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적에 살았던 곳은 염색공단 근처였다. 컬러풀 대구라던가 동성로의 번화한 모습이라던가, 문화도시라던가, 그런 대구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곳이었다.

여기에는 공장이 있었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공장에서 일하고 나온 사람들이 하룻밤 술 마실 곳도 많고 그랬다. 쾌락... 을 찾는다면야 티켓다방 같은 걸로 알음알음 하긴 하더라.

그런 요소들이 한가득 들어찬 곳이다 보니, 술마시고 소리치는 모습이라던가 주먹이 날아온다던가, 또 가끔은 등교길에 어제는 없었던 짙은 핏자국같은 것들도 알음알음 볼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본 덕분에 나는 그 때, 10살일 때 부터 가난을 알았다.

공장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북부정류장 근처에는 일하고 돈만 받으면 되는 동남아 지역에서 온 아저씨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장단지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면 베트남사람이 통화하는 소리, 파키스탄 아저씨 담배피러 나온 모습 같은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아저씨들도 공장일이 끝난 밤거리를 다니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일단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빈부격차하던가, 다문화라던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그냥 배우는 거고 주변에 보이는 그런 험악한 모습들에 대해 나는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불법체류든 뭐든간에 사람이고, 좋게 지내려 하면 좋아지고 그런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가난, 돈, 그런게 문제일 뿐이라는 걸 한 발만 대로 너머로 건너가도 보이는 호화로운 건물들을 보면서 절실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내던 어느 날 밤 10시. 나는 별 생각 없이 심부름을 나갔다. 어떻게든 인구를 수용해내려고 억지로 구겨넣은 주택들 사이에 뻗은 가늘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 그나마 빛이 좀 들기 시작한 슈퍼마켓에서 포카리스웨트 한 통 사서 나왔을 뿐이었다. 그저 그 뿐인 일이었어야 했다.

집에 가까워서, 그래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내다보려 하지 않는 가로등 빛조차 들지 않는 길 한가운데에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둘 있었다. 왼쪽에는 키가 작고 통통한 아저씨가, 오른쪽에는 키가 크고 깡마른 아저씨가 있었다. 속이 더부룩해 질 정도의 수염과 커다란 코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동네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 놀라운 점은, 생각보다 유창한 발음으로 나를 부르는 '저기요!' 소리였다.
나는 뒤돌아 그들을 보았다. 아저씨들은 폴더식 휴대전화를 들고 머뭇거리는 듯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긋한 말로 부탁해왔다.
"제가 한글을 읽는 거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메세지 온 것좀 읽어주시면 안될까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부탁. 도덕 시험에서 100점 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이기에, 그 정도 일, 당연히 할 수 있는 쉬운 일로라도 도움되는 일이라면 할 의향이 있을 때였다. 흔쾌히 알겠다고 하면서 받아든 휴대전화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샤킬, 파키스탄에는 언제 돌아가?
-우리 아버지하고 만나보면 어떻겠어?
-샤킬 오늘 시간 있어?

아무리봐도 여자였다. 파키스탄 아저씨지만 꼬셨구나, 나도 아직 사귀어본 적 없는 여자친구인데 부럽다, 뭐 그런 생각 하면서 별 생각없이 읽었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이 때 나는 눈치를 챘어야만 했다.

옆에 같이 있던 깡마른 아저씨는 자기가 쓰는 전화가 아닌데도 나와 눈을 맞추며 내가 읽어주는 것을 듣고 있었고, 정작 전화를 내게 건낸 왼쪽의 키 작은, 아마 샤킬이라고 부르면 될 그 아저씨는 조용히 내 손을 만지작 거렸었다.

10건 정도 메세지를 읽었던 것 같다. 깡마른 아저씨는 지갑을 꺼내면서 내게 5천원짜리 지폐를 한 장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두 번 거부했다. 내 손을 갖고 무슨 짓을 했는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로, 나는 웃으면서 '아니예요, 괜찮아요.' 같은 소리로 손사래를 치기만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만 더 부탁하자고 말했다. 이번엔 오른쪽 아저씨 차롄가보다, 했다. 가로등 아래로 가길래 편지라도 꺼내려는건가 싶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 둘은 나를 벽에 붙여세웠다. 아무튼 벽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처럼 잘 골라놓은 시멘트벽이 차가웠다. 어깨에 느껴졌던 뜨거운 위압감은 키작은 아저씨의 털로 뒤덮인 손이었다. 나는 그 때, 내가 본 그 눈동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지갑으로 여기며 털어내던 불량배들의 눈과 비슷했다. 나는 그게 아니길 빌었다. 애써 괜찮은 척 하면서, 깡마른 아저씨가 바지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올 것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 아저씨가 꺼내놓은 것은 성기였다.

나는 그 순간에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키작은 아저씨가 무엇을 했던 건지, 그 주머니에서 나온 지폐가 뭐였는지. 그래. 겨우 메세지 읽어주는 걸로 5천원이면 수지가 안 맞지. 그런 생각까지 이른 뒤에도,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그저, 하지 말라며 몸을 흔드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저렇게 해야지 같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대체 왜? 나도 남잔데 대체 왜? 그런 의문과 혼란에 빠져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털이 잔뜩 나 있는 팔은 내 옆구리를 문지르고, 바지 뒤쪽으로 들어와 엉덩이까지 향했다. 그 와중에도 이번 차례인 키큰 아저씨는 내 왼손으로 자신의 것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싫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 이외의 무언가를 할 용기조차 나질 않았다. 어쩌다가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뛰어올 수 있었을까.

집으로 도망쳐와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당연히 경찰을 불렀고, 나는 경찰에게도 그대로 말했다. 나는 남자니까, 최대한 아무 일 아닌 것이라 가슴 쓸어내리며 자세하게, 있는 그대로.

돌아오는 대답, 아니, 변명은 걸작이었다.

"어차피 이 동네는 불체자들이 많고, 그 사람들이 쓰는 전화는 대포폰이 대부분이라 추적하기도 힘들어요."
"어떻게 방법이 없어요?"
"중대한 사건이면 이 일대 전부 탐문수색해서 뭐라도 해보겠지만, 어쨌든 애도 별일없이 집에 들어왔고 괜찮아 보이니까 굳이 쑤석거릴건..."

더 듣기 싫었다.

그냥 알겠다고 하고서, 와주셔서 고맙다고, 경찰아저씨들이 나가는 길을 배웅했다. 마지막으로 아저씨들은 내심 미안한 듯 말씀하셨다.

"앞으로 이쪽 순찰을 좀 더 강화해 볼게요."

나는 그 말 밖에 믿을 게 없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3년 뒤까지, 순찰 도는 경찰관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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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험악한 동네에서 어린시절
2.불체자 아저씨 남자애한테 성욕 무엇?
3.경찰 무관심 무엇?

추가.
1.손을 10분을 넘게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단단한 것의 느낌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대체 뭐였을까.
2.내가 남자인 걸 눈치 못챘던걸까.
3.지금도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그 때 손길 그대로 다시 느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