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歸村）》

한도현은 사람에 지쳐 있었다. 숨 막히는 전철, 무표정한 사람들, 감정 소모만 남는 회사 생활까지. 하루하루가 조금씩 그를 갈가먹고 있었다. 때마침, 인터넷을 뒤적이던 중 한 블로그에서 눈에 띄는 글을 보게 됐다.

"조용하고, 누구도 없는 시골 마을. 한적한 고요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

이름도 생소한 '연곡리'라는 작은 마을. 지도에도 표시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블로그 작성자는 연신 '힐링'을 강조했다. 도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장 짐을 싸고 버스를 탔다. 서울에서 몇 시간, 환승만 세 번. 도착했을 땐 해가 이미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마을 어귀는 너무나 조용했다. 길 한복판에 멈춰선 순간, 도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바람은 부는데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벌레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전혀 없었다.

민박집은 오래된 초가였다. 흙담과 나무문, 누렇게 뜬 창호지. 마당에는 정체 모를 나무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고, 바람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를 맞은 이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가느다란 체구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그녀는 도현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안채 오른쪽, 저녁은 없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벽장 안에 있습니다."

할머니는 도현의 질문도, 인사도 받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현은 마당을 둘러보다가 안채로 향했다. 방은 생각보다 깨끗했지만 낯선 한지의 냄새, 눅눅한 습기, 바닥에 그어진 묘한 선들이 거슬렸다.

잠시 누워 눈을 감았을 때, 문득 생각났다. 방 구석의 선. 붉은색 실로 그어진, 어딘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 그는 일어나 다시 보려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날 밤, 도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깊은 숲속을 걷고 있었다. 주변은 모두 나무였고,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숲은 자꾸만 그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멈추고 싶어도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 나무 틈 사이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떴다.

밤이었다.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도현은 꿈에서 깨어났다는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또각... 또각... 또각...'

나무 마룻바닥을 누비는 발소리. 무거운 무엇인가를 끌고 걷는 듯한 소리. 도현은 화들짝 일어나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문틈 아래,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누구지? 할머니? 아니면 다른 투숙객?

하지만 이 작은 민박집에 자신 외에 다른 투숙객은 없었다. 분명히 그랬다.

문틈 아래로 그림자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도현은 방 안에 있던 자신의 가방이 열려있는 것을 봤다. 분명 잠그고 잤다.

그 안에서 꺼낸 물건이 있었다.

작은 거울 하나. 그리고 그 앞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거울 속 인물은 도현이 아니었다.

피부가 누렇게 떠 있고, 눈동자는 없었다.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었고,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낡고 때가 타 원래 색을 알 수 없었다.

"……도현아."

낮고 기괴한 목소리.

"잘 왔다, 도현아."

거울 속 형체가 웃었다. 아니, 웃었다기보단 벌렸다. 입을, 끝도 없이.

그 순간, 도현은 정신을 잃었다.

…

아침이었다. 모든 것이 꿈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는 자신의 짐이 어질러져 있었고, 거울은 사라져 있었다.

도현은 황급히 민박집을 나서 마을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 입구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왔던 길인데, 같은 곳을 돌아도 돌아도 계속해서 민박집 앞이었다.

도현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때, 마을 안쪽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도현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말 없이 도현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나도… 여기 들어왔다가 못 나가."

그 남자는 자신을 '진우'라 소개했다. 1년 전 여행을 왔다가 이곳에 발이 묶였다고 했다.

"이 마을, 해가 지면 진짜가 나와. 그게 널 원한다면, 절대 피할 수 없어."

도현은 진우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둘은 다시 마주했다. '그것'을.

민박집이 아닌, 마을 깊숙한 우물 근처에서.

검붉은 옷을 걸친 채,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형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도현아… 또 왔구나…"

그것은 웃었다.

다시금 입을 찢어지게 벌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우가 외쳤다.

"지금이야! 저 우물에 네 이름표를 던져! 그걸 불태워야만 빠져나갈 수 있어!"

도현은 미리 준비했던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불을 붙이고 우물에 던졌다.

형체는 괴성을 지르며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무언가 터지듯 빛이 번쩍였고, 도현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서울 자신의 집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엔 누렇게 그을린 종잇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기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도현'

그날 이후 도현은 다시는 시골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그 마을 속에 있는 것인지.

그는 매일,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

그 웃는 얼굴이, 자신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