 나 조만간 전시회 열릴지도 몰라 임마."


그건 분명 내 이름으로 열리는 전시회는 아니었다.
내 그림은 다른 화가가 연 전시회의 귀퉁이에 걸리는 그림에 불과했지만
나에겐 그것조차도 너무나 기쁜 행운이었다.
나에게 그럴날이 올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네온사인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고 황홀했다.
거리의 모든 네온사인들은 앞으로 일주일 후 열릴 내 전시회를 축하해주는것 같았다.
택시기사 아저씨의 온화한 얼굴도 좋았고, 부드럽게 밟히는 택시의 엑셀 소리도 좋았다.


"청년 기분 좋아보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어 ?"


기사 아저씨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아마 내가 친구와 전화하는 내용을 들은것같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무슨 상관이냐며 화를 냈음이 분명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예, 아저씨 저 곧 제가 그린 작품이 전시회에 올라갈거 같거든요."


"어이쿠, 좋겠네. 젊은 친구가 그림을 잘 그리나봐 ?"


"헤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구요."


"하..젊은 친구가 대단하구만..나도 자네 또래의 아들놈이 하나있는데.
녀석이 좀 지독한 병을 앓고 있거든..얼른 일어나서 자네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만."


갑자기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미안했는지 아저씨는 나에게 사진 한장을 건넸다.
'이게 우리 아들.' 이라며 건네는 그 사진 안에는 잠들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아저씨가 말한 병 때문인지는 몰라도 얼굴이 상당히 초췌해져있었다.


"와, 아저씨 아들 잘생겼네요."


내 말에 기사아저씨는 애써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세요. 언젠간 아드님도 저 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테니까요."


"허허, 이 사람 보게나."




그 순간, 일은 벌어졌다.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잠시 뒤로 돌린 그 순간.


아직도 내 기억에선 그때 내가 타고 있던 택시의 정면에서 달려오던 그 트럭을 잊을수가 없었다.
운전대를 잡고있는 남자는 잠이 오고 있었는지 고개를 깜빡거렸고.
기사 아저씨는 정면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트럭을 피할만큼 운전에 능숙하지 않았다.














"김경석씨, 정신이 드세요 ?"


몽롱한 정신에서 깨어난 의식으로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마치 장막이 씌여져있는것처럼 귀는 먹먹했고, 몸은 내 몸이 아닌것처럼 무거웠다.
고개를 몆번 흔들자 그제서야 내 얼굴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 김경석 환자 깨어나셨습니다 !"


간호사는 귀가 찢어질듯이 큰 소리로 의사를 불러댔다.
아직 재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로써는 귀를 건드리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몆분동안 멍 하니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해보자 떠오르는건 몆가지 없었다.


간호사의 목청만큼 귀가 찢어질듯한 자동차의 경적소리와, 비명을 지르는 아저씨와 내 목소리.
그리고 오랫동안 불에 달군 인두를 대고있는것처럼 고통스러운 내 오른 팔..


오른 팔..



"내 팔 !"


소리를 지르며 내 오른 팔을 바라보았다.




없었다.
내 오른팔이.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었다.
단지 주변의 소리가 모두 단절되는듯한 기분만이 느껴졌다.
손가락 다섯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오른팔이 딱 반절이 되어버린 것이다.


팔꿈치 부분을 기점으로 그 아래부분은 흔적조차 없었다.
믿을수없는 현실에 머리가 점점 아파왔다.


그제서야 의사는 몆몆의 간호사들을 옆에 낀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흰 가운을 입고있는 의사의 모습이 마치 나에게 고문을 내리러 온 악마의 모습처럼 보였다.


"내 손은요, 예? 의사선생님 제 손은 대채 어떻게 된 겁니까 !"


아직 온전한, 아니 화상을 입어 흉측하게 변해버린 왼팔로 의사의 옷소매를 잡고 소리쳐봐야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사실 잘 알고있었다. 이래봤자 나에게 돌아오는건 주변 사람들의 추한 시선 뿐이라는걸.
하지만 믿을수가 없었다.


나는 물감을 뭍힌 붓으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고, 그것밖에 할수있는게 없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신이 나라는 인간을 만드면서 유일하게 내린 재능.
그건 나에게 있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재능' 이였다.
그런데 이게 지금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고후, 택시의 잔해에 환자분의 오른팔이 뭉개져 빼낼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빼낸다고해도 사고후 일어난 화재 때문에 피부가 심하게 녹아내린 상태였을거구요.
그 상황에서 이미 떨어져나간 팔을 찾다가 시간을 지체했다면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여유로웠고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목소리.


"택시기사..그 기사 아저씨는 어디에 있죠 ?"

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내가 괜찮다는걸 알자, 곧바로 간호사들을 대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모든게 다 원망 스러웠다.
죽은 사람을 욕하면 안됀다는것쯤은 알고있었다.


그때 기사 아저씨는 왜 뒤를 돌아본걸까, 그때 왜 나는 기사 아저씨께 그런 말을 했을까.
우리 앞에서 달려오던 트럭은 왜 하필 내가 타던 택시 앞으로 달려온걸까.
아니 애당초 귀찮은 성격이던 내가 친구와의 약속을 한번만 더 다음날로 연기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기사 아저씨도, 친구도, 트럭 주인도 모두다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원망하면 할수록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오른팔의 허전함은 채울수 없었다.


아, 이제 다 끝이었다.

















내 오른팔과 작별한지 오늘로 딱 한달 째였다.
아직 전부 회복이 되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을 뒤로한채 나는 냄새나는 단칸방으로 향했다.
내 방의 곳곳에 자리잡은 도화지들이 나를 보며 비웃는듯 했다.


'나를 그렇게 찢어버리더니 이제 너도 그 꼴이 됐구나.'


'이제 너도 우리처럼 실패작이네.'


도화지들이 꺄르르 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리는듯 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나날들은 이제 꿈에서나 볼 정도로 내 삶은 초췌해져만 갔다.
눈을 뜨면 들리는건 도화지들의 비웃음과 오른팔의 비명소리 뿐이었고.
오래전 책에서 읽은듯한 '끊임없이 도전하라' 라는 문구는 정말 책에서나 나올법한 단어였다는걸
깨달았다.


책에서 읽은적 있었다.
오른팔로 승승장구하던 화가가 오른팔을 잃자, 왼팔로 그림을 그리고 성공했다.
하지만 왼팔마저 잃자 이번엔 두 다리로 그렸다.
두 다리마저 잃은 그 화가는 자신의 입으로 그림을 그렸다.


전에는 그런 화가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건 정말 '소설' 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왼팔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해봤지만, 마치 초등생이 그린 그림보다 못할것만 같은 그림이 탄생했다.
그 그림또한 지금은 내 방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하루를 비극처럼 보내던 어느날, 그 녀석은 내 앞에 나타났다.
마치 온몸이 그림자라도 되는듯 검은 색을 띈 녀석.
입고있는 옷이나 그 녀석의 몸이나 색의 조화 따윈 눈꼽만큼도 찾아볼수 없었다.


어느 사이비 종교에서 나온 사람인줄 알고 녀석을 쫒아내려했던 그때.
녀석이 나에게 한말은 녀석을 밀어내는 내 왼손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오른팔을 되찾고 싶어 ?"


내 동공은 커다랗게 확대되었고 녀석의 입가 또한 점점 올라갔다.
이미 없어져버린 오른팔이 다시 떨려오는 기분이었다.
정체를 알수없는 녀석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저 깊은 심해에 처박아 두었던 기억을
녀석이 지금 꺼내려하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


떨리는 목소리로 녀석을 윽박지르자, 녀석은 내가 그럴줄 알았다는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장난이 아니야. 니 팔을 다시 붙여줄수 있어. 물론 온전한 상태로 말이야."


내 앞에 서있는 녀석의 모습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지금 움직이는건 녀석이 아니라 떨리는 내 두 눈일게 뻔했지만 말이다.
지금 이 녀석이 장난을 치고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따금씩 느껴졌다.


대채 저 녀석은 누구인가, 이미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팔을 다시 붙여주겠다는 신과 같은 말을 내뱉으며
'살' 이란게 존재 하는지 없는지 온통 새까맣기만한 몸을 가지고 있는 이 녀석은
대채 누구란 말인가.


아니, 이 녀석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지금 저 정체모를 남자가 내 팔을 붙여주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어떻게..아니 어떻게요.."


단어 끝부분의 악센트를 높여 의문형으로 묻는 다는 대화의 기본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지금의 나는 '팔' 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간단해, 떨어진 팔을 너에게 붙여줄수 있다. 이 뿐이야, 다만.."


"다만..?"


'팔' 로 가득 차버린 내 머릿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오직 한가지의 단어였다.
내가 정신이 돌아왔다는 걸 눈치챘는지 녀석이 어께를 들썩이며 말했다.


"역시 대가는 있어."


이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건지 알수 없었다.
영화나 만화에서나보던 인간과 악마와의 거래, 그런 상황을 연기하고 있는건가 ?


"대가라뇨 ?"


"그림을 그리는 재능. 그걸 가져가야겠어."


한순간 벙쪄 대답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짧은 침묵을 깬건 다름아닌 내 입에서 새어나온 욕설이었다.


"이런 미친새끼가 ! 내 팔을 돌려준대놓고 가져가는게 내 그림실력이라고 ?
내가 지금 왜 팔을 찾고싶어 안달이 난줄 알아 ? 그 빌어먹을 그림 때문이라고 !"


열려있는 문 밖으로 바람이 새어들어와 꽤나 쌀쌀한 온도를 유지했지만
내 몸은 지금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에 못이겨 더워 죽을 지경이었다.


"진정해, 잘 생각해봐. 가지고 있는건 그림 그리는 재능 하나밖에 없는 넌데.
팔을 잃어서 그 재능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앞으로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평생 너를 쫒아다니며 널 방해할거야."


남자의 말에 나는 더 이상 반박할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차오르는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내가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한쪽 팔이 없다는 이 사실이 더욱 더 내가 할수있는 일을 없애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 팔이 생긴다면 어떨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없어져도
니 두 팔로 할수있는 일은 많아. 어때, 지금 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데 ?"


분노는 점점 식어갔고, 내 머리는 지금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할수 있게 되었다.
아니, 애당초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리 정상적인 상황은 아님을 단박에 알수 있었지만
내 머리는 그런것 따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자, 어때. 교환하는거야. 니가 가지고있는 재능과, 내가 가지고 있는 너의 팔.
어떤게 더 너에게 소중할지 그건 니가 더 잘 알텐데 말이야."


남자의 말에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해본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돌아가는 내 머리에
문득 나를 비웃던 도화지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제 너도 우리처럼 실패작이네.'


난 실패작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엉망진창으로 범벅이된 그 도화지들이야 말로 진정한 실패작 이었다.
엉망진창이 되버린 나는 얼마든지 얼룩을 지울수 있었고
깔끔히 지운 그 도화지 위에는 얼마든지 또 다른 그림을 그릴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대답은 단박에 정해졌다.


"바꾸자, 내 재능이랑 니가 가진 내 손."



그러자 온통 검은 녀석이 숙이고있던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전부 새까매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녀석이 웃고 있다는건 알수있었다.


















정신을 잃은 내가 눈을 뜬곳은 다름아닌 내 방의 침대위 였다.
몽롱하던 의식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내 뇌리를 스치는 단어는 다름아닌 '팔' 이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내 오른쪽에는 '팔' 이 존재하고 있었다.
평소 깎는걸 귀찮아해서 길어지던 긴 손톱과 모두들 화가하기 딱 좋은 손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내 손가락 다섯개.

모든것이 전과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끝난건 아니었다.
아직 실험해야할게 하나 남아있었다.


팔은 녀석의 말대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남은건 내 그림 뿐이었다.
서둘러 도화지를 챙긴후 연필을 능숙하게 손에 쥐었다.
이 느낌이었다.


오른쪽 집게와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끼고, 엄지 손가락으로 받치는 이 느낌.
나는 이 느낌을 지금껏 간절히 바래왔었다.


이제 그림만 그려진다면 모든게 완벽했다.
전 처럼 돌아갈수 있는 것었다.
전시회를 연다고 기뻐하던 예전에 내 모습으로 말이다.








불과 두시간 동안 지금껏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찢었던 도화지 양보다 더 많은 양의
도화지를 찢은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 사실이란말인가.


왼팔로 그렸을때보다 더욱 그려지지 않는 이 그림들은
그 검은 존재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걸 깨닫게 해줬다.
인정해야만 했다.
이건 사실이었고, 나는 이제 그림을 그릴수가 없었다.












*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었다는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른팔을 얻고 그림을 잃은지 2주일째 되는날, 나는 전과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 몆일간은 긍정적으로 산다는 취지로 온갖 일을 다 해보기 시작했다.


장애인으로 살때보다는 훨씬 더 일을 구하기 쉬워졌지만
일을 하는건 장애인으로 살때와 마찬가지로 흥미가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컴퓨터로 게임을 해봤자, 낚시를 가봤자 무얼하든 흥미를 느낄수없었고
장애인으로 살때와 별반 다른걸 느낄수 없었다.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낄수 없었다.


그림, 그림이 필요했다.





전에 말한적 있지 않은가, 신은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 하나 만을 주셨다고.
그런데 지금은 그걸 그 녀석에게 빼앗겼다.
오른팔은 멀쩡한데 그림을 그릴수 없었다.


희망고문과도 같은 이 지독한 현실에 나는 더욱 더 미쳐가기만 했다.
내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친구 녀석의 방문도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장애인이었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해도 나는 장애인이었던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완전한 페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의 거래를 받아들이면 안됐었다고 하루에도 수백번을 후회한다.
이따금씩 다시 도화지들의 비웃음이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그림이 사라진 내 삶은 오른 팔을 잃고 살아가는 삶보다 더욱 더 비극적임은
나는 깨달을수 있었다.
나는 내 그림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 녀석이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건 내가 휴대폰을 창문 너머로 던져버렸을 때의 일이었다.
완전히 망가져버린 내 몰골을 바라보자 녀석은 또 다시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날 그만좀 불러줘 난 바쁘거든.왜, 거래를 승낙할때는 기쁜 얼굴이지 않았어 ?"


"우리 조건을 바꾸자."


녀석의 물음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몆달만에 다시 만나는 녀석의 얼굴을 봐도 반가움이라는 감정은 단 하나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오직 길었던 기다림만이 녀석을 반기고 있었다.


녀석은 내 물음에 어께를 으쓱거리며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 왼팔을 줄게, 내 재능을 돌려줘."


"안돼."


녀석은 단칼에 내 제안을 무시했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내 얼굴이 크게 찌푸러졌다.


"니가 잃은건 오른팔이었는데, 다시 왼팔을 돌려줄순 없잖아 ?"



"그럼 오른팔을 다시 줄게, 내 재능을 돌려줘."


오른팔을 잃는다면 지금 생활과 다를것이 없다는것 쯤은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이렇게 된다면 완벽하진 않아도 아직 그림을 그릴순 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건 오직 그림, 그림 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지금껏 한번도 생각해본적없는 말이었다.


"미안한데 그것도 안돼."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내 재능이잖아."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본 녀석은 우습다는듯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재능이 되어버렸거든."


참을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난 지금껏 이런 대답을 기다린것이 아니었다.


"개새끼야..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거라니."


"말 그대로야, 다른 사람한테 줬거든. 니 재능."


점점 쌓여져가던 분노는 드디어 폭발했고
내 주먹은 녀석의 기분나쁜 면상을 한대 후려치기위해 하늘높이 올라갔다.


"넌 내가 왜 니 앞에 나타난지 알고있어 ?"


올라갔던 내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또한 지금껏 한번도 생각해본적없는 질문이었다.
이 녀석은 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을 이리도 깔끔하게 찌르고 들어오는가.


"난 거래를 통해서만 움직이는 '악마'야."


"거래..?"


"그래, 거래 너와 내가 했던것처럼."


내 주먹은 서서히 내려갔고, 녀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예를들면 말이야, 니가 나에게서 오른팔을 되찾고 회사에 취직했다고 치자.
그럼 원래 너 대신 그 회사에 취직할 사람에게 내가 찾아가는거지.
그 사람은 우리들의 거래로 인해 손해를 봤으니까."


녀석의 말을 듣자,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럼 나는, 나는 누구의 거래로 인해 손해를 본거지 ?"


"너는 거래로 인해 손해를 본게 아니야. 니가 거래의 물건이었던거지."



악마는 계속해서 알수없는 말만 지껄였다.
내가 거래의 물건이라니, 그게 대채 무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복잡해져만 갔다.


내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메이고 있자, 악마는 자신의 손에서
누군가의 사진을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남자를 기억하나 ?"


악마가 건넨 사진에는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아니, 이 남자를 본것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 어디선가 이 사진을 본적이 있었다.











"하..젊은 친구가 대단하구만..나도 자네 또래의 아들놈이 하나있는데.
녀석이 좀 지독한 병을 앓고 있거든..얼른 일어나서 자네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만."









그래 택시기사, 택시기사가 나에게 건넨 사진에 있었던 그 남자였다.
택시기사의 아들말이다.
하지만 왜 뜬금없이 이 남자가 내 인생에 개입하는건지 알수없었다.


"이 남자가 너랑 거래를 했던 남잔가 ?"


"아니, 내가 거래했던건 이 남자의 부모였지."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때려맞은듯 띵 해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마치 나만 모르던 내 인생의 비밀을 하나하나 듣는것처럼 가슴이 쿵쾅댔다.
대채 내 오른팔을 잃어야만 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것일까.



"내용은 대채.."


"듣고나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악마는 그 특유의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 아들의 병이 고쳐지고, 앞으로 살아갈만한 능력을 얻는 대가로는 너의 죽음이다.
거래는 이제 성립됐어, 나중에 울고불고 보채도 나는 한번 거래한 물건을 돌려주진 않아."


"그럴리는 없을겁니다."


악마의 앞에선 남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지었다.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요.."


악마가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저는 언제 죽게되는겁니까."



악마가 특유의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니 아들이 능력을 얻는 그 순간에."



악마의 얼굴에 걸린 그 미소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