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좀 더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게 따뜻한 커피를 타주었다. 물론 녀석만 주는게 아니고 우리도 같이 마신다. 모두에게 마음의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 모금. 두 모금. 기현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마른침을 연달아 삼켰다. 그만큼 꺼내기 힘든일이라.. 그것을 잘 알기에 우리들은 기현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기현이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날은 사람이 없었어요. 이 동네에서 그래도 제일 장사가 잘되는 PC방인데 10명 밖에 없는거에요. 전 처음에 악취 때문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없다고 생각했죠. 저 말고 다른 9명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폐인들이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저도 과제를 뽑고 바로 나가려고 했죠."

악취.. 녀석들의 공통점이다. 항상 악취와 함께 모습을 변해 사람들을 공격하고 배를 채웠겠지.

"이제 출력을하고 일어나려는데 악취가 갑자기 엄청나게 심해지는거에요. 사람들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들이 저마다 안좋았죠.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출력물을 들고 카운터로 갔어요. 근데.."

기현이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장한 체구의 녀석이 이정도로 떨 수 있다니.. 기현이는 고등학교때 양아치 놈들과 시비가 붙어도 절대 떨거나 겁먹지 않았다. 녀석은 합기도 3단에 태권도 4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제 몸 하나는 거뜬히 지킬 능력이 되고도 남았다.

학창시절 몸이 약해 괴롭힘을 당하던 나를 자주 도와주던 친구가 바로 기현이다. 왜 도와주냐고 물어봤었는데 그냥 네가 불쌍해 보여서라고 말하고 항상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자연스레 나는 기현이와 친해졌고 우리는 대학교도 같이 진학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기현이의 강인함을 같이 지내오면서 본 나에게는 정말 큰 충격이엇다.

"거기 알바가.. 뭔가 먹고 있었어요. 팔.. 팔이었어요. 사람 팔.. 전 마네킹인줄 알고 무시하고 나가려고 했죠. 근데 소리가요.. 소리가 너무 생생한거에요.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있잖아요. 제가 합기도랑 태권도를 오래 해봐서 알아요. 뼈가 부러질때 소리나 인대가 늘어나는 소리 등이요. 그게.. 너무 생생하게 들리는거에요."

기현이는 눈에 띌 정도로 손을 떨었다. 그 떨리는 손으로 잔을 간신히 들어 커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우리는 아무말도 해줄 수가 없다. 그저 기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묵묵히 지켜보는 것뿐이다.

"겁이 났어요. 또 한편으로는 웃겼어요. 여지껏 살아오면서 그런 감정.. 느껴본적 없었거든요. 근데 알바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띄게 변하는거에요. 양 팔뚝에서 갑자기 검은 털들이 무수히 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알바는 도저히 사람이 낼 수 없는 소리로 그.. 팔을 열심히 뜯어 먹었어요."
"...."
"팔을 뜯어먹는 소리보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커서 9명의 사람들도 모두 카운터쪽으로 걸어왔어요. 서로 친하진 않았지만 9명 사람모두 서로 간에 안면이 있어서 같이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러 온 듯 했어요. 한 아저씨가 나를 보고 왜 그러냐고 안색이 안좋다고 말하고.. 다른 아저씨는 카운터쪽으로 걸어갔어요."
"...."
"그리고 비명을 질렀죠. 알바를 자극하면 안되는거였어요."

기현이는 떨리는 양손으로 유리컵을 세게 움켜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손 마디에 있는 뼈가 희게 보일정도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어요. '그게' 괴물로 변하는 순간은요. 괴성을 지른 그 괴물은 처음 비명을 질렀던 아저씨를 덮쳤어요. 피가 튀었죠. 내 눈 앞에서 똑똑히 봤어요. 괴물의 이빨이 아저씨의 목과 몸통을 순식간에 분리시키는 것을요. 머릿속에 하얘졌어요. 그리고 내 본능이 시키는대로 PC방을 뛰쳐나왔죠. 다른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저 죽고싶지 않아. 죽고싶지 않아를 머릿속으로 반복했어요."

기현이는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식어버린 내 커피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기현이는 거부하지 않고 단숨에 커피를 비워버렸다. 한숨을 깊게 쉬고는 다시 말을이었다.

"우리는 살기위해 계단으로 열심히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근데 아래층 쪽에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나는거에요. 나와 아저씨들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어요. 살기에는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4층에 있는 사무실문이 열리는거에요. 평범한 회사원처럼 생긴 중년 아저씨가 우리에게 손짓을 했어요. 빨리 오라고. 그렇게 우리는 목숨을 건졌어요."
"..고생했구만."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기현이의 어깨를 몇번 쳐주고는 쇼파로 가서 누웠다.

"어제부터 한숨도 못잤어."

그 말을 끝으로 아저씨는 바로 곯아떨어져버렸다. 우리 셋은 아저씨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경험이 아니면 저렇게 마음 편하게 잠을 잘수도 없을 것이다. 과연 군인은 군인다웠다. 동생은 나와 기현이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

"참.. 기현아. 어제 톡 어떻게 보냈어?"
"..어제?"
"응. 낮에 다른 애들한테 톡 보내봤는데 통신 상태가 불량하다고 했었거든."
"난 처음 알았어. 그냥 도망치고나서 근처에 사는 사람이 너밖에 생각나지 않더라. 그래서 바로 너한테 연락한거였어. 그때가 밤인지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미안해."
"아니야.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게 더 중요한거지."
"..맞아."

하지만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이 죄악감은 뭘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기현이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저씨 이상해."
"..어?"
"너희들한테 총을 줬다고 했잖아."
"그렇지. 그게 왜?"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총을 그렇게 섣불리 주고 자신이 가진 총알 전부를 거리낌 없이 주겠어?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말이야.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해지면 무조건 자기만 살려고 한다고. 너희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게 아닐까?"
"..기현아. 아저씨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너를 구하러 같이 가달라고 했을때도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승낙했어. 덕분에 네가 이렇게 우리집에 있는거고. 네 말대로 지금 세상은 엉망진창이야. 하지만 생존자끼리 의심하고 헐뜯을 수 없잖아? 우리가 상대할건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고."
"그렇지..?"
"일단 좀 쉬도록 해. 2층에 방 남는거 알지? 거기서 자둬."
"응."

기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녀석 의심은.. 드르렁. 아저씨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처음 우리가 옥상에서 녀석들을 관찰할때 이불 안에 무전기를 넣어 우리와 연락을 하기 시작해서 총도 주고 같이 친구도 구해주고.. 아낌없이 도와주는 아저씨다. 이번엔 기현이 녀석의 쓸데없는 걱정이다.

식탁 위에 있는 컵들을 싱크대에 넣고 간단히 설거지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검색한다. 역시나 나오는 것은 매번 같은 문구.. '해당 카페는 폐쇄되어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하아.. 인터넷은 도저히 진척이 없어. 나는 컴퓨터를 아예 끄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이 엎드린다. 아까 전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군대에서 총을 쏴본적은 있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를 쏘는 것은 난생처음이다. 총을 쏘고 난뒤에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와 신음성을 흘리며 쓰러지는 괴물.

"하아."

결과적으로는 잘된일이다. 기현이를 무사히 우리집에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걸로 된거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눈이 스르르감긴다.

"..이."
"으음.."
"어이."

익숙한 목소리 눈을 떠보니 기현이가 내 몸을 흔들고 있다.

"언제까지 잘거냐. 저녁이나 먹자."
"..그래."

기현이를 따라 거실로 가니 동생과 아저씨가 저녁 식사를 한창 준비중이다.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살아있구나. 우리는 살아있는거구나. 앞으로를 위해 살아가고있구나. 그래..

"뭐하냐? 와서 밥먹어."
"그래. 우와 된장찌개네 누가 한거야 이거?"
"아저씨가."
"오~"

찌개를 한입 떠먹어 본다. 맛있었다. 우락부락한 아저씨의 체구에서 이런 맛이 나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내 감탄어린 시선을 못이기겠는지 아저씨가 멋적게 웃었다.

"허허. 혼자 살다보니 요리는 기본적으로 하게 되었지 뭐. 맛있게 먹어주니 오히려 기쁜데?"
"아저씨 진짜 요리 잘하시네. 우리 엄마보다 잘하신다."
"하하하."
"허허허."

얼마만에 웃어본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좋다. 밖의 일들을 모조리 잊고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띵동.

동생은 인상을 팍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친년."
"왜? 무슨 일이야?"

영문을 모르는 기현이와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인터폰에 비추는 여자 얼굴을 가리켰고 기현이와 아저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인터폰을 향해 다가갔다.

"이 여자.."

낮게 중얼거리는 아저씨.

"아는 여자에요?"
"그래. 바로 아래층에 사는 여자야."

쿠웅. 머리가 띵하다. 망치에 얻어 맞은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저씨는 굳은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일단 어떻게 된건지 보고 오마. 그래도 내 이웃이야."

아저씨는 권총을 굳게 잡고 느리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