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눈을 뜨고 마주한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쳐다 본 하늘부터 땅 까지, 선의 경계 없는 하얀색.
천천히 돌아오는 의식에 비로소 이것이 꿈이라고 인식한다.
육신의 감각은 존재하고 신체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눈을 내려 자신의 육체를 본다. 두 개의 팔, 두 개의 다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몸통.
평소엔 잘 입지 않는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가 그 전날의 기억을 어렴풋이 되돌려 준다.

오랜만에 동창회에 갔다. 사실 별로 가고 싶진 않았지만 10년 지기 친구인 OO의 부탁으로 가게 된 고등학교 동창회.
첫사랑이었던 그녀는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은 엄마가 되어 있었고, 오타쿠라 놀림 받던 아이는 사업을 성공시켜 벤처기업의 사장이 되어있었다.
그밖에 각자가 자신의 길을 걸어 원하는 자리에 취직했거나 번듯한 사업을 하는 훌륭한 사회인이었다.
그 반면에 나는....

나는...?

그러고 보니 모두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누군지는 알겠는데 이름만 기억 나지 않는, 그저 잠시 잊었을 뿐 인듯한 감각.
그래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튼 한창 분위기가 익어가던 중 그 녀석이 왔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던, 일진이 없던 학교에서 스스로 일진처럼 하고 다니던 놈. 이름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괴롭힘 당했던 기억 만큼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주변에는 항상 똘마니 같은 애들 두셋씩 끌고 다니며 제 잘난 맛에 살던 놈. 실제로 외모도, 집안도 좋아서 따르는 아이들도 많았고 평판도 좋아서 선생님, 아이들 할 거 없이 인기가 많았던 놈.

직접적인 괴롭힘은 아니었다. 녀석은 영리했고 사람이 어떻게 하면 괴롭고 힘든지 잘 아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게 친구처럼 다가와 알리고 싶지 않은 내 개인 사정을 소문을 만들어 퍼트렸고,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나쁜 놈이 되는 부탁 같은 강요를 마치 당연하단 것처럼 해왔다. 빵셔틀 같은 심부름은 일상이었고 그것은 내가 스스로 원한 친구를 위한 봉사로 포장되었다.
나는 매일같이 녀석을 위해 희생해야 했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술이 들어간 덕분에 없던 용기가 생긴 건지 아니면 그저 꾹꾹 눌러왔던 분노가 터진 건진 모르겠다.
나는 그날 녀석의 멱살을 잡았고 녀석과 내가 절친이라고 여겼던 동창회의 친구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나는 결코 누군가를 위해 몸을 내던지는 선인이 아니었고, 주인공을 향한 스포트라이트에 희생되는 조연도 아니었다.
몸싸움 도중 넘어진 녀석에게 달려들어 있는 힘껏 목을 졸랐다. 녀석의 손이 더듬더듬 근처에 떨어진 술병을 잡는다.
모든 것이 눈에 새겨지고 녀식이 쥔 술병이 내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또렷하게 보고 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하는 듯이 나는,
오로지 녀석을 죽이는 데만 일념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문득 기억을 떠올리자 손발이 덜덜 떨린다.
혹시나 했지만,

지금 난 죽은 건가?

"아니요. 당신은 살아있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간다.
남자가 있었다. 이 하얀 배경과 덧없이 어울리는 남자.
백발에 백색 정장, 그리고 하얀 장갑, 하얀 구두.
피부와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얀 남자.
처음 알았다.
남자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선은 환영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마치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의문의 남자 역으로 나올법한 목소리다.

"....."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긴 어디고, 당신은 뭔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벌린 입에서 하고 싶은 말이 음성이 되어 나오진 않았다.
그런 나를 남자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듣고 싶은 답변은 차차 듣도록 하고, 우선은 설명 먼저 하도록 하죠."

녀석은 품에서 손바닥 만한 사각형의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우편이었다. 마치 게임에서나 볼법한 아이콘처럼 반듯한 모양으로 포장되어 있는 우편.

"이것은 초대장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편을 내 손에 쥐어준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내 본질을 파악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입고 있는 옷을 떠나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 할 때 즈음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네 세상의 신이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네?
단언컨데 너무나 뜬금없는 말이라 잘 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너무 또박또박 귀에 박히듯 날아들었고, 결코 잘못 들었을리가 없음에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 죽다니?
아니 그전에 신이 있었다고?
심지어 그 신이 살아있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라고?
머리가 멍해진다.
동창회에서 그놈에게 술병으로 맞은 영향이 이제야 온듯한 느낌이다.

"우선 제 소개를 하죠. 저는 ----입니다."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명처럼 들려 내가 알아듣는 것을 방해한다.
짧은 이명이었음에도 머리가 아플 정도의 고통이 찾아온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한결 같던 그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곳 세계의 ----의 수준이 미달이라 아직 제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권한이 없군요."

제 이름은 다음에 알려드리는 것으로 하죠,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는 그렇게 덧붙이며 다시 입을 연다.

"앞서 말했지만 이곳의 신이 얼마 전에야 겨우 죽었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관리하는 마지막 신이었고, 그가 죽음으로서 이 세계는 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죠. 당연한 수순으로 원래라면 소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남자는 여기까지 말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직 이 세계가 앞으로도 존재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결국 새로운 신을 뽑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남자는 내 손에 들려준 우편을 손 끝으로 가리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초대장입니다."

스르륵-
들고 있던 우편이 저절로 개봉되어 내용물이 드러난다.
하얀색 사각형의 안에는 103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127명의 후보자들에게 보내지는, 정중한 초대의 메세지입니다."

103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는 스스로 공중에서 구겨지더니 동그랗게 말려 어느 순간 하나의 투명한 구슬이 되었다.

"삼키십시오. 그리고 후보자의 자격을 획득 하십시오."

모든 것이 이해 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고,
지식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다.

"모든 해답은, 당신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127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진정한 신위에 오르면 그때 답을 알려드리는 것으로 하죠."

왜 나인가?
왜 신을 경쟁을 통해 뽑는 것인가?
신은 왜 죽었는가?
그런 신을 뽑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왜, 왜, 왜....?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는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단 한마디만 내뱉었다.

"신이 되십시오."

나는...
손에 쥐어진 구슬을 본다. 물방울처럼 투명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신이란.

영원불멸하며 전지전능하며 바라는 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신이 죽었고, 후보자들을 모아 놓고 경쟁 시켜 신을 뽑는다고?
애초에 신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신인가?
신이 된다고 해서 내게 좋을 것이 있는가?
아니 애초에...

나는 신이 되고 싶은가?

나는... 눈을 꾹 감고 물방울처럼 투명한 이 구슬을, 입에 넣고 삼켰다.
생각은, 나중에 한다.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에 고민은 사치다.

"....!!"

순간 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른다. 아니 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전신의 피가 미친 듯이 날뛰고 근육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쿵쾅쿵쾅 심장소리가 터질듯 귓가를 울리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흐려졌다를 몇 십번이고 반복한다.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이명이 귓속을 울려대고 눈에서는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린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말을 할 수 없던 내가, 말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내뱉은 말은 비명소리였고,
고통으로 인해 의식이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단 하나의 신을 뽑기 위한 전쟁 속으로 버려졌다.

...........
......
...

5년 뒤-

"커흑! 쿨럭, 쿨럭!"

녀석의 입에서 끊임 없이 피가 흘러 나온다.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심정으로 녀석의 최후를 보고 있었다.
입에서 게워내는 피로 말을 할 수 없는 녀석은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건다.

'뒤를, 부탁한다.'

뒤. 현재보다 다음. 조금 더 나아간 미래.
신의 후보라 불리던 자들의 최후는, 결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최후가 아니었다.
모두가 인간처럼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고, 슬퍼하고, 아쉬워 하고 고통스러워 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품고서 죽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의 목숨을 걸 가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죽은 다음에 새겨질 미래에 어떤 기대를 한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안다.
신의 후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저마다 한 가지의 이상을 극한으로 품고 있는 미친놈들이나 되는 거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언제든 자기 자신을 불덩이 속에 내 던질 수 있는, 그러한 목표를 가진 정신이상자들.
그게 신의 후보라 불리는 인간들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포함되는 말이며,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죽임에도 결국 자신이 이기지 못한 상대에게 자신의 이상을 맡기며, 미래를 맡기고 죽는다.
자신의 꿈을 상대방에게 맡기고 죽는 거다.

틀림없이 최후의 하나는,
모두의 이상을 등에 업은 그 하나는,

반드시 미쳐 있겠지.

서로를 신뢰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가난이 죄가 아닌 세계가 되기를,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아이가 고통 받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사랑이 배신 당하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병으로 죽는 자가 없는 세계가 되기를,
노력이 보답 받는 세계가 되기를,
선은 보답 받고 악은 벌 받는 세계가 되기를,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이뤄질 수 없는 이상을 품고, 스러져간 그들은 대체 어떤 미래를 꿈꿔왔단 말인가.
나는,
이미 죽어 눈의 초점이 사라진 그의 가슴에 박힌 내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축하합니다."

세계가 바뀐다.
모든 것이 하얀 빛바랜 세계.
127명의 신의 후보.
그들을 위해 준비된 단 하나의 신좌.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시선을 그쪽으로 향한다.
예의 그 남자가 있었다.
온 몸을 하얀색으로 치장한 남자.
그렇기에 속이 검음을 알 수 없었던 남자.

"당신은 127명의 신의 후보 중 신의 자격을 획득한 유일한 후보입니다."

그는 손을 마주쳐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난 몸을 돌려 녀석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쥔 단검의 무게가 그 어느 때 보다 무겁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획득한 최적의 경로로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 꽂힌다.

턱-

그러나 단검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힌 듯 허공에서 멈췄고 동시에 그의 박수 소리도 멈췄다.

"뭡니까, 후보?"

그는 나를 아직 후보라 불렀다. 유일하게 남은 나는, 그의 말 대로라면 신위를 획득했어야 함에도.

빠직--

허공에 붙들려 있던 단검이 덜덜 떨리더니 스스로 분해되어 가루처럼 변하여 흩날린다. 나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단검을 손에서 놓고 뒤로 두 발작 물러섰다.

"아직 계승을 안 했으니 설령 신격을 얻더라도 곧바로 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

딱-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중지와 엄지를 부딪혀 시간을 멈춘다.
지속 시간은 체감 3초.
의지를 일으켜 세 자루의 검을 생성한다. 평범한 검은 안된다. 저 투명한 보호막은 지금껏 겪어왔던 그 어떠한 것보다 단단할 테니.
반드시 꿰뚫는다는 속성을 지닌 검이 하나, 그 뒤를 받쳐줄 축복을 외는 검이 하나, 영원불멸한 고통을 남기는 저주를 새긴 검이 하나.
멈췄던 시간이 재생한다. 허공에 만들어 둔 검 중 꿰뚫는 속성의 검을 잡고 휘두른다.

챙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을 보호하던 투명한 벽이 무너졌다. 동시에 쥐고 있던 검도 함께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다른 손으로 축복을 외는 검을 잡자 활력과 의지가 회복되며 힘이 솟는다. 넘치는 힘으로 녀석에게 휘둘렀으나 역시 닿기도 전에 검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곧이어 녀석의 심드렁한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이해한다. 녀석의 입장에선 개미가 나뭇잎들고 인간을 위협하는 꼴이겠지.
손에 쥔 저주의 검. 이 녀석은 특제다. 죽어간 신의 후보자들의 남겨진 고통과 슬픔, 절망을 모두 담아 벼렸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것일지라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가소로울리가 없다.

그들은 진심으로 바랬다.
절망 뿐인 현실에 막혀도 포기하지 않았다.
매 순간 포기 하고 싶은 마음을 끝끝내 버텨냈다.
바라는 이상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노력했고, 힘냈고, 바랬다.
그러기 위해 희생되었던 자신의 몸과 마음은,
그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으리.

이것은 그 감정의 끝에서 탄생한 찌꺼기다.
저주이며 불운이다.

푹-

녀석의 가슴에 저주로 벼린 검이 박힌다.
놈은 인간이 아니기에 심장이 있을리가 없지만,
저주가 심장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음...!"

놈의 몸을 걷어차고 20걸음 거리에 섰다.

"이건... 좀, 아프군요."

놈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에 박힌 검의 날을 잡고 뽑아낸다. 놈의 몸에서 피 대신 검은 무언가가 쏟아졌다.

"방금 일격으로 제 근원의 1할 가량이 소실되었습니다. 혹시 더 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내가 널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일 수 있나?"

녀석은 나를 쳐다보더니 고민하는 듯 하다 대답했다.

"가능성은 1푼 3리 정도 됩니다."

1.3% ... 최고등급 뽑기 확률이냐.

"그래서 방금 전 공격은 일전의 만남에서 제 무례함에 대한 것입니까?"

"... 아니. 그저 네놈 때문에 죽어간 후보자들이 겪은 고통의 일부를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저 때문에 죽었다라.... 그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 후보자들의 선정은 죽은 신이 남기고 간 시스템이 결정하였고 저는 단지 무대만 마련해 드린 것 뿐인데 말이죠."

"죽은 놈한테 화를 낼 순 없잖아. 그리고 그 무대가 너무 개판에 악질이었다. 만약 내가 널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반드시 널 죽였을 거다."

"그건 좀 무섭네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하하 웃었다. 빌어먹을.

"음, 일단 처음 하던 말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여기까지다. 나는 놈을 죽일 수 없고, 놈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 후보들에겐 미안하지만, 아마 복수는 요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남은 것은 그들이 남기고 간 이상이란 이름의 바람 뿐이다.

"축하합니다. 신의 후보 103은 신을 선정하는 경쟁에서 최후의 1인이 되어 이 세계 '지구'의 신이 되었습니다."

"신이라...."

지금에서 뭐가 달라지는 걸까. 이미 일신이 지닌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닌데....
어떤 인간이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가르고, 죽어도 되살아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자기가 죽인 자의 힘을 흡수할 수 있을까.

"당신이 지닌 것은 그저 물리력 구현의 일부일 뿐입니다. 후보자, 아니 지구의 신. 벌써부터 현실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겐 당신에게 죽은 자들의 이상을 이뤄줘야 할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히죽 웃어 보였다. 기분 나쁜 웃음이다.

"이것을 받으시지요."

그가 내민 것은 금색의 열쇠였다.
금이라....

"금처럼 보이지만 신의 물질로 벼려낸 열쇠입니다. 그것으로 신께서는 당신이 속한 지구의 모든 정보를 열람하고 이해하여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까.
신의 물질?
열쇠가 금색인것?
신에게 굳이 열쇠 모양의 아티펙트를 준 것?

"확실히 갑자기 인간에게 금 도금 된 열쇠를 턱 건네면서 당신은 신이 되었습니다 하면 황당하고 이해도 안되고 이딴 게 신? 이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거 금 도금이었냐? 신의 물질이 금이라니 놀랍지도 않은데....

"진정한 신의 계승은 저와의 만남이 끝나고 나면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니, 하고 놈은 검지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질문 타임입니다. 그동안 당신께서 후보자 생활을 하며 궁금했던 점을 물어 볼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

"이제와서?"

"당신께서 그동안 후보 생활을 하며 스스로 알아낸 정보들도 많을테고 그 열쇠로 알아낼 수 있는 것들도 많겠지만,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 열쇠로 열람 할 수 있는 것은 있었던 '사실' 뿐이며 누군가의 속마음이나 생각은 알 수 없죠."

그럼 우선....

"이 열쇠가 대체 뭐냐."

"도서관에 접속 할 수 있는 문을 생성하는 열쇠입니다."

"도서관?"

"차원의 도서관. 모든 차원의 정보가 수집되고 기록되는, 창조주 중 하나인 ---에 의해 관리되고 유지되는 세계입니다."

창조주? 이젠 하다하다 신을 넘어 창조주 인가. 것보다 이름이 또 안 들렸는데.

"어떠한 정보에 대해 잠금이 걸려있는 정보는 그에 대한 권한을 획득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막 신이 되었기에 아마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날 겁니다."

"그 차원의 도서관에서 뭘 하면 되는데?"

"뭘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고, 접속 할 수 있는 기록의 권한도 당신이 관리하게 될 세계의 것이 전부 입니다. 나머지는 그곳에 거주하는 담당 사서가 알려줄 겁니다."

이 열쇠가 얼마나 좋은건지 감이 잘 안오는데.

"그 열쇠 통해 갈 수있는 곳을 보통 당신의 세계의 사람들이 말하길 아카식 레코드라 부릅니다."

차원의 도서관은 그 아카식 레코드를 보관하는 곳이라 생각 하시면 될 겁니다. 라고 그가 덧붙인다.

아카식 레코드라니, 그 오타쿠 녀석이 좋아했을 법한 단어다.
내 손에 죽은.

"신은... 뭐지?"

갑작스런 나의 질문의 그의 고개가 삐걱거린다.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지 않습니까?"

추상적이라. 그런데, 신이란 단어 만큼 추상적이지 않은 단어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신 자체가 추상적이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아는 선에서 답변을 드려보도록 하죠."

딱-

그가 손가락을 부딪히자 이 순백의 하얀 공간에 마찬가지로 하얀색의 의자와 테이블이 나타났다.
유난히 하얀색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질감으로 인한 색이 다르지 않았다면 공간에 녹아들어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다.
그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티 포트와 과자가 담긴 바구니, 접시들이 나타나 스르륵 테이블 위로 차를 따르고 과자를 날랐다.
다행히도 차와 과자는 제대로 색이 들어있었는데 중세시대 영국 귀족의 식탁에 올려질 법한 색들이었다.

그나저나 살아 움직이는 티 포트와 접시들이라니. 어릴 때 미녀와 야수 애니메이션에서 본 거 같은 장면인데....
아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가?

"얘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 앉아서 대화 하지 않겠습니까?"

녀석의 말에 조용히 의자를 끌어 당겨 자리에 앉았다. 물론 차와 과자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녀석과 대화는 하겠지만 사이좋게 음식을 먹지는 않겠다는 의사표시다. 녀석도 그걸 아는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얘기하자면 신은 중간 관리자 입니다."

너무 많은 게 생략된 단어 선정인데.

"혹시 컴퓨터 게임 해보셨습니까?"

게임, 내가 아직 신의 후보가 되기 전에 게임에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얘기가 편해지겠군요. 게임으로 치면 신은 운영자, 요컨데 GM（Game Master）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거 되게 힘없는 직종 아닌가? 애초에 중간 관리자도 못 되는 거 같은데.

"GM은 GM인데 회사 사장 아들인 GM 이죠. 그리고 프로그래머나 그래픽디자이너, 기획자 이런건 하나도 없이 오로지 AI가 다 담당하는, 운영자가 마음대로 해도 문제 없는 그런 게임입니다. 물론 장르는 시뮬레이션입니다."

후릅-

그가 고풍스런 귀족이나 할 법 한 자세로 차를 한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잇는다.

"말했다시피 이 세상을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신은 플레이어가 아닌 시뮬레이션 게임의 운영자인 겁니다. 만약 이 게임에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신이나 초월자 같은 존재가 당신의 세계에 유희를 온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유희라니....

"실제로 대부분의 신은 신성 벌이를 외차원에서 유희 온 자들을 통해서 많이 버는 편입니다. 관광 서비스 같은 거죠."

신이란 자가 자신의 세계를 관광지처럼 쓴다고?

"모두가 그렇단 건 아니고 대부분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뮬레이션 게임의 NPC 같은 존재입니다. 그 자리에 항상 있으나 사실 없어도 크게 상관없죠. 사람들끼리 뭐 서로가 없으면 톱니가 안 물려서 세상이 안 굴러가네 그딴 소릴 하지만 결국 개소리입니다. NPC 하나 없다고 세상이 멸망하진 않아요. 실제 인류는 지금의 10%만 있어도 충분히 잘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알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다. 저 말대로라면 사람의 가치는 한 없이 낮아진다.

"자 그럼 운영자 입장에서 보죠. 24시간 모니터링 하는 운영자는 이 시뮬레이션 게임의 관음충 같은 존재입니다. 프로그래밍, 그래픽, 레벨 디자인 등 이 모든 것을 당신의 명령이라면 끔뻑 죽는 초자아 인공지능 AI가 관리하고 있으니 당신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명령만 하면 언제든 산사태, 태풍, 해일, 지진등의 자연 재해를 일으킬 수 있고 뜬금없이 지정한 산에 금광을 만든다든가, 아니면 좋아하는 국가 근처 해양 지저에 석유나 천연 가스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그래도 사람이라 불리는 NPC들은 당신이 일으킨 기적이 당연하게 생각되도록 인식이 개변 할 것이고 당신이 하는 일에 의문을 느끼거나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 말을 듣는 순간 뭐라 형용 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 친다.

"운영자는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 세상을 자기 원하는 입맛 대로 꾸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국가를 어느 한 순간에 없애 버릴 수도 있고 당신이 인간 시절 싫어했던 남자를 쫄딱 망하게 한다든가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다든가...."

끔찍한 상상이 떠오른다.

"당신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 시절 그토록 싫어했던 남자가. 학창 시절...."

"그만."

"애 둘 낳은 유부녀가 된 첫사랑을 다시 처녀에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되돌릴 수도 있고...."

"그만 하라고!"

그는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린다.

"뭐 어디까지나 할 수 있다는 얘기지 하라는 소린 아닙니다. 그건 이제부터 당신께서 결정 할 사항인거죠."

사람이... 이때까지 내가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NPC 취급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 살아왔던 신의 후보자였던 그들의 인생은?

"좋든 싫든 이제 당신은 '그렇게' 돼버린 겁니다."

쫙-

그가 손을 모아 펼치자 테이블 위로 지구의 평면도가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정말로 게임을 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 기분이 더러웠다.

보기 싫어도 보였다. 내가 그렇게 '인간 시절' 싫어했던 그 녀석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회사의 사무실에서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린 채 소파 같은 의자에 반 쯤 누워 전화를 받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가에는 연신 웃음이 걸려 있었고,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로 보아 연인 사이로 보인다.
나는, 그가 죽도록 싫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내가 신으로서 그의 존재를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행위 인가?

내가 인간으로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은 복수의 행위다.
하지만 신으로서 그의 존재를 지우는 것은,
그것은 복수라 불릴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한편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었던 그녀.
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던 녀석의 괴롭힘 후 자살 충동을 느낄 때 마다 웃으며 내게 과자나 음료수 등을 주던.

'어디 아파?'

'괜찮아? 얼굴 색이 안 좋은데....'

'자, 이거 먹고 힘내.'

그녀에겐 별 거 아닌 호의였을지 몰라도 나에겐 매 순간 살아가던 힘이 되어주던 그녀.
용기가 없었고, 자존감이 바닥이었기에 졸업하는 그 순간 까지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헤어진 그녀.
그런 그녀는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 둘을 끼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남편이 직장을 간 사이 5살 된 남자애와 3살 된 여자아이의 빨랫감을 개면서 아이가 울면 가서 달래주고, 남자아이의 점심을 챙겨주며 너무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
그런 그녀의 삶을 내 욕심으로 빼앗는다고 해서 저런 행복감을 줄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빼앗긴 자신의 삶을 인지 못해도 나와의 삶에서 과연 행복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녀를 가지기 위해선 그녀의 아이들을 없애고, 남편을 없애고, 그녀의 기억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절망했다.

신은, 결코 인간에게 좋은 존재가 아니다.

그걸 깨달아 버렸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서로의 아이라고 우길 때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나눠보라 하고 진심으로 거절 하는 여인의 편을 들어 주었다면
신은 아이를 둘로 나눠 각자에게 하나씩 껴안겨 줄 존재다.
그게 가능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나눠진 아이를 받게 되면 두 여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세상을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했을 때 부터 그만 들었어야 했다.

그건 너무 정확한 표현이기에.

감정이, 마모 된다.

진심으로 신을 바란 건 아니었다. 신이 될 거라 생각 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신이 되지 않으면 죽어야 했고, 살아 남다 보니 신이 되었다.
나의 이상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으나, 신은 인간의 이상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평면이 된 지구 속에서 또 한 명의 사람이 보인다.
10년 지기 내 친구. 아니, 이젠 신의 친구가 된 녀석.
그렇게 가기 싫었던 동창회를 부탁만으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든 녀석.
그런 친구가, 맞고 있다. 양복을 입고,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긴 떡대들 한테, 두들겨 맞고 있었다. 누군가는 각목을 들었고 다른 누군가는 야구방망이를 들었다. 무차별적인 폭력이 가해진다. 폐공장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인다.
친구의 생명이 꺼져가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잘 보인다.
나는,
순간을 참지 못 하고 개입 하려 했으나,

"그만 두시죠."

남자에게 저지 당했다.
나는 그를 돌아봤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인과율이라고 들어봤습니까?"

인과율.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의 법칙성.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로인해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인과율은 관련된 인간들이 책임집니다."

가끔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서는 신이 인과율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데 그거 전부 신이 절대적이면 재미가 없으니까 힘을 제한하려는 개소립니다. 하고 덧붙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 만약 인간 시절 친구이던 저 친구를 살려낸다고 가정하죠.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갑자기 뜬금없이 경찰이 들이닥쳐서 저 친구를 구해준다든지, 아니면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깡패들을 모조리 죽인다든지, 아니면 친구가 갑자기 헐크로 각성해서 헐리웃 스타가 된다든지.

"어찌되었든 저 친구는 죽었어야 할 당연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대가는 신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인물, 혹은 이 세상이 책임집니다."

운영자가 직접 개입해서 죽어야 할 NPC를 죽지 못하게 한다. 시스템은 죽었어야 할 NPC가 계속해서 존재하니 어떻게든 계속해서 죽이려 할 것이다. 결국 이를 운영자가 계속해서 막아내면, 시스템은 에러를 일으킨다.
그 NPC가 죽어서 남기는 데이터, 사람에게 친숙한 말로 '영혼'이라 불리는 이것이 순환되지 못하면, 시스템은 운영되지 않는다.

에러를 일으킨 시스템은 가동을 정지하고, 당연한 절차로 결국 여러가지 경우의 수만큼 사고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죽지 않든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다든지, 지구가 말라 비틀어 진다든지.

"죽이는 건 되면서 살리는 건 안 된다고?"

"아까 차원의 도서관 얘기를 했죠.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도. 거기에 새겨지는 모든 기록이 어디에서 오는 거라고 보십니까?"

"...설마?"

"맞습니다. 인간의 기억입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데이터가 들어있고 인간만큼 성능 좋은 데이터는 없죠. 일단은 지성체니까요. 지성체가 없으면 기록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까요. 지성체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차원의 도서관입니다. 차원의 도서관에서 판단하길 저 친구에게서 얻어야 하는 어떤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저 친구의 죽음을 요구했고, 시스템은 수긍했기에 저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여 잉여 데이터를 추가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요구한 데이터가 제때 오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즉."

신이 특정 대상을 함부로 살리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인 겁니다.

한 명을 살리는 것을 대가로 치뤄야 할 리스크가 너무 많다.

"물론 편법은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멈춘 세상의 죽어가는 친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고있지 않습니까? 신이시여?"

알고 있다. 절대 쓰고 싶지 않은 방법. 이것을 실행하면 나는, 분명 인간을 절대 인간으로 보지 못 한다.

데이터 복사.

인간을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라고 본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를 반드시 어딘가로 보내야만 한다면, 그게 꼭 진본일 필요가 어디있는가.
완전히 똑같은 걸 복사 붙여넣기로 두 개로 만든 다음 하나만 보내면 된다.
인간을, 똑같은 인간을 하나 더 만들면 되는 문제다.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인간을 단순한 도구로 생각하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문제.

이것을 행하게 되면 나는, 인간이란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보지 못 하리라.

"뭘 고민 하십니까. 당신은 이제 인간이 아닌데. 수많은 차원의 수많은 신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보기에 신들은 감정이 없는 존재로 비치고,

실제 신들 역시 인간을 대함에 있어 감정을 비치지 않는다.

신들에게 있어 인간은 그저 데이터 쪼가리에 불가하게 되니까.

살아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고 지울 수 있는, 그런....

"윽...."

어지럽다.

실제 육신은 어지러움 따위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어지럽다고 느낀다.
이상을 꿈꾸고 신이 되었으나 이상에서 더 멀어진 느낌이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인간인 채 신이고 싶다.
하지만 그런 건 신화에나 나오는 신의 탈을 쓴 인간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신은,

너무나 무자비하고

너무나 무서운 존재다.

생명의 가치가 없다
생명을 생명으로 느끼지 못 한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데이터에 불가하다면....

"죽...여."

가까스로 나온 말이다.

"나는 그가, 내... 친구가 인간으로서... 죽기를, 바란다."

나는,

도저히 내 손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친구를

복사 붙여넣기 할 자신이 없었다.

놈이 진심이냐고 묻는 듯이 쳐다본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고 곧 숨이 끊어 질 것 같던 내 친구는,
신을 친구로 뒀음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폐 공장에서 죽은 뒤에
자재로 보이는 모래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친구의 시체는 며칠 뒤, 폐 공장을 허물러 왔던 인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서로를 신뢰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가난이 죄가 아닌 세계가 되기를,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아이가 고통 받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사랑이 배신 당하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병으로 죽는 자가 없는 세계가 되기를,
노력이 보답 받는 세계가 되기를,
선은 보답 받고 악은 벌 받는 세계가 되기를,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신이 되고 싶었던 자들이 바란 이상을 이어받은 신이 보기에,

그들이 꿈꿨던 이상은 이루기에 너무나 힘든 것들이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감각에 한참을 허덕이고 있을 때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아이다. 아직 십대로 보이는 그 여자아이는 자신도 너무나 잘 아는, 심지어 인간 시절 너무나 자주 봤던 아이다.
왜, 잊고 있었을까.
나의 친구한테는 이토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윽, 윽...!"

괴롭다.
나도, 내 친구도.
서로가 너무나 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던 계기.

우린 둘 다 고아였다.

내 부모는 사고로 돌아가셨고,
내 친구의 부모는 거액의 빚을 지고 동반 자살했다.
둘 다 불우한 가정이었다.

그 와중에 친구는 여동생의 삶까지 책임져야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버는데 집중했다.
여동생 만큼은 자신과 달리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다고,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부모가 졌던 고액의 빚은 유산을 물려받지 않는 것으로 탕감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돈을 빌려줬던 친척과 부모의 지인이었던 자들은 틈만 나면 친구의 월셋집에 쳐들어와 한바탕 뒤엎고 가곤 했다.
그런 낌새가 있을 때 마다 내가 사는 집에 여동생을 잠시만 맡아 달라며 맡겨 놓고 갔던 친구.
그런 상황임에도 항상 짓는 미소가 너무 예뻤던 녀석의 여동생.
언제나 항상 웃고 있는 모습만 보아왔던 그 아이가 세상을 잃은 듯이 펑펑 울고 있었다.

-으어어어엉, 오빠! 왜 나만 두고 가는거야, 으어어어엉!!

아아....

-돌아와, 제발.... 이제 나한텐 오빠 밖에 없단 말이야... 엉엉....

아무도 오지 않는 쓸쓸한 장례식장에서, 그 아이는 죽을 듯이 통곡하다 그대로 지쳐 쓰러졌다.
이를 두고 보던 장례 지원 단체원 중 하나가 황급히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향한다.
가난하기에 돈이 없어 비영리 단체의 지원을 받아야 겨우 가능했던 장례식을 보며,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신이 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지켜보는 게 다 라니.

이 얼마나 웃긴 신인가?

친구의 죽음도 막지 못했고, 여동생 같던 아이도 돌봐주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신인가?

"후회하십니까?"

"....."

나는 놈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 타오를 것 같은 분노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나는,

이 세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온갖 불합리로 점철된 세상을, 나는 증오한다.
이상은 그렇게 태어난다.

불행함을 겪었기에,
나쁨을 알기에,
고통을 당해봤기에.

"나는...."

신이 되어야겠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더 이상 닳아 없어지기 전에.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사라지기 전에.

그러니까,

"내 눈앞에서 꺼져!!"

놈이 사라져야, 신으로서의 계승이 시작된다.
멈춰있던 나의 시간이 흐른다.
놈이 웃는다.
그것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웃음.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놈은 귀족처럼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윽!!"

육체와 정신, 그리고 마음을 향해

'신'이 주입된다.

그것은 거부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결과물을 이루기 위한 행위.
없어진 세계의 주인을 강제로 만들어내는 과정.

"으아아아아아악!!"

육체의 변환이란 이름의 고통과 무한한 지식의 전이, 영혼의 변환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신이 죽은 세계에 새로운 신이 강림했다.

.........
.....
..


xxxx년 x월 x일

세상이 빛에 휩싸였다.

누군가는 멸망의 징조라 하였고,

누군가는 자연과학에 의한 증상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신의 축복이라 하였다.

세상을 밝히던 빛은 하루가 지난 뒤 사라졌다.

다만 이 날을 기점으로,

'인류의 적'이 나타났다.

놈들은 허공에 거미줄 같은 균열을 내고 균열의 크기가 일정 수준이 되면 깨부수고 나와 인간을 공격한다.
잡아 먹기도 하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하며, 때론 무작정 때려 부수기도 한다.
다만 그들은 확실한 인류의 적이었다.
총이나 화기에 의한 공격은 그들이 가진 투명한 방어막에 의해 쉽게 막혔고 어떤 군대도, 병력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이대로 인류는 멸망하는가 싶었다.

그들이 나타나고 하루 뒤, 또 한번 빛이 세계를 휩쓸었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생겼음을 느꼈다.
공통적으로 자신의 능력치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가진 특기를 알게 되었고, 초능력과 흡사한 이능도 생겼다.
인류는 자연스럽게 이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되었다.

저 침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이 힘은 신께서 자신들로 하여금 소중한 것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부여해준 능력이라 여기었다.
실제로 인간은 힘을 각성하기 전에 꿈에서 여신과 만나게 되고 자신에 걸맞는 능력을 부여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능력의 이름은 'Gift', 선물이라 불린다.

화기가 통하지 않던 인류의 적들은 통칭 '몬스터'로 불리며
기프트를 통한 공격은 방어막을 관통하여 공격이 가능했고 전투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인류의 수호자（가디언）가 되었다.

사람간의 싸움은 멈췄다.
몬스터의 공격은 위협적이고 동시 다발적 무작위로 일어나기에 서로 간에 싸울 시간조차 없었다.
인류는 강한 기프트를 지닌 가디언을 앞세워 세상을 지켜내야 했고,
언제나 인재 부족에 시달려야 했기에 사람 간의 싸움을 일체 금지하였다.
그런다고 해서 사람 간 싸움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대놓고 국가와 국가간의 분쟁이나 단체들의 싸움들은 거진 사라진 상태다.
세계는 몬스터와 가디언간의 힘겨루기로 아슬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

어느 국가의 한 가정집.
이곳은 전 세계에 12명 밖에 없는 15레벨의 기프트를 가진 한 가디언의 집이다.
이 집의 주인은 그녀는 21살이라는 나이로 12명의 랭커중 가장 어린 나이였고
동시에 소녀가장（?）이었다.

"오빠, 밥 먹어!"

심지어 누가 예상했으랴.
만인의 경외를 받으며 국민여동생이라 불리기 까지 하고, 12명의 랭커 중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는데 가장 힘쓰는 그녀가 직접 식사를 차리고 청소에 빨래까지 온갖 집안일을 다 하면서 오빠의 뒷바라지 까지 하는, 외동남자의 꿈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여동생일 줄은.
그런데 정작 오빠 되는 사람은 방에 처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희대의 방구석폐인이었다.

"오빠?"

그런 오빠라도 걱정이 가는 것인지 열리지 않는 방문을 노크한다. 단순한 노크가 아니라 문 너머 파동을 보내 상대방이 뭐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나중에 먹을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오빠라는 사람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소리가 워낙 작아 천리지청술이라도 펼치지 않으면 안 들릴 정도였으나 그녀는 흔쾌히 알아먹고는 쾌활히 고개를 끄덕인다.

"꼭 먹어야 해! 나 오늘 30분 뒤에 출동 있어서 가봐야 하니까! 알았지!"

'웅....'

그녀는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여성과 똑같은 평범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오빠에게 지극정성인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빠가 얼마 전에 기적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칠흑 빛이던 세상에 색이 돌아왔다.

단 하나 뿐인 가족이, 기적적으로 생환한 것이다.
그녀는 잃어버린 고통이 어떤 건지 안다.
그렇기에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수많은 후회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찾은 행복이다.
단지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그 소중함을, 감사함을 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그녀는 기분 좋게 무장을 하고 외출을 한다.
자신의 행복을 찾았으니,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켜 줄 차례다.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주인님. 동생 분이 나가셨어요."

방구석 폐인이라 여기던 오빠의 방에는 그녀도 눈치 못 챘던 외부인이 존재했다.
아름다운 외형을 지닌 그 여성체는 기프트를 각성한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는 존재다.
꿈속에서 자신들에게 기프트를 주었던 그 여신과 그 모습이 완전히 똑같았으니까.

"나도 알아."

"그럼 다음에 하셔야 될 일도 알고 있으시겠네요?"

"음? 오늘 스케줄이 있었나?"

"물론이죠."

하며 그녀는 고대에 여신이라 불리던 여신상에나 입혀 놨을 법한 헐렁한 디자인의 상의를 스스럼없이 벗으려 한다.

"아니, 잠깐, 이보세요?"

"미네아는 주인님의 애정이 필요해요."

"그래 그래, 그 애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머리 쓰다듬어 줬잖아!?"

"주인님. 그 정도 스킨십은 요즘 12세 관람가의 소년 만화책 속에 등장하는 동정 주인공도 하지 않는다구요."

"아니 얘가 인간 사회에 물들어서 대체 뭘 보고 다니는 거야!?"

"쓰다듬지만 말고 여기저기 막 만져달란 말이에요. 미네아는 애정이 필요해요."

이런씨!

이건 명백히 그의 실수였다. 처음 만들 때 강아지 같은 성격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갓 죽은 암컷 강아지의 영혼을 끌어다가 인격을 형성해서 오래전 신들의 전쟁에서 죽은 여신의 육체에다 박아놨더니, 이 모양 이 꼴이 돼버렸다.
이젠 무를 수도 없고 시도 떼도 없이 만져 달라고 졸라대는 아름다운 여성체를 보니 총체적난국의 곤란함을 느낀다. 하필 이 육체의 주인이었던 여신이 미의 여신일 건 뭐람!

문득 몬스터가 나타났음이 느껴진다. 이를 막기 위해 많은 사람이 고군분투 하겠지만 결국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것이다.
인간을 해치던 것이 인간에서 몬스터로 바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최소한 인간이 같은 인간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강점은 감정이고 동시에 약점 또한 감정이다.
나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를 신뢰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가난이 죄가 아닌 세계가 되기를,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아이가 고통 받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사랑이 배신 당하지 않는 세계가 되기를,
병으로 죽는 자가 없는 세계가 되기를,
노력이 보답 받는 세계가 되기를,
선은 보답 받고 악은 벌 받는 세계가 되기를,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또한

나는 바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기를.

나의 선물（Gift）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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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에 맞게 최대한 짧게 쓰려하니 그것도 나름대로 힘드네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편이지만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