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모습]

홀로 남은 심야의 사무실.
창백한 전등 아래서 느리게 고개를 까닥이던 남자는 팔을 머리 위로 쭉 한번 펴고선
식어버린 믹스커피를 들이켰다.

빈속을 쓸어내리는 두어 모금 남짓의 서늘한 감각에 짧게 입맛을 다신 남자는 종이컵을 구겨 곧장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남자의 자리에 있는 쓰레기통에는 얼룩진 종이컵이 가득 쌓여있었다.

의욕 없는 손짓을 따라 울려 퍼지는 딱딱한 키보드 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붙들어준다.
눈꺼풀은 한없이 무겁지만 천천히 자신의 움직임을 계속하고, 건조한 입에서는 하품이 끊이질 않았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밀리고 밀려서 하루의 끝마저 회사에서 보내게 되었다.
아, 고달픈 월급쟁이의 삶이여 나는 어찌하여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는가?
스스로를 향한 무의미한 물음에 남자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실소를 흘리고는 남은 업무를 살폈다.
밤은 깊었고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있었으니 말이다.

깊은 밤이었다.
창밖의 거리는 이미 행인 하나 보이지 않고, 남자는 모두가 돌아간 어두운 도시의 유일한 야경이 되어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잡음을 비집고 들려오는 규칙적인 시계의 초침 소리.
문득 그 사실을 자각한 남자는 반복되는 작업으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들떠오는 것을 느꼈다.
들이쉰 숨이 조금씩 쌓여 가슴을 부풀게 만드는 것만 같은 그런 기묘한 감각이었다.

다만 그 감각은 결코 좋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에 희미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긴장이라는 형태의 아주 옅은 공포의 감정을.

울고 싶어질 적이면 언제나 주변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늘 밤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놀고 싶다며 떼를 쓰던 어릴 적에는 단순히 밤이 되어 어두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지던 골목길이 어둑한 땅거미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잠에 들 시간이 되면 밤은 어두운 구석에서 우두커니 주저앉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몸을 떨며 이불에 몸을 파묻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생활 음에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여보아도 밤은 동이 터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기나긴 때를 함께하였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두렵지 않아질 무렵에는 밤은 다시 한 번 모습을 바꾸었다.
외로움이었다. 누군가 있어주었으면 했지만 밤은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홀로 보내는 심야의 정적에 어린 마음이 죄여 불확실한 내일을 걱정하거나 막연한
자기위안을 반복하며 자신을 마모시키던 고독의 시간.

그렇게 밤은 상상의 괴물과 현실의 벽으로 모습을 바꾸어가며 그리도 끔찍하게 남자를 괴롭혀왔다.

아마도 이러한 탓에 남자는 삶에 이골이 난 어른이 되고서도 졸린 눈으로 이따금씩
저기 저 어둠 너머의 칸막이 저편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른다. 잔뜩 굳은 어깨, 느려진 손, 감기는 눈.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어둠 속의 외로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이대로 엎어져서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많이 처리했지.
남은 건 내일 이어서 계속하면 되니까, 내일 말이야...

아아, 눈이 감긴다. 손이 멈추고, 고개가 기울어도 멍하니 앞을 응시하던 피곤에 찌든 눈을 드디어 감을 수 있다. 하루의 짧은 안식.
드디어 그 때가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좁아지는 시야의 구석에서 밤을 비집고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느덧 흐려진 어둠 사이에서도 분명히 인지할 수 있는 선명한 존재감이었다.

잊고 살던 밤은 또 다시 모습을 바꾼 것이다. 남자는 시야의 사각에서 자신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그 무언가를 애써 부정하고 외면해보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아! 창 너머의 어둡던 밤이 모습을 바꾸어간다. 건물 사이로 그 끔찍한 모습이 스멀거린다.
멀리서 여명의 빛이 떠오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사람들이 다시 거리에 보이기 시작한다.

밤이 밝아온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도, 앞을 보여주지 않던 외로움도 아닌
그저 찬란한 아침으로 그 모습을 바꾼다.
빌어먹을... 다시 아침이다. 오늘을 마치지도 못했건만 내일의 태양이 떠버렸다.

어둡고 조용한 밤이 저주스러운 아침이 되어버렸다.
이번 밤에는 쉴 수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아침보다야 나았다.
아... 다음날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자는 남은 힘을 간신히 끌어 모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남자의 눈은 감겼다.

밝아오는 아침의 사무실에서 홀로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