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와인을 숙성했던 오크통에서 셰리와인의 향미가 완전히 빠지기까지는 십수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세월이 지나도 다 빠지지 않기 때문에, 술에 풍미를 입히기 위하여 한번 쓴 통을 소독하여 여러번 재사용하는 양조장도 더러 있다고 한다. 바닐린, 리그닌, 탄닌 등 참나무의 성분이 와인에 복합적인 풍미를 더하면서, 오크통의 결마다 와인의 풍미가 스며든다. 이 통에 다시 새 술을 숙성하면 와인과 참나무의 향미를 담아낼 수 있다. 위스키나 럼주 같은 숙성증류의 풍미에서는 원주의 특성보다 오크통의 영향이 더 크다. 유지보수 비용이나 멸균관리, 품질균일도를 고려하여 스테인리스나 콘크리트 숙성고를 쓰는 양조장도 많아졌다지만, 이런 재질의 특성 덕분에 여전히 오크통은 숙성시킬 술을 담아두는 대표적인 용기이다.

사람의 마음도 오크통과 같아서, 담았던 사람을 빼내는 데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는 오래된 성어도 주변사람의 색채가 스민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가까이 두는 걸 넘어 품안에 담았다면 물드는 것 그 이상일 터이다.

쉐리와인이 숙성을 거지며 참나무의 결마다 스미듯, 내 안에 담았던 사람도 삶의 결마다 스미는 모양새로 다가왔다. 갑작스런 이별에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는건 그 결마다 스민 흔적들 때문이다. 그리고 쉬이 빈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의 텅 빈 공간에는 그이의 향기가 진동을 한다.

하지만 정작 내 삶의 결, 마음의 결 사이사이 스민 그이의 속은 스테인리스제 저장고였나보다. 담은 세월에 비해 손톱만도 못한 짧은 시간 후에 새로운 이를 들인 모습을 보면, 비교적 쉽고 빠르게 소독하고 세척을 마친듯 보인다.

열달여가 지났지만 텅 빈 통에 진동하는 잔향에 잠 못이루는 밤이 여전히 잦다. 그럴 때마다 그 세월을 순식간에 씻어내고 누군가를 마음에 쉽게 담을 수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같은 그이의 마음의 소재가 부러울 따름이다.

저장고 용적의 차이 문제라기 보다는 소재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더 담았다 가정하면 그만큼 더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나 싶기도 해. 신기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